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의 1' 발언에서 노무현의 도덕성 지수를 가늠한다.




지난 일 년 간 노무현이 한 충격적인 발언사건 중에서 며칠 전의 "십분의 일" 사건은 내게 있어 "대통령 짓 못해먹겠다" 사건 이상으로 더 잊혀질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짓" 운운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고 본다면 십분의 일 발언에서는 그의 <도덕성>의 허울이 한 꺼풀 벗겨졌다고 판단되었다. 인간에게 있어 성격의 갈래는 천차 만별이라 그 발언 하나로 그를 규정하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방식이라 여겨지는 반면, 그의 도덕성을 검토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란 직책을 가진 이의 향후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훨씬 더 유용한 도구가 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성이 떨어질 법한 그의 지난 발언을 다시금 문제 삼는 것이 내일을 위해 결코 무익한 일만은 아니리라 믿는다.

대통령 노무현이 국민을 향해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이 저지른 범법사실을 두고 사과한다면 그 목적은근본적으로, 법을 어겼다는 사실에 대한 사과가 아니다. 법을 어겼으면 그에 상응하는 법리적 처벌을 받는 것으로 원인적 행위에 대한 책임 추궁이 말소가 되고 말 일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사과의 여지가 없다. 국민에 대한 <사과>란, 범법 행위에 대하여 법의 처벌을 다 감당하고도 따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잉여> 부분에 대한 사과인 것이다. 여기서 잉여라고 하는 것은 범죄의 성격이 법리적 해석 이전에 도덕과 밀접히 관련된 부분으로서, 법이 상정하는 응분의 처벌만으로는 그 범죄가 드리운 사회·윤리적 파괴 효과까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는 인식의 기초 아래, 사회 정의에의 합의를 새로이 이끌어내겠다는 공동체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공동체적 요구는 피의자 누구에게나 기대되는 것이 아니고, 그 범법 주체가 <사회적 책임>을 막중하게 짊어진 공인이었을 경우에나 해당하게 마련이다.

이 사과라는 형식은 <사회적 제의(ritual)>다. 그것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피의자인 공인에게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 즉, 침묵하는 공동체적 요구에 피의자 자신이 능동적으로 다가가 그들의 분노를 위무함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추궁의 짐을 덜어버릴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한 기회가 되는 점이다. 피의자인 공인에겐, 자기가 저지른 범법 행위로 인한 막대한 사회적 책임을, 잠시 수치심을 견디며 내뱉는 몇 마디 말로써 상당 부분 맞바꾸는 기회이다. 게다가 잘만 하면 잉여 부분만이 아니라 범법 사실 자체에 대하여도 일부 사면을 받을 수 있다. 피의자에게 이처럼 높은 경제적 효과를 보장하는 기회란 실로 굉장한 이벤트인데, 이것은 사실상 피의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공동체가 스스로 입은 상처를 얼른 싸매고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서글픈 관용의 표현이다.

제의가 수행하는 또 다른 목적은, 상처 난 사회정의를 치유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점이다. 피의자가 꾹꾹 눌러 쓴 고해성사를 듣는 순간, 민중은 가슴 속 분노를 다독거려 조용히 숨죽인 채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부흥을 간절히 기원함으로써 제의에 동참한다. 공동체는 피의자가 발하는 참회의 목소리를 들어주며 용서하는 형식을 빌어 서로가 서로를 관용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성찰하고 균열을 봉합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 피의자 공인에게 소명의 기회로 쓰여 그 개인의 허물을 사면받는 작은 의미에 머무르게 할 지, 아니면 전 공동체가 지난 불행을 씻고 일신(一新)의 스피릿으로 거듭나 쓰러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회로 활용할 지는, 전적으로 의식을 집행하는 집전자의 철학과 능력에 달렸다. 이렇듯 제의는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위다. 일국의 최고 권력자라면 제의를 통하여 얼마든지 닥친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야 할 일이다.

의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건성이다. 고해성사의 진실이 경건성에 의해 담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성은 고백자의 겸허하고도 도덕적인 자세에서 나온다. 사과나 고해성사의 행위를 제의에 비유했듯이 그것은 변명과 설득의 과정이 전혀 아니다. 재판정에서 변론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변명과 상대 설득의 형식은 자신이 받을 벌을 다소 경감할 수는 있겠으나 공동체로부터 나오는 자발적이며 전면적인 사면의 은택을 유발할 수는 없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변명이 계산적이고 치밀할수록 공동체는 역으로 그에 대한 관용의 폭을 제약해 나간다. 그는 더욱 뚜렷하게 공동체의 적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잘못을 고해성사할 내밀한 시간을 내주기를 간청하여 공동체로부터 겨우 허락받아 놓은 뒤 느닷없이 돌변하여 공동체를 향해 따지고 드는 비상식적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수는 그에게서 경건성이 결여되었을 때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 즉, 스스로가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시위하는 셈이다.

며칠 전 우리가 목도한 대통령 노무현의 '십분의 일' 발언은, 국민에게 올리는 사과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국민을 설득의 대상으로 삼고 만 오만과 부도덕으로부터 새어나왔다. 사회 통합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렇듯 좋은 반전의 기회를 그는 인간적 부도덕성으로 말미암아 그만 깔고 앉아 뭉개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무지한 탓에 자신의 허물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자충수를 두기까지 하였다.

노무현이 이번 사과·해명 기자 회견에서 얻어내야 했던 것은 불법 자금 모금의 액수에 대한 보충 설명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눙쳤던 거짓말에 대한 사죄와 이에 따른 국민적 이해였어야 했다. 즉, 한나라당과 노무현 캠프 중 누가 더 심한 불법행위를 했느냐라는 양(量)의 저울질이 아니라, 순전히 노무현에만 한정하여 도덕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유무가 문제였어야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국민의 관심이오직 그가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얼마나 진솔하게 인정하고 사죄하는가라는 도덕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이유들을 다음의 두 가지 범주에서 관찰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었다. 검은 뭉치돈을 철저히 배격하고 희망 돼지와 같은 소액 성금만으로 선거를 치루겠다는 그의 약속이 불러일으킨 감동의 물결이 결국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그는 이제 와서 짐짓 모른 체 한다. 그 감동을 나눴던 풀뿌리 지지자들이 지금 그와 그의 측근들이 저지른 엄청난 범죄 행위 앞에 배신감으로 몸을 떨고 있는 현실에도 그는 내내 태연자약하기만 하다. 그가 후보 시절, 청렴의 화신의 도포를 두른 채 약속한 말들이 겨우 불법 선거 비용 따위에 있어 한나라당과의 산술적 비교 우위가 아니었을 것인즉, 지금 와서는 그런 의미일 수도 있었다라는 식의 딴청을 핀다. 그는 후보 시절 자신이 말한 약속들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메시아적 이미지를 둘렀으며, 그것이 형편없는 거짓으로 판명나고 있는 현재, 돌아선 지지자들이 가질 실망과 분노의 깊이가 과연 어떠한 지에 대해 도무지 한 점 관심을 가질 줄 모른다.

원래부터 강도질 해 먹던 집단이 오백억원을 갈취해 먹은 것 보다, 청백리로 추앙받던 공직자가 천만원을 뒷구멍으로 뇌물받아 먹는 짓이 그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있어 훨씬 깊고 광범위한 것임을 그는 아는가 모르는가? 그것은 그가 도덕성이라는 개혁 세력의 표상을 짓밟음으로써 우리들로부터 개혁의 지표 자체를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개혁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한 행위는 겨우 몇 백억의 금액으로 환산될 가치가 아닌 것이다. 정치를 조삼모사로 본다는 그의 말마따나 그는 국민을 조삼모사의 대상으로 본다는 심증을 갖게 만든다.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를 들먹임으로써 사죄는커녕 은근히 도덕적 자신감을 위장하고 있기까지 한다. 19일 노사모와 함께한 취임 1주년 기념식장에서의 노무현 발언에선 아예 공세로 전환한 그의 후안무치를 원없이 감상하게 된다. ("이 정도 쓰고 당선됐다 하면 다들 놀란다” ;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금액” 등)

둘째, 그의 비인간적 면모다. 저지른 과오가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불가항력적 상황에 의해 야기됐다고 혹 아직까지 그가 스스로 믿고 있다고 치더라도, 올인했던 믿음이 산산히 깨지는 것을 보는 옛 지지자들의 상한 마음에 그는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속임수 행위로 말미암아 수많은 옛 지지자들의 마음이 크게 상하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그가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국민 일반과 자신의 옛 지지자들을 인격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한나라당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범법 행위를 어물쩡 축소시키려는 따위의 치졸한 속임수는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눈속임 동작으로 인하여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소하는 가운데 그만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을 지를 그는 필시 한 번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행위는 상식인의 눈에도 넌센스이자 어리숙한 사기꾼이 쓰는 전형적인 속임 수법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마는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속임수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경험이다. 노무현이 자신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본다면, 이처럼 국민을 대하는 그의 방식을 통하여 그의 비인간적이며 졸렬하기까지 한 면면들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십분의 일' 사건으로 인하여, 대통령 노무현의 배덕은 그저 그가 저지른 범법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도덕성, 그리고 국민에 대한 인간적 관심과 동정심(compassion)의 결여라는 비인간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십분의 일' 발언은 이제까지의 노무현이 벌여 온 일련의 정치적 배신행위의 배면에 놓인 동기를 궁금해 오던 이들에게 상당부분 그 의문을 해소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의 바닥을 기는 도덕성 지수이다. 이것은 앞으로 노 정권의 정치적 결정 행위와 정책적 지향 그리고 그 실천이 얼마나 굴절되고 도덕적 파탄 지경을 향해 내달을른 지를 예시하고 있다 하겠다.

노무현은 자신이 내뱉은 '십분의 일' 발언의 치졸한 논리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그 이틀 후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4당 대표와의 회동 중 발설한 내용을 다시 보충 설명하기까지 하였다. 이 기자회견으로써 노무현은 도덕성의 추락만이 아니라 정치력 발휘에 있어서도 아마추어리즘의 실상을 생생히 연출하고 말았다. 전일 노 대통령의 '십분의 일' 발언으로 국민들은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혹여 대통령이 말실수를 인정하고 납득할만한 사과의 변을 내놓을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철저한 자기 부정의 용기를 보인다면 국민들은 추락하는 대통령을 마주하는 민망함을 벗기 위해서라도 그의 범법 행위를 용서해주고픈 심리 속에서 부심하던 차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예의 교만때문에국민들의 애절한 가슴을 읽어내지 못하였다. 절대적 의미에서의 도덕적 순결성을 내세워 대통령에 오른 정치인이라면, 선거와 관련한 신묘한 부패 행위들을 펼쳐 이미 도덕적 파탄 집단으로 낙인 찍힌 한나라당과 견주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진흙 구덩이로 끌어내리는 자가당착의 행위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것은 자신의 위법 행위를 진솔하게 인정하는 당당한 자세가 아닐 뿐 아니라, 자신의 청렴을 믿고 표를 몰아 준 지지자들의 도덕적 순결성을 정면으로 능멸하는 정치적 미숙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태를 제대로 통찰하는 눈이 있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정직하게 석고대죄하는 자세로 나왔어야 했다. 즉, 노 정권이 당장 와해되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들의 염원을 하나로 묶어 그들로부터 그 자리에서 사면을 받아내는 의식(ritual)의 시간을 기자회견에서 가졌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정당한 정치력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천문학적 액수의 불법대선자금을 끌어모은 한나라당의 부도덕을 질타하여 그를 궤멸의 나락으로 밀쳐낼 기회를 범 개혁 세력이 꿈에서도 그리고 있음을 노무현만 모르는 것일까? 노무현이 만약 자신의 부도덕한 불법행위를 국민앞에 확실히 까발리고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하였다면 범개혁세력은 한나라당의 응징을 위해서라도 제의의형식을 빌어 노무현에게 면죄부를 주며 공동체의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자 함께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란 인간적 그릇은 그만큼 크지 못함을 드러내었다. 오히려 다시 한 번 억지 논리를 고수하며 자신의 상대적 결백성(?)을 입증하겠다는 듯 한 태도로 나옴으로써 스스로를 옥죄는 자충수를 두고 만 것이다. 그 기자 회견으로써 노무현은 검찰로 하여금 1/10을 꿰맞추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 기정 사실화돼버렸고, 더불어 끝내 잘못의 인정을 거부하며 범법의 의미 축소나 왜곡을 기도하려는 의지가 분명함을 널리 공포한 셈이 되었다.

노무현에게 있어 애초부터 이러한 '제의'가 어울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경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 속 진실이란 경건한 자세 속에서 절로 표현되고 마는 까닭이다. 의식의 집전자가 품은 진정성이 회중 위에 유포되지 않고서야 회중의 자발적 참례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회중의 열의가 빠진 제의는 이미 의식이랄 수도 없을 터이다. 대통령 노무현에게 이만한 기대를 거는 것마저도 현실적으로 무리임이 갈수록 자명해지고 있다.

노무현은 불법 대선 자금 사태로 벌어진 파행 정국을 수습하기는커녕 협량한 정치력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저급한 도덕성, 그리고 그의 비인간성(혹은 인간적 미성숙)으로 인해 도리어 사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 면모가 예시하는 것은, 항시적 위기 상황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도덕적 아노미 현상(가치관의 혼돈), 그리고 사회 통합에 역행하는 갈등의 대거 양산 등이다. 그것은 입에 담기조차 거북스러운 불길한 예측이지만 그나마 사태를 냉정하게 똑바로 바라볼 때만 적합한 대응 전술이 나오리라는 점에서 오늘 정리를 해두려는 것이다.

김원웅과 유시민으로부터 배운다









그때를 기억하는가?

작년 유시민은 개혁당을 창당하더니 느닷없이 김원웅이를 모셔와 독립운동 자손이란 순혈의 피까지 들먹이며, 세기의 지사가 독야청청 초야에 묻혀있다 구국의 현시를 받고 나온 선지자나 되는 것처럼 이미지 조작하기에 그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수천 수만의 오마이 독자와 서퍼들은 김원웅의 개혁당 대표수락을 영웅의 환생인 양 열광으로 환호하였다. 당시엔 그 놈이 지난 이십 몇 년간 군사독재의 품 안에서 영화를 누리며 끊임없이 패악질해 왔던 견공집단의 충직한 일원였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막힌 사기술에 눈을 감았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였는가?



유시민의 이미지에 완전히 압도되고 세뇌돼 있었기 때문이다. 즉, 김원웅를 믿었다기 보다는 그를 선택한 유시민을 믿었던 것이고 유시민은 이미 개혁의 화신으로 이미지가 확고하게 구축돼 있었던 것이다. 긍정적 이미지 형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화설'인 바 (이것이 모든 절대 권력자가 필요로 하는 맹목적 추종 집단을 만드는데 필수적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유시민은 운 좋게도 그러한 요인을 구비했던 자였다. 소위 '항소이유서' 라는 신화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거다. 그의 이미지는 순수하고 '숭고한 영혼의 젊은이'였다. 그것은 이 후 지속된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시대의 화두와 잘 맞물려 가히 팬태스틱(환상)한 이미지를 그에게 씌워줬던 거다.

그러한 개혁의 화신이란 이미지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유시민 자체를 검증할 기회는 고사하고 그가 추천한 한 비루한 경력의 정치꾼마저도 의심없이 개혁의 대변인으로서 환영으로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조작된 것일 망정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충분히 떨치고 있는 현실이다. 상상해보라. 그리고 비교해보라, 실체와 이미지가 얼마나 천지차인지를. 유시민이란 인물을 쏙 빼고 나면, 김원웅이가 딴나라당을 빠져나와 스스로 개혁당에 입당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김원웅이는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그가 지금과 같이, 과거 민주화 운동에서 일정한 희생의 댓가를 치른 이들을 연일 족쳐대는 도덕성의 우위를 연기해낼 수 있을까? 딴나라 족속들에 섞여 공생의 기름진 밥을 탐하고 있지 별 수 있겠는가?



어느 쪽이 진실인가? 수구냐 개혁이냐? 또라이가 아니라면 망서리고 의심할 틈이 아까우리라. 그렇다. 김원웅의 실체는 수구다. 그가 하루 아침에 대변신하여 수구로부터, 수구를 박살내겠다는 개혁의 선봉에 분연히 나서겠다 말할 때 그의 진실을 믿어주는 것,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막강한 권력까지 추인을 하고 마는 것이 대체 합리적 사고를 가진 자의 태도인가?



그가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가?



이 자에게 도덕성을 헌정하고 권력을 의탁한 사람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유시민의 이미지라는 가짜에 의해서 또 하나의 아류의 탄생 조건은 동시에 마련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김원웅의 개혁의 전도사란 이미지의 완성은 바로 우리와 당신인 '네티즌에 의해서였다.



필요와 충분이란 조건은 이렇게 유시민의 이미지와 그에 놀아났던, '개혁을 열망하는' 순박한 네티즌의 합력의 결과였다. 유시민에 의해 한 번 속은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용인하고 만 이미지에 의해 두 번 속아넘어간 것이다.



오늘 김원웅의 위장술이 한 꺼풀 벗겨짐을 목격한다.



그는 말한다. 전국 정당화를 위하여 호남은 기득권을 버려주세요, 간곡한 듯 애처로운 얼굴로 호소한다. 이게 알짜배기 개혁파의 주둥아리에서 나온 소리다. 열 받았다고 이유없이 뭉개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개혁에 대한 '개념'이 명백히 드러났고 그 확인으로부터 절망의 한 숨이 절로 새어 나와서 그런다.



호남을 이용한다, 호남을 희생양으로 잡는 정치 야바위꾼식의 계산속이다, 등의 다 아는 얘기는 열만 데울 것이므로 굳이 거들지 않으련다.



문제의 핵심은, 그에게 있어 개혁의 개념이란 꽝, 즉 없다라는 사실이다.



개혁의 뜻 설정이 잘 못됐다. 수구를 용감히 외치면서 개혁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영남표를 잡아 현재보다 지역적으로 골고루 국해우원을 내고 그 다수의 힘으로 원활한 국정 수행을 가능케 하자고 말한다. 여기에 개혁이란 의미에 해당되는 대목이 있는가? 이것이 이치에 맞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 다수당은 개혁적 인사들의 집합체여야 한다>는 대전제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쉽다. 허무하게 단순하다.



그 집합체가 개나 새나 협잡꾼이나 기회주의자들로 뒤섞이게 되어도 다수당이 되기만 하면 그들이 개과천선하여 개혁을 수행하리라 기대하는가? 그들이 다수당이 되기만 하면 자연스레 개혁으로 나아가는 자동엔진이라도 달았단 말인가.(아니면, 수구영남에서 누구를 내세워 개혁인사를 당선시킬까나?) 김원웅이 하는 짓은 개혁을 깨부수는 첩경이다.



정치하는 놈들만 깨지고 자빠진다면 쌍수로 환영할 개혁이랄 수는 있겠으나 문제는 우리의 개혁에의 염원과 개혁이란 가치 자체가 싸그리 무너져 내리고 만다는 점이다. 수구의 길을 개혁이라 머리띠 두르고 씩씩하게 나가게 그냥 놔두면 나중엔 개혁이 수구가 되어 질타와 모욕을 받고 말 것이다.



김원웅 뿐이겠는가? 유시민이가 소위 브레인인데 엉뚱한 놈 갖고 삽질한 느낌도 있다. 또 어디 시민이 뿐인가? 신주류라는 주역들이 있지 않은가? 유재인, 이강철, 청와대 참모들?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진짜 삽질이 되고 말리라. 이러한 수구에로의 회귀를 당차게 꿈꾸는 최종 윗 대가리엔 노무현이있음이다.



노무현이가 이런 황당한 배반을 할 리는 없다고? 아직도? 지금 보고서도 부인하려는가? 그가 개혁을 깨부시기로 작정하고 덤빈다가 천만에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을 향해 명백하게 가고 있다. 왜 그러는가? 철학의 부재? 이 말은 너무 거룩하다.



답은 '개념'의 부재 때문이다. 수구와 개혁간의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어이없는 기초 개념에서 혼란이 오는가? 혼란의 핵심은 이것이다.



<영남은 주류다>라는 '신앙', 이 신성불가침의 신앙 때문이다. 몸통 노무현을 비롯한 노정권 의전내각진, 전 참모진들, 거기에 기생하는 김원웅과 유시민, 그 추종 노빠돌이들이 이 신앙 공동체의 신자들이다. 이 신앙은 '영남패권-ity'이다. 그들의 개혁의 요체는 영남 끌어안기다. 수구영남을 냅두기만 해도 개혁에 반한단다. 수구영남을 끌어안기 위해 호남의 개혁을 양보하는 것이 정치 정당 개혁이란다. 백인(白人) 영남 머리 하나의 가치는 유색인 타지역 머리 서너 개와 맞먹는다는 얘기가 된다. 영남중심주의의 실체는 이토록 뿌리깊고 질기다.



이제 명확해졌다. 영남패권주의를 따르면 노무현식 '개혁'이 되는 거고 거부하면 '똥빠'가 되는거다.



나는 즐거이 영원한 똥빠를 꿈꾼다.

너 언론아 탄핵정국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

 



1. 탄핵정국 속의 아노미



이러한 狂風이 없다. 가치 전도의 아노미가 지금처럼 미친 회오리로 몰아친 적이 없다. 유신과 신군부독재 정권시만 하더라도, 콩닥이는 새가슴을 안고 양심이 숨을 가다듬었을지언정 정의가 무언지는 빛나는 안광에서 한시도 지우지 않고 살았었다. 정과 사가 뚜렷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들이 양심의 횃불을 들었었다. 시인들은 마른 가슴을 쥐어 뜯고 펜대를 꺾으며 고뇌의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최루탄가스로 숨막히는 학원에서 거리에서 젊은 학도들은 푸르른 인생을 뚝 떼어 저당잡히며 거대한 악의 정권에 맨몸으로 맞섰다.



민주주의 완성과 선진국으로의 발돋음을 위한 대장정의 길을 진군해온 이 나라가 느닷없이 아노미 광풍에 휩쓸리고 있다. 지지도 30%, 자신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당을 두 동강내버리고 뛰쳐나갔을 뿐 아니라, 무수한 실정, 위법과 반민주적 정치행위를 밥먹듯이 해온 배신자 대통령이 국회에서 헌법 정신에 따라 탄핵당한 일을 두고, 대표적 진보성향 신문 한겨레가 최일선에 나서서 국민을 상대로 탄핵 반대를 선동하고 프레시안, 오마이 등 대안 신문이라는 매체가 북소리를 울리며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 뒤를 따른다. 기타 언론과 방송이 연일 선무방송을 울려제낀다 .



'대외적'으로 이들이 항변하기는, 대통령의 위법행위가 탄핵을 받기엔 너무나 경미한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법리적 해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탄핵의 위법성이 증명될 수 있는 사안이라며 탄핵무효 구호로 윽박지른다.



그러나 정작 진보진영이 탄핵반대를 외치는 '속내'는 그것이 아니다. 다만, 탄핵 소추안 가결이 헌법 절차에 따른 입법부의 적법한 행위였으므로 그들이 법리적 정당성에 대해 한번이라도 문제삼고 나오지 않는다면 탄핵의 적법성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마는 꼴이 되므로 결국 딴지를 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탄핵의 위법성만이 이들이 지적하는 문제의 전부라면 이것은 헌법기관인 헌재의 판결 결과를 기다리면 될 일이지 대중을 상대로 선동행위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여론의 향배에 의해 법리적 해석이 좌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들 마음 속에 법리적 해석에의 관심은 없다.



이들이 주장하고픈 진짜배기 논거는 이거 하나다. "나라를 거덜 낸 16대 국회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없다!" 이 주장이야말로 대중의 정서에 강하게 호소하는 참으로 실감나는 구호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 이성은 느슨하고 감성은 질기다. 이성은 개인독립적이고 감성은 집단의존적이다. 감성이란 시시각각 가변적일 수 밖에 없어서 또 다른 유사감성과 뭉치고 의지하지 않는 한, 저도 모르게 스르르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 필히 집단화를 부른다. 감성은 집단화를 자극하고 그것은 집단을 최면속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노 정권 출범 이래 정쟁으로 날을 새며 민생을 완전 외면해 온 16대 국회를 새삼스레 매도하기에도 지쳐있는 대중의 감성을 충동하며 날카롭게 자극하기에는 그만인 폭발력있는 구호다. 그러기에 모든 언론은 야당공조로 인한 탄핵 가결을 아예 의회쿠데타라 규정하고 나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이 외치는 '16대 국회' 매도에 있어 여당행세를 하는 열우당의 의원들은 면제를 받는다. 공영방송은 총선을 코앞에 둔 현 탄핵정국의 시점에서,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 무색할만큼 바람몰이식 여당표 잡기 호기를 포착하였다 판단하자, 즉시 대중을 거리로 내모는 선무방송을 연일 내보낸다. 부정과 불법으로 얼룩진 여당임에도 그들의 지지율은 하루 아침에 두 배로 뛰어오른다. 태생적인 정치 해바라기 여당 추종 방송과 태생적으로 그들에게 비판적인 진보언론이 한 배를 맞추고 광란의 춤을 추는 현상 속에 매일 노출되면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머리도 시나브로 어지러워진다. 가치 기준과 판단이 정면으로 도전받음을 느낀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탄핵찬성론자는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원래 수구와 한통속이거나 정신이 돌았거나 상식이 모자란 사람이거나 지역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손가락질 받는다. 다락방에 처박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처지다.



아~! , 이것은 가히 메카시즘 회오리의 재현이다.



상식이 무참히 짓밟히는 처지에 몰려있는 나의 가슴도 비감으로 흐른다. 차라리 참담하다고 해야 옳다. 분노와는 다르다. 군사정권치하에서는 의분에 가슴이 불탔다. 정의와 사악의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암흑기를 끝장내고도 십 수년이 흐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가만보니 아니었다. 한 사회의 상식이 정의에 기초해 있는 것이라면 나의 정의는 지금 깡통처럼 비탈길 위에 뒹굴고 있다. 시민적 상식이 능멸당하고 있다.



이 나라 평화민주세력의 여론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개혁언론, 진보성향 지식인계급, 분당 전 민주당 지지층 다수가 합작으로 벌이는 여론몰이 행태의 동기 중 이들의 감성적 충정만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이들이 분개하는 것은 이번 탄핵이 수구기득권집단인 한나라당, 그리고 (이들이 보기에 한나라당보다 나을 것도 없다고 보는) 야당들의 '야합'이라는 것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 대통령이나 열우당이 잘해서 그들을 비호하려는 게 아니라 헌정 초유의 탄핵 사태를 발생시킨 주체가 <수구한나라당>이라서 분노한다는 것이다. 추잡한 정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 회복을 위한 정략적 안간힘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대통령도 잘못했지만 야당은 더 잘못했다는 양비론을 점잖게 펼치면서 중립을 가장한다. 그럼으로써 주장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런데 이들이 결정적으로 역사적 악수(惡手)를 두고 있는 판단착오가 있다. 이들의 비난 속에서 수구한나라와 함께 민주당이 도매금으로 떠넘겨지고 있는 사실이다. 민주당이라는 소수 정당인의 집합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수백만 개혁시민들이, 이들이 무분별하게 던진 더러운 오물을 함께 뒤집어쓰고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당한 외침은 이 소란 속에 완전히 무시되고 만다. 그것이 깊이 울리는 이 시대 양심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당내 개혁 작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허물 하나로, 수십 년간 일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민주화를 주도해왔던 민주당 주체 세력이 졸지에 한나라당과 동급의 수구 도배로 매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과 열린당이 그간 그토록 집요하게 정략적 정치를 해온 사실들은 일순 깡그리 잊혀진다. 민주당을 박살내며 나갔으면서도 부패신장개업당이 된 열우당은 수구당 한나라로부터 매를 맞았으므로 어느새 빛나는 개혁의 체현자로 우뚝 서버린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겪는 혼돈의 연원이다. 가치관의 전도가 결코 암흑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줄이야!



지금 우리가 겪는 탄핵 정국의 혼란은 정치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정치적 관점으로만 보면 시간이 흘러 혼란이 정리될 때까지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적 공황, 가치관 혼란이라는 아노미 현상 속에 우리가 통째로 내맡겨지고 있음이다. 가치관 혼란은 정치 현상을 너머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어두운 그림자를 깊고도 오래도록 드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2. 노무현의 총선승리 강박관념



탄핵 정국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고스럽지만 잠시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정과 주요 정치이벤트 한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 탄핵 정국에 다다르기까지의 원인 중 그 핵심은 노무현이 가진 <총선올인> 전략의 동기에 있다. 총선올인 전략이 한나라당과 상생 전술을 견인했고, 그의 민주당 탈당에 이은 열우당 창당을 추동했으며, 결국 선거법 위반이라는 주요 탄핵소추 사유를 얻게 된 것에서 보이듯이, 제 사건들의 중심을 일관하여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줄기를 따라가보자.



노무현이라는 신선한 개혁이미지 정치인의 출현과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의 국민적 열광의 기저에는, 수구를 이 땅에서 해체하고 사회 체제를 일신하여 선진국형 민주주의를 구가하겠다는 의지의 시대적 조류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광주민주화항쟁과 6월항쟁을 거치며 수많은 열사들이 흘렸던 피와 민중의 저항을 댓가로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참민주주의 기틀을 세워나가는 역사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2002년 초겨울, 수구냉전 군사정권 후예 집단의 궤멸을 가져올, 평화개혁 세력의 정권 재창출이라는 쾌거를 극적으로 이룩함으로써 대통령 노무현과 함께 그토록 갈망하던 국민통합과 통일을 향한 민족화해, 그리고 21세기 동북아 중심국가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장미빛 미래는 눈앞에 펼쳐졌다.



메시아와 같은 한 정치인의 출현은, 반 세기 동안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몸 바친 풍운아 DJ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감으로써 남게 될 커다란 공백을 누군가 메워줘야 한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 안에서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적 '이미지'를 두른 정치인 노무현이 일으킨 열광은 이러한 역사적 인과성과 국민들이 갖는 시대정신의 맥락 속에 미리 예비되어 있었다. 그 열망은 자발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이성을 멀게 하고 범상한 한 정치인 머리위에 후광(halo)을 띠워줬다. 그 제의를 행함으로써 국민은 열망의 현실화를 앞당겨 성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나라 현대사에서 40년 넘게 발목을 잡던 지긋지긋한 수구냉전세력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을 성취하고, 개방적 사고, 민주적 사고, 높은 도덕성을 가진 리더쉽 아래 사회 구석 구석 대대적인 개혁을 이뤄내어 나라를 완전 개조시키고 말리라는 떨리는 열정에 평화개혁 세력은 더러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한 여름 밤의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참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대통령 노무현은 수구냉전 세력과 상생하겠다고 한다. 수구정당 한나라당과 상생하자는 제의의 상징으로써 남북 민족 공조의 정신과 성과를 박살내고 말 ‘대북송금 특검’을 그들에게 선물로 보내줬다. 이 악수의 충격으로, 그간 노무현을 열렬히 지지하던 개혁세력의 일부가 최초로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라크파병 결정과 NEIS강행, 물류대란, 숭미외교, 부안 방폐장결정 등에서 우리들의 메시아는 어이없게도 수구의 파트너였음을 노정하고 만다. 그 즈음, 노무현의 최순위 국정 목표는 그 무엇도 아닌, 차기 <총선승리>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총선승리라는 그의 목표는 정권이 가지는 지고지선의 존재 목적이 되어버리고, 이를 위해선 어떠한 불법적 비도덕적 초헌법적 수단의 동원도 개혁이라는 합리화 작업에 의해 정의로 각색된다.





대북송금특검 수용에 의한 한나라와의 상생 구도로의 포석 의도가 사실상 한나라와 손을 맞잡자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노무현이 한나라당을 멸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을까? 순박한 국민의 눈에는 이 점이 이해되질 않는다. 총선에서 수구당을 꺾어 이기려면 매 이슈마다 그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될 텐데, 왜 한민족의 융성하는 기운을 밑둥으로부터 싹뚝 잘라내는 희생까지 치루며 한나라당에게 상생을 제안하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니 불법행위의 추적이니 하는 노무현의 선전이 과연 진실한 동기일까? 그것이 남북경협과 민족화해공조라는 민족 생존권 확보의 틀을 깨면서까지 추진할 당위가 있다고 믿어줄 수 있는 것일까? 이 비밀을 읽는 것이 작금의 탄핵 정국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요체이다. 중도개혁이나 진보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이제까지 이 비밀을 읽는 수고를 게을리 해 온 경향이 있다.





3. 노무현의 총선승리전략 : 영남패권이데올로기



대북송금특검 수용을 통한 한나라당과의 상생이라는 정치 구도 재편에서 노무현이 노리는 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을 깨기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왜 민주당을 깨야만 했는가? 노무현은 한나라당을 멸시하되 그들이 현실적으로 누리는 파워를 심히 두려워하는 거다. 그들의 거대한 힘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처지이지 않는 한(즉 다수당의 자리만 빼앗아오는 조건이면), 타협 속에서 사이좋게 균형을 이루며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을 깨보겠다는 시도는 원래 언감생심이다. 그럼에도, 영남권에의 의석 진출이 제1당이 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정면에서 들이받을 수 없으니 만만한 민주당을 요리하여 영남민을 상대로 앵벌이전술을 부리는 것이다. 다행히 영남민을 공략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호남혐오 정서를 이용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처럼 쉬운 일이 없다. 대신 이를 위해 호남이 희생을 해줘야만 한다. 호남은 지역주의집단이라는 능멸의 딱지를 다시 한번 감수해주어야 한다. 노무현같은 영남패권주의자에게는 호남민에 대한 희생강요가 아무 문제거리가 아닌 것이다. 미처 양심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다만 욕을 덜 얻어먹으려면 그것이 거룩한 개혁의 일환인 것으로 포장해야 한다.



영남에 대하여 이런 발상을 했다가는 당연히 그 자리에서 돌을 맞겠지만 호남에게야 아무려면 어떤가. 사회문화적으로 늘 주류 영남의 눈치를 살피게 짜여있는 현실이니 호남민이 무슨 힘이 있어 대들겠는가. 설사 일부 호남민이 들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패권 영남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매체가 호남민을 에워싸고 대리인 자격으로 위엄있게 일갈해 줄 텐데 걱정할 게 무엔가. 그러기에 "민주당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계승하겠다"라는 거짓말이나 "호남민이 노무현이 좋아서 찍어줬나? 이회창이 싫어서 찍어줬지!" 따위의 발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 진보성향 언론, 그 누구도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지 않는다. 설사 반항하는 한 목소리가 나왔다 해도 금새 덮여버린다. 대한민국에선 호남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랬다간 사회 정서로 봐서 바로 이단아로 취급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집단에서 눈흘김을 당하며 배척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호남인 당사자들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차라리 양순한 양을 가장하는 것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처세술임을 어려서부터 잘 학습받았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는 바보를 어느 제삼자가 나서서 같은 편이 되어 싸워주겠는가! 이것이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민 정서요, 멘탈리티인 것을. 아니, 그것은 문화요 규범이 되어있다. 영남이데올로기라는 규범이다. 누구도 도전하지 않고 토를 달지 않는 규범 말이다. 물론 그것은 강요된 규범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일수록 몸을 사리는데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기득권층이므로) 어느 누가 굳이 탄탄한 논리로 무장하는 수고까지 하며 대한민국의 규범에 도전하겠는가!



노무현이 이러한 전술을 사용하는데는 당연히, 민주당이라는 <호남 태생> 이미지를 가지고는 천하가 뒤집혀도 영남표를 얻을 수 없다는, 따라서 민주당 <간판>으로는 총선에서의 승리라는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이미 확고히 서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영리한 정치인의 계산이 아닐 수 없다. 40년간 "죽어라 (수구)한나라당만 찍어왔던 영남인들(유시민의 말)"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하더라도, 호남이미지를 입고있는 민주당으로선 결코 표를 얻어낼 수 없다는 판단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움직일 수 없는 공리이다.



'호남이라는 단어는 영남민에게 있어 어차피 혐오의 상징인데...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 방법 밖에 더 없지 않은가?', '호남이 지역감정을 버려야 영남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지긋지긋한 지역주의 정치, 철밥통 정치들 천년만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얘긴가!'라며 반론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바로 노무현과 유시민 등 그의 친구들의 사고 방식이다. 아니, 이 방식이 호남민과 '깨인 소수'를 제외한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중, 그리고 먹물먹은 지식인들까지 아우르는 컨센서스이다. 한나라당보다 훨씬 다양한 지역구를 거느리고 있는 버젓한 전국 정당 민주당을 호남당이라고 폄하하고, 그러기에 호남 지역당은 없어져야 한다라며 목에 힘을 주는 자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소위 지식인들이다. 이러한 가치 도착적 인식 방식을 그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들에게도 이미 규범적 의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영남의 인격은 인격이고 호남의 인격은 견격(犬格)인 것이다. 불공평, 불평등이 이들의 규범이다. 여기에 그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학자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까지 노무현의 이데올로그(ideologue)가 되어 영남이데올로기 옹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민주화 투쟁 이념, 진보좌파 이념 따위도 영남이데올로기를 이해, 터득 하는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 따로, 삶 따로이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민주당 고사 작전에 돌입한다. 호남기득권, 호남철밥통, 호남난닝구, 호남토호세력, 심지어 호남패권, 잔민당, 호남잔민련... 등 온갖 멸시와 조롱이 가득찬 신조어를 양산한다. 당내개혁이라는 그럴싸한 구호 아래, 통합신당론과 신당론간 샅바싸움을 연출하며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민주당 내부 개혁의 당위성을 내외에 선전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기획된 <신당창당>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한바탕 사기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전 자신들이 몸담았던 둥지로부터 호남이미지를 완전히 탈색하려고 작정한 이상, 아예 신당창당이라는 새옷을 걸쳐입는 것 외 다른 선택이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민주당이 당내개혁으로 환골탈퇴할 수 있다 한 들, 그렇다고 해서 영남민들이 '여전히' 전라도당인 민주당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찍어줄까 말까 고민할 리가 만무하다는 걸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노무현의 뇌리에 절어있는 인식은, 영남민이 가진 지역주의와 수구적 정치성향은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철옹성이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에 의하여 스스로 설복당함이다. 영남민은 원래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그들 정체성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영남민들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들의 구미에 영합하고자 일단 영남민들이 기피하는 호남색으로부터 그렇게 필사적으로 탈출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남민 권익 챙겨주기가 지극정성으로 깔려있음을 본다.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 지금 영남민의 수구냉전적 정치성향에 아부하는 전략을 정식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호남민에 대한 노무현의 태도는 어떤가? 호남민은 노무현의 쌈지돈이요, 현찰이요, 봉이다. 정치의식 수준이 높다는 개혁적 마인드의 호남민들은 절대 수구 한나라당에겐 표를 안 줄 터이니 어차피 민주당만 깨뜨리면 그 표는 고스란히 신당표에 흡수된다는 계산이 다 끝났다. 그러므로 하루 아침에 호남민들을 여당 지지자로부터 야당지지자로 추락시키고, 신당으로 따라오지 않는 지역주의자라는 치욕의 낙인까지 덤으로 꾹 찍어주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적 효율이란 관점에서 이해해줄 수 있을까? 참으로 지나친 사치다. 이것은 그냥, 패륜이다. 합리성의 부재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것은 그저 제 부모를 잡아먹는 패륜행위일 뿐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만인 앞에서 데몬스트레이션한 이 패륜행위로써, 그리고 이 행위에 대한 가열찬 비판의 의지가 각 개인으로부터 억제당함으로써 남는 것은,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짊어져야 하는 <가치체계파괴>라는 짐이다. 복구하는데 엄청난 수고와 다툼과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를 만만찮은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거짓과 계략이라는 자산만으로는 한 공동체의 영속적인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안의 질서가 파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 있는 자가 싹쓸이를 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저항과 다툼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당분간 불행한 나라다. 가치체계가 다시 바로 설 때까진 그렇다.



수단이 지극히 저급하며 상식과 원칙을 엎어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개혁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거니와, 만약 개혁의 일부를 설사 일시적으로 일궈냈다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조만간 다시 한번 개혁이라는 철퇴를 받아야만 하는 사이비인 것이다. 즉 적어도 <개혁>이란 게 <민주시민의 정신>을 담보할 것이어야 한다면 말이다. 호남민을 수구세력으로 몰아 그들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부인하고 치욕을 안기는 반인륜적, 반민주적 정략으로, 수십년에 걸쳐 수구냉전군사정권을 일관되게 지지해온 영남민의 수구표를 얻어내어 그것으로 개혁을 완성해나가겠다는 말은 뻔뻔스런 사기일 수 밖에 없다.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아전인수식 논리는 이렇다. 한국의 정치가 지역주의 정당 구도에 기반하고 있어 정치 발전이 영원히 저해된다는 것이다. 각 지역민이 지역기반 정당을 자동적으로 찍어주는 틀을 기어코 부수어 재편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발상만큼은 가상하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주의를 깨겠다며 이번엔 노골적인 영남의 지역주의는 살리고, 대신 호남은 지역주의가 아닌 <지역민정체성> 자체를 파괴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무현의 인식 양식과 관련하여, 정당개혁 자체가 이들에게 있어 전혀 관심 밖이라는 추론은, 이들이 수구냉전적 영남민에게는 물론 한나라당을 향해서, 자민련을 향해서 한번도 개혁을 요구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진실임이 밝혀진다. 개혁이라는 모토 아래,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모태를 척살하길 마다하지 않았지만 수구당들에 대하여는 한 마디 싫은 소릴 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개혁이란 이들의 관심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은 오직 호남이미지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묘수인 신당창당의 길이며 야당인 한나라당과 상생을 도모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노무현은 민주당을 깨고 신당을 만들어 그것으로 과연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있는 것일까? 110 여 석의 민주당을 분열시키면서까지 데리고 나간 열린우리당은 불과 47개 의석의 왜소정당이다. 이렇게 보잘것 없는 몸피를 가지고 총선을 치뤄 승리를 일구겠다는 희망을 갖는다면 그는 이미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원래 노무현의 셈법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야무진 꿈을 가꾸었었다. 민주당의 대부분 의원들을 굴복시켜 신당에 합류케 하고 민주당을 소위 "잔민련"으로 몰아 지역토호 소수 집단으로 겨우 명맥만 잇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름을 바꾼 신당을 내걸고, 어차피 한나라당으로 못 가는 호남표의 대부분과 개혁성 강한 수도권 등의 민주당표를 쓸어담는 한편, 호남색을 털어버린 색깔로 영남표를 공략하여 결국 원내 다수당으로 등장하는 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적어도 과반수 의석 달성이었으리라. 민주당이 조용히 찌그러져만 준다면 그의 시나리오는 그리 황당한 목표가 아니었다. 원래의 민주당 표에다 30 여 석만 더 건지면 가능한 일이니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영남이데올로기에 찌든 그로서는 대선에서 영남의 표를 얻지 못했던 회한이 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가 고향 부산에서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되면서도 거푸 도전을 한 것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지역주의에 도전했던 것이 아니고 고향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말했던 데서 보이듯이, 총선에서 영남 의석을 얻는 것은 그에게 숫자 이상의 각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임이 틀임없다. 그러므로 민주당 의석을 다 가지고 거기에다 몇 석을 더하고도 영남 의석을 한 석도 못얻는다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 "영남 의석만 얻는다면 전국 10석만 얻어도 좋다"고 오기서린 말을 내뱉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므로 영남의석 얻기는 그에게 지상명령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 사술을 동원하였다. 물론 원래부터 사기숫법을 쓰지않고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뒤집어보면, 애초부터 노무현의 목표 자체는 도덕성이 난자당한 흉악한 모습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당을 원내 다수당으로 탄생시키기 위한 어떤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전략에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을 유권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환골탈퇴 시켜 수구야당과 정정당당히 경쟁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따른다면, 노무현은 개혁을 기치로 들고 나온 대통령이므로 수구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영남민을 중심으로 <호소와 설득> 작업을 펴나갔어야 했다. 즉 영남민들의 수구냉전적 의식을 바꾸는 노력을 다하고 그것이 안 되면 여전히 떳떳한 소수 여당으로 남는 것을 택해야만 했다. '이유없이 호남이 싫더라'는 이유로 민주당에게는 표를 못주겠다는 영남민들의 기호에 기꺼이 영합하겠다는 것은, 결국 수구적 노선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그러한 수구 영합적 국회의원을 모아 개혁을 이루겠다는 주장이 되고 만다. 참으로 가당찮은 논리인 것이다.



결국 노무현은 자신을 열렬히 지지했던 개혁세력의 뒤통수를 때리고 민주당 탈당을 감행한다. 그것은 개혁의 여망을 간절히 품은 수백만 개혁세력이 맡겨준 소중한 민의를 내동댕이쳐버리는 행위로서 <대의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쿠데타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반민주적 행위는 일찌기 세계 정당사에 없던 일로서 즉각 탄핵을 받고도 남을 만행이었다. 헌법에 명시될 필요조차 없었던 민주주의 기본정신 중의 기본인 대의민주주의의 부정이 헌법 조문에 적시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면죄부를 받는다. 더구나 이렇게 비상식의 극치인 파렴치행위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신문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으로부터의 비판의 대상으로서 이슈화되지도 않는다. 아니, 권력의 눈치를 보던 그들이 결국은 노무현의 논리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노무현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영남이데올로기 통속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비롯한 동조 언론 일반은 다음과 같은 적반하장식 논리를 펼친다. '지역주의는 망국병이다. 그런데 호남당인 민주당을 해체시키는 것이 호남주민의 소위 지역 몰표성 투표행태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식 말이다. 이 신성한 논리의 완성을 위해 호남민들은 수구집단으로 매도돼야만 한다. '호남민은 거기에 작대기만 세워도 민주당 간판이면 무조건 표를 몰아주는 집단'이라는 모멸적 정체성이 주어진다. 반면 수구원조 집단을 40년간 꾸준히 지지해온 영남민의 골수 지역주의적 투표행태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철저히 통제된다. 영남민에 아부해서 그들의 표를 구걸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은 영남민의 수구냉전적 멘탈리티에 대하여는 입을 꼭 다문 채 호남민만을 물고 늘어지며 아예 그들을 개혁을 거부하는 지역주의 함몰집단으로 내몬다. 노무현과 신영남패권세력의 실로 추잡한 전술이다.



그 방식은 일찌감치 공정의 게임법칙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린 파쇼정치의 표본이다. 약한 집단에 대하여 부리는 힘 있는 집단의 살인적 폭력이다. 이들이 개혁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말 자체가 개혁에의 능욕이었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대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속이고 이용해먹는 대 국민 사기극이었다.



여기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 재밌기도 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이렇게 노무현과 열우당 패거리가 극본을 쓰고 영남이데올로기 언론들이 연출하는 무대 위에서 민주당이 열우당을 파트너로 열심히 개혁경쟁 쇼를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기쇼의 속성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순진하지만 진지한 마음에서 민주당이 개혁에 박차를 가해주기를 주문하고 채근하다 결국 욕바가지를 씌우기도 한다. 그렇다, 개혁이란 건 얼마나 신성한지 모른다. 그러나 개혁의 정신을 난도질한 당사자가 주관하는 개혁경쟁이 남기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개혁경쟁이 아니라 개혁포장 경쟁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거짓으로 개혁을 멋지게 포장하느냐의 경쟁이다. 분당 후의 민주당 내분과 내홍은 모두 노무현이라는 영리한 무대 감독 아래 그의 기획대로 충실한 연기자가 되어 놀아나는 결과였다. 민주당이 스스로 내부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면 그렇게 바람직할 수가 없다. 그것이 민주당이 생존하는 유일한 길이며 총선 승리를 담보하는 최선책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면 좋은 일이다. 단, 그 개혁의 경쟁 파트너가 유권자라면 말이다. 유권자가 두려워 개혁을 할 때가 진실이다. 그 개혁이 영속적이다.





4. 영남패권이데올로기 규준 : 불공정경쟁



그러나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어진 개혁 경쟁이라면 완전히 딴 얘기가 된다. 개혁의 알맹이를 채울 턱이 없다. 그런 여유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결국 이미지 싸움이다. 민주당 내에서마저 권력 간 이미지 싸움이 첨예하다. 유권자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포장개혁은 길게 봐서 개혁의 뒷걸음질이다. 얼마 안 가 들통난다. 게다가 민주당이 노무현 극본을 쓴 이 게임에 참여하기로 작정했다면 상대를 이길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한다. 어차피 유권자를 대상으로가 아니라 열우당을 상대로 하는 개혁경쟁에서 심판관으로서의 언론은 일방적으로 여당의 손을 들어주게 돼있기 때문이다.



그 경쟁게임 룰의 이름은 <불공정경쟁>이다. 민주당은 강제적으로 이 무대의 어리광대가 됨으로써 엄청난 내분을 겪고 그 모습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친노집단으로부터 쏟아지는 집중적 비판공세에 시달리며 지지율 추락을 맞본다. 열우당의 사이비 개혁은 언론에서 곱게 포장하여 널리 널리 선전해준다. 이러한 불공정 게임법칙하에서라면 천하 장사라 한 들 승리할 수가 있겠는가. 개혁적 성향의 민주당 지지자일수록 개혁이 지지부진하게 비쳐지는 민주당을 한층 강도높게 비판하고 이에 호응하지 못하는 민주당에 실망하는 사람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친노언론은 민주당의 추락을 즐긴다.



자, 이렇게 그들 조롱마따나 호남철밥통 민주당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반면, 상대적으로 월등한 우위를 점한 듯이 선전되는 열우당의 개혁 수위와 내용은 과연 어떻겠는가? 예컨대 탄핵 정국 후폭풍을 업고 50%의 지지를 구가하여 단번에 유일한 일급수로 떠오르는 열우당은 그 구성원을 흘낏 보기만 해도 그들이 개혁과는 아무 상관없는 정치자영업자 집단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청정수와 같은 열우당의 이미지가 그들의 실체와는 얼마나 동떨어졌는가를 금새 알 수 있다. 상종못할 집단이라고 한 목소리로 힐난하는 한나라당을 거친 의원들과 그곳 보좌관 출신, 그리고 후단협회원들이 즐비하고 대통령의 측근이란 측근은 하나같이 감방에 가있다. 게다가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불법대선자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착복까지 한 자가 당당하게 경선승자가 되는 당이다. 탄핵 직후 전국 중계되는 TV 앞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며 통곡하고 꿇어앉아 국민에게 빌면서 국회의원 사퇴서를 일괄 제출한 의원들이 일 주일을 미적거리더니 이제와선 그저 없던 일로 하자며 입씻는 당이다.



이러한 어이없는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이비 개혁 경쟁을 해왔기 때문이다. 포장을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만큼 개혁의 실체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열우당은 여당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에 절은 대부분 언론의 비호 아래 그 포장지 기술을 최고로 연마해왔다. 이것은 애초부터 승자를 결정하고 패자를 끌어들여 벌이는 쇼인 것이다. 그것은 멋진 승자와 비굴한 패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할 것인가가 최대 관심인 사기쇼이다.



그렇다면 왜 민주당은 이토록 어리석은 것일까? 왜 어리광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것일까?



대답은 둘이다. 첫째는, 민주당도 <영남이데올로기>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땅의 규범이 되어 정치판은 물론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불공정경쟁>이라는 영남이데올로기의 핵심 규범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금 어떠한 게임 환경에서 뛰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이 없다. 민주당이 생존을 하려거든 이 불공정 게임 법칙 자체를 깨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룰을 공정한 것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게임을 아무리 죽어라 뛰어봤자 패하도록 짜여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거대한 공룡이라 하더라도 우선 그 본질을 인식, 학습해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민주당의 바보짓만을 탓하고 싶진 않다.



둘째 대답 때문이다. 정작 책임의 소재가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여론을 통제하는 대한민국의 언론이 영남이데올로기 편에 서서 자신이 올린 무대에 민주당이라는 어리광대가 올라오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가 없는 강제다. 아예 카메라 앵글로부터 사라지기를 고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예 고사하기를 작정하고 저항하기엔 가진 힘이 너무 작은 것이다. 뻔히 지는 줄을 알면서도 게임에 임하지 않을 수 없는 소이다. 영남이데올로기에 편입되면 사는 길이 열리고, 거부하면 그때부터 수난의 시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노무현에게 진실로 개혁이란 목표가 지시하는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그 안에 담고자 하는 고상한 철학이 있었다면 굳이 이러한 사기술을 쳐서 개혁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그 다수 의석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만약 그 목표가 실패했을 경우엔 어떠한 원칙과 철학으로 국정을 펼칠건지에 대한 기획이 수립된 바가 없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목적은 개혁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국정 수행을 원할히 하기 위한 원내 다수당 확보에 있었다. 이렇게 소박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목표에다가 개혁이라는 신성한 가치를 엮어 포장한 결과 사이비 개혁경쟁이라는 광란이 펼쳐지고 말았던 거다.





5. 탄핵정국과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파쇼



노무현의 지지도가 30%에서 반등의 기미가 없고 측근비리와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옥죄어오는데다 열우당의 '정동영효과'도 기력을 다하면서 총선에서의 여당승리는 이미 물 건너 가는 형국이 된다. 노무현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기대처럼 민주당이 완전히 깨져버리지도 않았고 열우당의 약진도 한계가 보인다. 이 때 노무현이 던지는 카드는 한층 치열한 총선올인 작전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전략을 수립한 마당에 그는 자신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선거법을 연거퍼 어기는 발언을 한다. 노무현 정권 출범 들어, 자신에게 끊임없는 모략과 수모, 그리고 결정적인 배신을 안기고 총선 직전에 이르기까지 불법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노무현을 민주당에서 곱게 볼 리는 만무하다. 한나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개혁 경쟁이라는 불똥이 한나라에도 튕겨, 억지 춘향으로 당내 개혁을 하느라 터진 분란의 격랑이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다. 노무현은 국정을 최우선시키는 대통령의 의무와 체신을 내던지고 일 개 선거대책본부장이 되어 좌충우돌한다. 그러한 노무현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들끓는다. 지난 일 년간 노무현의 실정에 절망해온 국민 70% 이상이 그를 불신하는데다 노무현이 선거법 위반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이 옳다는 여론이 비등하다면 거기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치적 목표는 탄핵가결을 통해 자연스레 만날 수 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미움과 민주당에 대한 편견이 없이 차분하게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탄핵가결 정국은 두 야당의 야합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민의 뜻을 받든 일임을 인정하게 된다. 노 대통령 탄핵은 매우 적법할 뿐 아니라, 헌법정신을 받들어 대통령의 과도 권력을 견제하므로써 헌정질서를 수호하라는 입법부의 의무를 올바로 수행한 일이다. 노무현의 탄핵은 그간 그가 저지른 심각하고도 패역한 실정들과 위법 사실, 그리고 계속되는 위법의 가능성을 제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입법부에게 주어진 권리를 적절하게 사용한 예였다.



그런 중에도 탄핵 가결 후 일 주일이 지나는 현재 언론의 선동은 그칠 줄을 모른다. 신문방송이 탄핵찬성 의견을 무시하거나 억누르고 탄핵반대 의견과 이벤트를 극화시켜 메인에 건다. 신문이란 신문,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신문, 친노 비노를 가릴 것 없이 웹진이란 웹진, 그 어느 것을 펴보아도 탄핵반대로 도배가 돼있고 텔레비젼을 켰다하면 탄핵찬성자를 파렴치한으로 만들어버리는 프로그램으로 가득 찬 것을 매일 봐야한다. 고문이다. 신문방송 등 언론 일반은 시민단체들과의 연합전선으로 대규모 군중 집회 참여를 선동한다. 멋대로 만든 100만이라는 숫자가 춤춘다. 행정부 장관이라는 자는 탄핵무효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촛불집회를 문화축제라고 속이면서까지 친절하게도 법망을 찢어 벌려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장관이 됐건, 언론이 됐건, 진보지식인이 됐건, 필부가 됐건 이들이 주장의 정당성으로 내거는 구호는 한결같이 <국민의 뜻>이다. 국민의 뜻을 어기고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을 탄핵했다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까진 없겠다.



문제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파쇼의 그림자이다. 즉 (탄핵을 반대하는) 자기들이 '다수,' 곧 메이저라는 것이다. 힘센 다수라는 것이다. 그걸 믿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집회와 효순.미선 촛불 집회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한 국민들에게 '광화문촛불집회'가 드리우는 상징은 <국민의 힘>이요, <정의로운 저항>이다. 그러므로 지금 언론이 부추기는 탄핵무효 촛불 집회는 자동적으로 정의라는 이미지를 후광으로 달고 있다. 군중이 다수의 힘을 업고 정의라는 이미지까지 두를 때 그것은 파쇼로 쉬 빠지게 된다.



파쇼는 즉시 공포를 조성한다. 소수의 목소리는 잦아들게 된다. 소수는 괜한 죄책감에 어깨를 움츠린다. 사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입을 조심한다. 입을 봉한다. 소수가 입을 봉하고 났을 때 다수는 폭발하는 스스로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들은 국민이라는 이름과 다수라는 힘으로 법을 무시한다. 다수가 법 위에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파쇼는 제어장치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린다. 소수는 혼돈에 빠져든다. 정과 사가 헷갈린다. 사고가 위축된다.



탄핵 정국 속에서 언론이 연출해낸 것은 파쇼의 광기였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친노 언론은 그런다 쳐도, 여지껏 비노라는 스탠스를 견지했던 언론마저 왜 탄핵가결에 대하여 극도의 분개와 항의를 표출하며 파쇼의 광기까지 번득이는가? 어찌하여 그들이 한통속이 되어 다수로 합심하고 있는가? 어떤 동기와 목적이 있는 것일까?





6. 언론의 영남이데올로기 부역--'한겨레' 를 중심으로



우선 한겨레를 보자. 한겨레는 진보를 표방한다. 민노당을 공식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파성과 관계없이 좌파적 편향을 자랑으로 삼는 언론매체다. 이들의 염원은 대한민국 정치판이 건전보수와 진보의 양대 정당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완전히 멸절되어야 할 존재다. 한나라당이 궤멸됐을 때 남는 당은 민주당과 열우당이라는 보수당, 그리고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민노당 등의 진보당이다. 그러므로 이번 탄핵정국이 한겨레로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호기가 되는 것이다. 탄핵주도의 한 축인 한나라당을 벼랑 끝에 선 소수당으로 몰아버리기에는 하늘이 내린 기회가 된다.



이들에겐 한나라당이 없어지고 만 지형 위에서 볼 때, 민주당과 열우당간에 아무런 차별성이 없다. 어차피 오래 안가서 두 당이 합당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이왕 열우당 지지도가 폭등한 마당이라면 잘 된 일이다. 한나라당을 무너뜨리는 천적이기만 하다면 그게 누구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열우당의 바닥을 기는 도덕성 따위, 그들의 사기성같은 건 지금 문제가 아니다. 열우당을 확실히 밀어주면 줄수록 한나라당은 그만큼 나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떨어질거다. 상대적으로 왜소해져가는 민주당의 형편은 지금 봐줄 계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좋다. 보수당도 여럿보다는 뚜렷한 하나가 서야지만 진보당이 그와 대등한 파트너로 행세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한나라당을 죽여라!



이것이 진보성향지 한겨레의 꿈이다. 그것은 민노당의 입장과 매우 대동소이하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이비 좌파가 빠지기 쉬운 자가당착이다. 이들의 첫번째 문제는 도덕성이 없다는 점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합리화된다. 또 다른 문제점은 판단착오다.



한겨레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탄핵 가결이 법적으로도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 것임이 틀림없다. 하물며 그간 한겨레는 줄기차게 노무현의 수구적 정책 기조를 비판해왔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대통령 자격 없음과 위법 사실 등 탄핵의 정당성을 그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믿을 만하다. 한겨레의 도덕적 기만성은 이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진보를 꿈꾸면서 정작 그 정신이 표방하는 소수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일절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위축이 민주당의 잘못 때문이 아닌 것을 한겨레가 모르겠는가. 노무현과 열우당의 공작에 무너지고 있는 본질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부정의가 강자가 되어 행세를 하며 약자가 다시 구석으로 내몰리는 불공정 게임을 보며 한겨레는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진보의 정신을 완전히 갉아먹는 사이비 집단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두 번째 문제인 이들의 판단착오는 어이없게도 상상력 빈곤에 기인한다. 그 짧은 상상력은 한나라당이 자멸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은 영남 <대중>이 만들어줬다. 안타깝게도 영남인들은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찌든 사람이 대부분이다. 영남이데올로기란 패권에의 갈구이다. 열우당이 지금 순식간에 반짝하며 지지율이 올랐다고 해서, 그토록 허약한 대통령, 탄핵을 받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대통령을 두고 있는 여당이 영남인들에게 과연 듬직한 당으로 보이겠는가? 영남인들이 의지하고 맡기고 싶은 신뢰를 열우당이 보여준다고 여기겠는가? 열우당은 영남민의 패권의식을 맡기기에는 형편없이 초라한 난장이에 지나지 않는다. 영남민들은 그것을 직감으로 안다. 그 영남민이 어디로 이민가는 것이 아니다. 투표장에서 열우당을 꾹 찍고 나올 영남인들이 절대 많지 않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영남민이 의지하는 대상이다.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끄떡없다는 것은 이러한 보통의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뭔가? 헛물켜기다.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에서 꼿꼿하게 살아남는다. 과반수에 육박할 것이다. 대신 한겨레가 앞장서고 친노 어용언론들이 부추긴 댓가로 열우당이 약진하고 민주당이 약소 정당으로 내몰릴 것이다. 결국 한겨레가 보기에 한나라와 열우라는 두 개의 보수 정당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이 설 환경조건은 여전히 요원하다. 엄마의 치마 뒤에 숨어 눈만 빼꼼히 내놓는 아이처럼 덩치 큰 어른들 사이에 낀 꼬마 민노당이 될 것이다. 한겨레의 야무진 꿈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다.



사술의 동원과 파쇼의 광기에 동참하므로써 한겨레에게 남는 것은 역사적 죄악밖에는 없다. 한겨레는 노무현이 지지자를 배신한 것과 꼭 같은 패턴으로 그를 아껴왔던 중도개혁과 진보성향 독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군사독재정권 엄혹한 시절을 뚫고 횃불을 밝히며 한국 민중에게 민주의 혼을 심어준 민주당을 짓밟는데 동참해온 죄과가 남는다. 한겨레는 이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해왔다. 상식과 원칙이 통용되는 언론으로 여겼더니 진보를 표방한다는 자들이 또 다른 파쇼를 지지해버렸다. 상식을 가진 시민들을 기만했다.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정국을 도구로 이용하면서 상식과 원칙을 완전히 갈아엎어버렸다.



탄핵 정국 국면에서 한겨레는 배신을 때린 반면 오마이는 일관되게 제 길을 간 셈이다. 그렇다고 파쇼의 광기를 드러낸 오마이의 노무현광신이 무죄인 것은 아니다. 물론 오마이만이 아니다. KBS, MBC 두 공영방송, 한국일보, 경향신문, 국민일보, 문화일보 등 일간지, 그리고 브레이크뉴스, 최후로 믿었던 프레시안 등 인터넷신문까지 예외없이 한통속이 되었다. 우연일 수 없는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는가? 물론 권력 추종적인 그들이므로 친노 논조에서 벗어난 목소리를 낼 리도 만무하겠지만 이토록 일사불란한 데에는 그럴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따올림 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여타 언론사로부터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 자체가 무섭기 때문이다. 한 번 낙인찍히면 과거의 명예를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남이데올로기의 기준과 규범이 강제하는 환경이다. 공정하고 균형잡힌 보도라는 언론 본연의 자세는 고사하고, 우리가 과거 십 수년 전 이래 경험해보지 못한 파쇼언론공동체라는 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언론공동체가 끼친 사회적 해악의 깊이와 넓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영남이데올로기의 구현에 동참한 잘못을 첫째(first and foremost)로 꼽을 수 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마이너, 즉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특히 호남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일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공포였다. 재갈을 물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고와 판단 기능을 정지 혹은 파괴시켜버린 점이다. 민주당 지지율이 호남에서도 곤두박질 쳐 (전국적으로) 5% 까지 떨어진 수치가 그것을 웅변한다. 적법하고 적절한 탄핵에 참여한 댓가가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것은, 호남민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느끼는 공포감 외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전의 자랑스런 소수가 아니라 졸지에 그들은 저주받을 파렴치 집단이 되어버렸다. 마치 그들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심지어는 제 부모와 형제를 죽인 정권의 후예들과도 입을 맞출 수 있는 더러운 집단인 것처럼 매도되었다. 마치 민주당이 그러한 패륜을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지지자들은 세뇌당하였다. 그것이 공포의 효과였다.



아울러, 생명과도 같은 그들 가슴 안의 5.18이 처참히 난도질당해 버렸다. 자긍심엔 씻지 못할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들 간에, 호남인들간에, 친척과 친구들 간에, 가족 구성원들 간에 서로를 멸시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로부터 소외당하고 말았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자체가 두렵다. 차라리 입을 닫고 서로 소외되기를 택한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 정신은 산산조각이 났다. 한번 일그러진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간의 신뢰를 잇는 경험이 다시 축적될 때만 가능하다. 세월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앞으로 호남민은 한 동안 엄청난 상흔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모두 언론의 조작에 의한 결과다. 거짓이 진실이 되게 만든 결과다. 그것은 죄악이었다.





7. 탄핵정국 너머-영남패권이데올로기 해체의 길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족화해와 통일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개혁이나 사회 변동을 추동하는 데에는 주체 세력의 출현과 결집이 필히 요청된다. 이 나라의 개혁 주체는 누구인가? 말할 필요없이 호남민중이다. 또한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왜 호남민중일 수밖에 없는가?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에 저항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핍박을 받았던 민중이 충청이든 강원도민이었다면 그들이 대한민국의 개혁세력이 돼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불행하게도 호남민중이었다. 호남민중이 없다면, 또 그들이 살아있으나 그들에게서 저항 정신이 빠져나간다면, 그래서 저항할 대상을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진보는 거기서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호남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문제다.



진보좌파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착오적인 망상을 그만 하라고. 한국에 자본주의 이입 역사가 반 세기요, 한 사회의 진보는 계층·계급 간의 힘겨루기와 타협에 의해 견인되는 법이라고. 나는 이들에게 말한다. 착각하는 게 있노라고. 이 땅에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행세하는 한, 먼저 그것에 대항하지 않는 한,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사회적 약자의 권익은 영남패권과 그 부역세력으로부터 절대 빼앗아올 수 없다고.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바로 파쇼에 다름아니므로 파쇼가 해체되기 전까진 계층·계급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작금의 탄핵 정국은 파쇼의 망령이 아직도 이 땅에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주었다. 영남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총체적 언론의 힘은 결코 영남패권특수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의 규범이 되어있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이념에서 저절로, 자연스레 스며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해줬다. 영남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기괴한 형상을 한 파쇼인지도 뚜렷이 보여주었다. 파쇼가 그렇듯이 그것은 역시나 파괴적이었다. 영남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작금의 아노미는 그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실체를 깨닫는 여부에 따라서 2004년 초봄의 탄핵 정국은 우리에게 그나마 쓴 약이 되기도, 아니면 여전히 독약이 되기도 할 것이다.

시대정신인반영남패권주의.c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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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 개념과 그 척결의 당위성

시민25


영남패권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대소집단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등 권력을 독점하여, 과도하고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환경조건을 구조화 시킴과 동시에, 소외지역민을 발생시키고 다시 그들을 사회문화적으로 차별하는 대한민국의 비틀린 정치경제문화적 패권 구조와 그 체제를 기리킨다.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여 사회갈등을 조장, 견지하려는 이들 세력들을 '영남패권' 혹은 영남패권주의자라 규정하며, 그 양상에 따라 영남정치패권, 영남경제패권, 영남언론패권, 영남문화패권 등의 하위개념으로 분류하며, 그 관계에 따라 영남패권을 능동적으로 관철하여 부당한 수혜를 누리는 영남패권추동세력, 패권정서하에서 수동적으로 수혜를 누리는 영남패권동조세력, 이를 묵인하며 방관하는 영남패권주변세력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패권세력에 의한 수탈적 지역주의의 대척점에 저항적 지역주의가 있다.

그리고 영남패권을 지탱하는 유무형의 체계를 통틀어 영남패권주의 혹은 영남패권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영남패권주의 해소는 시대정신이며 당위

  영남패권주의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했을 때 패배주의에 지배되어 현실을 수용하고 기회주의적으로 강한 자에게 빌붙어 동포를 팔아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인 친일부역배들의 이데올로기와 질적으로 흡사하며 사대주의로 귀결된다.

친일부역배의 의식과 궤를 같이하는 영남패권주의는 비인도적이며 반민족이며 반민주적이며 반역사적이며 불합리이며 비효율적이며 반헌법적인 심각한 병폐이다.

우리 일상을 옥죄는 이러한 전근대적이며 비인도적인 병폐들을 발본색원함이 없이는 지역화합, 민족화합, 민족자주는커녕, 인간으로서 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으로의 성장조차 바랄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지향적으로 지역간 계층간의 부당한 차별없는 천부적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과, 의존적인 공동체구성원으로서 평등이 적극적으로 시급히 확보되어 공정한 경쟁의 틀이 정착되어야 함은 우리 시대의 당위이며 시대정신이다.

1. 호남지역에 존재하는 영남패권동조세력, 비호남지역에 존재하는 반영남패권주의자, 비영·호남의 영남패권주변세력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라는 용어를 피하고 지역차별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이유

1) 영남이라는 가해 주체를 뺌으로써, 차별하는 지역과 차별 받는 지역이 어디인지 애매하게 하려는 의도.

2) 차별이란 용어는 힘의 우열의 소재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쌍방간에 상대를 차별하는 상태까지 포함하는 용어로서 어느 한 쪽의 과오가 아니라 쌍방 과실로 다루려는 의도. 이리하여 피해를 당한 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거나 그 진상을 밝히는 데 장애를 된다. 힘의 차이가 없는 대등한 쌍방간이므로 피해를 입어도 피해가 아니고, 피해가 있다면 순전히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크기로서의 피해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피해사실을 인정받지 못해 그 피해는 그저 피해자의 피해'의식'이 되고 오히려 그것은 약자의 치졸한 하소연쯤으로 희석시키려는 의도.

3) '차별이란 그저 인간사에 있기 마련인 불가피한 필요악 수준이 아니겠느냐' 하는 뉘앙스를 담아,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려는 의도.

4) 패권이라는 월등하고 독점적인 힘의 집합체라는 뜻을 뺌으로써, 한 지역(영남)이 다른 모든 지역에 대해 누리는 지배자의 위치, 억압의 위치를 슬며시 은폐시키려는 의도.

3. 지역주의, 지역감정(정서), 지역구도등의 개념과의 구별

지역주의 : 이기적 인간들이 천혜의 자연적 풍토위에 군거하여 발현하는 제 양상. 이해관계가 얽혀 획일적이지 않다.

지역감정(정서) : 풍토및 지연과 얽혀 발현하는 연고자들의 감정이나 정서로 다양한 풍토를 반영한다.

지역구도 : 지역단위들의 어떤 양상을 서술하기 위한 가치맹목적 개념.

총선결과를 영패적으로 해석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총선 결과를 놓고 도하(都下) 신문찌라시들은 민주의 승리라는 둥, 이념과 정책 대결로 가는 정치시대의 개막이라는 둥, 거침없는 개혁드라이브가 걸릴 거라는 둥, 좌우 양날개로 나는 최초의 정치지형 형성이라는 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지역주의의 퇴조를 확인했다는 둥, 하나같이 헛소리들로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민주당 지지 웹진에서는 각자 가진 비통함을 달래고 추스르며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소위 논객들께선 민주당 총선패배 원인의 분석 글을 하나씩 내놓고 있기도 합니다.

언뜻 다 필요한 절차로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순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생존 조건이 영패의 지배 아래, 영패의 문화환경에 철저히 둘러싸인 채 제한받으며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피지배 상황이라는 것은 세계 여느 민주국가와는 다르게 이 땅에나 있는 아주 <특수>한 조건입니다. 우리가 시궁창 냄새가 나는 곳에서 매일매일을 살고 있는 탓으로, 그 환경이 곧 Normal한 것으로 둔갑할 수는 없습니다. 코가 그만 문드러져서 냄새를 못 맡는 현실은, 감각이 아닌 우리의 기억력으로,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되새김질 함으로써 이 환경이 Abnornal임을 늘 깨우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영패지배의 환경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이란 사실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정상적 특수환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영패의 존재를 잘 아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까먹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주장들에서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가 빠진 채 논리가 전개되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보통 통탄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예가 바로 이 시간 쏟아져 나오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자탄과 자성, 그리고 민주당 재건 모의의 형식에서 보입니다. 패배 결과의 원인을 모두 <안으로만>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민주당 내부에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치환경이 영패구조라는 거대한 영향력이 없는 normal한 상태라면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꼭 집어 올려 똑바로 마주한 뒤, 깊은 성찰에 의해 오류를 하나씩 바로잡아가는 시간이 소망스럽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자성은 대단히 빗나간 전제 위에 기반해있습니다. 원인을 규정하는 전제인-바로 우리의 환경이 abnormal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영패라는 외부 조건을 전혀 고려치 않은 normal한 환경하의 분석 '패러다임'이라는 겁니다. 전제가 어긋나있는 분석이 현상의 진실을 바르게 설명해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영패찌라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이비진보 티를 내는 모든 신문과 방송, 그리고 심지어는 반영패 대오에 함께한다는 민주당 지지자들마저 이러한 오류를 천연덕스럽게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겨레, 오마이의 분석 기사를 읽을 때 곧 역겨움을 느끼고 마는 것은 그들의 사고와 논리방식(패러다임)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러 민주당 논객들의 글에서마저 그런 역겨움이 느껴지곤 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바로, 민주당 지지자들의 패러다임이 막상 저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있다고 봅니다. 민주당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빼고는, 저들 무뇌아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를 의식하지 않고 사고하는 형식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패지배환경이라는 <특수>하고도 한 상태를 무시한 채, normal 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제를 깔고 있는 것과 전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실제 어떤 차이를 만들까요?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를 인식할 때, 우리는 사이비 개혁 세력의 논리적 허구를 훤히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밑창까지 다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그들의 거짓진술이 속속들이 드러납니다. 반면,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를 무시하고 총선 결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저들의 허구적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속아넘어가고 맙니다. 저들은 논리 전개에 있어, 영패지배환경 사실을 전혀 고려치 않고 그저 normal한 상태로 놓고 주장을 펼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내내 속아와 이젠 차라리 편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중립적 일반인들에겐 그것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왠지 입맛을 잃게 하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궤변만을 아닌 것 같고 대충 반은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논리입니다.

이때부터 우리 민주당 지지자들은 갸륵하게도 책임추궁과 비난의 화살을 이내 <내부>로 돌리고 맙니다. 저들의 말도 쓴소리려니 하며 귀히 여기게 됩니다. 영패지배환경이라는 대전제는 우리의 문제분석과 이해의 과정에서 이내 쏙 빠져나가고 맙니다. 오직 내부보수가 우선 다급한 일이고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부각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 우리는 그들에 대항할 전의와 논리를 잃게 됩니다. 그들의 말이 반은 맞다고 느끼는 조건에서 상대에 대한 전의가 일어날 리 만무합니다.

저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사실 왜곡 위에, 민주당죽이기, 호남죽이기를 천연덕스럽게 벌이고 있는데 순진하기만 한 우리는 집안싸움 아니면 자탄으로 가슴이나 치고 있단 말입니다. 알고 보면 한심스러운 짓입니다.

이렇게 저들 영패적 패러다임에 의한 총선결과 분석은 정통성을 인정 받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대로라면 역사에도 저들의 주장을 그대로 기록하고 말 것 같습니다. 맘씨 좋은 우리 민주당 지지자 바보들은 그저 손 놓고 저들의 17대 총선 관련 역사왜곡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민주당이 짓밟힌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저들은 대놓고 민주당의 의석 축소에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해가며 아예 사망선고까지 하겠다는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총선 결과가 구영패와 신영패의 싹쓸이로 나타났습니다. 호남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신영패에 대한 굴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민주당 지지자들은 지금 눈물이나 떨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민주당이 패배했다고 해서 우리의 반영패 의지가 함께 패배한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럴수록 반영패 기치는 선명해졌습니다.

지금부터 당장 우리들의 정당한 분노를 가열차게 표출해내야 합니다. 우리 내부가 아닌 <저들> 영패주의자들을 향해 준엄하게 항의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내부적 자성은 그 다음, 그것도 한참 뒤 나중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적극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책이 얼만큼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되 저들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깨끗하고 떳떳합니다. 저들의 비열함과 사기성과 비도덕성을 끊임없이 공격해야 합니다. 영패척결이 지금과 같은 눈물과 한숨으로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abnormal한 영패지배환경을 normal한 것이라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놓지 않을 때만 영패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보정당과 영남패권주의

부제: 홍세화의지역주의인식을비판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중 한 분인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이하 경칭 생략)이 며칠 전 쓴 "진보 정당 콤플렉스"라는 글을 일부 발췌하여 살펴본 뒤 그와 한국의 일반 진보/좌파가 갖는 지역주의에 대한 시각을 비판하고자 한다. 내가 평가하는 한 홍세화의 논리와 주장은 진보좌파의 전범(典範)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글을 빌리긴 하였으나 그것을 자연인 홍세화만이 아닌 <진보/좌파 일반>의 인식이라 놓고 비판하고자 한다.

(인용 시작) "‘보수일색인 정치판에서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가 없으므로 차별성은 오직 지역에서만 나온다. 이 땅의 정치가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인데, 지역주의 극복의 당위성을 거듭 주장하면서 진보 정당을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책과 이념의 경쟁이 지역주의 극복의 최선책임에도 진보 정당 육성을 애써 피하면서 지역주의 극복 방안들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진보 정당에는 거리를 두다가도 개혁에는 선뜻 동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진보 정당 콤플렉스 때문인가..."

"...진보 정당 콤플렉스는 레드 콤플렉스와 진흙탕으로 묘사되는 정치판에 몸담지 않고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타성이 만나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낳은 기계적 중립성이나 정치에 대한 총비론적 시각은 또 하나의 탈정치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사회 변화와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은 진보 정당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금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입은 그 흐름을 가속시킬 것이다." (인용 끝)

여기서 그는 한국의 지역주의를 '지역이기주의'와 같은 선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이해대로라면 그의 주장은 곧, '정책과 이념상의 차이가 없으므로 이 땅의 정치는 지역(이기)주의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인과 관계>의 진술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당간에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없음이 지역이기주의를 불러들인 선행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역주의의 본질은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라, 어느 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일방적 패권의 조건과 그것에 의해 억압받는 세력(집단)의 존재에 있다. , 영남패권주의가 그 본질이다.

한국의 지역패권주의는 군사파쇼정권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정치적 환경으로서, 정당간 정책과 이념의 차이 없음(혹은 차이 자체)을 배태하고 생성시킨 <선행조건>이 되는 것이다. 홍세화는 이 양자('이념상 차이''지역주의')간의 선행조건을 정확히 거꾸로 규정하고 있다. '정당간의 이념 상 차이없음'이 지역이기주의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지역패권주의라는 정치환경이 '이념 상 차이없음(혹은 이념 상의 차이)'을 결과적으로 야기시킨 조건이 된다.

홍세화는, 진보정당의 진출을 방해했던 것이 지역주의가 아닌 레드컴플렉스라고 진단하면서, 도대체 무슨 논리로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역주의를 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가? 그의 비논리와 비약을 "보면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진보정당이 지역주의를 몰아내는 도깨비방망이는 아닐텐데 말이다. 그는 정치판에 아직도 지역주의가 횡행하는 이유가 정당간 정책이념의 무차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보정당이 진출하여 정책이념의 차이만 정치판에 도입시키면 지역주의는 슬며시 자리를 뜰 것 처럼 말한다.

그의 비논리를 들여다 보자. 정당간의 정책이념 차이가 아무 문제가 안될 정도로 지역주의가 그 위에서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면, 지역주의 정치문화는 이미 '정책이념의 무차별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한 독립적인 변수가 되어있음을 인정함이 된다. 그러니 이 지역주의 문화에 새로운 정책과 이념을 도입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정치판이 정책이념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지금까지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역주의에 의해 결정적으로 방해받아 왔다면, 이제 진보정당의 국민적 육성에 의하여 지역주의가 어느 만큼 혁파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세화의 주장처럼 레드컴플렉스에 의해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체되어 왔다고 수긍할 때, 진보정당의 육성으로 인해 <레드컴플레스가 퇴치될 기회>는 맞았을지언정 <지역주의>까지 무너질 인과성은 하등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진출과 지역주의 혁파는 상호간 아무 상관이 없는 이슈다. 그가 진보정당의 착근을 방해한 이유를 레드컴플레스라고 진단한 이상, 이제 진보정당의 육성을 위해 할 일은 그 레드컴플렉스를 거둬들이는 캠페인을 벌이는 일 밖에 없다. 뻔한 말이지만 물론 이 전략은 그리 유용할 리 없다.

그가 왜 이런 모순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가? 그가 지역주의의 본질과 그것의 영향력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의 이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정치판의 지역주의 문화는 이미 진보적 정책과 이념의 도입 정도로는 임팩트를 전혀 줄 수 없을 만큼, 홍세화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억센 위력을 가지고 정치행위 방식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세화를 비롯한 진보/좌파는 정작 영남패권의 존재 자체가, '극우와 보수의 공생'을 견인하는 환경을 제공함과 동시에 진보의 발아 자체를 극도로 억압한 조건이었다는 역사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한 환경과 조건이, 바로 영남군사파쇼와 영남패권집단이 정책적으로 제도화, 구조화했던 그 산물이었음을 간과한다. 홍세화의 표피적인 진단처럼, 그저 정당간의 정책/이념 차이가 없다보니 자연적으로 정치판에 지역주의가 스며들고 말았던 것이라는 인식이다.

여기서 잠시, 진보주의자가 전형적으로 빠지기 쉬운 논리적 오류를 짚어보는 의미에서 위의 인용문 중 좀 더 사소한 점 하나를 지적한다. 그가 보수정당들 사이에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가 없었다고 단언하고 나서는데 이것은 전혀 진실에 닿아있지 않다.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보수>라는 멸시조의 딱지를 제 정당들 위에 한꺼번에 둘러씌우는 수법으로 정당 간 정책과 이념 상의 무차별성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 홍세화도 이와 똑같은(stereotypical)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그는 이 방식을 통하여 각각의 정당을 지지하는 수구냉전세력과 개혁민중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 구도의 의미마저 무로 돌려버리겠다는 논리를 천연덕스럽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걸어온 길에는 아무런 차이도 의미도 없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무지막지한 우김질이 된다. , 아직까지 수구냉전이데올로기의 포로로서 남아있는 영남대중과, 호남을 중심으로 한 민주평화개혁민중이 대립하며 그들 각각의 정당을 지지해올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인과성을 몽땅 무시하고 있다. 지지 정당 선택의 동기야 그저 그들의 지역이기주의의 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 의미를 형편없이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자의적이며 몰역사적인 인식이다.

 

문서로서의 정강상에서야 정책과 이념 면에서 정당 간 별 차이가 없다고 해석한다면 일면 수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 각 정당이 국민을 상대로 정책입안과 입법행위를 펼쳤을 때는 '수구'정당과 '보수'정당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해왔던 것이다. 정책과 이념 면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식인 홍세화의 터무니없는 역사인식이요, 사실왜곡임을 확실히 지적해둔다. 그러나 여기서 보수정당간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가 있느니 없느니 따지는 일에 더 이상의 지면을 할애할 수가 없다. 그의 한국 지역주의 문제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도발적인 인식 오류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헤치지 않을 수 없는 소이에서다.

홍세화가 여기서 '지역', '지역주의'라고 말할 때, 그는 영남패권주의가 배태한 제 현상 즉, 그것이 한국 최현대사 40여년 긴 세월을 통하여 강고하게 구조화시킨 <정치 경제 사회적 권력의 독점, 불공정규칙과 권위주의로 대표되는 비틀린 가치체계, 호남민에 대한 강고한 사회문화적 차별주의> , 전 사회에 걸친 광범위하고도 근본적인 제문제임을 전격 무시하고 있다. 총체적인 한국 사회 병리 현상의 근본 연원인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쳐두고, 그는 문제 영역으로서의 '지역'을 그저 '지역이기주의'나 지역갈등 정도, 혹은 지역간 '감정의 싸움'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겨우 "정치판"이라는 상대적으로 매우 협애한 분야에 국한된 병리현상인 것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러길래 그는 정치판의 패러다임 전이 하나로 악마적인 지역문제를 일거에 퇴화시키고 말 것처럼 선언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지금 홍세화는 정치판의 지역주의라는게, 각 지역에 기생하는 정치권력이나 토호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철저히 봉사하는 도구가 되면서 서서히 고착되고 만 구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각 지역세력들 간에 지역적 집단이기주의를 각각 좇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저급한 정치판이 형성되고 만 것이다라는 식의 현상파악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역주의가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는 원인이, 40여 년에 걸친 군사파쇼/수구냉전정권 기간을 통하여 영남패권집단이라는 주체가 일어나 자신의 기득권을 틀어쥐기 위해 지역간 불균형 구도를 인위적으로 제도화해 왔음에 기인한다라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대립하는 두 주체(한나라당 플러스 열우당 vs. 민주당)가 지역이기주의를 놓고 대등하게 대결하고 있는 양상이 아니라, 패권세력이 약소세력에 대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있는 불평등 현실에 대한 외면이다.

그에게는 각각의 지역 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힘의 차이가 정치판에서 보이는 지역주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영남과 여타 지역이 똑같이 이기주의자라는 점에서 거기에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타파의 대상인 점에서 완전히 평등하게 보인다는 거다. 하나는 패권적 지역주의자이고 하나는 생존을 위한 방어에 나선 형국이라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 둘을 싸잡아서 똑같이 지역주의자 나쁜 놈이라고 매도한다면 거기엔 한 조각 정의가 들어설 틈이 없다. 이것은 영남패권세력이 아직도 철벽처럼 버티고 선 채 사회의 모든 개혁을 사사건건 거부하는 주체라는 현실 분석이 실종된 인식인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권의 부조리 현상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치패러다임을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판갈이를 하기만 하면, 지역이기주의에 기대는 그들 소수 정치권력이 퇴출되면서 자연히 한국의 정치는 이제 전혀 새로운 시대를 구가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라는 나이브한 주장을 그가 하고 있는 거다.

그는 '정책과 이념'이라는 패러다임으로의 정치권 판갈이 문제라는 게, 우리가 이제까지 그것의 필요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완강히 막아서는 영남패권세력의 존재 때문에 늘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그 엄연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철벽이 막아서고 있는데 그것을 부수거나 뚫지 않고 어떻게 그 너머에 있는 파라다이스에 닿겠다는 것인가? 한국의 대표적 진보지식인 홍세화의 지역주의 인식이 이토록 낭만적인 수준이라면 한국의 자칭 좌파일반의 생각은 과연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지 대단히 궁금해진다.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유보다는 평등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념으로서의 진보주의를 표방하려면 우선, 우리 사회의 이른바 사회적 마이너러티(소외층)가 생성된 <역사적 과정>을 왜곡없이 정면에서 바라보고 정직하게 진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의 마이너러티가 산업화 과정을 통하여 희생타로서 발생한 노동자/농민이라는 소외계급만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역대 군사독재정권들의 지역차별 정책에 의해 대규모로 발생시킨 수백만의 호남대중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인하지 않는 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소외층은 계급적 요소 하나로만 설명되지 못하고 계급적 요소와 지역적 요소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가 진보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그 길을 트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먼저, 이 나라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과연 무언가에 대한 성찰이 좀 더 치열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홍세화를 포함한 일반진보좌파들이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진단하듯, 레드컴플렉스와 같은 보수적 사고가 진보의 의회진입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리만 계속 할텐가? 결코 그 까닭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진보진영의 한국 지역주의에 대한 진단과 인식이 영남패권주의자들과 동일선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보수/좌파를 표방한 자로서 영남패권주의를 똑바로 질타하는 지식인이 이 땅에 겨우 한 손 안에 꼽힐 정도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민주당 지지자 중엔 수많은 반영패자가 있는데 반하여 왜 노동당 지지자 중엔 그리도 귀한 이유가 과연 무언가! 계급론적 인식은 한국의 지역패권주의-, 약자를 억압하는 기제-를 그저 무로 돌려야 할 만큼 유일무이한 사회 인식체계여야만 하는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지역주의를 이념과 정책이 빠진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종속변수> 쯤으로 치부하는 한,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구와 극우가 여지껏 득세하며 신자유주의의 광포한 파고에 서민과 기층민이 온 몸을 내맡겨버릴 수 밖에 없게 된 현실이 근본적으로는 영남패권주의라는 <독립변수>에 의하여 생성되고 구조화된 사회체제 때문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그리고 강고한 영남패권과 분명하고 확실한 대립각을 세우는 용기가 없는 한, 우리는 그 정당을 가르켜 진정한 진보라 이름 붙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사회 제 분야에서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영남패권을 정면에서 제대로 질타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오히려 패권에 맞서고 있는 사회의 절대 약자인 호남민에게 호남지역주의자라는 딱지나 붙이고 있는 진영을 진보좌파라 불러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정녕 사이비 진보일 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주의자들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호남주민이 민주노동당에 18%의 표를 던졌던 사실의 의미를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될 줄 안다. 호남은 진보라는 뿌리를 내리기 좋은 옥답이다. 왜냐하면 호남은 사회적 소수집단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의 존재 의의를 사회 약자들간의 연대와 이들의 권익 확장에서 찾고자 한다면 진보좌파들은, 약자를 억누르며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원흉인 영남패권주의 혁파를 제일의 시급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패권에 대항하는 세력은 당연히 진보를 지향하는 것이고 패권에 눈감는 세력은 사실상 진보를 훼방하는 반동집단에 다름 아니다.

이 나라의 진보좌파는 낭만주의적 지역주의 접근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라! 낭만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기만적이라고 해야 할 그 인식으로부터 이제 그만 벗어나라.

[심층분석] '원칙과 소신'의 이미지, 노무현 실체해부

 

영남 위해 호남 소외시키는 신당창당은 국민사기극

 

 

개혁과 상식

 

한 사회의 총체적 개혁이란 화두는 민주주의를 오래 경험한 사회에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우리와 같이 변혁기나 과도기에 있는 사회에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 무언가 바로 잡아야 할 가시적 문제가 사회의 발전을 오랜 기간 가로막고 있어 그것을 고치고 치우는 대대적인 작업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대상은 굳이 분석이 따로 필요할 만큼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를 몰라서 개혁을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함으로써 손해를 입을 기득계층의 강력한 저항책동에 눌려 못해 왔을 뿐이니까요. 이 시대 이 사회의 '상식'에 반하는 낡은 제도와 관행과 사고방식이라면 그 분명한 대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개혁을 하는데 정치 공학을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걸림돌입니다. 온갖 술수의 개입 여지가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큰 틀은 매우 단순하고 정직해야 하며 상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치적 환경 조건과 정치 세력간의 타협의 산물로써 개혁의 밑그림이 기초된다면 거기에 설사 거창한 철학적 이념을 담았다고 떠들더라도 정작 개혁의 수혜자가 될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이익은 고스란히 빠지고 그것을 기획한 소수 정치집단이나 기득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일입니다.

 

 

주체

 

그럼 개혁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그 시대의 변화를 갈망하고 그간 기여해왔던 '시민 일반이 주체가 되고 그들의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소수가 그것을 수행하되 매번 시민의 동의와 추인, 그리고 시민 단체의 감시 속에서 투명하게 시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정치권력이란, 선거를 통하여 정당하게 쟁취한 지지세력의 권력으로서 선거에 패배한 시민군()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지는 우위의 힘을 말합니다. 권력을 잠정적으로 위임 받은 정치인 그룹이 홀로 개혁의 주체가 된 양 착각하여 선거 결과에 의해 새로 짜여진 권력의 구도를 깨면서 전횡하고 멋대로 오/남용하는 일이 생기면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그때는 시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깊은 좌절의 한숨이 토해지고 있습니다. 허탈감 위에 얹힌 분노, 혹은 아예 시나브로 체념이나 냉담으로 젖어드는 분위기가 매우 심각한 현실에 있습니다. 노 정권을 창출한 지지자층의 민심 이반입니다. 한편, 아직까지 남은 노무현 지지파의 낙관은 저들의 한숨을 상쇄하고 덮겠다는 듯 가성의 헛웃음을 드높이기도 합니다. 그들 모두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희망과 신념을 공유하는 동지였고, 굳게 결속한 한덩어리 알짜배기 노무현 지지자들이었단 말입니다. 헌데 작금에 와서는 서로 제각기 흩어져 분열하고 대립까지 하는 지경에 와있습니다.

 

 

의문

 

이런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집권 신정부와 민주당은 숫자 놀음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내건 구호는 참으로 그럴 듯하여 명분상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름하여 지역구도 타파 정치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젠다야 말로 이 사회의 절체절명의 과제를 요약한 것으로서 자못 신성하기까지 한 역사적 당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구도 타파 개혁이 웬일인지 개혁정당 창당과 동의어가 돼 있습니다. 왜 그 둘이 일란성 쌍둥이로 취급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창당의 방식의 조율만이 관심일 뿐, 왜 창당만이 선택이며 다른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인지, 그 작업이 과연 지역구도 타파의 과업을 이뤄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관심 밖인 듯합니다. 왜 우리는 정치인이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걸 잘 알면서도 막상 그들이 벌여놓은 논쟁에는 뒤늦게 뛰어들어서 그냥 휩쓸리고 말까요? 그들의 논의 자체가 정치꾼들의 엉터리없는 수작인지의 여부부터 검토하는 것이 경제적인 일 아닐까요?

 

정치 개혁이라는 귀한 사업이 정치권력을 위임했던 유권자군()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스스로의 사적 이익만을 탐하는 소수 정치꾼들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철학과 목적과 자격이 모두 의심받을 투성이인 사람들이 주도하는 개혁신당 추진은 알고 보면 오직 자기네 편 세불리기만이 지상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와 암투와 술책의 당권 헤게모니 쟁탈전을 그들은 정당 개혁이라고 큰소리치면서 포장합니다. 11초가 아까운 이 귀중한 집권 초기에 민생 현안을 내버려 둔 채 5개월(신당논의 시작으로부터)을 질질 끌어오고 있고 아직도 분명한 가닥조차 잡히지 않은 신당 헤게모니 암투가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른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전국 정당으로 태어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요. 이것이 과연 정당한 명분인지부터 마구 의심이 갑니다. 스스로가 지역 정당이라 칭하며 그만 벗어나고 싶다는 건데, 이것이 비하인지 아니면 정말 대의를 위하고 나라의 건전한 정치 발전을 위한 고뇌의 고백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비하라면 더불어 자신의 지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이죠. 정녕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면 국민의 동의는 얻어냈는지 모르겠군요. 전국 정당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는 무엇입니까? 각 지역에 지지자가 골고루 분포하는 게 소망스럽다라는 겁니까, 아니면 국회의원을 각 지역에서 골고루 내는 것이 국민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는 겁니까? 전자는 어차피 억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므로, 문제는 후자일 뿐인데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습니다. 전국이란 말이 지역이란 말보다 이미 우위의 가치라고 보는 일반의 믿음에 우리도 속고 있는 겁니다. 사실상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의 우열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집권당이 전국 정당이 아닌 지역 정당이어서 손해 보는 국민이 있으니 안 된다는 말입니까? 어느 지역의 주민이건 자기가 선호하는 정당은 있는 것이고 지지한 정당이 집권을 하면 득을 볼 것이요 야당으로 남으면 다음 선거를 기약하며 기다릴 일입니다.

 

 

기만

 

각 지역의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각각의 특성을 안은 채 오랜 세월을 두고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전국 정당으로 변모를 시키려면 각 지역의 정치 성향에 딱 맞는 후보군을 골라 각 지역에 내보내야겠군요. 이것을 가능케 할 정당의 이념과 정강은 좌에서부터 우까지를 통째로 아우르는 짬뽕 정당을 지향하겠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정체성으로 전국 정당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웃음거리겠지요. 그래서 위장합니다. 정당의 이념과 지향을 필요 이상 선명하게 색칠합니다. 그리고 속내로는 수구집단에 이제껏 부역해온 정치꾼을 '개혁 성향' 의원이라 거짓 단장시켜 영입합니다. 그로써 지역을 넘어서는 전국적 정당이 되는 양 선전하겠다는 기만적 전략을 사용합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민주화 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한 공을 무시할 없는 특정 지역 출신 의원들을 상종 못할 개혁대상 '부패정치인'이라 몰아부치고 정리함으로써, 자리바꿔 탈 신당의 호남 색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탈색시키면 영남 보수층에게 표를 얻어내기가 매우 용이해지리라는 전략을 차용합니다.

 

보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는 유권자들에 의해 당선된 위장 개혁 정치인이 개혁을 외치며 민주당의 의원으로서 펼치는 의정활동을 하고 당의 표면적 정강을 따른다고 해서 개혁적일일까요? 유권자의 이익을 좇아 보수적일까요? 귀신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영남지역에서 표를 얻어 소위 전국 정당이 됨으로서 달라지는 것이 뭡니까? 정권에서 소외된(?) 영남인들을 위로하겠다는 것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군요. 양식있는 영남 유권자들의 자존심을 유린하는 일입니다.

 

 

토사구''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배역 행위, 즉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개혁성향의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을 과감히 발로 차버리는 행위 등이 모두 이들 개혁정당 주도층의 면밀한 정치 역학 분석에서 나온 창의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의심없는 정치적 자살 행위로서 극도로 회피되어야 할 이 패악질이 버젓이 이 나라의 집권 정당의 정치 개혁 전략으로 공공연히 용인, 합의되고 맙니다. 호남의 민주당 지지자들이야 하늘이 내려 앉아도 한나라당으로 갈 수 없는 결국 오도가도 못하는 붙박이 민주당 표인 셈인데, 그렇다면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호남의 지지자들은 좀 희생되어줘야만 하겠다는 교만한 사고 말입니다.

 

무릇 자신이 지지하고 선출했던 정치인이, 정당성이 결여된 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 강제로 퇴출되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그 지지자 개인의 소중한 정치적 선택과 권리가 깡그리 무시당하고 빼앗기는 인격적 강간의 경험입니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기대는 누구한테 담아야 하나요?)

 

그것이 영남지역의 의원자리 몇 개를 건지겠다는 목적 때문에, 수구적인 영남 유권자에게 아부를 할 기반 조건 형성으로써 강제적으로 치러야 하는 댓가라면 소위 '개혁 대상' 의원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대로 영남패권주의 정치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걸

 

개혁 신당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영남표 '빌어먹기'입니다. 개혁의 실체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정당하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절차를 아예 상정하지 않고 (호남의원 퇴출 후) 탈호남당이라는 '이미지 조작' 하나로, 영남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아예 저급한 수준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역감정에 감성적으로만 파고들기만 하면 스리슬쩍 몇 개의 의석은 건질 수 있다는 셈본하의 치졸한 모사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영남 유권자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불과합니다. 표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영남의 양심적 유권자들의 갈망도 이 지역패권주의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겁니다. 이렇듯 개혁의 실체는 완전 실종입니다. 실로 개혁의 대상자들이 스스로 개혁 주체라며 주제 모르고 날뛰는 겁니다.

 

 

가짜명분

 

이들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강변합니다. 소위 "내년 총선에서 기필코 승리해야지만 그 의회 의석수를 기반으로 비로소 노무현 개혁의 실질적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대도를 올곧게 걸어가는 도정에서 마주치는 온갖 방해 공작과 잡음은 개혁의 완수라는 대의 쟁취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시할 수밖에 없는 소소한 장애일 뿐이다. 그만큼 내년 총선의 승리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명제다." 개혁의 이념과 목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농락하는 뒤틀린 개혁 주장입니다. 개혁정신을 깨부수며 사술을 동원하더라도 총선 승리만 하면 개혁은 천사의 모습으로 도래하리라는 기대의 자가당착 논리입니다.

 

이들 정치인들의 논리가 그 형식에서마저 얼마나 빈약하고, 그 철학적 사고의 수준이 얼마나 바닥인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말을 정확하게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겐 원래 인격과 실천 '합일적인' 철학과 논리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로지 권력 쟁취와 자신의 기득권 유지만이 그들의 관심의 전부입니다. 모든 행위는 그것에의 봉사입니다. 그들로부터 인간적 선의나 고매한 인격을 기대하는 건 순진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정치 행위라는 성질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실천 주체로부터 인격의 분리를 일정 부분 강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질

 

한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아젠다는 서로 적대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그 관계마저도 항구성을 띄지 않고 상황과 시간 변화에 따라서 변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대립적인 정치적 의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타협이라는 조절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합니다. 결국 타협이란 기술은 그 정치인의 인격 합일적인 철학과 거리를 둔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타협의 기술이 빼어난 정치인일수록 인간적 격과 정치적 격은 더욱 이중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권력욕이 남다른 정치인일수록 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만큼 그들의 정치적 행위의 진정성은 시민들에 의해 의심(suspect)받아야만 하고 다시 면밀히 검토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시민은 늘 그들의 봉노릇 밖에 못합니다.

 

지역주의 타파 정치 개혁의 허구, 그 속임수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우선 지역주의 타파란 구호 자체부터 유령입니다. 지역주의란 정의부터 실체가 없고 기껏해야 왜곡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편중된 지지분포''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인 양 둘러댑니다. 사실상 정당 지지의 지역적 편중이 상당 부분 지역이기주의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촛점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인 중 그 누구도 지역구도에서의 수혜자임을, 아니 그 편승자임을 부인한 채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나서서 매스를 들이댈 자격을 갖춘 자는 이 나라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돌팔이

 

'타파'란 제삼자인 의사가 칼을 들고 인위적으로 벌이는 외과적 처방입니다. '극복'이란 내적 성찰과 반성을 통한 방법입니다. 지역주의란 오랜 시일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결과물인데 그것을 단번에 타파한다며 정작 그 환경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커 온 정치 자영업자들이 의사 가운을 하나 훔쳐 걸치고 외과적인 수술로 쉽게 뚝딱 고치겠다고 나선다면, 신중하고 올바른 진단은 고사하고 결국 사람을 잡겠다는 짓이 됩니다.

 

 

원론

 

이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열망하는 깨인 시민을 한 사람이라도 상처주는 거짓 정치 개혁이 용납되어선 안됩니다. 정당 지지의 지역 편중을 극복하는 길은 어디까지나 정도로서 바르고 정직하게 가야합니다. 정당의 정체성과 이념을 훼절시키지 말고 국민 앞에 약속한 그 정강에 충실한 정책을 개발, 추진하므로써 자발적 지지자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 우리와 같은 왜곡된 정치 환경에서는 정치인들의 내적 자기 변혁을 위한 성찰과 반성을 살짝 보이기만 하여도 감동먹은 지지자가 자연스레 모이게 돼있다는 말입니다.

 

 

영남

 

물론 이런 원론적 설교가 지금 얼마나 한가하고 부질없는 일인지는 이들의 정치적 인격을 들여다보면 바로 깨달아집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지지받는 정당으로의 거듭남을 거론합니다. 그러니까 호남유권자를 주 기반으로 하며 영남유권자로부터 외면받는 현 정당 정치 구도가 잘못 되었다고 규정하는 겁니다. 한 지역이 자기네 당을 너무 열성으로 지지해준 것을 잘못이라 보는 겁니다. 그들 유권자들의 선택의 진정성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한마디로, 호남지역 주민과 민주당 지지층은 지역감정의 표현으로써 민주당을 지지한 것이니 가치가 없다는 규정입니다. 그들 유권자의 표에 의해 의원직을 받은 자들이 유권자의 진정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또 영남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도 비정상이니 이번엔 그 지역 유권자의 입맛에 맞는 수구 정치인을 그럴듯하게 포장시킨 뒤 내세워 지지를 호소하겠다는 겁니다. 영남표만 얻으면 지역주의 정치가 타파된다는 궤변입니다.

 

 

 

수구적 성향의 영남유권자에게 쉽게 먹혀 들어갈 수구인사를 영입하여 당선시키고 그들과 함께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이 뻔한 모순 논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며 국민을 설득하겠다고 하니 그 저급성에 절망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 논리를 정치 개혁이랍시고 갖다 붙입니다. 개혁에 목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대신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코드를 맞춰 개혁을 가열차게 추진하자고 주장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머리 나쁜 사기꾼들입니다. 이들이 떠드는 전국정당으로의 재편과 정치 개혁과는 일말의 관련성도 없습니다.

 

 

경고

 

지금 노 정권의 개혁처럼 목적과 비전도 내놓지 못한 채 고작해야 내년 총선 승리만을 지고의 선으로 설정한 개혁 추진은 개혁이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는 몰상식이요, 진보적 시민 사회와의 약속에 대한 반역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정치 실험은 지지층의 좁은 선택의 폭(alternative)을 볼모로 잡은 게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자기의 정치 생명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정정당당하게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지를 보세요. 최소한 영남표를 얻으려거든 영남의 수구표를 얻으려고 구걸하면 안됩니다. 유권자의 수구적 입맛, 체형에 딱 맞는 맟춤형 후보를 내세워 일단 의원만 만들면 그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전위대가 될 거라고요? 이치에 맞는 말을 해야지요. 한 마리의 국해의원(國害蟻猿)만 더 생산하는 겁니다. 표를 얻으려면 영남인의 개혁표를 얻어야 합니다. 똑 부러지게 개혁적인 인사를 찾아내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유권자를 감동, 설득하여 의원을 만들 경우 그가 개혁의 일당백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그럴 신념과 의도가 전혀 없으면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보겠다는 작태를 당장 거둬들여야 합니다.

 

 

몸통

 

개혁 신당을 출현시키겠다는 설계 오케스트라단의 단장은 누구입니까? 이 정권의 총체적 수구 행로로의 노선 변경 결정 주체는 누구입니까? 놀랄 일도 없이, 노무현입니다. 그의 보좌관 유인태, 문재인, 아니면 최측근 인사 이강철, 이강재, 아니면 신주류 삼인방 신기남, 정동영, 천정배 등을 거론할 수 있다고요? 그들은 노무현의 수족일 뿐입니다. 개혁 신당 창당의 논의와 진행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통하여 그의 의도와 구상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친구

 

그의 수족들이 무얼 믿고 이렇게 무리한 사기 행각을 감행하려 할까요? 노 대통령과 코드를 맞췄다는 확신에서 온 건방이 큰 부분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노 대통령과 민주당 신주류가 한 통속으로 어우러지는 코드가 적어도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편견이고 하나는 무모입니다.

 

 

커밍아웃

 

528일 노 대통령이 말합니다. "제도를 개편하든,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 결과적으로 어느 한 지역에서 어느 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독식하지 못하도록 또는 독식하지 않는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중략) 이 지형 위에선 제가 다수당 위에 있더라도 지역의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이 발언에서 그의 사고 방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석합니다. 1) 현재 한 정당의 3분의 2의 의석을 한 지역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현상인데 이것을 고치려면 제도 자체나 정당의 구조 개편이 있어야 한다. 2) 나는 영남의 표를 얻지 못했으므로 그 지역의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에는 흠이 있다고 느낀(인정한). 노무현의 사고의 핵심은 2)의 발언에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코드는 신주류 개혁신당파 등이 정확히 공유하는 인식입니다.

 

 

편견

 

"제도를 개편하든"이란 말 속에서의 제도는 중앙집권의 완화, 지방분권 강화와 같은 제도와 환경의 동시적 개선이 아닌, 미국식 간접선거 제도와 같은 근본적 대안을 염두에 둔 것인 듯 보입니다.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인단을 각 주에 두어, 그 주에서 한 정당에 대한 100%의 지지표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 표가 그대로 카운트되지 못하고 일정하게 제한된 선거인단 수밖에 가져가지 못하게 돼있는 제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51%의 지지나 100%의 지지나 아무 실질적 차이가 없는 제도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는 얘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2)의 발언(해석)과 연결해서 그의 인식을 분석해 봅니다. 호남지역민이 몰아 준 표에는 나름의 편향성과 당파성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인정되므로 그들의 표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고있다라는 인식의 표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그의 발언이 대통령 선거에 관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막바로 통하는 의미의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국회의원 선거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결국은 대통령 선거의 문제점과 접목시켜 거론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가 미국식 간접선거를 심각하게 고려해본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도를 개편하든"이란 발언은 그 뒤의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의 주장을 위한 의미 보정일 뿐입니다. 당연히 주장의 요점은 뒷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 방식' ('인식'보다 더욱 근본적인 그의 철학적 기조)을 엿보게 되는 곳은 오히려 앞머리입니다.

 

(이러한 말의 해부 작업이 어떤 이에겐, "말장난이다", "발언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다"라는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더구나 발언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직위에 있고 또 정식 인터뷰(한겨레 신문)에서의 발언입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지역주의를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남표의 의미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는 일정부분 지역주의의 소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로 표현된,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와 갈망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설사 지역주의의 개입의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표의 의미와 가치를 내리 깎겠다는 발상은 유아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의 표현입니다. 결국,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한 표 한 표의 의미를 축소하므로써 자신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 그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갖는다는 자가당착이 됩니다. 위에서 보듯, 사실상 그는 그 콤플렉스를 적나라하게 입으로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편견은 이것입니다.

 

"호남표의 일부는 DJ에 의존한 지역주의 표이므로 그 진정성을 다 인정하진 못하겠다. 같은 지지표라도 호남표와 타 지역인의 지지표의 의미는 다르다."

 

 

사도(詐道)

 

그의 발언에서, "제도적으로라도 3분의 2의 몰표 현상을 막고는 싶다"라는 열망이 깊이 배어납니다. 현실적으로 꿈도 꾸기 어려운 제도 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못내 아쉬워하며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중심을 환경 개선 쪽에 놓습니다. 환경 개선을 하겠다면 현 환경의 생성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의 현상만 보고 무조건 개혁해야 한다는 접근법입니다. , 현행 제도 하에서는 몰표를 막을 수 없으니 몰표가 못나오도록 막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의 상정 자체로써, 환경 개선의 문제가 원론적으로는 어느새 '제도 개혁'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정공법은 피해야만 하겠기에 결국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방법을 쓰겠다는 것입니다. , 몰표가 나오는 지역의 표를 조금 거두어들이고 아예 표가 안 나오는 지역의 표를 얻어내는 원천적인 방법을 도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 목적을 이루겠다는 것인가요? 두 지역민들을 서로의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아니면 표가 안 나오는 지역민들에게 아부하는 것 밖에 더 있을까요? 아부의 방법으로써, 탈호남당의 이미지로 변모하여 얼굴을 내밀겠다는 겁니다. DJ의 이미지만 벗으면 표가 절로 굴러 들어오리라는 기대입니다.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경우, DJ를 높이 외치면 자신의 태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과오보다 공적이 적지 않은 DJ, 영남인으로서는 기피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동의해주는 부도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자칫 하다간 호남 쪽에 그릇된 점이 많다라고 몰아부치는 형국이 됩니다. , DJ는 놔두고 탈호남만을 외치려니 공허하게 들리고 마는 점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영남인들의 선택 취향에 딱 들어맞는 후보를 물색하려니 역시 수구성향 정치꾼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간 개혁의 이미지를 다치게 되므로 안 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딜레마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사술(詐術)의 동원 밖에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 계속 모르게 감추고, 잘 못보고 있는 다수의 사람에게는 사기를 치는 겁니다. , 어차피 표만 얻으면 끝입니다. 우선 탈호남 이미지로의 변신에 필요한 명분 획득을 위하여 개혁의 구호를 드높이 외칩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인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둘도 없는 개혁의 전사인 양 비장미까지 띕니다. 자신의 순수한 피를 돋보이게 하려니 희생양을 마구 잡는 일도 필수입니다. 수구인사를 영입하되 개혁의 일꾼이라 선전합니다. , 여기까지가 작금의 신당 창당 논의가 연출해낸 작태입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시나리오

 

향후 시나리오입니다. 영남인들에게 향한 본격적인 아부와 선물 공세만 남았습니다. 선물이란 딴 게 아닙니다. 호남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극적으로 시위하는 겁니다. 호남당이 아니라는 이미지만 반복하여 심으면 영남표는 다 잡을 수 있다라는 계산은 끝났습니다. 영남인의 지역감정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호남인의 정치 헤게모니를 용납하지 못하는 다수 영남인들의 정서를 만족시켜야만 합니다. 당연히 당의 주도권을 영남인이 잡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남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요설로 명분을 꾸며야 합니다. 총선에서 수구꼴통 한나라당을 누르고 기필코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선전합니다.

 

 

저항

 

다시 한 번 호남이 술렁거릴 것은 뻔합니다. 부당한 방법에 의해 농락당했다고 느낄 호남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항의는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됩니다. 호남이 조금 양보하면 된다는, 명분 선점 여론몰이를 합니다. 호남만 조용하면 나라가 조용해진다는 호소도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사태에서 호남이 잠자코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지나친 낙관론자입니다. 지역감정이 아직도 이 사회의 정치 환경에서 그 영향력과 결정력이 가장 강력한 인자임을 자칫 부인하다간 큰 코 다칩니다. , 이렇게 나라는 총선이 가까와 올수록 지역감정 논박의 초특급 회오리에 휘말리게 됩니다. 민생은 뒷전에 이미 쳐박혀 있습니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 난국을 맞지 않는다 자신할 수 없는 전망입니다.

 

 

오산

 

여론 조사에서 보입니다. 민주당을 신장개업하는 것과 민주당을 허물고 신당으로 나올 때 영남인들로부터 받는 지지차는 20%이상이라고 합니다(28일자 오마이뉴스). 저항에 부딪혀 표현을 자제하고 있지만 신주류는 무척 고무돼있을 것입니다. 대세라며 밀어붙일 기회를 쉽게 접지 않을 것입니다. 신구류주간의 갈등 양상은 언제나 임시 미봉에 의해 잠시 덮어지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겠지만 어느 한쪽이 확실한 헤게모니를 쥐는 그 날까지 분란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론 조사 결과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자의적으로 자신에게 이롭게 해석합니다. 그때 그때 일희일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닥칠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 조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여론 조사의 질문 자체를 현 싯점에서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여론조사와 아무 상관없이, 지금의 개혁신당 논의가 정의에 반하는 기만과 협잡에 의한 것임이 점차 확연히 드러나고 반드시 저항에 부딪치면서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결국 국가적으로만 적잖은 희생만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것의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노무현이 집니까? 신주류 3인방이 집니까? 시민 전체가 큰 상처와 불익을 이미 받았는데 누가 책임을 진다고 하여 보상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원인에 대한 규명 회피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겁니다. 단지 지역구도 뿐만 아니라 그 모태가 되는 이 나라 정치의 파행의 긴 역사에는 영남패권주의라는 암이 그 최기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그렇게도 죽기보다 듣기 싫고 지겹고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대선에서의 영남을 제외한 전국적인 노무현 지지와 호남 몰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개혁이지요. 무엇을 개혁하자는 건가요? 개혁의 순위에서 상위에 놓인 것이 바로 '영남패권주의' 타파입니다. 소위 신지역이기주의로 어떤 득을 챙기겠다가 아닙니다. 다만 '차별받기 싫다',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라, 이겁니다.

 

-지역주의자

 

대선 결과에서 보듯이 차별에 대항하는 의지는 자발적이고 개별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무슨 작당이나 한 것처럼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열망이 호남인들에게 그토록 사무치게 간절하지 않았었다면, 다른 모든 상대적 우위의 조건과 자질들을 인정하더라도 노무현의 인기가 그 정도로 하늘을 찔렀을 거란 추측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신지역주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파렴치입니다. 이 점에 대한 성실한 분석과 고찰이 노무현에겐 결여돼 있습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둔 우리는 영남중심(패권)주의를 영원히 땅 속에 묻어버리는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무리였습니다. 나는 그를 '영남패권주의자'라고 확실하게 규정합니다. 질이 나쁜 골수 지역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영남패권주의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한 사람입니다. 증거는 위에 진술한 대로입니다. 개혁의 화신이 알고 보니 지역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영남패권주의의 피해자는 호남인만이 아닌 전 국민입니다. 심지어는 영남인도 피해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고 방식은 인간의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상식을 기초로 하는 가치체계의 굴절과 불연속이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인종차별과도 같은 지역차별은 시공을 뛰어넘어 범죄라고 규정되어 마땅합니다. 이것은 상식이 아니라 명제입니다. 상식 이전의 명제마저 서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마저도 논란거리고 싸움거립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끝없는 소모전이 진행되고 결론은 영원히 없습니다. 당연히 합리적 사고, 과학적 사고가 설 수 없고 인간관계 마저도 불신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잴 수 없는 크기로 우리 모두는 손해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끊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노무현의 실체를 알고 너무 절망했습니다.

 

지역주의 구도는 이렇게 영남패권주의가 위세를 떨쳐왔던 역사적 조건 속하여 형성되어 왔습니다. 이 구도를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공법으로 가야합니다. 노무현이 가는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돌이켜야 합니다. 노무현의 길은 나라를 진흙구덩이에 다시 한 번 쳐넣는 길입니다.

 

 

영남에 대한 배려를 냉정하게 단념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느 지역이 됐건 특별 배려를 다 끊습니다) 이어서 가시적인 개혁을 수행해 나갑니다. 이 경우,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과 지역에게는 자연스레 불이익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차별함으로써가 아니라 개혁 정책에 의해 발생한 이익과 혜택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로서 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방식입니다.

 

 

원칙

 

 

개혁은 개혁을 원하는 자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자만이 자발적으로 개혁의 대오에 동참하는 법입니다. 개혁이 싫다는 자에게 무언가를 도와 달라 호소한다고 해서 그들이 도와줄 게 있겠습니까? 아부, 호소가 아니라 당당하게 설명하고 나면 그 뿐입니다. 개혁을 하므로써 그것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이제까지 기득권을 향유해온 부류일 겁니다. 만약, 약자가 개혁에 의해 또 다시 불이익을 겪었다면 그 개혁은 크게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은, 기득권자가 조금 손해를 보고 음지에 있었던 자가 제 몫을 챙기는 사회구조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기득권자의 이익은 절대 훼손하지 않으면서 중산층과 서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요? 그렇다면 그 개혁은 거짓입니다. 그런 철학에 바탕을 둔 개혁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개혁은 불합리를 합리로 고치는 작업입니다. 무엇이 합리이고 무엇이 불합리인지 분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한 가치 체계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회는 상식이 있으되 흐리멍덩하고, 더구나 통용되지 않아 왔으므로 이제부턴 상식이 보증을 받는 관례를 시행해 나가야 합니다. 상식을 거스르면 그만한 댓가를 치루도록 만드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식이 무언지 비로소 분명히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합리의 사회로 만들었을 때, 손해 봐야만 할 자는 손해 보도록 놔두는 것이 정의입니다. 개혁은 이러한 철학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기본 원칙입니다.

 

 

의문

 

그런데 노 정권은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습니까? 원칙이 서있다면 실천하고 있습니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본질은 허위의식입니다. 아직 개혁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누가 그럽니까? 수구와 보수언론이 사사건건 발목 잡고 믿었던 지지자마저 집단 이기주의로 정권의 힘을 빼고 있다고요? 노 대통령의 개혁의지는 확고한데 참모들이 띨띨하다고요? 노동계와 공무원 노조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하여 국정 수행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니 어느 틈에 개혁의 돛을 올릴 수 있었겠냐고요?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음를 느낍니다. 그의 철학과 이념적 성향과 실천적 노선의 실체를 알 때 우리도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탐구

 

이제 잠시, 위에서 거론한 개혁정당 출범 논의의 내용과 같은 노무현 정권 출현 후 일어난 모든 정치적 행위와 결정들이 왜 일관되게 수구적 노선을 ( 촛불행진 자제 발언, 수구적 인사의 중용과 영남 출신 편중 인사, 대북송금 특검 수용, 논의를 차단한 이라크 파병 결정, 전교조 반미교육 제재 지시, 실리 없는 숭미 발언으로 국민의 자존심 짓밟기, 햇볕정책의 실질적 파기와 남북관계 급속 경색,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한미공조라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 하나로 대체해놓고 대미 외교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 재벌개혁의 연기, 수도권 지역 아파트 값 상승에 손 놓고 방관하기, 한총련 검거 지시와 5.18묘역 '난동자' 낙인 발언, 초법적으로 네이스(NEIS) 시행 밀어 부치기, 수구지역 주민 끌어안기 목표의 소위 개혁신당 구상과 지원... ) 견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노무현의 정치적 정체성은 무언지, 정치 철학은 무언지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기간이 매우 짧아 인권 변호사로 활약한 80년대 초중반의 사회활동을 빼면 처음 국회에 진출한 해에 있었던 5공 청문회 명패 사건, 903당 합당 반대 선언과 의원직 사퇴, 연이은 부산 지역구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 출마와 낙선 (98년 종로구 보궐 선거 당선 포함), 그리고 진보 개혁 성향의 시민과 노사모의 지극한 성원을 등에 업고 나선 국민 경선에서의 부상 이변 연출과, 대선 기간 중에 보여준 개혁적 발언들이 분석 자료의 전부랄 수 있습니다.

 

 

원칙과 소신

 

제조된 이미지는 '원칙과 소신'이었습니다. 원칙과 소신 중 하나만 뚜렷해도 정치인으로서의 자산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긍정적 이미지는 늘 상승 작용을 불러오기 마련이어서 일반 지지자들은, 그 둘을 하나로 결합까지 시키려는 열혈팬들의 요구에 기꺼이 동의하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원칙이란 이미지는 3당 합당 반대 선언에서 보여준 올곧은 젊은 정치인의 인상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잇따른 부산 지역구 출마는 '원칙'이란 지향성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큰뜻(?)을 일찍이 품은 그의 정치 감각,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의 발로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의 부산 출마와 낙선의 과정은 원칙과는 상관없는 그의 어떤 결기에 가까운 것이라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서 화합의 정치를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로 노무현을 꼽으며, 그가 지역주의의 피해 당사자임으로 그것을 허무는데 최전선에 설 전사가 되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런 연상 작용은 심리적으로야 자연스런 연결이지만, 한 꺼풀 벗기면 지나친 비약임이 드러납니다. 지역차별주의에 맞서 얼마나 줄기차게 싸워왔느냐라는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역주의의 피해자임으로 곧 지역주의 타파의 선봉장이 될거다라고 건너 뛴 겁니다. 물론 이 예는 원칙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그의 사회 문제를 해석하는 시각과 철학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그의 원칙과 소신이란 이미지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 합니다. 요약하면, 그의 정치 활동에서 원칙과 소신이 늘 동인이 된 것이 결코 아니었음 불구하고 그의 팬들의 기대가, 기왕에 만들어진 그의 이미지에 시너지 효과까지 보태며 곧 노무현 실체인 양 일반에게 전해졌던 겁니다.

 

 

이미지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미지의 역할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치인의 행위에는 어차피 인격과 실천의 합일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연이은 낙선 사실이 웅변으로 증거하듯 그가 프로 정치꾼들과는 달리, 인격 합일적이며 비타협적인 정치적 선택을 할 때마다 정치판에선 늘 외면을 당해왔습니다. 이 나라와 같은 정치판에서 각광받는 생존 전략은 진실이 아니라 정략과 술수입니다.

 

 

정치판이란 속성이 명분 선점을 가장한 음침한 권력 싸움임을 알고 볼 때, 정치인의 하나인 그가 뚜럿한 명분을 획득하고도 뻔히 지는 싸움만을 매번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정치에 신물을 내는 시민 일반에게는 그가 정치인의 음습한 속성을 한 점 묻히지 않은 인격 실천 합일의 경이로운 천연기념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선택이 신선한 감각과 사고에 기인한 것을 부인키는 어렵지만 인격 전체가 터무니없이 미화되고, 사실상 관련이 적은 '원칙과 소신'의 화신으로까지 찬양된 배경에는 예술적 차원의 이미지 메이킹 역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내 정치인으로서 좀 더 긴 세월 동안 활동했었다면 더욱 많은 정치적 타협의 모습이나 말 뒤집기, 기만술, 술수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대선 전의 이와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는 필시 구축되지 못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원내 활동을 짧게 한 덕에 대권을 잡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이미지 제조의 주역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지로 형성된 노무현을 우리가 그의 실체로서 착각한 부분이 오직 이것뿐이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결 론

 

지지자에 대한 노무현의 변절에서 보듯 시민 개개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철학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서있지 못하다는 의심이 듭니다. 가치관이란 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갈 수가 없는 법인데 그의 행동에서 읽히는 가치관은 그 토대가 매우 허약하다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난관과 같은 테스트를 견뎌 이기고 통과함으로서 타인에게 비로소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러한 면에서 철저히 검증받은 바가 없고 이제 와서 그러한 테스트 기회가 닥칠 때마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노무현이 실체 노무현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지 메이킹의 포로였습니다. 언론도 반성하고 여론 주도층도 반성해야 합니다. 아직도 그를 파악하는데 까지, 그래서 더 이상의 실망도 기대도 필요치 않을 싯점까지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그의 발언에, 행동에 나타나는 그대로를 가지고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조만간 정리가 되리라고 봅니다. 대선 전의 노무현을 가지고, 그는 반드시 돌아오네 마네 논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가 스스로, 대선 전에 알려졌던 노무현이 아니라고 말로, 행동으로 강변하는 마당에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며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입니다. 대통령인 그가 누군지, 그의 철학과 성향과 이념과 지향점이 무언지를 실증에 근거해서 바로 알아야 우리 각 개인의 정치적 포지션도 제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정권에 대해 효과적인 비판과 감시의 방법도 계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당신이 속은 것,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속을 것

 

"노무현지지자는 곧 개혁세력이다"

이 말이 대선 전까지는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틀린 말이 된다. 엄밀히 말해, 노무현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개인 '노무현'이 아닌 '개혁'이라는 이념을 지지한 것이다. 개혁이 빠져버린 노무현은 이미 노무현이 아니다. 개혁을 내팽개친 노무현을 아직까지 지지한다는 말은 개혁문제만큼은 더 이상 상관 않겠다는 말, 아니면 애초부터 개혁엔 관심 없었다는 뜻이다.

'인간 노무현'의 가치보다 '개혁'을 우위에 놓는 사람들은 인간 노무현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개혁을 운위할 자격이 없는 배신자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개혁과 동의어였던 인간 노무현을 살리는 길은 무언가? 아직도 노무현의 실체를 파악 못하고 있는 바보들과의 논쟁에 의한 설득이 통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개인 노무현''개혁 노무현'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에게 "현재의 노무현은 개혁이 아니다. 더 이상 개혁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지를 철회함이 마땅하다. 노무현이 이 엄중한 위기감을 깨달을 때만이 그를 개혁의 기치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득하는 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실체를 통찰하지 못하는 '인간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러한 논리성에 설득 당해 줄까? 아마도 이 논리를 이해할 사람이라면 지지철회를 이미 마친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고 개혁에의 희망이 다 물 건너 갔다고 단정하려는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물 건너 갔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

첫째, 노무현을 압박하여 개혁의 기치를 다시 들게 만들 세력이 부재한다.

둘째, 노무현은 원래부터 그의 지지자들이 믿고 있던 개혁마인드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 인간 노무현은 개혁의 표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세째, 노무현은 비개혁파 혹은 영남패권 마인드를 가진 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들을 모두 갈아 엎을 정치공학 차원의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줄기차게 말 할 것이다. 노무현을 믿어보자고. 노무현에 의한 개혁에 힘을 실어주자고. 대안이 있느냐고. 냄비기질 제발 버리라고. 이런 식으로, 진정한 개혁세력은 사이비 지지자라는 누명이나 뒤집어 쓸 것이다. 하지만 개혁 위에 인간 노무현을 얹어놓는 사람들이 걸어 갈 길은 뻔하다. 그들은 대선 드라마를 통하여 속았고 또 그렇게 계속하여 속을 것이다. 노무현이 사라질 때까지 속을 것이다.

대안은 위에서 말하였다: 현재까지 노무현의 실체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노무현지지자들의 생각을 확실히 깨부시고 바꿔놓는, 가열찬 논쟁에 나서는 것, 그것이다. 당분간은 그들이 개혁세력의 적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들의 애매한 노무현 온정주의를 냉철한 개혁주의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개혁이란 실체가 실종된 채로 남고 만다. 그들을 설득한 다음에 노무현을 '강제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노무현이 개혁을 스스로 단행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는 무망하다. (그는 개혁주의자가 아님을 알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시나리오는 거의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상황은 그것을 용인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거 문익환 선생같은 이가 있어 희생으로 제 몸을 던진다면 가능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노 대통령의 수구적 진로 수정은 실수인가 철학인가

노 대통령은 지금 5년 정권 로드맵(roadmap)의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 먼저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요즘 조선일보의 환호를 보세요. 각하니, 편집국 초청이니, 국가 질서 회복이니 하며 노 대통령의 수구적 행태를 엄호하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양 은근한 노비어천가로 고무하고 박수를 쳐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저런 짐짓 속보이는 짓을 하고 있을까요? 노대통령이 정말 장하고 이뻐서요?

아닐겁니다. 노 대통령을 길들이고 있는 겁니다. 프로파겐다입니다. 그들 신문의 독자에게 노 대통령의 혁명적일 만치 변모된 정체성을, 나발불며 선전해대는 겁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수구적 발언이 나오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그 사실들이 노 대통령의 정체성의 근본적 변신이라며 딱지(Labeling)를 붙여주는, 희화적이지만 겉으로는 엄숙하기만 한 제의(祭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혹여 장래에 노 대통령이 그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미리 강력하게 차단하려는 그 야비한 술수 말입니다. 그들의 올가미 씌우기 방법입니다.

노 대통령이 만약 개혁지향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경우가 발생했다고 칩시다. 조중동으로선 또 한번의 놓칠 수 없는 호기가 됩니다. 노 대통령이 이미 잘 못 계산하고 들여놓은 조중동과의 자연스런 '코드 맞추기' 회합이 이번엔 그를 윽박지를 수 있는 자료로서 조중동에겐 훌륭히 이용되고 말 것입니다. 변신의 귀재 어쩌구 하는 천박한 어휘를 다 동원하여 그의 노선 회귀를 또 한번의 용서받지 못 할 변절로서 규정하고 그를 수구의 이익에 부역하는 정권으로 기필코 잡아놓으려, 정책 결정의 고비 고비 마다 딴지를 걸며 괴롭혀 댈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여기가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 자신이 불러들인 함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자못 필요했을 정책수행의 수구화로의 편향은 나중 조중동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드는 악수로 돌아오고 맙니다. 더욱 더 노골적으로 우편향을 요구하는 조중동의 간섭과 협박을 노 정부가 버텨내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므로, 강력한 지지자들을 소외시켜왔던 업보를 가진 노 정부는 점차 조중동과의 협력 관계를 아예 정책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권의 안정과 안녕을 담보받는 길을 선택하고 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노 대통령은 더 훗날, 이러한 패착이 지지층의 자연적 와해나 이반, 그리고 강고한 극우언론의 발목잡기에 의한 것일 뿐 자신의 신념,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책임을 피하려 할 지도 모릅니다. 허를 찔린 공생의 함정, 그들이 놓은 악귀같은 덫에 걸린 불행이었다 하면서요.

그러나 정치인의 한 번 판단과 그 행위는 적어도 정치적인 이익과 그 반대급부를 무시한 채 실천되고 말았다 해서 책임을 벗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정치인의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정치의 기역니은을 인정합시다. 현재 우리 눈에 실착으로 보이는 정책 결정은 필시 노 대통령과 그 참모진이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고도의 정치 행위라고 규정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수구와의 공생의 댓가는 이토록 만만찮은 것입니다.

자신의 수구적 발언으로 지지자의 대거 이탈을 경험하면서도 한편 지금 당장은 조중동의 격려와 다둑거림에 자신의 깊은 한숨을 의탁해버리고 있을 노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야 가여운 마음이 아니 들 수 없지만, 냉혹한 현실에서는 이제 그가 쉬 발을 뒤로 뺄 수도 없는 형국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초심으로 되돌아 가려고 해도, 조중동의 하이에나 이빨에 한 번 발목잡히기 시작한 그가 운신할 선택의 폭은 대단히 협소해져버린 겁니다. 그들은 절대 노통을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비운이 현실로 나타나면 우리가 나서서 가열차게 싸워야 한다구요?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문제의 본질은 노 대통령에게 계속 남아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지금 '일관되게' 어느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를 검토하면 될 일입니다. 그 발걸음을 주시하다보면 그 때가 되었을 싯점에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노 대통령과 한편이 되어 조중동에 대항할 상황에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옵니다. 노 대통령이 필경 조중동의 품에 의탁해 있을 사태를 우린 결국 맞을 거라고 예측합니다. 치기어린 허튼 예상이라 웃고 마는 사람도 더러 있겠군요.

 

보십시오.

노 대통령은 취임 3개월간 지치지도 않고 간단없는 시리즈로 수구적 발언과 정치 행위를 일삼아왔습니다. 촛불행진 자제 발언, 수구적 인사의 중용과 영남 출신 편중 인사, 대북송금 특검 수용, 논의를 차단한 이라크 파병 결정, 전교조 반미교육 제재 지시, 실리 없는 숭미 발언으로 국민의 자존심 짓밟기, 햇볕정책의 실질적 파기와 남북관계 급속 경색,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한미공조라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 하나로 대체해놓고 대미 외교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 재벌개혁의 연기, 수도권 지역 아파트 값 상승에 손 놓고 방관하기, 한총련 검거 지시와 5.18묘역 '난동자' 낙인 발언, 초법적으로 네이스 시행 밀어 부치기, 수구지역 주민 끌어안기 목표의 소위 개혁신당 구상과 지원... 숨이 찰 지경입니다. 드디어 오늘에 와서는 극우진영과 수구언론의 두둔과 찬사까지 얻어내는 장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기조가 분명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연이나 상황의 강요가 아닌 노 대통령 자신이 선택한 기조 말입니다.

한 마디로 수구의 길입니다. 선거 공약과는 정확히 180도 틀어진 변신입니다. 대 변신입니다. 그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가히 세상이 뒤집혔다며 수선을 떨어도 할 말이 없게 된 엄청난 반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취임 후 3개월 만의, 지지층의 정확한 자리 바꿈의 현상은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현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정치적 이념과 지향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보여집니다. 그간 그의 이름 앞에 관형사로 붙었던 '개혁'의 실체는 정작 알맹이 부재, 철학 부재임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상황과 실리를 우선시키는 철학, 그래서 이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원칙과 소신도 얼마든지 유기시키고 마는 철학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그는 예측 불가능의 정치인입니다. 선거 기간 후보로서 쌓았던 지지자들로부터의 신용과 신뢰를 내동댕이치고도 향후 개의치 않겠다고 공언하는 비상식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 입니다.

그의 실리가 어떤 기준에 근거하는지 (그는 '상황에의 순응'을 실리라고 말합니다) 파악이 안 되는 정치인이라면, 그를 믿고 계속 지지한다는 것 자체는, 나의 정체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전제하의 투항이고 무책임성의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를 '무조건 믿고' 밀어주자는 말은 정치적 지진아나 할 말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믿고 우두커니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에게 남겨진 유권자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선택의 폭은 노 대통령의 어이없는 변절로 인해 몹시 옹색하게 졸아들었습니다. 그간의 지지자들이 실제 어제, 오늘을 고비로 하여 대규모로 이탈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제(521)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회의를 느낀다-- "이러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이 상황으로 가면 대통령을 제대로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는 발언이 또한 결정적인 자충수를 둔 듯 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금 지지자들을 되돌릴 수 없는 길을 향해 지금 막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개혁을 오매불망하는 지지자들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구와의 공생을 선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 조중동에게 발목 잡히고 있는 노 대통령, 그들과 화합하는데서 국정수행의 고뇌의 땀을 씻어내며 평안을 구가할 노 대통령, 그는 다시 육체와 정신의 극심한 고통을 수반할 첨예한 대립으로 조중동과 맞서 싸울 철학과 신념과 의지가 결코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확실히 섭니다.

후보 시절 그가 언론 개혁을 외칠 때완 다르게, 대통령이 되고 보니 국정 책임자로서 거대 언론과 매양 대립만 하고 있는 것은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하였을 성 싶습니다. 이러한 예측이 저 개인의 자의적 판단과 취향으로 무책임하게 마구 발설되고 있다고 분개할 사람들도 있겠지요. 아닙니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이전까지의 편견을 다 내려놓고 조용히 사색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것은 인간 노무현과 나와의 관계, 즉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 개별적으로 어떤 대의 앞에 떳떳하게 단독자로서 서느냐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노 대통령이 수구의 길을 가면 반대할 일이고 개혁을 밀고 가는 철학이 확실히 보였다고 판단되면 그를 지지하면 될 일 입니다. 그러나 조중동과의 상생을 택하는 그를 무조건 지지한다는 건 자가당착이라고 보입니다. 그것은 조중동과 수구, 기득권, 반통일, 사대숭미, 친일, 반재벌개혁, 반민중에 손들어 주는 일이 되고 마니까요.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흠모하던 님인들 어쩌리요, 그가 지금 적군 진지에 가담하여 옛 동지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옛 정만을 회억하며 동정으로 눈을 질끈 감을 순 없는 일이 아닙니까? 노 대통령의 계획됐지만 돌연한 우연으로 보이는, 수구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으로 인해 이미 민중의 상당수는 커다란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턱대고 감싸며 기다릴 수 만 없습니다.

돌아오지도 않을, 돌아올 수도 없는 강을 건너는 옛 님을 나는 깨끗이 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추스려서 나도 모르는 새 형성된 새로운 수구와의 대치선에 또 걸어나가야겠습니다. 그게 내가 설 곳이고 또 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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