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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활강

영남패권주의 용어가 거부감을 줍니까?

시민25 2016. 3. 17. 16:26

영남패권주의 용어가 거부감을 줍니까?

 

지역감정'이란 담론 속에 숨겨진 위악과 진실을 찾아서

 

영남패권주의란 말이 적어도 인터넷 문화의 흐름에 민감한 네티즌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어로서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이 사회 곳곳에 섬세한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 영남패권 존재 자체만큼은 검증 과정을 거쳐 점차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 용어의 지속적 쓰임과 의식의 확산은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픈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적잖은 압박으로, 스트레스로, 위기의식으로 작용하게 될 것 같다.

 

1. "지역차별"

 

이전까지 이 용어를 대신해왔던 말은 기껏 지역차별이었다. 지역차별이란 어느 지역인가의 소외를 전제하는 것이되, 정신이상의 상태를 진단하는 피해'의식'이란 말을 피해 당사자 위에 교활하게 덧씌움으로써 정작 소외를 불러 일으키는 그 가해 주체를 어디엔가 꼭꼭 숨겨놓고 말았다.

지역이란 일반 명사 속에, 특정한 지역의 가해적 위치와 피해적 위치의 구분이 끼어들 여지를 아예 없앰으로써 차별의 실체를 부정하겠다는 의도를 그 안에 감추어온 것이다.

 

게다가, 차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발생시킨 '피해사실'보다는, 다분히 피해 당사자가 실제와는 다르게 그저 망상적으로 가질 수 있는 '피해의식'이 진정한 문제의 본질이라는 식의 어의조작이 어이없게도 대중에게 폭넓게 먹혀들은 결과, 피해 당사자들의 저항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역할을 하였다.

가장 첨예한 갈등 주체인 영남과 호남이란 두 지역의 실체를 묻어두는 용어로서 지역차별을 사용할 때,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노출되기를 경계하는 자들의 깊이 배인 두려움을 역설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2. "지역감정"

 

가장 미개한 수준의 인식을 시사하고 있는 지역감정은 아직까지도 일반 매스미디어(종이신문, TV)는 물론 그 중 진보적이라는 한겨레 신문의 '인터넷판'에서조차 부동의 대표용어로서 질긴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 우리 사회가 갖는 패권주의에 대한 인식 수준이 일천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보수 집단일수록 이 논의가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지역감정'이란 어휘를 고집하는 것은 역사적 인과성과 사회적 발생 조건을 깡그리 배제함과 동시에 그 현상을 일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 편견의 결과물로 묶어둠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끝내 엄폐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지역차별'과 함께 그보다 덜 진화된 어휘인 지역갈등, 지역감정, 호남소외등의 쓰임새가 영남패권주의란 용어와 다른 점은, 한결같이 가해자를 실종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어떻게 생성 진화해 왔으며 누구에 의해서 의미 왜곡이 자행되고 대중 조작이 이뤄져 왔는지를 유추하는 것은 전혀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 주체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실체를 기어이 덮음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보호하겠다는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기득권 계층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언론과 정치권은 물론 대단히 진보적인 극소수를 제외한 사회 일반은, 그것이 패권이라는 구조와 집단의 사회학적 문제라는 본질을 애써 외면하면서 관심을 오직 개인의 사소한 선택적 문제로 한정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공론의 경험이 전무한 일반 대중은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이 거대한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지역감정'의 저차원 논리를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왔다.

일천한 단계일망정 온라인상의 논의는 그 성역의 맨 가장자리를 깨뜨리는 성과를 가져왔다. 지역감정을 거쳐 담당주체를 슬며시 빼낸 지역갈등이라는 용어를 지나, 그나마 한결 진실에 접근한 지역차별이라는 어휘를 거부감 없이 사용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다 지역차별의 문제 핵심이 결국 지역패권주의에 있다라는 본질 규명의 차원으로 인식의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편집자주

( 부정적인 사회현상을 지양하려는 목적의식을 갖고도 지역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의식이 결여된 소이이다. 인간의 개성의 다양성만큼이나 천혜의 지역적 조건에 규정당하는 지역의 특성과 관련되어 발현되는 다양한 지역주의는 그 자체로 비방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병리적 지역주의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정직하게 영남패권주의를 사용해야 한다. 지역차별이라는 용어를 타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조선일보신문이라 부르고 여차여차한 신문이라고 설명을 덧붙이는 화법과 다르지 않다.)

 

 

3. "영남패권주의" 논의주체의 이전(移轉)

 

이렇듯 영남패권주의 논의가 본격화 되기까지 거쳐온 발전 과정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인식과 논리의 발전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논의 주체의 주도권 이전이란 점이다. 이전까지는 그 주체가 기득권계층이었다. 마음대로 용어의 본 뜻을 비틀고 진실을 은폐·호도하고 논의를 독점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파워와 도구의 소유자인 기득권세력이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그 주체는 진실을 벗겨냄으로써 이제까지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그 계층이 당해왔던 불균형을 바로잡아 놓겠다는 피해 당사자들이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영남패권주의의 논의가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언론의 기피 영역으로 남아 있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이 논의가 갖는 엄청난 사회적 폭발력이다. 이제 인터넷의 환경으로 인하여 논의의 주체가 그것을 억압해왔던 보수언론으로부터 피억압 일반민중으로 넘어옴으로 인해, 조만간 영남패권주의의 실체와 패악이 완전히 까발려지며 혁파의 해법 또한 다양하게 분출될 것이다.

 

보수 언론과 사회의 모든 기득권 계층은 일시에 뒤집어지고 만 정세 반전의 환경 속에서, 이제 논의의 수세에 몰리며 기존 논리가 깨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목도할 수 밖에 없다. 영남패권주의란 용어의 정립·발명과 인터넷 상의 공론화는 힘의 주도권을 네티즌에게 이양케 하였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논의의 주도권' 쟁취만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지배논리 그리고 그 지배층의 존재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사회 가치체계의 변동을 유인하고 말 거대한 사회운동의 물결로 발전할 것이다.

 

 

 

. 영남패권주의의 형성 : 시대적 배경

 

1.정치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정권 안녕의 영구 보장은 정치적 생존만이 아니라 그들의 물리적 생사 문제를 가르는 일이었다. 원래 일본군국주의에의 충성을 맹서했던 반민족 역도의 정권 탐욕으로부터 성립된 박정희쿠데타정권은 자신의 추악한 정체와 정권의 부정의를 가리기 위해, 소위 철권 정치를 통하여 정보의 소통을 최대한 차단하는 한편, 국민에게 미래에 대한 환상을 심는 일환으로 사회의 대변혁이 일어나는 양 과장 선전하는 전시 행정의 연출로 기만정책을 항용(恒用) 펼쳐야만 했다.

그것은 태평양 전쟁에 징용당해 (38만명의 징용자) 희생당한 수만 조선인의 귀중한 생명과, 관동 대지진 당시 폭동 누명을 쓰고 무참히 살해된 수천의 조선인과, 7만에 달하는 원폭 조선인 사상자들(4만 사망), 그리고 일본군 성노리개 감으로 납치되어 꽃다운 시절은 물론 전 인생의 파탄을 강요당한 무려 20(아시아여성 28만명 중)의 조선여성들의 희생을 모두 깡그리 무()로 돌리고 만, '65년 한일 협정 조인의 실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희생자가 장래 요구할 엄청난 액수의 배상 청구 권리와 소송의 유효성을 모두 미리 말소시켜버리는 조건을 단돈 3억불에 팔아먹고 만 데에는, 그 조건을 달고 일본으로부터 지속적인 유상 차관을 들여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경제 성장을 국민들에게 시위해야만 한다는 숭일 쿠데타 정권의 치졸하지만 절박하고 다급한 요구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2. 이데올로기 : 매카시즘

 

한편 박정희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군사정권답게, 김대중과 대결한 '71년의 대통령 선거 훨씬 이전인 '60년대 중반부터 공안 정국을 조성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의 신장 기회를 억누르면서 국민 총화의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68년 초, 김신조 무장공비조의 청와대 습격시도 사건은 박 정권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기도 했지만, 박 정권은 이를 정권 안보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역이용하는 정치적 교활성을 과시한다. 그 해 박 정권은 정권에 대항하는 젊은 지식인들을 일망 타진코자 통일혁명당이라 불리우는 대남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백오십여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들을 검거하고 그 중 일부를 실제로 사형집행함으로써 사회의 정신을 이른바 레드컴플렉스에 바짝 얼어붙게 하였다. 또한 그 해 12월을 기해 제정 공표된 국민 교육 헌장(발췌 :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이 상징하듯 전 국민을 국가의 신민 자격으로 떨어뜨려 권력 앞에 굴복시키고 북한으로부터의 전쟁 발발 위협을 끊임없이 재생시킴으로써 그 공포 분위기 속에서 국가의 모든 시책에 완벽히 순종토록 만드는 철권 통치의 시대로 서서히 막을 올리게 된다.

 

'72년 영구 집권을 위한 전면적 독재 체제인 유신 헌법을 출범시키고 잇따른 긴급 조치 발령으로 재야 민주 세력은 물론 고등학생을 포함한 대학생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국가 전복 기도 사건('74민청학련)으로 조작, 탄압하면서 경찰과 정보부의 항상적인 학원(일부 고등학교 포함, 전국의 대학) 사찰로 '70년대 젊은이들의 자유로워야 할 정신과 마음을 옥죄어 얼어붙게 만들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일본에서 독재 정권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을 납치('73), 해상에서 살해를 기도하다 미수에 그치는 전대미문의 국가 권력에 의한 청부살해를 연출하였고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독재투쟁세력은 '70년대 내내 가택 연금이나 정보원의 밀착 감시로 정치적 행위를 철저히 억압당한 채 목숨만 부지하며 살아야 했다. 이렇게 가혹한 매카시즘 수법으로 인간의 대지에 공포의 철조망을 둘러버린 것은,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박정희 자신의 황군 출신성분, 공산당(남로당) 간부로서의 행적, 그리고 일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동료 남로당 간부들 명부를 폭로했던 배신자로서의 추악한 정체를 감쪽같이 국민들로부터 속여내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자신의 레드컴플렉스의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3. 경제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60년대 말과 70년대) 동안 서울 인천 지역에 수출산업공업단지를 건설하고 울산에 대규모 석유화학공업단지 조성에 이어 창원, 구미, 포항과 낙동강 하류, 부산, 거제 등 영남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업단지를 건설한다. 비영남지역으로는 비철금속 공업의 온산, 석유화학공업의 여천 지역이 유일하다. 성장을 지상 명제로 삼은 경제 정책은 차관 도입(대부분 유상차관)과 외자 유치를 필요로 하였고 관과 기업의 유착은 특정 기업체에게 거의 무이자에 가까운 차관 은행 융자와 각종 세제 특혜로 엄청난 부를 거저 안겨 재벌을 육성함으로써 정권은 수출 주도형 성장 경제를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하고, 그 대가로 정권은 그들의 금력에 의한 절대적 비호를 받아 정권 연장의 지렛대로 삼았다.

 

 

4. 사회

 

 

노동 집약적 수출주도 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노동자의 증가를 봤으나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생활 수준의 향상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자의 생활 안정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저곡가 정책을 실시하여 이번엔 국민 대다수가 종사하고 있는 농업의 희생을 초래하였고 농촌의 경제가 갈수록 피폐해져 대규모 이농 현상이 발생, 서울로의 인구 유입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교외에는 빈민촌이 우후죽순으로 형성되었다.

 

한편, 서울의 산업 집중과 정치 사회 문화 중심지로서의 비대화는 '70년대 초반 이후의 가속적 팽창을 예감케 하였고, 이를 노리는 아파트 개발 러시와 함께 70년대 중반부터 대대적인 부동산 투기 붐이 서울을 휩쓸어 빈부간의 격차를 벌리는 것을 물론, 관리·건설업자간의 유착과 건설 정보의 사전 유출로 인해 떼돈을 버는 불로소득자 졸부의 대거 출현 사태를 초래하였다. 부동산 불법 투자 이익이 한국에서 부의 창출의 최고 효율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공공연히 인식되면서 모든 시민이 부동산 투기꾼으로 나서는 풍조를 만연케 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근면·정직·창의·실력 등등의 사회의 도덕적 가치체계를 근본으로부터 급격히 무너뜨리는 위기를 몰고 왔다.

 

 

5. 박정권 시대를 관통한 정신(영남패권주의를 논하기 전까지 규정되어 왔던 시대 정신)

비틀린 역사의 한 장인 박정희시대의 '60년대와 '7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1) <반공 매카시즘의 긴 긴 혹한 속 모래 바람>,

2) <노동자 농민의 희생과 생존권 박탈을 댓가로 치룬 경제 성장>, 그리고 그 결과로서,

3) 부정과 불의한 방법이 대접받고 불법 투기가 부 축적의 지름길로 각광받으며 배금주의가 판치는 <인간과 사회의 도덕적 파탄>이었다.

 

 

6. 요약

 

박정희 정권 19년은 정권의 비정당성을 가난 퇴치라는 명분 획득으로 은폐하고자 일본 차관 도입이라는 비상대책을 강구하게 하였고, 이 굴욕적 한일 협정 외교는 민족의 혼을 팔아먹은 부도덕의 극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전시성 행정과 언론에 대한 통제 탄압 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는 원죄가 된다. 차관 도입을 둘러싼 정권과 특정 기업의 유착을 바탕으로 전시성 수출 주도 경제 개발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때, 한편으로는 영남지역에의 집중 투자로 영남민들의 환심을 사 정권 안보에 필요한 표심을 붙들고,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인권을 억압하고 그 수고를 착취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동력을 삼았으며, 산업 성장을 밑받침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저곡가 정책을 펼침으로써 농촌, 특히 농업인구가 절대 다수인 호남 지역의 농촌 피폐화를 방치, 심화시켰다. 이것은 서울과 도시를 향한 이농을 재촉하였고 서울은 경제 집중으로 인한 비대화와 함께 상경민들로 인한 빈민촌이 형성, 확장되면서 거대화하였다. 서울의 팽창은 서울의 전 지역을 투기 대상으로 만들어버렸고 불법 투기가 사회의 정당한 이재수단으로 각광을 받는 풍조를 만연시켜 사회의 일괄적이고도 결정적인 도덕적 파탄을 예약하고 있었다.

 

 

 

. 영남패권주의 형성 : 패권의지 발아과정

 

1. 박정희의 콤플렉스

 

박정희 군사 파쇼는, 가난극복이라는 인간의 선험적 열망을 오로지 고대 국가의 메시아 재림으로써나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국민의 의식을 호도하여, 국가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서 전면에 부각시키고,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희생정신에 입각하여 민족적 대역사(大役事)를 일으키고 있는 <정의의 화신이자 구국의 메시아>로서 자신을 선전해나가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의 친일 부역의 과거가 남모르게 희석되고 더불어 차기 정권도 연이어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경제 성장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루는 박정희의 또 하나의 통치술은, 정권 비판을 국가 전복 기도로 뒤집어 씌워 전 사회의 지성과 양심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빨갱이 사냥의 기나긴 회오리였다.

이토록 부도덕한 태생의 정권이 표방한, 한민족의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을 퇴치해내겠다는 대외적 명분은 사회에 일시적으로 충격과 활력, 그리고 대중의 동원을 불러왔으나,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전후 냉전 초기 신생 국가가 갖는 시대적 요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기초 학습 관문에 막 진입했던,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신장, 민주적 가치체계 확립, 그리고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 근본정신은, 군사 독재 정권이 내세운 가난 퇴치라는 대외 선전용 구호 아래, 그리고 정권 안보라는 내적 당위 밑에 내던져져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므로 모든 전통적 덕목의 계승이나, 전근대를 벗어나 신생 민주 사회가 지향할 제가치(諸價値)는 이 경제 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무참히 목 졸리고 말았으며, 이제 인간의 혼과 정신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피폐한 목숨을 근근이 부지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2. 영남민의 이미지 제고

 

한편, 영남민에게는 급상승한 사회적 지위와 상대적 우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 사회에 대한 패권의 영향력을 뻗쳐나가는 기회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서울에 대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일환으로 호남이라는 라이벌을 희생양으로 잡아 자신들 능력의 본원적 우월성을 전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했고, 이 의지는 다시 영남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차츰 차고 넘쳐흘러서 어느덧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패권을 자신감으로 확인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정작 우려했던 서울의 견제가 어느 곳에서도 감지되지 못한 데에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민들의 개방적 성향과 그로 인한 그들의 낮은 결집력도 있었겠지만, 이미 서울은 정부 요직에서부터 국회, 사법부, 대기업, , 검찰경찰 등 사회의 실질적 지배 위치를 장악해버린 영남인들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공존이라는 유화(宥和)와 타협을 선택하고 말았던 데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또한 영남 권력층과 서울에 진출한 상류층 영남인들이 항용 견지하는 서울에 대한 정중하고도 열등감이 배인 태도가 서울 수도권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제공했고 따라서 경계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꺼려할 이유가 없기도 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영남인 스스로 '촌놈', '문디'라고 칭하는 모습은 사실상 '자랑스런 열등감'-'열등의식'과 차이가 있는 의미로서-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서울사람들로서는 그것이 겸손과 활달한 정서의 표현으로 보여 호감을 갖게 하고 영남패권주의 자체에 대한 경계를 해제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3. 박정희를 찬미한 배경

 

오랜 시일에 걸친 영남민들의 서울 컴플렉스는 박정희라는 동향 출신 절대 권력자의 탄생, 그리고 60년대 중반부터 가시화되는 영남 편중의 산업 기반 편성과 경제적 성과물의 수혜로 인해 타 지역에 비한 상대적 우월을 확인하며 서울 콤플렉스를 벗고, 사회적 신분 상승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변방에 위치했으며 정치 경제적으로도 주변인의 처지를 벗어나 보지 못한 영남 대중으로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삶의 변화였다. 동향 출신 영남 정권 담당자가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역사 이래 최초의 기획인 가난 퇴치라는 슬로건에 거는 전적인 신뢰와 열광적 찬미 속에, 영남민에겐 박정희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소명이라는 <신앙>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영남인들의 박 정권에 대한 애착에는, 한민족 역사만이 아니라 유교 문화권의 대부분 국가가 그렇듯, 혈연 중심, 가족 중심, 지역 중심 등의 연고주의가 지지 동력의 기저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영남민이 부도덕한 독재 정권인 박정희를 같은 영남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표피적 감성에 의지하여 무의식중에 관성적으로 지지해 왔다면 이것은 오직 영남인만이 아닌 한민족 전체, '한국의 문화'가 감당해야 할 업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미 관습으로 내려와 영남민 당사자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가급적 배제한 면만을 논하고자 한다.)

['67년과 '71년의 6,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경상도민으로부터 거의 변함없이 72%의 지지만을 얻고 있는 것으로 봐서, 경부고속도로가 개통('718)되고 포항과 낙동강 하류 지역, 창원, 구미, 부산, 거제, 울산 등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대단위 전문 공업 단지가 들어서는 70년대 이전까지는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유신시대에서와 같은 극심한 편파로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71년 선거가 영남에서 최초로 노골적인 지역감정의 선동에 휩쓸려 치러졌던 사실까지를 감안하면, 영남대중이 박정권의 경제 정책으로 인한 직접적 수혜를 피부로 느끼기 전까지는 그에 대한 지지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렇듯 박정희정권에 대한 영남인의 지지는, 70년대 들어 경제 성장 혜택의 가시적 증거로서 영남과 서울을 잇는 고속도로가 뚫리고 거대한 공장이 마을 근처에 들어서 연기를 뿜으며, 직접적으로는 초가지붕이 헐리고 가옥이 개량되는 것을 실제 경험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굳어지는 것이었다.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가장하는 관의 면밀한 주도로 새마을 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며 새벽의 마을 확성기를 통한 노래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하여 사회가 활기를 띠어 보이는데다, 긴긴 농한기에 펑펑 놀았을 젊은이들이 공장에 취직하여 일함으로써 가계 소득을 높이고 집안에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를 들여놓게 되는 등, 가히 눈이 휘둥그레질 의식주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유형적 생활 패턴의 변화가 박정희시대의 60년대 후반 이후부터 70년대를 관통하여 꾸준히 지속되어왔다.

 

영남민은 그러나 이러한 표피적 생활수준 향상이, (앞에서 짚어본 바) 그것이 일본에의 항구적인 경제적 종속을 전제한 유상 차관 도입과 그것을 둘러싼 정·경의 검은 커넥션, 권력층의 부정부패, 노동자 임금 착취 그리고 산업 인구의 80% 이상이 종사하는 농업 전체를 제물로 삼는 정책이었으며, 특히 (산업도로로서 경부선을 건설하고 그 곳으로부터 비켜간 지역인) 호남을 푸대접함으로써 그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경제적 투자와 수혜를 영남에 독점적으로 쏟아 부은 결과였음을 짐짓 모른 체하였던 것이다. , 영남민 자신의 윤택해지는 생활의 변화가 사실은 타 지역의 희생에 힘입은 과실이었음을 무시하고 있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걸쳐 청장년 시절을 보냈던-당시에 사회의 중추 노동력 제공자 층이었던-영남민들은 (2003년 현재, 50대 중반~60대 중반) 해방을 전후한 '40년대에 출생하여 한국 전쟁의 고통과 전후 폐허가 된 국토 위에서 보릿고개를 넘기며 소년 시절의 극심한 가난을 체험해 본 세대로서, 이들에게 있어 박정희시대에 처음 맛본 이러한 생활수준의 향상은 한 영웅의 구국적 리더십의 결과이자 종교적 축복으로 받아 들여졌다. 종속적일 망정 수치로 나타나는 경제 발전이라는 빛의 이면에, 불평등과 소외의 암울한 그림자가 길게 누워있을 것이란 것을 그들이 잘 알았다 한 들, 자신들이 난생 처음 움켜쥐어 본 물질적 축복은 결코 누구에게 양보할 일이 아닌 것이다. 넉넉한 시절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일수록 더욱 그것이 언제 누구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지도 모르는 한시적 기회라 여겨져, 이참에야말로 아예 한층 알뜰한 대목을 노리려고 할 일이다.

 

 

. 영남패권주의 형성 : 성장과 강화

 

1. 경제적 수혜와 우상숭배

 

그러나 이들이 경제 발전을 이끄는 정부를 신뢰하고 지지하며 국가 시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몫을 챙기겠다는 의식과, 박정희를 점차 <우상숭배화>하고 있는 사실 간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잇는 고리는 바로 <사회적 신분상승>이라는 동기이다. 독재자로 낙인찍히고 있는 박정희를 열렬히 숭배하는 이유는 단지 박정희가 통치하는 조건에서만 최대의 경제적 수혜를 누릴 수 있다라는 계산속에서가 아니다. 그 경제적 추구라는 동기만으로는 전 사회에서 빗발치는 비난을 다 감당하고 이윤까지 남기기엔 손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까지 절대 지지를 해왔던 정치 지도자가 독재자임을 확인했다고 해서 냉정하게 돌아서려니 편애를 받아 누리고 있는 혜택을 놓아버리기가 아까울 수밖에 없다. 버리자니 아깝고 부정한 사람과 애정행각을 지속하려니 그것은 남한테서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라 영 불편한 것이다. 그러니 그를 아예 우상화를 시켜 그의 부도덕성을 완전히 가려버리겠다고 나서게 되는 방법이 남았다. 우상화 작업에 돌입하기를 작정하고서부터는 이제 자체적 메커니즘에 몸을 맡겨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후로는 박정희에 대해 어디로부턴가 스며나오는 의구심은 모두 무시된다. 부정적인 요소는 제거됐다. 다음에 마주치는 단계는 우상화된 박정희와의 자기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이미 구국의 선지자와 같은 인물로서 우상화를 시켰으니 그를 나의 역할모델(role model)로 삼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모델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자신의 미래의 모습쯤으로 매번 그려보며 닮아가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은 이제 그 모델의 원초적 부도덕성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지운 채 온전히 평화로운 애정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것의 결과는 스스로가 평가하는, (먼저 심리적으로) 신분 상승된 자신의 모습이다. 만약 이 과정 어디에서 회의(懷疑)가 시작된다면 그것은 각 절차 (박 정권의 태생적 비도덕성, 독재자가 된 인물 지지, 독재자 우상화, 심리적 신분 상승 경험)에서 행한 자신의 부도덕을 스스로 폭로하는 자기 파멸적 행위가 되고 말 것이므로 함부로 긁어 부스럼을 낼 일이 아니다. 그 회의란 애초부터 터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박정희정권 자체가 영남인을 대상으로 정치적 공작을 한 혐의가 물론 짙다. 그러나 각 과정은 어디까지나 영남민 개개인과 소집단 각각이 개별적이면서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절차를 밟았다고 말해야지 옳다.

 

2. 신분 상승의 욕구

 

위에서 말한 심리적 신분 상승이란 자존심과 자부심(self-esteem)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심리는 자신 안에 내재한 능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책정한 한 역할모델과의 동일화라는 비본질적인(external) 요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신분 상승에서 이행할 다음 단계는 실질적인 사회적 신분 상승이다. 심리적이란 어디까지나 인간 개인이 갖는 개별적 현상이므로 그것을 <집단적인 현상>으로 만들어 그 사실을 서로 공히 나누면서 확인하고픈 욕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집단적 신분 상승이란 당연히,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닌 이질 집단을 필요로 한다. <외부 집단>과 자신의 집단을 비교하여 우위가 판명될 시엔 자기 안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입증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본질적인(internal and essential) 자부심의 제고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3. 희생양의 필요성

 

이러한 영남인의 신분 상승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체성 재형성 과정에 결정적인 악역을 떠맡길 집단이 필요한데 그것이 호남지역민이었다. 호남이 유독 영남인에게 적대적 관계를 형성해 왔거나 미래의 라이벌로서 미리 손봐야 할 골칫거리로 인식되는 차원이었다면, 영남은 이미 자신의 지위와는 현격한 거리를 벌리며 약체화의 길로 들어선 호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연민까지 가졌을지언정, 비틀거리는 놈을 냅다 걷어 찰 이유까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관계만으로는, 박정희정권이 아무리 관과 언론의 여론조작으로 호남사람들이 정부를 무조건 반대하는 못된 짓을 하는 것처럼 선전할지라도, 정치에 무관심하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운 시골 노인, 아낙네까지를 포함한 전 영남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호남민 전체를 그렇게 멸시하고 내리깎는 집단적 마타도어 행위에 동참해온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71년 유신으로 영구집권 체제가 확립됨으로써 민중의 신성한 투표권 행사가 갖는 의미 자체를 말살당한 환경에서, 박정희정권에게 호남은 이미 아무 위협거리가 되지 못하였으며, 하물며 영남인들 민초가 호남인 민초를 그렇게 이지메(편집자주: izime :집단괴롭힘)하여 박정희정권을 정치적으로 도울 일 또한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영남이 호남을 잡은 동기에는, 이렇듯 자신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정당화시켜줄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집단 간의 권력 구도와 그 다툼의 메커니즘이 기저에 놓여있다. 박정희가,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선 김대중을 정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와 질서에 도전하고 위협을 가하는 '빨갱이' 사상을 가진 자로 몰아 핍박함으로써 자신의 좌익 경력의 정체를 가리고, 다시 그 희생양을 제물로 정권 안보를 더욱 견고히 쌓는 동안, 영남민들은 호남민들을 국가적 역사 창조에 늘 훼방놓는 반동 집단이거나 온통 빨갱이 사상에 물든 불온 집단으로 매도함으로써 그들을 사회의 최변방으로 끌어내렸다. 대신 자신은 국가 시책에 협력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의로운 민중으로 분칠하고 그로써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사회의 주류 시민으로서의 신분 상승을 입증받고, 계속하여 그 기득권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과시하였다. 박정희가 범죄자적 수법으로 덧씌웠던 소위 빨갱이의 흔적이 김대중에게 있다고 한번 가정하더라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영남민 개인 개인이 김대중을 미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이 아예 집단적 광기를 띠고 김대중이 아닌 호남민 전체를 빨갱이로 몰고 말았던 데에는 이러한 영남민 집단의 실질적 이해 타산과 그 추구라는 의지가 작동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박정희는 영남인들의 이러한 신분상승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매카시즘의 회오리를 일으켜줌으로써 그들의 '안티빨갱이' 광분이 의로운 행위로서 인증되도록, 그리하여 사회의 주류로서 명분을 얻고 행세가 가능하도록 내내 지원하였다.

 

4. 영남패권주의 형성과 영남민의 자발적 동참

 

여기에서 박정희가 영남대중을 이용해 먹은 점도 부인키 어렵겠지만, 영남대중의 호남민에 대한 집단 이지메 행위 또한 박정희의 빨갱이 사냥이라는 공포정치를 가능케 하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동력으로 역할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영남민들은 다시 자신들의 기득권을 박 정권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박 정권과 영남대중은 서로의 필요에 의한 찰떡궁합의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남민이 (흔히 지역감정이니, 지역주의니 하며 그 책임이 호남민과 영남민 둘 모두에게 돌려져야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그 책임의 주소란 과거의 독재 권력과 현재의 극소수 특권층들만의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을 하는 사람의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대호남 모략과 중상의 집단 광기에 동참함으로써 영남민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영남에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실질적인 경제 특혜와, 영남인의 인사 우대와 요직 중용이라는 간접적인 대리 성취감, 그리고 사회의 집단적 패자로서 호남은 물론 여타 모든 지역민에 대해 누리는 우월한 사회적 지위라는 직접적 성취감이었다. 이러한 프리미엄이 실생활에서 실현되고 있다면 그것은 각 개인으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인 것이다. 이 집단적 행위는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영남인 전체의 norm(규범)이 되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호남인을 이지메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지극히 비인간적 만행인지에 대한 숙고와 판단의 능력이 각 개인으로서는 거의 마비되어 간다.

 

5. 호남민들의 의식 수준

 

그럼 영남민들이 그러한 광기에 휩쓸리는 동안 호남민은 어떻게 대응했던가. 호남민은 왜 자신들이 그러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알 리 없었다. 왜냐하면 영남민으로부터만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그들에게 나서 직접 따지거나 대항하여 투쟁했을 테지만, 집단 가학은 영남만이 아닌 비호남 전 지역으로부터 날아왔기 때문이다. , <영남의 규범>은 그들이 사회적 패권의 자리에 올라서면서부터 어느새 <대한민국 전 사회의 '규범'>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전 사회의 문화가 되어 이제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 비호영남(非湖嶺南)은 중립적 위치의 공정한 심판관이나 그저 무심한 구경꾼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 (아직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고 칭하기엔 충분치 않다)에 편입되어 대호남 멸시와 이지메에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떠받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렇게 전 사회의 정서(sentiment)가 호남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 호남민들은 자신들이 정말 역적질이라도 한 일이 있는지 스스로의 행위를 자꾸 반추해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발견해 낸 이유는 겨우 김대중을 지지한다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이 독재자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가 빨갱이일 리도 없고 더구나 한 의로운 정치인을 존경한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이 자연히 빨갱이가 되고 말 수는 없음을 잘 아는지라 사회의 멸시와 가학을 거부해 보지만 결국 이르는 결론은 자신에겐 힘이 없다라는 자조였다. 수시로 대남간첩단 사건을 조작, 무고한 사람을 체포 구금하고 무지막지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 광기로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북한이 아닌 '북한괴뢰'와 관련한 일이 털끝만큼이라도 발각되면 친외가 8촌까지 샅샅이 뒤져 불이익을 가하는 이 살벌한 독재 시대에, 숫제 빨갱이라는 딱지를 한 지역에 붙여준다는 것은 그저 자존심을 상해주는 것 정도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 자체를 난도질하는 용서받지 못 할 범죄행각이었음이다.

 

그러나 호남민들은, 자신들의 뺏긴 몫이 영남민들이 향유하는 상대적 풍요에 돌려져 있다라는 사실, 영남인들의 자신들에 대한 이지메에는 동기와 목적과 의지가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다 인식할 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슬픔의 감정 안에서 모두를 감당해내고 있었다. 이처럼 호남민들의 사회문화학적 인식의 수준은, 자신들이 소외에 처하고 있는 원인의 규명이나 자신들의 권리 주장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이해에 다다르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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