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프랑스 브르타뉴지방의 한 맥도날드 가게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종업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는 지역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알려졌다. 수천년 전 영국 땅에서 해협을 건너온 겔트족의 후예들로서 16세기에 프랑스에 완전 통합된 브르통(브르타뉴지역 사람들을 일컫는 말)은 그들의 말이 따로 있을 만큼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 중에 프랑스에서 분리, 자치 혹은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거니와 가장 과격해 극소수파로 몰린 집단이 테러 행위까지 저지른 것이다. 최근에 이들과 스페인 접경 바스크 지방의 분리주의자들이 연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당국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브르타뉴지방 이외에도 프랑스는 바스크 지방과 코르시카 섬 등 자기들의 언어와 문화 유산을 지니고 있는 지역의 분리주의자들 때문에 자주 풍파를 겪는다. 그런데 이번 테러가 국민국가의 상징이 아닌 세계화의 상징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세계화가 국민국가의 약화를 불러온다는데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에 불만을 품어온 지역 할거주의자들은 세계화에 반대하기보단 부추겨야 될 성싶기 때문이다. <르몽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사설에서 테러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했는데, 프랑스 중앙집권주의의 무게를 덜어야 할 것이라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위에서 보듯 프랑스판 지역주의는 문화적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에 한국의 지역주의는 이런 실체가 없다. 실제로 30여년 전까지는 몰랐던 지역주의였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던 것이 박정희 시대 이래 머릿수, 곧 유권자수를 염두에 둔 정치적 계산에 따른 인위적 행위들로 한국판 지역주의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고 또 자라났다. 두 나라 지역주의의 발생 근거의 차이는 그 양상의 차이로 나타난다. 즉 프랑스의 지역주의가 `중앙'(정부)에 대해 소수이며 약자인, 그러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의 표현이라면, 한국의 지역주의는 `우리가 남이가'에서 보듯이 `남'에 대칭되는 `우리'의 표현일 뿐이다. 프랑스의 지역주의가 `자기 주장'을 앞세운다면 한국의 지역주의는 배타성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영·호남의 지역주의가 `남'과 `우리'를 구분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남과 우리의 크기와 구성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30여년 동안 지속된 영남의 패권은 크기로 이미 우위인 영남의 `우리'에게 점점 `중앙'까지 아우르게 했고 그래서 호남만이 `남'을 뜻하게 되었다면, 호남의 `우리'는 더욱 더 변방으로 몰려났다는 점이다. 바로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이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에 대한 양비론적 태도는 이 과정을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으려는 데서 온 것이며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수의 횡포를 감추는 것이다. 2년 전 김대중 정부의 성립은 영·호남의 `우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변방의 `우리'가 뜻밖의 결과에 어쩔 줄 모르며 조심스럽게 기뻐했다면, 패권의 `우리'는 `남'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 강고히 했다. 여기에는 수구 언론들의 부추김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이번 총선은 김대중 정권 2년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김대중 정권 자체가 준 충격에 따른 반응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반인권적 전력을 가진 사람에게 몰표를 주는 `묻지마'식 투표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총선은 끝났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지역주의와의 결별이 우리들에게 가장 중대한 과제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남북 분단된 마당에 정체성의 차이가 없음에도 `남'이니 `우리'니 구분하는 작태는 이중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홍세화
<오마이뉴스 2000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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