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원칙과 소신'의 이미지, 노무현 실체해부
영남 위해 호남 소외시키는 신당창당은 국민사기극
개혁과 상식
한 사회의 총체적 개혁이란 화두는 민주주의를 오래 경험한 사회에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우리와 같이 변혁기나 과도기에 있는 사회에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무언가 바로 잡아야 할 가시적 문제가 사회의 발전을 오랜 기간 가로막고 있어 그것을 고치고 치우는 대대적인 작업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대상은 굳이 분석이 따로 필요할 만큼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를 몰라서 개혁을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함으로써 손해를 입을 기득계층의 강력한 저항책동에 눌려 못해 왔을 뿐이니까요. 이 시대 이 사회의 '상식'에 반하는 낡은 제도와 관행과 사고방식이라면 그 분명한 대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개혁을 하는데 정치 공학을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걸림돌입니다. 온갖 술수의 개입 여지가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큰 틀은 매우 단순하고 정직해야 하며 상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치적 환경 조건과 정치 세력간의 타협의 산물로써 개혁의 밑그림이 기초된다면 거기에 설사 거창한 철학적 이념을 담았다고 떠들더라도 정작 개혁의 수혜자가 될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이익은 고스란히 빠지고 그것을 기획한 소수 정치집단이나 기득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일입니다.
주체
그럼 개혁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그 시대의 변화를 갈망하고 그간 기여해왔던 '시민 일반이 주체가 되고 그들의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소수가 그것을 수행하되 매번 시민의 동의와 추인, 그리고 시민 단체의 감시 속에서 투명하게 시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정치권력이란, 선거를 통하여 정당하게 쟁취한 지지세력의 권력으로서 선거에 패배한 시민군(群)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지는 우위의 힘을 말합니다. 권력을 잠정적으로 위임 받은 정치인 그룹이 홀로 개혁의 주체가 된 양 착각하여 선거 결과에 의해 새로 짜여진 권력의 구도를 깨면서 전횡하고 멋대로 오/남용하는 일이 생기면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그때는 시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깊은 좌절의 한숨이 토해지고 있습니다. 허탈감 위에 얹힌 분노, 혹은 아예 시나브로 체념이나 냉담으로 젖어드는 분위기가 매우 심각한 현실에 있습니다. 노 정권을 창출한 지지자층의 민심 이반입니다. 한편, 아직까지 남은 노무현 지지파의 낙관은 저들의 한숨을 상쇄하고 덮겠다는 듯 가성의 헛웃음을 드높이기도 합니다. 그들 모두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희망과 신념을 공유하는 동지였고, 굳게 결속한 한덩어리 알짜배기 노무현 지지자들이었단 말입니다. 헌데 작금에 와서는 서로 제각기 흩어져 분열하고 대립까지 하는 지경에 와있습니다.
의문
이런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집권 신정부와 민주당은 숫자 놀음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내건 구호는 참으로 그럴 듯하여 명분상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름하여 지역구도 타파 정치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젠다야 말로 이 사회의 절체절명의 과제를 요약한 것으로서 자못 신성하기까지 한 역사적 당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구도 타파 개혁이 웬일인지 개혁정당 창당과 동의어가 돼 있습니다. 왜 그 둘이 일란성 쌍둥이로 취급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창당의 방식의 조율만이 관심일 뿐, 왜 창당만이 선택이며 다른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인지, 그 작업이 과연 지역구도 타파의 과업을 이뤄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관심 밖인 듯합니다. 왜 우리는 정치인이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걸 잘 알면서도 막상 그들이 벌여놓은 논쟁에는 뒤늦게 뛰어들어서 그냥 휩쓸리고 말까요? 그들의 논의 자체가 정치꾼들의 엉터리없는 수작인지의 여부부터 검토하는 것이 경제적인 일 아닐까요?
정치 개혁이라는 귀한 사업이 정치권력을 위임했던 유권자군(群)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스스로의 사적 이익만을 탐하는 소수 정치꾼들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철학과 목적과 자격이 모두 의심받을 투성이인 사람들이 주도하는 개혁신당 추진은 알고 보면 오직 자기네 편 세불리기만이 지상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와 암투와 술책의 당권 헤게모니 쟁탈전을 그들은 정당 개혁이라고 큰소리치면서 포장합니다. 1분 1초가 아까운 이 귀중한 집권 초기에 민생 현안을 내버려 둔 채 5개월(신당논의 시작으로부터)을 질질 끌어오고 있고 아직도 분명한 가닥조차 잡히지 않은 신당 헤게모니 암투가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른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전국 정당으로 태어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요. 이것이 과연 정당한 명분인지부터 마구 의심이 갑니다. 스스로가 지역 정당이라 칭하며 그만 벗어나고 싶다는 건데, 이것이 비하인지 아니면 정말 대의를 위하고 나라의 건전한 정치 발전을 위한 고뇌의 고백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비하라면 더불어 자신의 지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이죠. 정녕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면 국민의 동의는 얻어냈는지 모르겠군요. 전국 정당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는 무엇입니까? 각 지역에 지지자가 골고루 분포하는 게 소망스럽다라는 겁니까, 아니면 국회의원을 각 지역에서 골고루 내는 것이 국민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는 겁니까? 전자는 어차피 억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므로, 문제는 후자일 뿐인데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습니다. 전국이란 말이 지역이란 말보다 이미 우위의 가치라고 보는 일반의 믿음에 우리도 속고 있는 겁니다. 사실상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의 우열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집권당이 전국 정당이 아닌 지역 정당이어서 손해 보는 국민이 있으니 안 된다는 말입니까? 어느 지역의 주민이건 자기가 선호하는 정당은 있는 것이고 지지한 정당이 집권을 하면 득을 볼 것이요 야당으로 남으면 다음 선거를 기약하며 기다릴 일입니다.
기만
각 지역의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각각의 특성을 안은 채 오랜 세월을 두고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전국 정당으로 변모를 시키려면 각 지역의 정치 성향에 딱 맞는 후보군을 골라 각 지역에 내보내야겠군요. 이것을 가능케 할 정당의 이념과 정강은 좌에서부터 우까지를 통째로 아우르는 짬뽕 정당을 지향하겠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정체성으로 전국 정당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웃음거리겠지요. 그래서 위장합니다. 정당의 이념과 지향을 필요 이상 선명하게 색칠합니다. 그리고 속내로는 수구집단에 이제껏 부역해온 정치꾼을 '개혁 성향' 의원이라 거짓 단장시켜 영입합니다. 그로써 지역을 넘어서는 전국적 정당이 되는 양 선전하겠다는 기만적 전략을 사용합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민주화 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한 공을 무시할 없는 특정 지역 출신 의원들을 상종 못할 개혁대상 '부패정치인'이라 몰아부치고 정리함으로써, 자리바꿔 탈 신당의 호남 색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탈색시키면 영남 보수층에게 표를 얻어내기가 매우 용이해지리라는 전략을 차용합니다.
보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는 유권자들에 의해 당선된 위장 개혁 정치인이 개혁을 외치며 민주당의 의원으로서 펼치는 의정활동을 하고 당의 표면적 정강을 따른다고 해서 개혁적일일까요? 유권자의 이익을 좇아 보수적일까요? 귀신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영남지역에서 표를 얻어 소위 전국 정당이 됨으로서 달라지는 것이 뭡니까? 정권에서 소외된(?) 영남인들을 위로하겠다는 것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군요. 양식있는 영남 유권자들의 자존심을 유린하는 일입니다.
토사구'팽'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배역 행위, 즉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개혁성향의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을 과감히 발로 차버리는 행위 등이 모두 이들 개혁정당 주도층의 면밀한 정치 역학 분석에서 나온 창의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의심없는 정치적 자살 행위로서 극도로 회피되어야 할 이 패악질이 버젓이 이 나라의 집권 정당의 정치 개혁 전략으로 공공연히 용인, 합의되고 맙니다. 호남의 민주당 지지자들이야 하늘이 내려 앉아도 한나라당으로 갈 수 없는 결국 오도가도 못하는 붙박이 민주당 표인 셈인데, 그렇다면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호남의 지지자들은 좀 희생되어줘야만 하겠다는 교만한 사고 말입니다.
무릇 자신이 지지하고 선출했던 정치인이, 정당성이 결여된 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 강제로 퇴출되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그 지지자 개인의 소중한 정치적 선택과 권리가 깡그리 무시당하고 빼앗기는 인격적 강간의 경험입니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기대는 누구한테 담아야 하나요?)
그것이 영남지역의 의원자리 몇 개를 건지겠다는 목적 때문에, 수구적인 영남 유권자에게 아부를 할 기반 조건 형성으로써 강제적으로 치러야 하는 댓가라면 소위 '개혁 대상' 의원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대로 영남패권주의 정치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걸
개혁 신당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영남표 '빌어먹기'입니다. 개혁의 실체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정당하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절차를 아예 상정하지 않고 (호남의원 퇴출 후) 탈호남당이라는 '이미지 조작' 하나로, 영남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아예 저급한 수준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역감정에 감성적으로만 파고들기만 하면 스리슬쩍 몇 개의 의석은 건질 수 있다는 셈본하의 치졸한 모사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영남 유권자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불과합니다. 표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영남의 양심적 유권자들의 갈망도 이 지역패권주의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겁니다. 이렇듯 개혁의 실체는 완전 실종입니다. 실로 개혁의 대상자들이 스스로 개혁 주체라며 주제 모르고 날뛰는 겁니다.
가짜명분
이들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강변합니다. 소위 "내년 총선에서 기필코 승리해야지만 그 의회 의석수를 기반으로 비로소 노무현 개혁의 실질적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대도를 올곧게 걸어가는 도정에서 마주치는 온갖 방해 공작과 잡음은 개혁의 완수라는 대의 쟁취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시할 수밖에 없는 소소한 장애일 뿐이다. 그만큼 내년 총선의 승리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명제다." 개혁의 이념과 목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농락하는 뒤틀린 개혁 주장입니다. 개혁정신을 깨부수며 사술을 동원하더라도 총선 승리만 하면 개혁은 천사의 모습으로 도래하리라는 기대의 자가당착 논리입니다.
이들 정치인들의 논리가 그 형식에서마저 얼마나 빈약하고, 그 철학적 사고의 수준이 얼마나 바닥인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말을 정확하게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겐 원래 인격과 실천 '합일적인' 철학과 논리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로지 권력 쟁취와 자신의 기득권 유지만이 그들의 관심의 전부입니다. 모든 행위는 그것에의 봉사입니다. 그들로부터 인간적 선의나 고매한 인격을 기대하는 건 순진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정치 행위라는 성질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실천 주체로부터 인격의 분리를 일정 부분 강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질
한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아젠다는 서로 적대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그 관계마저도 항구성을 띄지 않고 상황과 시간 변화에 따라서 변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대립적인 정치적 의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타협이라는 조절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합니다. 결국 타협이란 기술은 그 정치인의 인격 합일적인 철학과 거리를 둔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타협의 기술이 빼어난 정치인일수록 인간적 격과 정치적 격은 더욱 이중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권력욕이 남다른 정치인일수록 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만큼 그들의 정치적 행위의 진정성은 시민들에 의해 의심(suspect)받아야만 하고 다시 면밀히 검토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시민은 늘 그들의 봉노릇 밖에 못합니다.
지역주의 타파 정치 개혁의 허구, 그 속임수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우선 지역주의 타파란 구호 자체부터 유령입니다. 지역주의란 정의부터 실체가 없고 기껏해야 왜곡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편중된 지지분포'가 '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인 양 둘러댑니다. 사실상 정당 지지의 지역적 편중이 상당 부분 지역이기주의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촛점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인 중 그 누구도 지역구도에서의 수혜자임을, 아니 그 편승자임을 부인한 채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나서서 매스를 들이댈 자격을 갖춘 자는 이 나라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돌팔이
'타파'란 제삼자인 의사가 칼을 들고 인위적으로 벌이는 외과적 처방입니다. '극복'이란 내적 성찰과 반성을 통한 방법입니다. 지역주의란 오랜 시일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결과물인데 그것을 단번에 타파한다며 정작 그 환경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커 온 정치 자영업자들이 의사 가운을 하나 훔쳐 걸치고 외과적인 수술로 쉽게 뚝딱 고치겠다고 나선다면, 신중하고 올바른 진단은 고사하고 결국 사람을 잡겠다는 짓이 됩니다.
원론
이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열망하는 깨인 시민을 한 사람이라도 상처주는 거짓 정치 개혁이 용납되어선 안됩니다. 정당 지지의 지역 편중을 극복하는 길은 어디까지나 정도로서 바르고 정직하게 가야합니다. 정당의 정체성과 이념을 훼절시키지 말고 국민 앞에 약속한 그 정강에 충실한 정책을 개발, 추진하므로써 자발적 지지자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같은 왜곡된 정치 환경에서는 정치인들의 내적 자기 변혁을 위한 성찰과 반성을 살짝 보이기만 하여도 감동먹은 지지자가 자연스레 모이게 돼있다는 말입니다.
영남
물론 이런 원론적 설교가 지금 얼마나 한가하고 부질없는 일인지는 이들의 정치적 인격을 들여다보면 바로 깨달아집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지지받는 정당으로의 거듭남을 거론합니다. 그러니까 호남유권자를 주 기반으로 하며 영남유권자로부터 외면받는 현 정당 정치 구도가 잘못 되었다고 규정하는 겁니다. 한 지역이 자기네 당을 너무 열성으로 지지해준 것을 잘못이라 보는 겁니다. 그들 유권자들의 선택의 진정성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한마디로, 호남지역 주민과 민주당 지지층은 지역감정의 표현으로써 민주당을 지지한 것이니 가치가 없다는 규정입니다. 그들 유권자의 표에 의해 의원직을 받은 자들이 유권자의 진정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또 영남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도 비정상이니 이번엔 그 지역 유권자의 입맛에 맞는 수구 정치인을 그럴듯하게 포장시킨 뒤 내세워 지지를 호소하겠다는 겁니다. 영남표만 얻으면 지역주의 정치가 타파된다는 궤변입니다.
꾼
수구적 성향의 영남유권자에게 쉽게 먹혀 들어갈 수구인사를 영입하여 당선시키고 그들과 함께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이 뻔한 모순 논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며 국민을 설득하겠다고 하니 그 저급성에 절망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 논리를 정치 개혁이랍시고 갖다 붙입니다. 개혁에 목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대신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코드를 맞춰 개혁을 가열차게 추진하자고 주장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머리 나쁜 사기꾼들입니다. 이들이 떠드는 전국정당으로의 재편과 정치 개혁과는 일말의 관련성도 없습니다.
경고
지금 노 정권의 개혁처럼 목적과 비전도 내놓지 못한 채 고작해야 내년 총선 승리만을 지고의 선으로 설정한 개혁 추진은 개혁이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는 몰상식이요, 진보적 시민 사회와의 약속에 대한 반역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정치 실험은 지지층의 좁은 선택의 폭(alternative)을 볼모로 잡은 게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자기의 정치 생명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정정당당하게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지를 보세요. 최소한 영남표를 얻으려거든 영남의 수구표를 얻으려고 구걸하면 안됩니다. 유권자의 수구적 입맛, 체형에 딱 맞는 맟춤형 후보를 내세워 일단 의원만 만들면 그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전위대가 될 거라고요? 이치에 맞는 말을 해야지요. 한 마리의 국해의원(國害蟻猿)만 더 생산하는 겁니다. 표를 얻으려면 영남인의 개혁표를 얻어야 합니다. 똑 부러지게 개혁적인 인사를 찾아내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유권자를 감동, 설득하여 의원을 만들 경우 그가 개혁의 일당백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그럴 신념과 의도가 전혀 없으면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보겠다는 작태를 당장 거둬들여야 합니다.
몸통
개혁 신당을 출현시키겠다는 설계 오케스트라단의 단장은 누구입니까? 이 정권의 총체적 수구 행로로의 노선 변경 결정 주체는 누구입니까? 놀랄 일도 없이, 노무현입니다. 그의 보좌관 유인태, 문재인, 아니면 최측근 인사 이강철, 이강재, 아니면 신주류 삼인방 신기남, 정동영, 천정배 등을 거론할 수 있다고요? 그들은 노무현의 수족일 뿐입니다. 개혁 신당 창당의 논의와 진행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통하여 그의 의도와 구상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친구
그의 수족들이 무얼 믿고 이렇게 무리한 사기 행각을 감행하려 할까요? 노 대통령과 코드를 맞췄다는 확신에서 온 건방이 큰 부분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노 대통령과 민주당 신주류가 한 통속으로 어우러지는 코드가 적어도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편견이고 하나는 무모입니다.
커밍아웃
5월 28일 노 대통령이 말합니다. "제도를 개편하든,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 결과적으로 어느 한 지역에서 어느 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독식하지 못하도록 또는 독식하지 않는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중략) 이 지형 위에선 제가 다수당 위에 있더라도 지역의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이 발언에서 그의 사고 방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석합니다. 1) 현재 한 정당의 3분의 2의 의석을 한 지역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현상인데 이것을 고치려면 제도 자체나 정당의 구조 개편이 있어야 한다. 2) 나는 영남의 표를 얻지 못했으므로 그 지역의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에는 흠이 있다고 느낀(인정한)다. 노무현의 사고의 핵심은 2)의 발언에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코드는 신주류 개혁신당파 등이 정확히 공유하는 인식입니다.
편견
"제도를 개편하든"이란 말 속에서의 제도는 중앙집권의 완화, 지방분권 강화와 같은 제도와 환경의 동시적 개선이 아닌, 미국식 간접선거 제도와 같은 근본적 대안을 염두에 둔 것인 듯 보입니다.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인단을 각 주에 두어, 그 주에서 한 정당에 대한 100%의 지지표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 표가 그대로 카운트되지 못하고 일정하게 제한된 선거인단 수밖에 가져가지 못하게 돼있는 제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51%의 지지나 100%의 지지나 아무 실질적 차이가 없는 제도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는 얘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2)의 발언(해석)과 연결해서 그의 인식을 분석해 봅니다. 호남지역민이 몰아 준 표에는 나름의 편향성과 당파성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인정되므로 그들의 표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고있다라는 인식의 표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그의 발언이 대통령 선거에 관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막바로 통하는 의미의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국회의원 선거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결국은 대통령 선거의 문제점과 접목시켜 거론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가 미국식 간접선거를 심각하게 고려해본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도를 개편하든"이란 발언은 그 뒤의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의 주장을 위한 의미 보정일 뿐입니다. 당연히 주장의 요점은 뒷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 방식' ('인식'보다 더욱 근본적인 그의 철학적 기조)을 엿보게 되는 곳은 오히려 앞머리입니다.
(이러한 말의 해부 작업이 어떤 이에겐, "말장난이다", 또 "발언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다"라는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더구나 발언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직위에 있고 또 정식 인터뷰(한겨레 신문)에서의 발언입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지역주의를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남표의 의미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는 일정부분 지역주의의 소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로 표현된,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와 갈망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설사 지역주의의 개입의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표의 의미와 가치를 내리 깎겠다는 발상은 유아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의 표현입니다. 결국,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한 표 한 표의 의미를 축소하므로써 자신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 그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갖는다는 자가당착이 됩니다. 위에서 보듯, 사실상 그는 그 콤플렉스를 적나라하게 입으로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편견은 이것입니다.
"호남표의 일부는 DJ에 의존한 지역주의 표이므로 그 진정성을 다 인정하진 못하겠다. 같은 지지표라도 호남표와 타 지역인의 지지표의 의미는 다르다."
사도(詐道)
그의 발언에서, "제도적으로라도 3분의 2의 몰표 현상을 막고는 싶다"라는 열망이 깊이 배어납니다. 현실적으로 꿈도 꾸기 어려운 제도 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못내 아쉬워하며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중심을 환경 개선 쪽에 놓습니다. 환경 개선을 하겠다면 현 환경의 생성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의 현상만 보고 무조건 개혁해야 한다는 접근법입니다. 즉, 현행 제도 하에서는 몰표를 막을 수 없으니 몰표가 못나오도록 막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의 상정 자체로써, 환경 개선의 문제가 원론적으로는 어느새 '제도 개혁'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정공법은 피해야만 하겠기에 결국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방법을 쓰겠다는 것입니다. 즉, 몰표가 나오는 지역의 표를 조금 거두어들이고 아예 표가 안 나오는 지역의 표를 얻어내는 원천적인 방법을 도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 목적을 이루겠다는 것인가요? 두 지역민들을 서로의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아니면 표가 안 나오는 지역민들에게 아부하는 것 밖에 더 있을까요? 아부의 방법으로써, 탈호남당의 이미지로 변모하여 얼굴을 내밀겠다는 겁니다. DJ의 이미지만 벗으면 표가 절로 굴러 들어오리라는 기대입니다.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경우, 탈 DJ를 높이 외치면 자신의 태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과오보다 공적이 적지 않은 DJ를, 영남인으로서는 기피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동의해주는 부도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자칫 하다간 호남 쪽에 그릇된 점이 많다라고 몰아부치는 형국이 됩니다. 또, DJ는 놔두고 탈호남만을 외치려니 공허하게 들리고 마는 점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영남인들의 선택 취향에 딱 들어맞는 후보를 물색하려니 역시 수구성향 정치꾼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간 개혁의 이미지를 다치게 되므로 안 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딜레마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사술(詐術)의 동원 밖에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 계속 모르게 감추고, 잘 못보고 있는 다수의 사람에게는 사기를 치는 겁니다. 뭐, 어차피 표만 얻으면 끝입니다. 우선 탈호남 이미지로의 변신에 필요한 명분 획득을 위하여 개혁의 구호를 드높이 외칩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인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둘도 없는 개혁의 전사인 양 비장미까지 띕니다. 자신의 순수한 피를 돋보이게 하려니 희생양을 마구 잡는 일도 필수입니다. 수구인사를 영입하되 개혁의 일꾼이라 선전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작금의 신당 창당 논의가 연출해낸 작태입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시나리오
향후 시나리오입니다. 영남인들에게 향한 본격적인 아부와 선물 공세만 남았습니다. 선물이란 딴 게 아닙니다. 호남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극적으로 시위하는 겁니다. 호남당이 아니라는 이미지만 반복하여 심으면 영남표는 다 잡을 수 있다라는 계산은 끝났습니다. 영남인의 지역감정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호남인의 정치 헤게모니를 용납하지 못하는 다수 영남인들의 정서를 만족시켜야만 합니다. 당연히 당의 주도권을 영남인이 잡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남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요설로 명분을 꾸며야 합니다. 총선에서 수구꼴통 한나라당을 누르고 기필코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선전합니다.
저항
다시 한 번 호남이 술렁거릴 것은 뻔합니다. 부당한 방법에 의해 농락당했다고 느낄 호남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항의는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됩니다. 호남이 조금 양보하면 된다는, 명분 선점 여론몰이를 합니다. 호남만 조용하면 나라가 조용해진다는 호소도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사태에서 호남이 잠자코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지나친 낙관론자입니다. 지역감정이 아직도 이 사회의 정치 환경에서 그 영향력과 결정력이 가장 강력한 인자임을 자칫 부인하다간 큰 코 다칩니다. 자, 이렇게 나라는 총선이 가까와 올수록 지역감정 논박의 초특급 회오리에 휘말리게 됩니다. 민생은 뒷전에 이미 쳐박혀 있습니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 난국을 맞지 않는다 자신할 수 없는 전망입니다.
오산
여론 조사에서 보입니다. 민주당을 신장개업하는 것과 민주당을 허물고 신당으로 나올 때 영남인들로부터 받는 지지차는 20%이상이라고 합니다(28일자 오마이뉴스). 저항에 부딪혀 표현을 자제하고 있지만 신주류는 무척 고무돼있을 것입니다. 대세라며 밀어붙일 기회를 쉽게 접지 않을 것입니다. 신구류주간의 갈등 양상은 언제나 임시 미봉에 의해 잠시 덮어지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겠지만 어느 한쪽이 확실한 헤게모니를 쥐는 그 날까지 분란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론 조사 결과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자의적으로 자신에게 이롭게 해석합니다. 그때 그때 일희일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닥칠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 조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여론 조사의 질문 자체를 현 싯점에서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여론조사와 아무 상관없이, 지금의 개혁신당 논의가 정의에 반하는 기만과 협잡에 의한 것임이 점차 확연히 드러나고 반드시 저항에 부딪치면서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결국 국가적으로만 적잖은 희생만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것의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노무현이 집니까? 신주류 3인방이 집니까? 시민 전체가 큰 상처와 불익을 이미 받았는데 누가 책임을 진다고 하여 보상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길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원인에 대한 규명 회피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겁니다. 단지 지역구도 뿐만 아니라 그 모태가 되는 이 나라 정치의 파행의 긴 역사에는 영남패권주의라는 암이 그 최기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그렇게도 죽기보다 듣기 싫고 지겹고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대선에서의 영남을 제외한 전국적인 노무현 지지와 호남 몰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개혁이지요. 무엇을 개혁하자는 건가요? 개혁의 순위에서 상위에 놓인 것이 바로 '영남패권주의' 타파입니다. 소위 신지역이기주의로 어떤 득을 챙기겠다가 아닙니다. 다만 '차별받기 싫다',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라, 이겁니다.
노-지역주의자
대선 결과에서 보듯이 차별에 대항하는 의지는 자발적이고 개별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무슨 작당이나 한 것처럼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열망이 호남인들에게 그토록 사무치게 간절하지 않았었다면, 다른 모든 상대적 우위의 조건과 자질들을 인정하더라도 노무현의 인기가 그 정도로 하늘을 찔렀을 거란 추측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신지역주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파렴치입니다. 이 점에 대한 성실한 분석과 고찰이 노무현에겐 결여돼 있습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둔 우리는 영남중심(패권)주의를 영원히 땅 속에 묻어버리는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무리였습니다. 나는 그를 '영남패권주의자'라고 확실하게 규정합니다. 질이 나쁜 골수 지역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영남패권주의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한 사람입니다. 증거는 위에 진술한 대로입니다. 개혁의 화신이 알고 보니 지역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영남패권주의의 피해자는 호남인만이 아닌 전 국민입니다. 심지어는 영남인도 피해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고 방식은 인간의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상식을 기초로 하는 가치체계의 굴절과 불연속이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인종차별과도 같은 지역차별은 시공을 뛰어넘어 범죄라고 규정되어 마땅합니다. 이것은 상식이 아니라 명제입니다. 상식 이전의 명제마저 서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마저도 논란거리고 싸움거립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끝없는 소모전이 진행되고 결론은 영원히 없습니다. 당연히 합리적 사고, 과학적 사고가 설 수 없고 인간관계 마저도 불신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잴 수 없는 크기로 우리 모두는 손해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끊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노무현의 실체를 알고 너무 절망했습니다.
지역주의 구도는 이렇게 영남패권주의가 위세를 떨쳐왔던 역사적 조건 속하여 형성되어 왔습니다. 이 구도를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공법으로 가야합니다. 노무현이 가는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돌이켜야 합니다. 노무현의 길은 나라를 진흙구덩이에 다시 한 번 쳐넣는 길입니다.
영남에 대한 배려를 냉정하게 단념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느 지역이 됐건 특별 배려를 다 끊습니다) 이어서 가시적인 개혁을 수행해 나갑니다. 이 경우,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과 지역에게는 자연스레 불이익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차별함으로써가 아니라 개혁 정책에 의해 발생한 이익과 혜택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로서 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방식입니다.
원칙
개혁은 개혁을 원하는 자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자만이 자발적으로 개혁의 대오에 동참하는 법입니다. 개혁이 싫다는 자에게 무언가를 도와 달라 호소한다고 해서 그들이 도와줄 게 있겠습니까? 아부, 호소가 아니라 당당하게 설명하고 나면 그 뿐입니다. 개혁을 하므로써 그것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이제까지 기득권을 향유해온 부류일 겁니다. 만약, 약자가 개혁에 의해 또 다시 불이익을 겪었다면 그 개혁은 크게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은, 기득권자가 조금 손해를 보고 음지에 있었던 자가 제 몫을 챙기는 사회구조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기득권자의 이익은 절대 훼손하지 않으면서 중산층과 서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요? 그렇다면 그 개혁은 거짓입니다. 그런 철학에 바탕을 둔 개혁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개혁은 불합리를 합리로 고치는 작업입니다. 무엇이 합리이고 무엇이 불합리인지 분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한 가치 체계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회는 상식이 있으되 흐리멍덩하고, 더구나 통용되지 않아 왔으므로 이제부턴 상식이 보증을 받는 관례를 시행해 나가야 합니다. 상식을 거스르면 그만한 댓가를 치루도록 만드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식이 무언지 비로소 분명히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합리의 사회로 만들었을 때, 손해 봐야만 할 자는 손해 보도록 놔두는 것이 정의입니다. 개혁은 이러한 철학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기본 원칙입니다.
의문
그런데 노 정권은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습니까? 원칙이 서있다면 실천하고 있습니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본질은 허위의식입니다. 아직 개혁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누가 그럽니까? 수구와 보수언론이 사사건건 발목 잡고 믿었던 지지자마저 집단 이기주의로 정권의 힘을 빼고 있다고요? 노 대통령의 개혁의지는 확고한데 참모들이 띨띨하다고요? 노동계와 공무원 노조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하여 국정 수행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니 어느 틈에 개혁의 돛을 올릴 수 있었겠냐고요?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음를 느낍니다. 그의 철학과 이념적 성향과 실천적 노선의 실체를 알 때 우리도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탐구
이제 잠시, 위에서 거론한 개혁정당 출범 논의의 내용과 같은 노무현 정권 출현 후 일어난 모든 정치적 행위와 결정들이 왜 일관되게 수구적 노선을 ( 촛불행진 자제 발언, 수구적 인사의 중용과 영남 출신 편중 인사, 대북송금 특검 수용, 논의를 차단한 이라크 파병 결정, 전교조 반미교육 제재 지시, 실리 없는 숭미 발언으로 국민의 자존심 짓밟기, 햇볕정책의 실질적 파기와 남북관계 급속 경색,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한미공조라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 하나로 대체해놓고 대미 외교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 재벌개혁의 연기, 수도권 지역 아파트 값 상승에 손 놓고 방관하기, 한총련 검거 지시와 5.18묘역 '난동자' 낙인 발언, 초법적으로 네이스(NEIS) 시행 밀어 부치기, 수구지역 주민 끌어안기 목표의 소위 개혁신당 구상과 지원... ) 견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노무현의 정치적 정체성은 무언지, 정치 철학은 무언지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기간이 매우 짧아 인권 변호사로 활약한 80년대 초중반의 사회활동을 빼면 처음 국회에 진출한 해에 있었던 5공 청문회 명패 사건, 90년 3당 합당 반대 선언과 의원직 사퇴, 연이은 부산 지역구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 출마와 낙선 (98년 종로구 보궐 선거 당선 포함), 그리고 진보 개혁 성향의 시민과 노사모의 지극한 성원을 등에 업고 나선 국민 경선에서의 부상 이변 연출과, 대선 기간 중에 보여준 개혁적 발언들이 분석 자료의 전부랄 수 있습니다.
원칙과 소신
제조된 이미지는 '원칙과 소신'이었습니다. 원칙과 소신 중 하나만 뚜렷해도 정치인으로서의 자산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긍정적 이미지는 늘 상승 작용을 불러오기 마련이어서 일반 지지자들은, 그 둘을 하나로 결합까지 시키려는 열혈팬들의 요구에 기꺼이 동의하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원칙이란 이미지는 3당 합당 반대 선언에서 보여준 올곧은 젊은 정치인의 인상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잇따른 부산 지역구 출마는 '원칙'이란 지향성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큰뜻(?)을 일찍이 품은 그의 정치 감각,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의 발로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의 부산 출마와 낙선의 과정은 원칙과는 상관없는 그의 어떤 결기에 가까운 것이라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서 화합의 정치를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로 노무현을 꼽으며, 그가 지역주의의 피해 당사자임으로 그것을 허무는데 최전선에 설 전사가 되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런 연상 작용은 심리적으로야 자연스런 연결이지만, 한 꺼풀 벗기면 지나친 비약임이 드러납니다. 지역차별주의에 맞서 얼마나 줄기차게 싸워왔느냐라는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역주의의 피해자임으로 곧 지역주의 타파의 선봉장이 될거다라고 건너 뛴 겁니다. 물론 이 예는 원칙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그의 사회 문제를 해석하는 시각과 철학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그의 원칙과 소신이란 이미지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 합니다. 요약하면, 그의 정치 활동에서 원칙과 소신이 늘 동인이 된 것이 결코 아니었음 불구하고 그의 팬들의 기대가, 기왕에 만들어진 그의 이미지에 시너지 효과까지 보태며 곧 노무현 실체인 양 일반에게 전해졌던 겁니다.
이미지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미지의 역할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치인의 행위에는 어차피 인격과 실천의 합일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연이은 낙선 사실이 웅변으로 증거하듯 그가 프로 정치꾼들과는 달리, 인격 합일적이며 비타협적인 정치적 선택을 할 때마다 정치판에선 늘 외면을 당해왔습니다. 이 나라와 같은 정치판에서 각광받는 생존 전략은 진실이 아니라 정략과 술수입니다.
정치판이란 속성이 명분 선점을 가장한 음침한 권력 싸움임을 알고 볼 때, 정치인의 하나인 그가 뚜럿한 명분을 획득하고도 뻔히 지는 싸움만을 매번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정치에 신물을 내는 시민 일반에게는 그가 정치인의 음습한 속성을 한 점 묻히지 않은 인격 실천 합일의 경이로운 천연기념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선택이 신선한 감각과 사고에 기인한 것을 부인키는 어렵지만 인격 전체가 터무니없이 미화되고, 사실상 관련이 적은 '원칙과 소신'의 화신으로까지 찬양된 배경에는 예술적 차원의 이미지 메이킹 역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내 정치인으로서 좀 더 긴 세월 동안 활동했었다면 더욱 많은 정치적 타협의 모습이나 말 뒤집기, 기만술, 술수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대선 전의 이와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는 필시 구축되지 못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원내 활동을 짧게 한 덕에 대권을 잡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이미지 제조의 주역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지로 형성된 노무현을 우리가 그의 실체로서 착각한 부분이 오직 이것뿐이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결 론
지지자에 대한 노무현의 변절에서 보듯 시민 개개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철학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서있지 못하다는 의심이 듭니다. 가치관이란 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갈 수가 없는 법인데 그의 행동에서 읽히는 가치관은 그 토대가 매우 허약하다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난관과 같은 테스트를 견뎌 이기고 통과함으로서 타인에게 비로소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러한 면에서 철저히 검증받은 바가 없고 이제 와서 그러한 테스트 기회가 닥칠 때마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노무현이 실체 노무현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지 메이킹의 포로였습니다. 언론도 반성하고 여론 주도층도 반성해야 합니다. 아직도 그를 파악하는데 까지, 그래서 더 이상의 실망도 기대도 필요치 않을 싯점까지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그의 발언에, 행동에 나타나는 그대로를 가지고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조만간 정리가 되리라고 봅니다. 대선 전의 노무현을 가지고, 그는 반드시 돌아오네 마네 논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가 스스로, 대선 전에 알려졌던 노무현이 아니라고 말로, 행동으로 강변하는 마당에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며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입니다. 대통령인 그가 누군지, 그의 철학과 성향과 이념과 지향점이 무언지를 실증에 근거해서 바로 알아야 우리 각 개인의 정치적 포지션도 제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정권에 대해 효과적인 비판과 감시의 방법도 계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당신이 속은 것,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속을 것
"노무현지지자는 곧 개혁세력이다"
이 말이 대선 전까지는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틀린 말이 된다. 엄밀히 말해, 노무현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개인 '노무현'이 아닌 '개혁'이라는 이념을 지지한 것이다. 개혁이 빠져버린 노무현은 이미 노무현이 아니다. 개혁을 내팽개친 노무현을 아직까지 지지한다는 말은 개혁문제만큼은 더 이상 상관 않겠다는 말, 아니면 애초부터 개혁엔 관심 없었다는 뜻이다.
'인간 노무현'의 가치보다 '개혁'을 우위에 놓는 사람들은 인간 노무현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개혁을 운위할 자격이 없는 배신자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개혁과 동의어였던 인간 노무현을 살리는 길은 무언가? 아직도 노무현의 실체를 파악 못하고 있는 바보들과의 논쟁에 의한 설득이 통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개인 노무현'과 '개혁 노무현'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에게 "현재의 노무현은 개혁이 아니다. 더 이상 개혁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지를 철회함이 마땅하다. 노무현이 이 엄중한 위기감을 깨달을 때만이 그를 개혁의 기치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득하는 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실체를 통찰하지 못하는 '인간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러한 논리성에 설득 당해 줄까? 아마도 이 논리를 이해할 사람이라면 지지철회를 이미 마친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고 개혁에의 희망이 다 물 건너 갔다고 단정하려는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물 건너 갔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
첫째, 노무현을 압박하여 개혁의 기치를 다시 들게 만들 세력이 부재한다.
둘째, 노무현은 원래부터 그의 지지자들이 믿고 있던 개혁마인드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즉, 인간 노무현은 개혁의 표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세째, 노무현은 비개혁파 혹은 영남패권 마인드를 가진 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들을 모두 갈아 엎을 정치공학 차원의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줄기차게 말 할 것이다. 노무현을 믿어보자고. 노무현에 의한 개혁에 힘을 실어주자고. 대안이 있느냐고. 냄비기질 제발 버리라고. 이런 식으로, 진정한 개혁세력은 사이비 지지자라는 누명이나 뒤집어 쓸 것이다. 하지만 개혁 위에 인간 노무현을 얹어놓는 사람들이 걸어 갈 길은 뻔하다. 그들은 대선 드라마를 통하여 속았고 또 그렇게 계속하여 속을 것이다. 노무현이 사라질 때까지 속을 것이다.
대안은 위에서 말하였다: 현재까지 노무현의 실체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노무현지지자들의 생각을 확실히 깨부시고 바꿔놓는, 가열찬 논쟁에 나서는 것, 그것이다. 당분간은 그들이 개혁세력의 적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들의 애매한 노무현 온정주의를 냉철한 개혁주의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개혁이란 실체가 실종된 채로 남고 만다. 그들을 설득한 다음에 노무현을 '강제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노무현이 개혁을 스스로 단행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는 무망하다. (그는 개혁주의자가 아님을 알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시나리오는 거의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상황은 그것을 용인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거 문익환 선생같은 이가 있어 희생으로 제 몸을 던진다면 가능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