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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활강

자연환경으로 주어진 불공평 vs. 공평의 조건

시민25 2016. 3. 17. 16:38

자연환경으로 주어진 불공평 vs. 공평의 조건

 

공평의 개념을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주어진> 상태 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좀 거시기 하지요. 해당이 될 때도 간혹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니까요. 위에 공평의 조건들을 적어놨으니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고요.("공평이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지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출발점을 보장한다는 규칙이다. 태생적/환경적 약자에게는 미래의 손실분을 일정 부분 미리 보상한다는 지혜이다.") 공평과 공정은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공평(fairness or imparttiality)은 차등이 없음에 중점이 있고, 공정( fairness or justice)은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이 <정의>로운 상태임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님이 전제한 것,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주어진> 상태를 '공평'이라고 일단 가정하십시다.

그러니, 지리적인 환경에 의해서 자연적인 공평이 깨졌다면 그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두 지역이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조건, 그러니까 한 나라(state)랄지, 한 도(province)랄지, 한 산업(industry)이랄지, 어쨌든 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조건에서만 해당하는 개념이어야 하겠죠. 예컨대, 한국의 노동자와 베트남의 노동자 간에는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공평의 개념을 놓고 따질 수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호영남이 백두대간에 의하여 동서로 갈렸는데 동쪽은 자연적인 조건으로 빈곤하였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왔으므로 공평의 상태가 깨져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따라서 동쪽 사람들이 서쪽 사람들의 부를 탐하고 서로 나눠서 공평하게 하자는 것은 정의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군요.

이 경우에는 바로 위에서 제가 말한 그 조건에 부합하는 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만약 그 동서간 불평등의 상태가 한(single) 나라라는 민족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이 불공평하므로 어떤 방법을 동원하건 그 상태를 최소화하도록 바로 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신라와 백제간의 각기 다른 정체성과 체제를 갖은 두 개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당연히 공정과 불공정 이전의 문제입니다. 부정의가 아닌 것이죠. 신라가 보기에 백제가 잘 살더라, 그러니 불공평하고 부정의하지 않느냐, 이거 안되겠구나, 가서 좀 뺏어와서 정의를 실현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도둑놈 맘보라는 것이죠.

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역사적 실제가 짐작하건대 대략 고려 이후 대한제국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 이 경우를 보십시다. 이 때 제도적(당시는 상놈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주거 이동의 자유가 매우 제한 돼 있었겠죠)으로도 그렇고 교통 수단의 미비로 인해서도 그렇고 서로 교류·소통하는 질적 양적 크기가 대단히 미약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경우 하나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듯 각 지역간의 물적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면 행정과 통치적 차원에서는 한 나라였을 망정, 지금의 호남과 영남은 상당 부분 각 각 <독립>적인 지역(province)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그 두 지역간에 자연적 조건으로 발생한 불공평의 상태에서는, 한 지역이 다른 한 지역의 것을 가져와서 똑같이 나눔으로써 공평을 만들겠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공평의 개념을 충족시켰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국가 통치적 차원에서, 국가 조세를 거둬들여 그 재원으로 동쪽 지역민에게 더 많이 분배함으로써 모든 백성이 고루 잘 살도록 정책을 펴는 것이 더욱 공평의 규칙에 합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왜 <교류>의 유무를 문제 삼고 있냐면요, 교류란 그저 커뮤니케이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자원·재화·용역의 생산과 분배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서 다른 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물적·지적 자원의 양이 일방적으로 컸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양은 훨씬 적으나 필수적이고도 긴급한 어떤 자원의 이동이 틀림없이 존재하여 그 두 지역이 상호 의존하며 공영을 지향해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적 교류가 됐건, 지적, 문화적 교류가 됐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풍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없었을 거다라는 점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서쪽의 풍요로운 자연 조건을 가진 지역민이 운이 좋게도 조금만 일을 해도 넉넉하게 멀고 살 수 있는 반면, 동쪽 지역민이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각 종 생산과 분배가 그 두 지역 사이에 거의 오가지 않았었다면 그것은 곧 그 각각의 지역이 애초부터 상호 의존적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미 독립적 공동체로서의 존재 능력를 갖고 있었던 것이겠죠. 이 경우에는 절대적 의미에서 서로간에 차등이 있을 망정 그 상태가 불공평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자연의 열등 조건에 놓인 지역민이 우세 지역민들 것을 "배타적 질시() 빼앗아와야 한다는 사고방식" 이 마치 정당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겠지요. 빼앗는다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그 당위성에 있어 조금이나마 정상참작을 받으려면, 위에서 말씀드린 교류와 공동체라는 (최소한)두 가지('공동체''교류')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 한민족의 지역간 교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위의 두 조건이 충족되기엔 상당히 미흡합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뺏음과 질시"는 더구나 물론이려니와, '공평히 분배해야 한다'라고 문구를 고쳐놓고 말 할 때마저도, 그 경우가 갖는 당위성은 역사적으로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서남쪽 지역과 동남쪽 지역만을 놓고 볼 때를 말합니다.) 대신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 공동체 유지와 발전을 위해 분배의 묘를 살려야 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중세에 있어 만약 동쪽 지역민들이 서쪽 지역민의 풍요를 질시하여 그 부를 뺏어가려고 침략이나 어떠한 다른 경로를 통한 탈취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면 그 동기에서부터 당위성을 전혀 얻지 못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대략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각 지역간의 교류가 대단히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 동기의 당위성이 웬만큼 충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류가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부의 편재가 지속되고 있다면 무언가 부정의가 분명 있다고 봐야할 겁니다. 중앙 정부에서 분배 정책을 소홀히 했달지, 부의 대물림이 정책적으로 가능도록 방치했달지 하는 부정의가 존재 했었으리라 봅니다. 이 경우엔 불공평, 그 부정의를 강력하게 바로 잡았어야 하겠지요.

그럼 이제 구한말 경부터 일제 강점의 근대사 시기를 보기로 하지요.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한 서쪽 지역민들의 피수탈이 동쪽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가혹했습니다. 뼈골이 부서져라 일하고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농민들의 수는 호남지역에 넘쳐났지요. 그러니 영남민이 호남을 질시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님의 가정대로, 그 이전 수 대에 걸쳐 내려온 영남민들이 호남민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다고 한 번 가정하고라도, 적어도 50년이 넘도록 이러한 호남의 피수탈이 극심했던 역사적 시기를 지나왔다면, 영남인의 그러한 질시의 감정은 정당성을 완전히 잃고 만다고 보겠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공평을 논하는데 있어 합리성이 전혀 없는 얘기입니다.

공평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때마다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것이 기계적 공평은 그야말로 원시적 공산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빌어먹을) 유토피아라는 겁니다. 그 기계적 공평은 사실상 공평의 규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많이 일한 사람이 일 한 만큼 많이 갖는 것이 정의를 이루는 것이니까요.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평의 규칙이 본원적으로 굴절돼있다는 것입니다. 그 규칙만 그대로 지켜지면 '기계적 차등'{, discrepancy ; , inequality(불평등)이 아닌}의 현상 차체는 얼마든지 <정의>의 표현이 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불공평의 규칙을 가치체계로 가지는 부정의(injustice)입니다.

[편집자 주: 원문은 대화체 형식으로 시작되지만 대화부분을 일부 절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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