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거일씨나 이문열씨에게 화가 난 것은, 내 판단과 달리, 그들의 이념때문이 아니라 인격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에 이념과 인격을 구분하려는 노력의 실익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고종석 작가(이하 경칭 생략)의 칼럼에서 따온 내용이다.

얼마 전 이인직의 혈의 누의 일부가 EBS수능시험 강좌(?)에 유통되었다는 기사을 접하고 생각해 본 주제였는데 오늘 고구마 줄기를 들추다가 맞닥뜨렸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천착해 볼까 한다.

 

오염된 작품과 오염되지 않은 작품 사이에서

이를테면 나찌에 협조한 H. 카라얀과 그가 지휘한 수다한 작품들...
                      변절한 춘원 이광수의 작품들,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의 혈의 누 ....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뭘까?  세대를 뛰어넘어 종족보존을 위해 우리 몸뚱아리가 본능에 이끌리어 DNA를 전달하는 숙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이 글을 읽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자.

 

숙명으로 단순작업이 직업으로 주어진다면

  ( 단순작업인 종이를 세는 작업만 하여도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전혀 문제없을 정도로 보수가 듬뿍 주어진다.  그리고 감정이입의 효율을 위해서 필자와 고종석을 등장시키겠다.)

 필자가 고종석에게 A4 종이 매수를 세라고 했다고 하자.   하염없이 하루 이틀 한달 일년 10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존재는 인성아닌 신성의 그 무엇,  즉 유한성을 초월한 존재자라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든 귀한 존재요, 유한한 존재이다.  고종석에게 여생 중에 남은 시간이 겨우 독서할 수 있는 하루라는 시간뿐이라고 가정하자.   흠결있는 책과 하자없는 책 중 무엇을 소비할까?

 

 

유한성(동적으로 효율성)

 

적어도 합리적 사고가 가능하다면 해답은 빤하다.  유한성은 실존적 인간이 살아내며 항상 염두에 굴리는 화두이다.  인지적 구두쇠, 단순한 일의 기계화, 무미건조한 단조로운 일의 기피, 조금 더 신선한 뭔가의 갈구.. 이러한 경향은 모두 유한성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유한성(stock)을 뒤집어 동적(flow)으로 파악하게 되면 곧 효율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유한하니까 효율을 추구하고 효율추구는 곧 인간세계의 역사적인 굵직하고 면면한 노선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른바 산업혁명의 배경엔 효울성의 추구라는 도구의 발전이 개입돼 있다.  이 효율 추구는 그 시야만 다를 뿐 어느 시대이든 그 누구든 추구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보편성을 갖는다.

따라서 효율적인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이다.  비효율이 횡행하는 사회는 곧 비합리적인 사회이고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불완전한 사회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근시안적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보다 거시적인 광역적인 완전한 정보를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라야 이상적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는 주제가 벗어나므로 약함) 왜냐하면 자원의 비효율성을 낳고 있다는 혐의를 오늘의 자본주의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그리 쪼개써야 하는 이유

 

굳이 유한성이나 효율성을 염두에 둬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짐승과 달리 인간은 먹고사는 리비도(Libido : Freud가 아닌 Jung)가 해결되면 그 후로 동물과 달리 미를 추구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의 확장

 

자아정체성을 확장해 보자.  우리 모두는 물리적인 공간상에 배타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즉 유일무이하다.  게다가 시간적 궤적을 겹쳐 파악하면 각자의 존재는 절대 겹칠 수 없는 독특한 좌표(바코드라 해도 좋다)를 지닌다.  그 누구도 표준이 될 수 없는 절대적 표준들이 수다하게 널린 상대적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에 내몰린다.

 

이로부터 우리는 거창한 자연법 혹은 신앙, 관습을 배제하고서도 모든 사회규범을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우들의 경우, 그들은 평균보통인 - 장애를 갖지 않은 - 들의 기준으로 형성된 시스템하-사회적 효울이라는 미명하에-에서 수용을 강제당하며 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장애우들을 위한 정부지원은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권리에 대한 대가)이지 은혜가 될 수 없다.  우리 정상인들은 장애우들에게 한 풀 꺾이는 빚쟁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의 전환이란 생각할 수 있는 존재들임에도 전혀 쉽지 않다. 

 

유한성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공공재(경제학적 개념이 아님)인 경제적 자원이나 개개인의 시간이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따라서 책을 사회에 유통시키려는 작가는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 글 솜씨가 없는 필자가 이 글을 써서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다면 유한한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소모케 하는 죄악이다 -

 

따라서 적어도 보편적 이성에 미달하는 즉 함량미달인 작품이 세상에 유통되어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케 한다면 저승에 가서 천벌을 받아야 한다.  (좀 극단적이고 과격한 표현인가?  : ) )

 

같은 맥락에서 정치에서의 인물의 인품과 이념간의 괴리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정치지형에서의 인물의 평가는 더 엄혹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혀 비효율적인 이념을 추종하는 날엔 공동체의 절대이념과 상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유한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오염된 책과 그렇지 않은 책들간의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는 오염된 책을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런 괴리된 작품이 곧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야 우리는 간혹 있을 수 있는 누군가의 무의미한 시간 소모를 차단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오염된 책에서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는 - 사실 없을 것이지만 - 합리성과 배치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한정적으로만 소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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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창조론

이 대조적인 관점을 바꿔본다면 
인간있고 규범있나 혹은 규범이 만들어진 다음 인간있나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직관적으로 느낀다면 
규범이란 곧 부단하게 변화하는 삶의 양태를 필요에 의해 고정시킨 집단의지를 말함을 알게 된다.
굳이 M. 샌덜이나 J. 롤즈의 노력도 크게 의미없는 
우리들의 관계에서 필요에 따라 수립된 규약이 규범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리하여 각 사회집단별 규범의 다양성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최근의 뇌관련 연구의 집대성인 뇌 이야기(BBC. Brain Story)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참고한다면 
칸트의 인식론의 집대성인 순수이성비판의 인식구조나 구조주의자들의 이른바 인식구조, G. 프로이트나 G. 융, 혹은 아들러나 프롬 아니 최근의 인지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우 .... 현대판 이단아인 메를로 뽕티의 몸철학의 논의들이 모두 
사실을 토대로 한 게 아니라 상상위에 구축됐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상상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 상상에 수긍하기 쉽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론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면 폐기만이 답이다.  
현실을 이론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은 자연에 거스르는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일이니까...

우리가 지각하는 오감(시, 후, 미, 청, 촉)외 6감 중에서 대표적으로 시각은 양방향성 작용으로 우리에게 정보가 제공된다는 사실...
심지어 단순히 망막에 상이 맺혀 그 빛에 의한 자극을 감지해서 신경회로를 통해 뇌에서 처리하여 우리가 시야에 관한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구조, (특히 시각지각)에 대한 이상한 낌새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캐치할 수 있다.
핑크렌즈 효과나 피로해지기 쉬운 후각, 암적응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시각의 신뢰성의 문제, 
맡는 게 모두가 아닌 쉽게 피로해져 버리는 후각의 그 후의 신뢰성, 
심지어 귀도 제대로이지 않다.
예를 들어 큰 스크린에서 캐릭터들의 입에서 우리는 흔히 말이 나온다는 착각 속에서 스크린을 주시한다.

그뿐 아니다.

감정은 매 판단마다 부수적으로 생산된다.  
우리의 지나온 기억들의 축적인 과거를 기초로 매 순간 불쾌나 유쾌를 판단하는 가치의 세계를 본다면 
감정에 관한 기존의 책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 지를 알 수 있다. 
줄여 말하면 판단있고 감정있는게 아니라 판단자체가 감정과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며 그 감정은 조건에 대한 결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희노애락이라는 감정들은 특정조건하에서 부수적으로 유발되는 결과들이다.
우리는 화를 내기 위해 지각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임의로 화를 낼 수 있거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굳이 연기수업을 따로 할 필요없고 그런 분야에 특화된 연기자들이 큰 급부를 받을 이유가 없다.
 
생존이라든가 경계점수라든가 혹은 사회규범에 따른, 혹은 진화과정에서 내장된 (집단적)무의식이라는 그 본능에 의한 환경에의 적응의 필요성에서 화학적 변화가 초래하여 그에 대응하는 우리의 감정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

돌이 옆에서 날아오는데 기분이 쐐~해서 고개를 싹 돌렸는데 주먹만한 돌이 머리를 향해 날아와서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려 피한 적이 있는가? 혹은 피했다고 하자...
기존 이론에 의하면 감각-지각-처리-반응이라는 도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없다. 오히려 일단 움츠려 처리한 다음 후에 휴~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 뱉는 것이다.

---
나이테가 점차 두툼해짐에 따라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을 감정이나 시간 소모없이 반사적으로 하다시피 익숙하게 처리한다. 이른 바 인지적 구두쇠가 된다거나 유사한 상황을 처리하는 스타일이 굳어진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내는 매 순간의 삶들이 미래의 불쏘시개가 된다면 그 삶은 스스로운 위한 의미있는 삶일 수 없다.
매 순간 순간 기억속으로 소멸해 가는 때마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  바르게 추구하는 것, 제대로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헛되이 사는 삶을 피하는 것이다.
기억들과 심상들의 집적인 과거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의 경계에 선 현존재인 우리들이
  그저 DNA를 후계자에게 전달하는 운반체 역할만 한다면...  그 존재는 이성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성이 있는데도 잘못된 얄팍한 지식을 기초로 한 오류위에 쌓아올린 삶이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삶일까?

이 곳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주장되는 의미가 무엇일까? 왜 인간들은 자기 입장을 얘기하며 혹은 누구를 지지하는 걸까?
그것은 불만이나 만족을 위한 시도의 한 양태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들의 삶의 의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정치나 경제는 사실 우리 진정한 삶의 하나의 방식이나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수단들을 통해 효율적으로 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수단에 일비일희하면서 목매는 삶이 아닌 바에야
그 수단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수단들이 제대로 작동하는 지에 더 관심을 쏟을 일이다.

... 글들을 읽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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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독이 유행처럼 만연해 있다.


짝을 찾지 못해 고독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워 고독이고


이혼해서 고독하고

옆에 있어도 고독하고

여럿 속에서도 고독하고...


그러나 철학적 고독은 이런 세속적 고독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소크라테스, 미래의 미륵불과

오늘의 나 사이에  아무런 공유할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마르크스는 어떨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안출하며 저술할 때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인간세상을 구하고 역사의 궁극원리를 규명해 냈다고 확신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기하의 인민들과 더 효율적으로 소모됐을 자원들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희생되고 소모되었다. 


그가 확신했던 보편적 가치라 믿었던 과학적 사회주의가 한갓 오류투성이의 망상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진정 고독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저승에서 엄청난 벌을 받고 있지 않을까?




I.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이를테면 유한성의 극히 일부만 건드렸다.

                실천이성비판은 동적 효율성이라는 극히 부분적인 타당성만을 간파한 내용이다.


따라서 칸트도 참 외롭고 고독할 것이다.



세상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비관한 석가도 외로울 것이고

이슬람의 저항운동을 보건대 예수도 매우 고독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진정한 고독이란 이렇게 보편적 진리에 발을 담그지 않아 영겁의 세월 속에서 감수해야 할 소통단절의 상태일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주어진 삶을 영겁의 시간속에서 공유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이 마감하고 결코 끝나지 않을 영겁의 영원속에서

처절하게 고독을 만끽할 것인가?


그래서 유한한 우리는 자신을 날마다 초월하여 진리를 구하며, 삶을 허비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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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선악과 인간의 등장 순서가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물음은 당연히 '인간있음 후에 선악있다'이다.  마치 '인간있고 국가있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었다',  즉 국가는 절대적 목적가치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도적,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충성 어쩌구 저쩌구 민족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런 투의 얘기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를, 인간의 목적인양 호도하는 것으로써,  국가와 이해관계가 큰 이익단체나 특정 개인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부르짖는 더러운 밥그릇 지키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그런 사회적 태도가 극성인데, 사람위에 있는 국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래왔다. 군국주의였던 일본의 패망, 전체주의적인 나찌 독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모두 유사하다.  얘를 들어 독재자였던 친일파 박정희를 찬양하고 유신체재를 미화, 숭배하는 영남인이 있다면 그 자는 박정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수혜를 받아왔음을 절감하고 그 밥그릇을 끝끝내 지켜야겠다는 더러운 - 남의 밥그릇에 담겨야 할 밥을 담았으므로 - 이기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 '선악과'의 선후도 당연히 인간이 먼저이고 선악과가 뒤에 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사람 인, 사이 간'의 조어로서 2인 이상의 이야기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선악이란 무엇인가?


가치판단이다. 가치판단이란 기준을 전제한다.  그 기준이란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기대나 되고자 준거로 삼은 꿈, 이상이나, 나라나 사회에서 지켜라고 요구하는 사회규범, 종교인들의 경전, 계약서 등이 되겠다.

그러므로 가치판단 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 못한 유아기나 미숙아는 선악의 분별을 할 수 없다.  물론 G. Freud나 G. Jung이 말하는 Libido같은 본능,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내장기준(default standard)은 선악의 관념으로 분화되기 전의 단순한 감정의 차원에 불과하다.

즉, 불에 데일 때 인간은 '앗! 뜨거!'라며 아픔을 느낀다. 이게 감각, 지각이며 아픔을 느낀 후에 그 아픔에 대한 평가인 싫다느니 기쁘다느니 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선하다 악하다의 차원의 도덕적 평가 이전의 단계이다.


즉, 평가주체로서의 자아형성 전의 가치판단은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사회적 평가처럼 책임(능력)없는 상태를 비난의 객체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선·악의 관념은 몰가치적 물리적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유주체가 관계맺는 양상과 준거 사이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므로 선·악은 곧 사유주체의 경향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성악설 성선설은 잘못 선정된 아젠다이다.


결국 갭(기준과 사유나 언동간의 벌어진 틈)해소의 경향성에 관한 물음인데, 갭을 어떻게 해소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갭해소양상도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성악·선설로 이분하여 한 쪽을 택하는 것은 보편적 인성론이 될 수 없다. 무의미한 아젠다인 것이다


즉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 웅변하듯 인성이 악이냐 선이냐는 사람이 보는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은 관점에서는 논제로서 잘못 선정된 것이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선, 악의 판단을 자아형성전의 유아(미성숙아)들의 언동을 평가대상으로 해서 가름하는 것은 어떤가?

그 관점의 논의는 실익이 없다.  선`악의 평가가 불가능한 즉 미분화된 존재들의 언동을 기성세대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떤 실익이 있을까?  아마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인성론에서의 필자는 선택은 성악설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어떤 개체가 성장과정에서 외계와 관계맺을 때 절대적으로 타인의 영역과 겹치는 경계, 더 나아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타인과의 간섭의 연속인 양상으로 점철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악설이 타당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형태의 인성론은 사람의 본질과 무관한 환경과 관련된 인성론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인성론으로서의 성선설, 성악설은 잘못 설정된 소모적인 아젠다일 뿐이다.


 2016130() 맑음 2016320() - 사색의 기록일

자아의 확장

시간적 확장 : 과거의 나(기억, 조상) - 현재의 나 - 미래의 나(기대, 후손)

공간적 확장 : 나-> 우리-> 민족 -> 인류 -> 생명



불공정한 경쟁의 룰이 장착된 사회를 방치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다.

왜냐하면 '나'들이 서로 경쟁하는데 누구에게 족쇄차고 뛰라거나 자전거타고 편히 가라거나 하는 것이 공정한 경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내가 자전거에 올라탔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내가 족쇄차고 뛸 경우도 있다.  이것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동기가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배경이라면 누군가가 난 시행착오로 스스로 겪은 다음 대답해 줄게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지위를 영속적으로 고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동기가 되지 않고도 우리는 각자가 견줄 바 없이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라는 것으로부터

누가 우대받거나 누가 천대받는 것 자체가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  이렇게 지극히 간단한데도 그것을 발견한지가 겨우 250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귀중한 교훈임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동 장착돼 있지도 않아서 선민의식이나 열등감에 빠져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적지 않다.


 

각자는 다르다


어떤 생명체든 (오늘 날의 과학 수준에서) 일정한 물리적 공간과 생명을 얻은 특정 시각이 존재에 각인되어 있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전대통령은 경상도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우주 역사에서 그 어떤 생명이라도 절대 겹칠 수 없다.  생명을 얻은 시각이야 겹칠 수 있겠지만 배타성 있는 물리적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생명체 - 물질 - 라는 특성상 유일무이한 절대적 바코드(barcode)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다르다.


각자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견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똑같다.  이러한 점을 유감스럽게도 최근에서야 발견되었다.  근대사회, 근대이성이 발견의 주체이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고귀한 존엄한 존재인지라 누가 누구보다 우위이고 열위일 수 없다.



이것을 확장해 보자

생명체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절대적 공간좌표를 갖는 물리적 공간에 대해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없어서는 안 될 구성요소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명승지니 혹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니 하면서 특정의 물리적 공간을 선호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일종의 환상적인 준거(표준)를 만든 탓이다.

중국의 장가계라는 비경(?)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장가계를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경이 장가계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눈에는 희소성이나 색다름이 아닌 일상 그것일 게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유산이니 명승고적이니 하는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상술이 개입되어 있거나,  특정 잣대질이 개입되었거나,  보편적인 인간이 선호하는 요소가 있거나이다.


보편적인 인간이 선호하는 요소때문에 유명한 물리적 공간이라면 그것은 정말 가치있을 것이다.  그러한 곳이 어디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섬긴다는 것,  인간이 인간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오늘의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초라한 자신임을 드러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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