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창조론

이 대조적인 관점을 바꿔본다면 
인간있고 규범있나 혹은 규범이 만들어진 다음 인간있나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직관적으로 느낀다면 
규범이란 곧 부단하게 변화하는 삶의 양태를 필요에 의해 고정시킨 집단의지를 말함을 알게 된다.
굳이 M. 샌덜이나 J. 롤즈의 노력도 크게 의미없는 
우리들의 관계에서 필요에 따라 수립된 규약이 규범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리하여 각 사회집단별 규범의 다양성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최근의 뇌관련 연구의 집대성인 뇌 이야기(BBC. Brain Story)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참고한다면 
칸트의 인식론의 집대성인 순수이성비판의 인식구조나 구조주의자들의 이른바 인식구조, G. 프로이트나 G. 융, 혹은 아들러나 프롬 아니 최근의 인지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우 .... 현대판 이단아인 메를로 뽕티의 몸철학의 논의들이 모두 
사실을 토대로 한 게 아니라 상상위에 구축됐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상상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 상상에 수긍하기 쉽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론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면 폐기만이 답이다.  
현실을 이론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은 자연에 거스르는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일이니까...

우리가 지각하는 오감(시, 후, 미, 청, 촉)외 6감 중에서 대표적으로 시각은 양방향성 작용으로 우리에게 정보가 제공된다는 사실...
심지어 단순히 망막에 상이 맺혀 그 빛에 의한 자극을 감지해서 신경회로를 통해 뇌에서 처리하여 우리가 시야에 관한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구조, (특히 시각지각)에 대한 이상한 낌새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캐치할 수 있다.
핑크렌즈 효과나 피로해지기 쉬운 후각, 암적응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시각의 신뢰성의 문제, 
맡는 게 모두가 아닌 쉽게 피로해져 버리는 후각의 그 후의 신뢰성, 
심지어 귀도 제대로이지 않다.
예를 들어 큰 스크린에서 캐릭터들의 입에서 우리는 흔히 말이 나온다는 착각 속에서 스크린을 주시한다.

그뿐 아니다.

감정은 매 판단마다 부수적으로 생산된다.  
우리의 지나온 기억들의 축적인 과거를 기초로 매 순간 불쾌나 유쾌를 판단하는 가치의 세계를 본다면 
감정에 관한 기존의 책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 지를 알 수 있다. 
줄여 말하면 판단있고 감정있는게 아니라 판단자체가 감정과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며 그 감정은 조건에 대한 결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희노애락이라는 감정들은 특정조건하에서 부수적으로 유발되는 결과들이다.
우리는 화를 내기 위해 지각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임의로 화를 낼 수 있거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굳이 연기수업을 따로 할 필요없고 그런 분야에 특화된 연기자들이 큰 급부를 받을 이유가 없다.
 
생존이라든가 경계점수라든가 혹은 사회규범에 따른, 혹은 진화과정에서 내장된 (집단적)무의식이라는 그 본능에 의한 환경에의 적응의 필요성에서 화학적 변화가 초래하여 그에 대응하는 우리의 감정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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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옆에서 날아오는데 기분이 쐐~해서 고개를 싹 돌렸는데 주먹만한 돌이 머리를 향해 날아와서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려 피한 적이 있는가? 혹은 피했다고 하자...
기존 이론에 의하면 감각-지각-처리-반응이라는 도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없다. 오히려 일단 움츠려 처리한 다음 후에 휴~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 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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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가 점차 두툼해짐에 따라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을 감정이나 시간 소모없이 반사적으로 하다시피 익숙하게 처리한다. 이른 바 인지적 구두쇠가 된다거나 유사한 상황을 처리하는 스타일이 굳어진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내는 매 순간의 삶들이 미래의 불쏘시개가 된다면 그 삶은 스스로운 위한 의미있는 삶일 수 없다.
매 순간 순간 기억속으로 소멸해 가는 때마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  바르게 추구하는 것, 제대로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헛되이 사는 삶을 피하는 것이다.
기억들과 심상들의 집적인 과거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의 경계에 선 현존재인 우리들이
  그저 DNA를 후계자에게 전달하는 운반체 역할만 한다면...  그 존재는 이성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성이 있는데도 잘못된 얄팍한 지식을 기초로 한 오류위에 쌓아올린 삶이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삶일까?

이 곳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주장되는 의미가 무엇일까? 왜 인간들은 자기 입장을 얘기하며 혹은 누구를 지지하는 걸까?
그것은 불만이나 만족을 위한 시도의 한 양태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들의 삶의 의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정치나 경제는 사실 우리 진정한 삶의 하나의 방식이나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수단들을 통해 효율적으로 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수단에 일비일희하면서 목매는 삶이 아닌 바에야
그 수단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수단들이 제대로 작동하는 지에 더 관심을 쏟을 일이다.

... 글들을 읽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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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독이 유행처럼 만연해 있다.


짝을 찾지 못해 고독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워 고독이고


이혼해서 고독하고

옆에 있어도 고독하고

여럿 속에서도 고독하고...


그러나 철학적 고독은 이런 세속적 고독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소크라테스, 미래의 미륵불과

오늘의 나 사이에  아무런 공유할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마르크스는 어떨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안출하며 저술할 때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인간세상을 구하고 역사의 궁극원리를 규명해 냈다고 확신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기하의 인민들과 더 효율적으로 소모됐을 자원들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희생되고 소모되었다. 


그가 확신했던 보편적 가치라 믿었던 과학적 사회주의가 한갓 오류투성이의 망상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진정 고독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저승에서 엄청난 벌을 받고 있지 않을까?




I.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이를테면 유한성의 극히 일부만 건드렸다.

                실천이성비판은 동적 효율성이라는 극히 부분적인 타당성만을 간파한 내용이다.


따라서 칸트도 참 외롭고 고독할 것이다.



세상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비관한 석가도 외로울 것이고

이슬람의 저항운동을 보건대 예수도 매우 고독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진정한 고독이란 이렇게 보편적 진리에 발을 담그지 않아 영겁의 세월 속에서 감수해야 할 소통단절의 상태일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주어진 삶을 영겁의 시간속에서 공유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이 마감하고 결코 끝나지 않을 영겁의 영원속에서

처절하게 고독을 만끽할 것인가?


그래서 유한한 우리는 자신을 날마다 초월하여 진리를 구하며, 삶을 허비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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