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마치 불가침의 절대성역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나온 어떤 저작이든 불가침의 신성을 부여해야 할까외부와 끊긴 내면에서 뒹구는 생각이라면 모를까 외부로 투사되면 벌써  어떤 의미를 갖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와 다르지 않은 층위의 권익과 충돌하여 신성을 앗길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타인의 명예라는 권익 위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장정일이 주장의 가치를 숫적으로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맥락이 같고 사회적 합의로 명문화 돼 있으며, 문명국의 일반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국어를 제대로 떼지 못한 작가들이 수두룩하지만, 문화권력을 얼마간 갖고 있는 작가라면 그 사회적 책임의 무게가 어떻다는 것을 치열하게 깨달아야 한다.

 

  책읽는 소감을 게시하는 것은 하나의 소통의 수단이다. 따라서 책읽기는 신이 읽는 것처럼 완벽한 책읽기를 이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한정된 능력만을 가진 인간인 까닭으로 볼 수 있는 것만큼만을 읽고 쓸수 있음 또한 자명하다.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산한 후, 그 책은 2013년이라는 특정시각의 박유하의 분신이 되어 독자적 존재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 책(이하 녀석이라 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빼면 이미 그 녀석이 아니며, 그 녀석의 머리카락 한 올을 그 녀석이라고 할 수 없음 역시 당연하다. 즉 제국의 위안부를 평가할 때,  체계적 독해에 실패하고 일부만 쳐다보는 식의 평가는 사회적 공해이다.

 

  저자 박유하는 줄곧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신속한 해결을 바라며 모든 시도가 선의임을 말하지만 그 녀석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균열과 파탄된 사상적 기반위에서 횡설수설하며 아픈 상처에 소금뿌리기, 편파적 편들기, 본질 비틀기가 나의 실체라고 ...

 

유감스럽게도 볼 수 있는 자만이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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