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영구혁명이라는 관념이 있다. 인간은 전체성을 타고 태어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평생에 걸쳐 부단히 스스로를 초월해가야 된단다. 나의 묶음인 (과거의) 우리를 싫어하며 부단히 오늘에 이르기 이르른 것이 우리네 역사일 것이다.

이따금 내가 영국에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국이란 곳에서 천형처럼 과거를 부정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되돌아 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고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인간이기 때문에 계급이 발명되기 전엔 청동기 시대 이전에 태어나고 싶다.

미래의 우리들도 역시 (오늘의) 우리들의 역사들 들춰보며 나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제대로 된 혜안을 가졌다면 아마도 계급이 발명되기 전시대인 선사시대가 아니라면 영원한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Utopia)이 없으므로 그 어떤 시대든 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유토피아에서 태어났다 상상해 보자. 우리 삶이 이렇게 비효율적이며 갈등과 무한경쟁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내는 상태가 아닐 것이다. 기왕에 주어진 유일무이한 각자의 삶이 보다 값진 삶을 살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라는 존재는 항상 과거의 흔적과 관련돼 켜켜히 자아를 구축하며 미래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14세기부터 16세기를 문예부흥(Renaisance)시기라고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그 때의 한반도, 이씨 조선이 출발해서 500년동안 반상계급으로 나뉘어져 예송과 사화와 당쟁이 얽혀 탐욕적인 양반들이 옴짝달싹 못하도록 옥죄며 피지배층의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하던 야만의 시절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만약 14세기 말 이성계가 아닌 보다 선각자적인 인물이 휘청이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며 한반도내 모든 구성원들이 개성과 이성을 한껏 피워올렸다면 세계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리라.

우리가 과거를 성찰하며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유적지를 답사하며 외양이나 수려한 산수만을 즐기거나 지엽적인 가치를 천착하여 그 우수성이나 유일무이한 유례를 바라보며 단편적인 감탄과 감상에 머무르는 한, 그리하여 (과거의) 우리들의 전체성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한 (오늘의) 우리들은 (미래의) 우리들로부터 또한 되풀이해서 과거를 부정당하는 역사의 되풀이가 될 것이다.

그러한 (현재의) 우리라면 밝은 미래가 있을 리 없다.

우리 사회가 최선의 사회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그리하여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공통된 아젠다인 (보다 지속적인) 연명을 위한 기본적인 수요를 충당한 연후에는 나머지 여생을 참 삶을 위해 즐기며 사는 사회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하층민들은 늘 욕망의 결핍에 허덕인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노예상태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에너지를 부당하게 탐욕스러운 타자에게 자각마저 없이 즐겁게 넘기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맹목적인 경제발전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그 역사를 구현하는 주체들이 가장 최선의 상태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아닌 어느 순간의 주체의 희생을 기초로 진행되는 역사는 비극이고 잘못된 선택이다. 그래서 지난 현충일의 문재인의 과거의 모든 흔적들을 미화하는 추도사는 헌법정신에 반하는 추도사이다.

이념갈등을 봉합하자고? 그게 가능할까?

문재인이 더불어민주당 후보로서 대권을 다툴 때 그 숱은 공약들은 우리들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들이었다. 또한 문재인이 소속된 정당과 다른 정당들은 이념의 스펙트럼의 다른 위치에 속하기 때문에 경쟁한 것이었다. 우리는 종교나 사상의 자유를 긍정한다. 20세기에 2번에 걸친 세계대전도 이념을 반영하는 전쟁이었고 한국동란도 또한 이념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다.

우리가 살아가며 여러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을 포기하고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마저 일정한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념없는 선택이나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추도사란 공허한 헛소리이다.

가난이란 그 자체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한 상태를 초래한 역사적 조건을 통찰하지 못하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이 수치요 죄악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가난을 수치라 여기고 가난으로부터의 무조건 탈출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빈곤한 철학을 드러냈다.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일부의 희생을 기초로 가난을 벗어나는 방식을 애국으로 상찬하는 사고방식은 희생당한 당사자를 모욕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백주대낮에 수천만의 국민들을 향해 오물을 투척한 것이 아닌가?

현충일 추도사란 긍정적인 가치를 더욱 벼리고 고양하여 빛나게 하고 부정적인 가치를 더욱 핍박하여 억누르는 것이어야 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성찰에 대해서 보더라도 문재인의 선배들 DJ나 노무현 - 은 적어도 그러했다. 개혁세력의 역사를 부정하는, 나아가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민주평화를 사랑하고 개혁을 지향하는 지지자를 부정하는 행태는 반헌법적이다.

그리하여 친일잔재의 철저한 청산이나 독재자 박정희의 철저한 청산을 언급하기는 커녕, 명분없는 파월로 인한 국민들의 무가치한 희생을 상찬하고, 착취당한 여공을 미화하고, (과거의) 우리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독(생계형) 전사들의 희생을 미화함으로써 참된 애국을 모욕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집단의지인 헌법을 모욕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일제의 침탈과 일제침략기의 만행을 어떻게 규탄하겠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문재인은 친일독재자 박정희를 호출하여 상찬하고 DJ나 노무현의 발자취를 부정함으로써 훨씬 수구적으로 퇴영적인 추도사를 국민에게 오물로 투척한 것이다. 얼마전엔 독재자의 딸을 뽑아 앉혀 부끄러웠는데, 오늘 나는 퇴영적 사고, 반헌법적인 망발을 불사하는 문재인을 부끄러워한다. 문재인은 이 사태를 자각이나 하고 있으려나?

이하 현충일 추념사 전문 -----------

62회 현충일 추념사

2017-06-06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예순 두 번째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거룩한 靈殿 앞에 깊이 고개 숙입니다.

가족을 조국의 품에 바치신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가유공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습니다.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습니다. 지나온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지킨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이었습니다.

항일의병부터 광복군까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의 신념이 태극기에 새겨졌습니다.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나가면서도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조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를 키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굳건하게 살아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국가의 예우를 받기까지는 해방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 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습니다. 기억하고 기리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목숨을 바친 조국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전선을 따라 늘어선 수백 개의 고지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피 흘렸던 우리 국군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짧았던 젊음이 조국의 땅을 넓혔습니다.

전선을 지킨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 위에 위국헌신을 맹세하고 후방의 청년과 학생들도 나섰습니다.

주민들은 지게를 지고 탄약과 식량을 날랐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철원 백마고지’, 양구 단장의 능선피의 능선’, 이름 없던 산들이 용사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이 서린, 슬픈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전우를 그곳에 남기고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오신 호국용사들에게 눈물의 고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백골로 묻힌 용사들의 유해, 단 한 구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이곳에 모시겠습니다.

전장의 부상을 안고, 전우의 희생을 씻기지 않는 상처로 안은 채 살아가는 용사들, 그 분들이 바로 조국의 아버지들입니다.

반드시 명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념에 이용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존경받도록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응당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입니다.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1달러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 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고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 분들게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 분 한 분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입니다.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 위에서 펄럭였습니다.

파독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6월 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습니다.

서해 바다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도상의 화해를 넘어서, 마음으로 화해해야 합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바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이념갈등을 끝내 주실 분들입니다.

이 나라의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을 끝내 주실 분들도 애국으로 한평생 살아오신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무엇보다,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보훈정책은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군사원호에서 예우와 보상으로, 호국유공자에서 독립, 민주유공자, 공무수행 유공자까지 그 영역도 확대되어 왔습니다. 국가유공자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함께 기려야할 군경과 공무원, 의인들을 예우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분들의 공적에는 많이 못 미칩니다.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국회가 동의해 준다면, 국가보훈처의 위상부터 강화하겠습니다.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이 애국심을 바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입니다.

애국이 보상받고, 정의가 보상받고, 원칙이 보상받고,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다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개인과 기업의 성공이 동시에 애국의 길이 되는 정정당당한 나라를 다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다시 한 번 순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열사의 애국헌신을 추모하며,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766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은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를 향해 야권 연대를 거부한 것···이적행위···제2 유신시대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

 

DJ3남 더민주당 김홍걸 : 김홍걸이 DJ와 묶여 소비된다는 현실에서, DJ와 김홍걸의 정체성이 얼마나 겹치는 지 살펴 볼 일이다.

 

DJ가 숫적 열세를 온 몸으로 껴안으며 민주화투쟁을 하는 자세는 곧 강자앞에서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비현실적 낭만적 독립투사와 같은 것이다. 김홍걸의 왈왈거리며 협박하는 태도에서 마치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가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야권 연대 거부?

 

새누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된다는 명분이 정의일까? 그것을 앞세우는 배경에 숫적 열세는 고립과 핍박으로 연결된다는 패배주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변방인들의 반패권적 선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이다. 정상배들이 떳떳하게 제 몫을 제 자리로 갖다 놓자고 한 적이 있었던가? 왜 새누리당에 필적하기 위한 연대를 주장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우열이 극명하게 지속되는 경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친노에게 없었다. 정치가 이해 조정의 결정판인데도 변방인의 손을 잡기는커녕 냅다 발까지 걸고 넘어뜨리며 허허거리는 문재인에겐 정치의 치열함이 전혀 없다.

 

 

영남패권주의자의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

 

김홍걸이 DJ와 이희호의 프리미엄을 멋지게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세속적으로 최규선 게이트에 얽혀 DJ에게 누를 끼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지 못했다대북송금 특검을 난도질하고, 지지자들 등져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삼성재벌과 결탁한 참여정부를 떠받들며 짖어대는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의 모습을 지켜보며 DJ와 세월 무상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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