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영구혁명이라는 관념이 있다. 인간은 전체성을 타고 태어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평생에 걸쳐 부단히 스스로를 초월해가야 된단다. 나의 묶음인 (과거의) 우리를 싫어하며 부단히 오늘에 이르기 이르른 것이 우리네 역사일 것이다.

이따금 내가 영국에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국이란 곳에서 천형처럼 과거를 부정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되돌아 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고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인간이기 때문에 계급이 발명되기 전엔 청동기 시대 이전에 태어나고 싶다.

미래의 우리들도 역시 (오늘의) 우리들의 역사들 들춰보며 나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제대로 된 혜안을 가졌다면 아마도 계급이 발명되기 전시대인 선사시대가 아니라면 영원한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Utopia)이 없으므로 그 어떤 시대든 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유토피아에서 태어났다 상상해 보자. 우리 삶이 이렇게 비효율적이며 갈등과 무한경쟁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내는 상태가 아닐 것이다. 기왕에 주어진 유일무이한 각자의 삶이 보다 값진 삶을 살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라는 존재는 항상 과거의 흔적과 관련돼 켜켜히 자아를 구축하며 미래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14세기부터 16세기를 문예부흥(Renaisance)시기라고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그 때의 한반도, 이씨 조선이 출발해서 500년동안 반상계급으로 나뉘어져 예송과 사화와 당쟁이 얽혀 탐욕적인 양반들이 옴짝달싹 못하도록 옥죄며 피지배층의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하던 야만의 시절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만약 14세기 말 이성계가 아닌 보다 선각자적인 인물이 휘청이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며 한반도내 모든 구성원들이 개성과 이성을 한껏 피워올렸다면 세계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리라.

우리가 과거를 성찰하며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유적지를 답사하며 외양이나 수려한 산수만을 즐기거나 지엽적인 가치를 천착하여 그 우수성이나 유일무이한 유례를 바라보며 단편적인 감탄과 감상에 머무르는 한, 그리하여 (과거의) 우리들의 전체성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한 (오늘의) 우리들은 (미래의) 우리들로부터 또한 되풀이해서 과거를 부정당하는 역사의 되풀이가 될 것이다.

그러한 (현재의) 우리라면 밝은 미래가 있을 리 없다.

우리 사회가 최선의 사회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그리하여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공통된 아젠다인 (보다 지속적인) 연명을 위한 기본적인 수요를 충당한 연후에는 나머지 여생을 참 삶을 위해 즐기며 사는 사회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하층민들은 늘 욕망의 결핍에 허덕인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노예상태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에너지를 부당하게 탐욕스러운 타자에게 자각마저 없이 즐겁게 넘기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맹목적인 경제발전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그 역사를 구현하는 주체들이 가장 최선의 상태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아닌 어느 순간의 주체의 희생을 기초로 진행되는 역사는 비극이고 잘못된 선택이다. 그래서 지난 현충일의 문재인의 과거의 모든 흔적들을 미화하는 추도사는 헌법정신에 반하는 추도사이다.

이념갈등을 봉합하자고? 그게 가능할까?

문재인이 더불어민주당 후보로서 대권을 다툴 때 그 숱은 공약들은 우리들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들이었다. 또한 문재인이 소속된 정당과 다른 정당들은 이념의 스펙트럼의 다른 위치에 속하기 때문에 경쟁한 것이었다. 우리는 종교나 사상의 자유를 긍정한다. 20세기에 2번에 걸친 세계대전도 이념을 반영하는 전쟁이었고 한국동란도 또한 이념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다.

우리가 살아가며 여러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을 포기하고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마저 일정한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념없는 선택이나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추도사란 공허한 헛소리이다.

가난이란 그 자체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한 상태를 초래한 역사적 조건을 통찰하지 못하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이 수치요 죄악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가난을 수치라 여기고 가난으로부터의 무조건 탈출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빈곤한 철학을 드러냈다.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일부의 희생을 기초로 가난을 벗어나는 방식을 애국으로 상찬하는 사고방식은 희생당한 당사자를 모욕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백주대낮에 수천만의 국민들을 향해 오물을 투척한 것이 아닌가?

현충일 추도사란 긍정적인 가치를 더욱 벼리고 고양하여 빛나게 하고 부정적인 가치를 더욱 핍박하여 억누르는 것이어야 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성찰에 대해서 보더라도 문재인의 선배들 DJ나 노무현 - 은 적어도 그러했다. 개혁세력의 역사를 부정하는, 나아가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민주평화를 사랑하고 개혁을 지향하는 지지자를 부정하는 행태는 반헌법적이다.

그리하여 친일잔재의 철저한 청산이나 독재자 박정희의 철저한 청산을 언급하기는 커녕, 명분없는 파월로 인한 국민들의 무가치한 희생을 상찬하고, 착취당한 여공을 미화하고, (과거의) 우리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독(생계형) 전사들의 희생을 미화함으로써 참된 애국을 모욕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집단의지인 헌법을 모욕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일제의 침탈과 일제침략기의 만행을 어떻게 규탄하겠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문재인은 친일독재자 박정희를 호출하여 상찬하고 DJ나 노무현의 발자취를 부정함으로써 훨씬 수구적으로 퇴영적인 추도사를 국민에게 오물로 투척한 것이다. 얼마전엔 독재자의 딸을 뽑아 앉혀 부끄러웠는데, 오늘 나는 퇴영적 사고, 반헌법적인 망발을 불사하는 문재인을 부끄러워한다. 문재인은 이 사태를 자각이나 하고 있으려나?

이하 현충일 추념사 전문 -----------

62회 현충일 추념사

2017-06-06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예순 두 번째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거룩한 靈殿 앞에 깊이 고개 숙입니다.

가족을 조국의 품에 바치신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가유공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습니다.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습니다. 지나온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지킨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이었습니다.

항일의병부터 광복군까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의 신념이 태극기에 새겨졌습니다.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나가면서도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조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를 키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굳건하게 살아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국가의 예우를 받기까지는 해방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 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습니다. 기억하고 기리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목숨을 바친 조국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전선을 따라 늘어선 수백 개의 고지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피 흘렸던 우리 국군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짧았던 젊음이 조국의 땅을 넓혔습니다.

전선을 지킨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 위에 위국헌신을 맹세하고 후방의 청년과 학생들도 나섰습니다.

주민들은 지게를 지고 탄약과 식량을 날랐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철원 백마고지’, 양구 단장의 능선피의 능선’, 이름 없던 산들이 용사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이 서린, 슬픈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전우를 그곳에 남기고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오신 호국용사들에게 눈물의 고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백골로 묻힌 용사들의 유해, 단 한 구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이곳에 모시겠습니다.

전장의 부상을 안고, 전우의 희생을 씻기지 않는 상처로 안은 채 살아가는 용사들, 그 분들이 바로 조국의 아버지들입니다.

반드시 명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념에 이용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존경받도록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응당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입니다.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1달러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 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고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 분들게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 분 한 분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입니다.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 위에서 펄럭였습니다.

파독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6월 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습니다.

서해 바다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도상의 화해를 넘어서, 마음으로 화해해야 합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바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이념갈등을 끝내 주실 분들입니다.

이 나라의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을 끝내 주실 분들도 애국으로 한평생 살아오신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무엇보다,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보훈정책은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군사원호에서 예우와 보상으로, 호국유공자에서 독립, 민주유공자, 공무수행 유공자까지 그 영역도 확대되어 왔습니다. 국가유공자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함께 기려야할 군경과 공무원, 의인들을 예우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분들의 공적에는 많이 못 미칩니다.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국회가 동의해 준다면, 국가보훈처의 위상부터 강화하겠습니다.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이 애국심을 바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입니다.

애국이 보상받고, 정의가 보상받고, 원칙이 보상받고,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다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개인과 기업의 성공이 동시에 애국의 길이 되는 정정당당한 나라를 다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다시 한 번 순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열사의 애국헌신을 추모하며,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766

19대 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

 

 

누워침뱉기의 대중화의 완성 – 문재인의 현충기념사

 

국가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국가는 공간적으로 특정 영토를 기초로 한다그 국가에서 살다간사는미래에 살아갈 구성원들의 보다 나은 생존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청사진에 따라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적 존재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그 청사진을 구체화하는 수장이 곧 대통령이다.

 

 

헌법을 부정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은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그것이 애국"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 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라며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다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했다.

 

과거의 대통령 중 독재자로 비명횡사한 박정희가 오로지 돈독이 올라 베트남에 파병하여 숱은 인명을 희생케 한 바 있다. (과거의우리는 베트남 참전용사들에 대해 항상 부끄러움을 감출 길 없다우리가 만든 헌법을 유린하고 베트남에 파병하여 우리들을 전쟁의 제물로 바치게 방치한 것이 부끄럽고그 부끄러움으로 인해 부채의식으로 고엽제 등 후유장애를 배상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상찬거리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위로 및 부채의식인 것이며 아울러 강대국 미국에 앞잡이로 참전한 약자의 비애를 절감하고 부국자강의 다짐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월남전 참전은 본질적으로 애국일 수 없고 위정자의 반헌법적 망동으로 참전희생자들로부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온전한 기회를 빼앗은 것이며 아울러 그것을 방관한 (과거의)우리들의 책임으로 (오늘의우리들이 배상하는 일환의 성격인 것이지 애국을 위한 희생의 대가로서 예우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문재인은 또

"1달러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 광부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 간호사"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 경제에 디딤돌을 놓았다그것이 애국"


이라고 했다.

이런 인식은 우리들이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차별이 깔려있다파독광부나 파독간호사들의 애국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가난한 (과거의우리들의 잘못으로 서럽게 머나먼 이국땅에서 기꺼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하게 만들었다는 과거의 우리들에 대한 반성이요각오여야 했다파독전사들은 결코 애국의 차원으로 미화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제 필자는 예기치 않은 노력 봉사를 하느라 낮에 매스컴에 한눈 팔 여유가 없었는데 뉴스를 접하는 순간 부끄러움과 장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은 1970년대 여공(女工)을 언급하면서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 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린다"며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그것이 애국"


이라고도 했다.

 

이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한 희생을 애국으로 변질시키려는 불순한 시도로써전태일 열사의 정의로운 노동운동그 불의 열정을 부정하는 망발인 것이다뒤집어 말하면 (과거의우리들의 누나의 희생을 매개로 탐욕을 채우던 착취적 산업구조나 인간소외를 부채질하던 사악한 자본가들을 오히려 예찬하고 숭모하는 망발인 것이다점입가경이다.

 

이러한 발언은 세월호 방명록에 문재인이 쓴

미안하다고맙다


와 같은 맥락이다한 마디로 문재인은 대단히 기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뿌리의 DJ와 노무현을 부정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라고 말했다당시 한나라당과 베트남참전전우회 등에서는 이를 '망언'이라고 반발했다. DJ의 이 말은 베트남 참전용사를 부정한 게 아니라 베트남 참전의 성격을 정확히 간파한 합헌법적 발언이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2004년 베트남을 방문해

"우리 국민은 (베트남에마음의 빚이 있다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 했다.

 

그리하여 베트남 참전을 애국이라고 주장한 문재인은 입으로는 DJ와 노무현을 계승한다고 외치지만 DJ와 노무현 부정했으니 이제 노선까지 부정하고 상대진영에 부합하는 아첨을 자행함으로써그리고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함으로써 준비된 대통령이라며 현란하게 국민에게 속삭였던 열정은 오로지 대권을 향한 권력욕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우리 헌법전문에 불의에 항거 ···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헌법 제5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운동권의 민주 수호 정신을 부정하다.


운동권의 민주화를 위한 정신은 다름아닌 우리의 집단의지인 헌법적 가치를 지켜내려는 투쟁이었다그것은 반제 항일독립투쟁의 역사와 반민주투쟁인 4.19, 반독재 투쟁인 5.18 반민주 투쟁인 6.10 항쟁등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모두 우리의 집단의지인 헌법정신을 부정하지 않는 합헌법적 행동들이었다.

 

문재인은 국민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도전을 감행했다식장에 앉아있던 참석자그 중에 헌법을 수호하기로 선서한 국회의원들 –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노동자를 위한다는 심상정 노회찬 의원보수적 가치를 위해 정치하는 보수인사들 – 과 그곳에 참석한 유가족들을 모욕한 것이다.

 

그것을 듣고도 무슨 의미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존재들이 필자는 부끄럽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란 그러한 약체민족으로서 강자들에게 유린당해 삶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그런 때문에 남은 자들에게 슬픈 기억을 안겨 준그리하여 삶을 신산하게 만든 우리의 무능함에 대한 반성이어야 했다.

감사보다 참회에 방점이 찍혀야 하는 것이다그들의 희생으로 그나마 오늘이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 아니라 참회요 부끄러운 일이다그러한 참회 위에 다시는 불행한 일들을 우리가 되풀이하지 않기로 하는 다짐의 장이 되어야 했다.

 

 

라이프니쯔 류의 변신론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A : 세상에 사악한 현상들의 즐비하다왜 신은 사악함을 만들어 놓았을까?

B : 신은 전지전능 완벽해

 

A : 완벽한데도 악을 만들어실수 아냐?

B : 불완전한 인간이므로 필연적으로 악을 시전하지!

 

A : 인간도 완전하게 만들지 왜?

B : 인간과 신은 같지 않아다르지.

악이 없다면 선이라는 것의 귀한 가치를 어떻게 알아챌 수 있겠어?

 

A : 그러니까 신은 차별의식을 가진 존재고 선을 부각시키기 위해 악을 등장시켰다구?


신은 완벽한 자신과 다른 불완전한 존재를 통해 자긍심을 확인하고

선의 가치확인을 위해 악을 만들어 불완전한 인간이 고통스럽도록 만들었다.


필자는 문재인의 현충일 기념사를 보고 라이프니쯔의 변신론을 떠올렸다.  오로지 스스로의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저돌적인...  문재인의 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차기 문재인을 위한 반대진영을 위한 아첨인 것인가?  아니면 문재인의 변절인가? 

 

살펴본 바와 같이 문재인의 반헌법적인 대국민 도전을 자행한 발언을 통해,  문재인의 천박한 철학과 전후 상충한 체계화되지 않은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좌충우돌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를 우리가 대통령으로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기념사를 세상에 선 뵈게 방치한 청와대 참모들의 의식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지지자를 모욕한 것인가지지자의 지지를 반영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필자는 판단을 보류하겠다문자폭탄을 열호하는 태도며청문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며부정적인 권위(권위주의부정곧 탈권위를 서민이나 인간 코스프레하는 사진으로 이해하고 열광하는 수준들...을 보면

문재인의 현충일 기념사는 지지자들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재인의 지지자들이 바른 민주시민의 안목으로 제대로 사안을 본다면 아마 문재인을 절대로 지지하거나 지지자들 모욕하는 저러한 행태를 방관할 리 없다고 본다.

 

 

끝으로

 

DJ와 노무현을 부정하고 운동권을 부정하고 순국선열을 욕되게 하고 희생자를 애국자로 바꾸는 등 문재인의 신통력이 좌충우돌 현란하기 그지 없다그럼에도 열화같은 문재인을 지지하는 자들의 누워 침뱉기는 식을 줄 모른다하늘의 우중충함이 내 맘같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얼마나 더 모욕해야 본래의 우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한겨레 신문의 문재인의 현충일 기념사 기사를 읽었다.  한겨레신문이 맞는 지 눈을 부비며 다시 봐도 ..... 한겨레신문을 읽을 가치가 있는가?



제목에서 보다시피 지역화합을 꾸미는 한정(definite)사로 쓰인 ‘기괴망측이란 괴상하고 기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혹자는 뜬금없이 기괴망측하다니?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연유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호남이든 호·영남이든 멀게는 70년대 초부터 간혹 선거 때마다 선거 판세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지역을 의식하는 구호가 등장하였다.

 

***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가까운 부산항으로부터 신의주까지 병참기지화 되어 경부/경의선 철도가 놓여지게 되는데 남한에 한정해서 얘기하자면 오늘 날의 경부고속도로(1973년 완공주변이 개발되고 공단들이 수도권과 경상도에 집중되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는데 이에 가세해서 독재자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불균형적 경제개발정책의 선택으로 지역간 불균형이 가속화되고 거기에 더해져 정략적인 득표전략으로 호남을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누구든 태어나면서 가난하거나 불리한 환경을 피해서 세상에 출현할 수 없는 법이다달리 말한다면 가난하거나 불리한 환경에서 출생한다면 경쟁사회에서 불리하기 그지없는 출발을 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취업하려 할 때 면접관과 마주앉은 거리가 적당할 때와 너무 멀어 소통하기가 어려운 두 경우 중 불리한 경우에 당첨되어 면접을 치른다고 말이다. ...

, 대한민국에서 도시가 아닌 곳, 또는 호남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무한경쟁시대에 핸디캡을 안고 태어남을 의미한다.

 

왜냐

국립도서관이니 국립 모모기관들은 대부분 서울에 위치해 있어  서울사람만이 문화적 혜택을 쉽고 특별히 누릴 수 있다. 물론 유일한 국립기관이 집집마다 있을 수 없으므로 차별적이기는 하되 최대한 지역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거리정도는 배려해서 남한의 한 가운데인 무주라든가 충청도 어디에 설치해야 그나마 불만이 적어질 일이다.

 

차별이 존재한다.  즉 불평등하다.  반헌법적이다.

말하자면즉 박원순 시장이 아무리 공정하고 투명하게 시정을 운영한들 그것은 원초적으로 잘못된 구조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결국 미봉적인 현상유지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이미지의 박원순 시장의 의식속에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있을까?  있다면 박원순시장은 더불어민주당의 당적을 가졌을 리가 없다.  홍세화씨도 그나마 최근에야 영남패권주의를 수긍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곧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인사의 인식의 한계 - 지역주의에 대한 인식 - 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서울 아닌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서울 특별대우 주민들에 비해서 같은 세금을 내고 살면서 문화적 혜택 측면에서 공간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고쳐 말하면 똑 같이 세금내면서 서울사람을 위해(?) 서울 사람이 실효적으로 혜택을 보는 사업에 시골사람의 세금이 쓰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특별시민이기도 하다.

 

지역사정은 어떠한가대표적으로 경제척 측면에서 누군가에게 어디서 창업할까를 물었을 때 판단능력이 제대로라면 수도권이나 경상도의 어디를 선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류비용이나 경영환경 사회간접자본이나 사회문화자본 등의 경영조건이 다른 소외지역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정확히 의식적이며 인위적으로 초래되었다.

결국 우리들의 집단의지가 문서화된 헌법에서 얘기하는 법앞의 평등은 우리가 살아내면서 끊임없이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이상인 것이지 현실적으로 실효적인 이념으로서의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  불평등한 상태를 위정자들이 인위적으로 창출해 놓은 뒤 실기하여 방치한 지가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보다 공평한 지역적 조건에 태어났으면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터인데 더럽게 운 나쁘게도 하필이면(?) 경쟁에서 열악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당사자라고 하고 역지사지하여 그 상황을 공감해 보라.

정말 처절하게 자각한다면 억장이 무너지고 이 땅을 벗어날 정도의 혐오감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 뿐이랴?  이 곳 아고라에서도 가끔 보여지지만 합리적 이유없이 ‘빨갱이이니 ‘깽깽이... 등의 악의적 마타도어

 

지역감정

줄여 말하면 호남사람들과 영남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정서는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그것이 아니다위정자들 특히 노무현으로부터 문재인 뒤어은 더불어민주당 사람들 대부분이 지역화합을 얘기하면서 그것을 미치 해묵은 감정으로 설정해 놓고 탕평인사로 해소 가능한 것처럼 쉽게 얘기하곤 한다

그렇다면 반세기 동안 매 선거때마다 유권자인 영호남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들떠서 망국적인 몰표를 자행했다는 얘기일까?

 

그러나 지역정서니 지역감정이니 지역주의니 하는 이른바 망국적인 행태는 모두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의 정서를 가리키는 말로써 특정 조건으로 유발되는 결과이고 선거때마다 스트레스처럼 각인돼 있는 감정들이 일깨워져 드러날 뿐인 것이다.

 

인간이 존엄하다평등하다공정하게 경쟁하자고?

현재 대한민국의 이른바 양식있는 지식인, 정치인이랍시고 이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피해당사자(특히 호남인이나 시골에 사는 소외지역민)들은 그러한 피해자적 지위마저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자기의 정당한 몫이 뭔지도 모르고  삶의 대부분을 마친 사람이 존재한다.  무능한 위정자들 탓이다.

 

지역화합을 탕평인사한다고 해소되는 것이라면 과거 고건도 총리했고 DJ도 대통령 했고 이번에 이낙연도 총리했으니 해묵은 지역감정이 해소되고 화합이 되어 당뽀개기 전문가 유시민이 말하는 이념정당이 대한민국의 정치좌판에 전시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럴까? 과연 탕평인사하고 가야역사 연구한다고 소외지역민들의 열악한 지역의 사회경제문화자본이 저절로 업(up)되는 것일가?

 

 

정당한 이유없이 시골사람의 몫을 서울에다호남이나 그 외 소외된 지역민들의 몫을 경상도에 쏟아붓는 등 평등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짓을 파렴치하게 위정자들이 저질렀다면 ‘균형개발평등이라는 이념에 맞춰 서둘러 교정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헌법적 의무이다

그럼에도 반세기 동안 이 불평등한 지역적 불균형을 방치하는 것은 위정자들의 직무유기인 것이다.

 

문재인이 오늘 가야사연구 운운하는 거 보니 (가야사 연구)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0601_0000000738&cID=10301&pID=10300

소외지역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조치 등의 본질적인 지역화합은 물건너간 거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기괴망측하다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제발 더 늦기 전에 빼앗긴 정당한 몫을 원위치했으면 한다.

** 오늘도 학계나 미디어가 반색하며 문비어천가를 불러대는구나.  

한갓 서비스맨의 수장에 불과한 문재인이 혈세로 학문분야까지 창도하고 거기 맞장구 치는 기레기와 해바라기 지식인들을 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노무현2기가 지나면 조금 더 나아지려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은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를 향해 야권 연대를 거부한 것···이적행위···제2 유신시대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

 

DJ3남 더민주당 김홍걸 : 김홍걸이 DJ와 묶여 소비된다는 현실에서, DJ와 김홍걸의 정체성이 얼마나 겹치는 지 살펴 볼 일이다.

 

DJ가 숫적 열세를 온 몸으로 껴안으며 민주화투쟁을 하는 자세는 곧 강자앞에서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비현실적 낭만적 독립투사와 같은 것이다. 김홍걸의 왈왈거리며 협박하는 태도에서 마치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가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야권 연대 거부?

 

새누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된다는 명분이 정의일까? 그것을 앞세우는 배경에 숫적 열세는 고립과 핍박으로 연결된다는 패배주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변방인들의 반패권적 선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이다. 정상배들이 떳떳하게 제 몫을 제 자리로 갖다 놓자고 한 적이 있었던가? 왜 새누리당에 필적하기 위한 연대를 주장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우열이 극명하게 지속되는 경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친노에게 없었다. 정치가 이해 조정의 결정판인데도 변방인의 손을 잡기는커녕 냅다 발까지 걸고 넘어뜨리며 허허거리는 문재인에겐 정치의 치열함이 전혀 없다.

 

 

영남패권주의자의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

 

김홍걸이 DJ와 이희호의 프리미엄을 멋지게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세속적으로 최규선 게이트에 얽혀 DJ에게 누를 끼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지 못했다대북송금 특검을 난도질하고, 지지자들 등져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삼성재벌과 결탁한 참여정부를 떠받들며 짖어대는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의 모습을 지켜보며 DJ와 세월 무상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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