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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심리학 - 민낯 1] 사이비좌파 진중권

시민25 2016. 3. 23. 16:48

진중권의 새論새評] 전국의 향토인이여

이른바 철학을 전공한 진중권은 (좌파의) 인기 패널로 꽤 소비되는 듯 하다. 그의 최근 글을 통해 진중권을 읽어보자.

(이 글은 위 글을 토대로 한 이른바 정서심리학적 인간 조명이며 시간나는대로 한국의 지식인, 정상모리배들을 읽어 볼 생각이다. 마침 추천게시판에 진중권의 글이 걸려 있어서 1번으로 당첨시켰다.)    



 선별적 통계 인용과 아전인수적 해석 

 

좌파라면 유물사관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본다. (사실 진중권의 전공인 미학이란 학문은 I.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비롯되는데 좌파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음.) 그래서 하부구조인 생산시설에 주목해야 하고 한국의 생산시설의 인위적인 공간적 편중이 어떤 결과에 귀착될 것인지의 답은 뻔하다. 따라서 진중권의 이런 선별적 통계의 인용과 해석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의사(Pseudo)통계조작이다. 이것이 공공에게 소비되는 상황이므로 더욱 비난가능성이 커진다.

 

 

진중권의 지역주의 양비론

 

진중권은 한국사회의 향우회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진중권은 반기문의 편지를 들먹이며 지역색이 추가됐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향우회정치의 원인이나 그 해법에 대한 진중권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짐짓 서울사람의 눈을 빌리거나, 자신의 탈지역색을 부각시키거나, 견강부회적 통계까지 끌어오는 등, 실제 계산은 이른바 지역주의 양비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꼼수이다.

 

, 이렇게 세 가지 이상의 자료를 들이대며 정당화하는 진중권의 의식은 양 지역주의가 같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추청이 옳지 않다면, 즉 진중권의 지역주의 양비론 입장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면, ‘우리가 남이가식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진중권의 호남 향우회 정치와 같은 수위의 비난 글이 있어야겠다. 그러나 아마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위 글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및 성 차별 해소에 더 관심을 갖자라는 얘기인 듯 위장했으나, 호남의 향우회 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글이다. 왜 이렇게 편파적일까? 이른바 상식, 평등을 외치는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 지역주의를 왜 외면하는 것일까? 다름아닌 진중권이 영남패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향우회정치의 본질 정상모리배에게 놀아나는 감정적인 유권자들(?)

 

진중권이 자인하듯 정상모리배들이 판치는 한국정치판에서 집요하고 강고한 지역주의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진중권의 안목대로 서술하자면 지역색이 집요하며 강고해 보이는 유권자들은 정상모리배들의 유혹에 곧잘 휘둘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들이다. 과거 막걸리·고무신 선거때는 막걸리나 고무신을 얻었지만 그것마저도 없이 오로지 감정적 존재로 그려낸다. 집단에 대한 대단한 모욕이다.

 

진중권의 이같은 안목은 천박한 자아 · 사회적 성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본능적 직관이 호소하는 정서 즉, 차별에 대한 호남인의 분노야말로 호남 지역주의의 본질임이 명백하므로, 그것을 비난할 여지는 추호도 없다. 변방 지역민들의 일상을 옥죄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반감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정지지형의 이합집산은 곧 정치지형의 독립변수인 지역유권자의 향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호남 향우회 정치란 곧 얼마간 인간사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지역주의인 것이지, 반사회적 향우회 정치가 아니다. 정당한 몫에 대한 외침을 외면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반사회적, 반민주적 작태로써 비난 대상인 것이다.

 

 

 

양비론적 지역주의 입장에 선 지식인은 친일부역배

 

일제치하 친일부역배는 동포를 등쳐 호의호식한 족속들이다. 우리의 고통을 분담한 게 아니라 고통을 가중시킨 극단적 이기주의자요, 선민주의에 대항하지 않고 강자에 빌붙어 약자를 유린한 현실순응적 패배주의자, 기회주의자, 사대주의자요, 비인도주의자이다. 진중권같은 사이비 지식인의 실질은 다름아닌 친일부역배와 다르지 않다.

 

 

 

차별을 선별적으로 식별하는 괴상한 진중권

 

진중권에겐 성, 계층, ·촌간 차별은 보이지만 지역간 차별은 보이지 않는다. K.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따르면 물적인 하부구조는 모든 것의 독립변수이다. 따라서 지역에 편중된 생산시설은 지역사회나 문화나 지역정서를 규정하는 독립변수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지역정서나 지역감정같은 상부구조를 독립변수라고 본다. 이른바 좌파적 시각으론 수용할 수 없는 안목이며,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사이비 좌파이다. 지역주의 양비론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노무현이나 문재인과 다름없고, 좌파와 같다. 즉 한국 좌파는 사이비 좌파이다.

 

 

한국좌파는 친일부역배이자 민주주의의 적

 

한국좌파를 일제치하로 옮겨 평가해 보자. 약자의 아픔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짓밟고 유린하며 강자에 빌붙었다. 강자(영남패권주의자)에게 항의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점에서 현실순응적 패배주의자이며 사대주의자요, 약자를 유린하는데 조장·기여한다는 점에서 극단적 이기주의자이며, 패륜적 기회주의자이며, 사회를 개악하는데 일조하는 측면에서 반사회적, 비이성적인 자들로 영락없이 친일부역배이다.

 

 

우리 헌법에 장착된 평등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반헌법적이요, 주권자(민주)의 의지인 헌법을 거스른다는 면에서 비민주적인 자들이다. 흔히 독재자를 민주주의의 적, 그래서 반민주적이라 한다. 진중권 같은 민주주의의 적을 소비하는 매체가 있다는 것, 곧 한국사회의 자화상이요 영남패권주의에 장악된 한국사회라는 반증이다.

 

 

 

향우회정치

 

인간이 모두 이기적이듯 향우회 정치는 당연한 것이다. 좌파들이 이념정당 어쩌구 하는데 사실 그 빌어먹을 이념 때문에 냉전과 남·북 분단, (우리의 후생을 윤택하게 했을) 정례적 국방비로의 천문학적인 규모의 국부의 유출, 그 으슥한 배경에 K. 마르크스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인간의 이기적 동기를 헤아리지 못한 유물사관을 토대로 구축된 공산사회는 결국 소멸되었다. 우리는 공자나 예수나 부처나 마르크스를 모두 조망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초월할 수 있음에도 오늘날 한국좌파는 여전히 낡고 형해화된 유물사관을 어두운 구석에서 부둥켜안고 부질없이 부활의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어떻게 세뇌되면 130년이나 낡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가 뱉은 배설물을 탐하며 금과옥조처럼 귀중히 여길까? 긍정적인 인본주의적 요소보다 인류역사에 끼친 해악이 훨씬 컸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아

 

한국식 좌파들은 부디 깨어나라. 친일부역배 같은 반역사적인 인식을 거두고, 질곡에서 신음하는 변방인들을 외면하지 말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부디 미몽에서 하루바삐 깨어나라.

 

진정 한국사회를 진보적으로 인도하려는 열망이 있다면, 그깟 마르크스를 왜 초월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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