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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활강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은 누구인가

시민25 2016. 3. 17. 16:36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은 누구인가?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비윤리, 비합리, 비효율, 불공정의 총합)

 

가치체계

진실 은폐를 위한 개념의 왜곡

 

순진을 가장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가진 망국적 병폐를 들 때 지역감정, 지역주의, 지역갈등 등을 꼽는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나 외국의 예를 끌어 들이며, 지역감정은 애향심의 발로로서 인간의 건강한 정서이므로 지역주의라는 대결로만 번져가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라느니, 지역주의도 인간의 삶에서 안정을 담보삼기 위한 공동체의식의 연장이므로 지나치게 이기적이지 않은 선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느니, 지역갈등도 단지 각 지역간의 지배집단들이 벌이는 이권다툼의 확대해석일 뿐 각 지역 대중들간의 갈등은 아니라느니, 말을 돌리며 가장 핵심되는 문제를 애써 비켜간다.

위의 세 가지 개념은 모두 쌍방향, 즉 거의 대등한 <두 지역>간의 대립을 공통분모로 거느린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지구상 어느 땅 어느 고을을 가든 언제나 마땅히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간 사회의 원초적 모형이고 현실적 실체이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고로 한국의 지역문제는 우려할 만한 현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 현상이 '보편적'이므로 곧 <정상적>인 범위 안에 있다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지역문제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체계적으로 별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타이른다.

 

그런데 이들이 언급하기를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바로 '지역패권주의'라는 개념이다. 지역패권주의는 위의 세 가지 개념과는 다르게 어느 두 지역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 어느 <한 지역과 여타 전 지역>간의 문제라는 해석이다. 지역패권주의란 위의 세 가지 개념과는 판이한 시각으로 본 지역문제 접근법이다. 시각이 다른 것만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실체의 중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작업이다. 더구나 '영남패권주의'라는 논제가 나오면 이들이 경기를 일으키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새로운 개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꺼려하고 극구 기피해오며 순전히 남의 곁다리만을 대신 긁어왔었다는 참회론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이들 학자군의 저항은 틀림없이 일반 대중의 그것보다 훨씬 거셀 것이다.

 

 

그럼, 영남패권주의가 위의 세 개념들보다 얼마나 명쾌하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설명하는지를, 가치체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로 하자.

 

 

 

가치체계 파괴 : <공평> 개념의 부재

국가에서 시행하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 모든 정책이 관행적으로 어느 한 지역민만을 지속적으로 '특별 우대'하여 왔으며, 사회 모든 분야-국가 시책의 유무를 떠나서 시민의 경제활동 환경 등을 포함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아예 '경쟁조건'이 그 특정 지역 출신자들에게 보다 우호적 방식으로 고착화되었고,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 지역 출신자의 '독점적 지배력'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어 왔다면 그 사회의 <가치체계>는 근본부터 부정의에 기초해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편중의 현상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거짓없는 실체이다.

영남패권주의로 인해 발생한 가치체계의 비틀림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공평의 부재>라는 부정의이다. 거꾸로 말하면, 공평의 부재라는 우리의 가치체계가 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사는 사회성을 배워나가는 유아기 때부터 그렇게나 일찍, <공평(fairness), 공정>의 개념을 익히게 되어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유지 발전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 요소이자, 인간의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에서 근간이 되는 개념이다. 유아기의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하물며 형제간에도-서로 공평한가의 문제를 최우선 관심으로 놓고 다투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적 탐욕만이 아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다행히도 그것을 제어하는 도구 또한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평에 대한 관심은 거의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공평한가에 대한 '판단'은 아직 미숙할지언정 공평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이라는 얘기다. 그 아이가 지금 적게 가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너의 필요의 크기가 작아서, 혹은 다른 기회를 더 가진 대신으로, 아니면 자발적 양보와 미덕을 실천하기 위하여' 등등의 이유를 들어 공정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줄 때 그는 울음을 그치고 환하게 웃을 것이며, 그가 나중 커가면서도 상대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공평>에의 이해는 인간의 이성을 실험하는 첫걸음이고 합리를 깨우치기 위한 기초정지작업이다. 이것은 윤리의 근본을 이룬다. 공평이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지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출발점을 보장한다는 규칙이다. 태생적/환경적 약자에게는 미래의 손실분을 일정 부분 미리 보상한다는 지혜이다. 이 가치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초석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마련하기로 약속하며, 자유와 평등의 최대공약수를 실현하겠다는 '일반의지'로서, 인류의 평화애호적 삶의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

공평이라는 가치가 확고하게 정의되지 못했거나 어려서부터 실천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좋은 제도를 들여와 심어놓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들에게 공평의 개념이 서있지 못하면, 그 사회는 가치 혼란, 끝없는 부패와 타협, 다툼, 불의가 득세할 것이며 결국 원시 야만에 멈춰 서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가치체계는 이 공평의 개념을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줄 수가 없다. 공평 대신에, '때론 손해도 보고, 때론 이득도 챙기며, 부당할 지라도 참고 <사이좋게> 놀라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양보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양보는 오히려 경계할 가치이다. 공평이 전제되지 않은 양보는 손해만 안기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이좋게 놀라는 당부에는 아무런 이치가 서있지 않다. 사실상 (친하지 않은 아이에게는)'양보 하지 말라'는 요구를 말 속에 감추면서, 동시에 '사이좋게(화합)' 지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거짓이요 이율배반이다. 한국의 부모는 아이에게 자기 몫과 상대의 몫을 서로 인정하는 공평의 룰을 지키는 학습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아이에게 공평이 아닌 타협과 융화를 가르칠까?

 

(이 교육 방식은 새삼스러운게 아니고 자고이래로 있어온 <융화와 화합>이란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 둘은 어디까지나 공평이란 개념에 배반하는 개념이며, 또한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환경'공평'이란 개념을 그나마 고쳐쓰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망가뜨려 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타협과 화합'이라는 사회화 과정의 기술은 삶을 이제 처음 배워나가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가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공평에 대한 개념이 확립될 무렵, 공정과 불공정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위의 가치를 위하여 잠정적으로 양보하고 인내하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공평을 가르치지 않은 채 화합을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화합마저 가르치지 못하고 마는 오류이다.)

 

 

새로운 학습 : <불공평의 규칙>

 

왜냐하면 실제 기성 사회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공평에 대하여 진정으로 가르쳐 줬다간, 사회의 불공정이나 부정의와 부딪칠 때마다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해댈 것이며, 배워온 가치와 현실의 실체간에 놓여있는 간극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고 결국 절망하고 말 일을 도처에서 만나리라 우려하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주의 체제 안에서 상대적 기득권을 누리는 영남민도 그 자식에게 공평을 가르칠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다. 제대로 가르쳤다간 그 아이가 자라서 영남과 타지역간에 놓인 불평등을 보고 스스로를 비판하다가 자기 몫도 챙기지 못하는 빙충이가 되고 말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비영남민도 자기 자식을 공평의 룰을 제대로 지키는 아이로 키울 수 없다. 세상은 불공평의 룰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아는지라, 아이가 원칙만을 따지다가 결국엔 사회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나 반항아로 자라고 말 수 있다는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사회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이단아로 만드는 것이, 부모나 선생의 입장에서는 결코 죄책감을 갖지 않을 보장이 없기 때문에 미리부터 공평의 개념보다는 화합을 가르치게 된다. 화합을 강조해야만 하는 부모들의 의식 속엔 현 사회체제와 관행, 문화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깃들어 있다.

 

혹 그것의 개념을 제대로 가르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공평이란 개념을 '오직 가정 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가치로서 한정하고 특별히 주의시킨다. , 바깥 사회는 가족간의 관계와 다르다, 냉정하다, 정글의 법칙이 통용된다, 그러므로 그 불공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세술이다 등등을 가르친다. 불공정을 만났을 때 대적하기 보다는 미리 타협의 길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 타협의 정신은 다음 무엇을 낳는가? 불공정의 조건에 분노하지 말고 감정을 조정하라고 가르친다. 머리를 활용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불공정의 환경에 아예 친화적이 되기를 가르친다. 결국 불공정의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것을 화합과 융화라는 말로 포장한다. 불공정과 타협함으로써 불공정을 영속화시키고 마는 가치로서의 <화합과 융화>를 환영하는 것은, 대신 공평의 개념을 멀리 귀양보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싸우면 양편의 주장을 듣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려 하기보다는, 싸웠다는 즉 '화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써 양편 모두를 나무라고 마는 것이다. 물론 속을 들여다보면, 양편 모두가 아니라 남의 자식만을 꾸짖고 마는 셈이다.

 

공정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생활에서 실습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구별없이 선과 악에 대한 판별력이 떨어진다. 판별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타협의 개연성을 그만큼 크게 가진다는 뜻이다. 그 타협이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적당한'이란 의미로 얼버무려져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상대와 화합 융화하는 것이 더 없는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러한 개념을 가진 사회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 그 어떤 제도를 갖다 놓아도 공평이라는 개념이 바로 서있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타협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고 정실의 개입, 그리고 다시 화합과 융화, 그리고 의리라는 변명으로 포장되지 않을 수 없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공평이란 가치 개념을 뿌리로부터 죽여버린 지배체제이다. 왜냐하면, 불공평을 자연스러움 자체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공평은 국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영남출신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그들이 기득권을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불공정 경쟁 조건>을 짜놓은 체제이며, 또한 그 체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력조차 말살해버리는 새로운 가치체계까지를 생산해낸 <이데올로기>이다.

(사회체제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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