우리가 원할 때마다 느낄 수 있고 그 때 마다 카타르시스에 함몰된다면...


K.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이성의 보편성과 이성의 특수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미학을 규정한다.


그러나 미학이 뭐든

궁극적으로 예술이란 소비자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는 것이라야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감동과 공감이 시공을 초월한 극대 감동이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어떤 소비자가 살아내면서 취향이 바뀐다면 과거의 선택이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과 공감도에 못미쳤다는 것과 같다.


분야별 효율성을 보자.

   인간은 단조로움에 흥미를 이내 잃는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자기최면하에 있지 않다면 눈앞에 그 어떤 미인이 있다해도 그 외형이 지속되지 않을 뿐더러 왈라스적 한계효용론에 따른 체감이 작동할 것이다. 

    그래서 단속적으로 감상할 때만 그 효용을 느끼게 되는 시간예술인 음악을 공간예술보다 나는 더 선호한다.

    고2때부터 의도적으로 발을 담근 이래 요즘은 전천후 악기로 연주하는 조수미와 셀린디옹의 노래들을 즐겨 듣는다.

         멜로디와 장단 화음 그리고 여백과 풍경을 멋드러지게 연주해내는 예술가...   질투날 정도로 부럽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가요계를 이끄는(?) 박진영류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발성이란 발성기관인 성대와 공명기관을 경유하며 효율적인 소통을 도모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따라서 공명기관이 아닌 부비공이나 눈두덩이 가슴같은 현실적이지 않은 공명통을 상정하는 두성이나 흉성을 입에 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자연스러운 발성은 벨칸토발성이다.   이 발성의 달인으로 조수미나 셀린디옹이 있다.

            벨칸토발성기법으로 노래하는 연주자들의 작품을 감상할 때 반드시 이어폰을 끼고 듣는다. 

 

                그 때, 그 숨소리마저 감미롭다.  동양화에서 화폭에 담기는 여백이 중요한 역할을 하듯 말이다.



인간이라는 공통성은 명실공히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다양성과 개별성은 다양한 쟝르의 음악들을 좌판에 진열케 된다.


음악을 소비하려면 보다 폭넓게 섭렵한 후 자기 귀를 갖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한한 우리에게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이나 불세출의 연주가의 명품연주의 소비가 보다 합리적 소비 양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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