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현재의 불미함으로 가릴 수 없다.

 

과거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동남아를 석권하자, 그 때까지 절개를 지키던 문인이나 명망가들이 그 위세에 놀라서 이내 패배의식에 휩싸여 동포를 배신하고 일신의 영달을 꾀하게 된다. 오늘 날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자들을 친일부역배라고 멸시하고 혐오한다.

 

가소적인 존재인 인간인지라 상황에 따라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개선 아닌 변신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게다가 반사회적 변신일 때는 오로지 비난의 대상일 뿐이다.

 

지난 날 순수한 마음으로 독재에 대항하여 민주를 외쳤던 인간들이 권력의 단맛을 보자 이내 권력 해바라기가 되어 온갖 권모술수와 정략을 일삼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파행이 일상화 되었다.

 

 

좌파의 이단 한국의 사이비 좌파, 변절한 운동권

 

 

요즈음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운동권이랍시고 과거 이력을 침소봉대하여 마치 사회에 대단한 기여를 한 것 마냥 미화하고 그것을 빌미로 권력에 발을 내딛은 다음에 곧 권력의 단맛에 취해 온갖 전략전술을 동원한 권모술수와 이미지 조작, 정치의 종교화를 꾀하여 권력의 확장에 몰두하는 반역사적인 부류가 있다.

 

지역주의 양비론자인 노무현과 그 신도들이 좋은 예이다.

 

 

반세기 가까운 긴 세월동안 한국사회에서 영남퍼주기식 수출주도형 불균형성장정책이 자행되었는데도 이것을 교정하기는커녕, 심화된 지역격차를 기정사실화하고 인위적으로 기울게 한 불균형 상태에서 능력껏 경쟁하자고 하는 파렴치하고 비양심적인 족속들이 다름아닌 노무현과 그 파당들이다. 이들을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자라고 한다.

 

반 세기 가까이 변방인의 희생으로 한국사회의 주류가 된 영남의 눈치를 보며 당당하게 정의와 평등을 외치기는커녕 소외된 변방인들을 집단적으로 모욕하며 급기야 이지메에 앞장서기까지 한다.

 

 

자유를 위해 투쟁한 이력을 가졌다면 다음 단계의 지향은 실질적평등인 경제민주화이다. 그러나 한국의 운동권은 실질적 경제민주화 중 대표적 현안인 지역간 차별로 빚어진 불평등을 외면한다. 명백히 변절인 것이다.

 

이 변절의 최선봉에 자살한 노무현이 있고 그 광신도들이 이제 한국의 제1당이 되었다. 1당인 더민주당에 몸담은 의원들 모두 변절자라거나 위선자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시아에서 FTA를 제일 먼저 체결한 노무현, 지역주의 양비론으로 호남의 소외를 공식적으로 외면하며 양극화를 심화시킨 그들을 4.13 총선에서 호남 민심은 영남패권주의자라고 낙인찍었다.

 

좌파라면 자유를 위한 투쟁보다 평등을 가장 우선시한다. 그러나 한국좌파들은 지역적 차별로 인한 불평등을 외면한다. 좌파의 이단이다. 매우 선별적으로만 평등을 관철하려는 좌파들은 좌파가 아니다. 사이비 좌파인 것이다.

 

 

한국사회에 정의가 살아 숨쉰다면 이번에 사망선고 받은 변절한 운동권과 사이비 좌파는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내며 조만간 사회에서 매장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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