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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활강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남패권 이데올로기

시민25 2016. 3. 17. 16:34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남패권 이데올로기

 

(이 글은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남패권이데올로기'입니다. 따라서 '정치권력'에 의한 직접적 억압이라는 논제는 가급적 피했음을 밝힙니다.)

1. 영남의 문화코드와 규범

관습에서 규범으로

박정희 정권 시대의 정신은, 북한 남침 가능성을 위협의 빌미로 삼은 <국민 총화 단결>, 국가의 경제 성장을 명분으로 삼은 <개인 자유의 억압>이었다. 즉 국민의 <일사불란한 행동통일 양식>을 요하는 통제 사회의 정신으로서, 권력자의 명령에 개인이 순종-상명하복-하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국가는 개인에 대한 '다수'의 의지로서 선()이고, 집단은 통일된 개체로서 개인에 대해 선()이어서 개인은 어디까지나 종()에 머무는 존재였다. 이러한 <명령-복종>이라는 사회적 룰을 모든 개개인이 준수할 때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며 국가발전이 비로소 추동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 <질서>란 의미 속에는, 체제(system)는 빠지고 오직 순서(order)와 서열의 이미지만 남아있어, '조화와 균형'이라는 질서의 본래적 의미가 완전히 누락되어 있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그들 개인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문제 제기, 반대, 불만의 표출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속셈으로 권력이 부린 효율적 통치 기술에 불과하였으나, 권력의 선전에 속고 있는 각 개인으로서는 그 방식이 자기 개인의 생존권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이러한 <집단적 행동통일> 선호라는 사고방식은 이제 국가의 결정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소규모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 단체(다수)가 결정한 일에 대하여 개인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개인의 자율적 판단에 의한 독자적 행동, 그리고 타인에게 하등 해를 끼치지 않을 개인적 결정과 행동을 할 때마저도, 그것은 다수 타인들에 의해 습관적으로 집단의 선()에 반하는 일로서 빈축을 사고 마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새로운 현상이 가치 중립적 의미의 <관습>-문화코드-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 문화는 부단히 권장되거나 그저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이전까지는 '관습'의 범주 안에 머물러 왔는데-지켜지지 않았을 경우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수모와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으로서, 엄연한 <규범>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단체의 결정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는 곧 반동으로 몰리고 마는 것이다. 이 규범은 꼭 제재의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에게 행동규준(준거)을 제공함으로써, 매사 잘잘못과 합리·비합리를 꼼꼼히 따질 필요 없이, 무조건 선()으로서 믿고 따르도록 유도하는 지침이 된다. 그러므로 이 규범이라는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생활에서의 낙오를 상징하고 만다. 그만큼 유·무형의 강제력이 만만찮은 것이다.

<집단 우위 양식>,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아직 주종관계라는 전근대의 사고 속에 길들여져 있는 '70년대의 한국인들이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서 개인의 자유를 신장할 꿈을 미처 꾸지도 못한 채, 그냥 관습의 연장 상태에 머물고 말았다는 의미의 '문화 지체'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서로 이질적인 문화간의 조정과 조화의 시간을 요하는 문화적 지체가 아니라 문화 퇴행이요, 문화적 반동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장래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가는데 있어 결정적인 장애물 구실을 하고 말기 때문이다.

<단체의 권위에 복종하고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라>는 권위주의 규범은 영남민에 의해 주도된다. 그들은, 박정희정권에 순종하고 국가시책에 협조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고 집단의 이익(그들로서는 곧 국가의 공영)을 좇는 자랑스런 전통을 세웠다며 득의만면이지만, 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개인의 희생을 똑같이 치루면서도 집단적 이익의 분배에서 철저히 제외되고 있는 지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현실에는 애써 눈을 감는다. 이렇게, 정치 권력과 영남민들은 합세하여, 영남민들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저쪽 소외지역의 대중도 자신들이 규정한 규범아래 고개를 숙이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대외홍보용 합리화

규범이란 모든 사회 구성원에 대해 강제력을 갖는다. 그것은 선과 악, 우위와 열세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럼 왜 영남민이 그 규범을 만들어 나갔는가? 영남민들이 역사적 유물로서의 봉건적 의식과 전통을 더욱 각별히 자랑스러워하고 숭앙해왔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규범>이 전 사회로 전파되어 갔다는 그 사실 자체이다. 애초, 박정희에 정서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영남민들이 박정희정권의 비도덕성을 눈감아 주면서 댓가로 받은 경제적 혜택이란, 물리치기 어려운 뇌물과 같아서 일시적으로 배를 채우게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차후에도 끊임없는 탐욕을 갈구하는 것은 야만이긴 할망정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졸렬한 인간의 본성이 가져오는 현상을 그대로 공개, 자랑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므로 정권과 영남지역민은 공생관계를 일단 형성하여 서로를 감싸고 옹위하면서 그들 각자의 최대 이익을 서로간에 보장받는 방법에 골몰하게 된다. 따라서, 부도덕한 야합 과정을 아름답게 윤색하기 위한 <대외홍보용> 합리화(justification) 작업, 즉 전 국민을 상대로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한 논리 개발이 필요해진다. <공식적>으로는 그것이 국가가 찾는 최선의 공동 이익을 얻기 위한 결과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며, <정서적>으로는 국가 시책에 적극 협조하는데 대한 합당한 보상으로 여겨지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나라가 처한 위기감을 부추기고 선전하는 일이다. 직접적 생존의 문제로 그 긴급성을 역설하여 그 누구든 국가의 권위에 토를 달지 못하게 완전히 복속시키겠다는 방식이다. 끊임없는 북한의 남침 위협 속에 한손에 총을 잡고 나라를 지키며 또 한편으로는 간단없는 경제적 전진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는, 영남출신인이 사회의 요직마다에 포진하고 있는 것 자체가 곧 국가와 국민에 봉사하는 양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처럼 선전하는데, 관직을 맡는 일을 한 개인의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에 몸과 맘을 바치는 봉헌인 것 쯤으로 미화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로 아무리 고급관료의 부패가 심하더라도 그들에게 올리는 일반의 존경이 좀처럼 가실 수 없게 만드는 매스컴의 선전에 의해 굳어진다. 또한 영남민들에게 돌아가는 편파적인 혜택은, 지역에 위치한 산업단지나 항만 등의 힘차게 돌아가는 현장을 수시로 매스미디어에 광고하여 영남이 국가 기간산업을 이끌고 가며, 그만큼 국가 발전에 주춧돌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미지 조작한다. 이러한 작업은 결코 소수의 정권 담당자들이 도맡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남대중의 긴밀한 협조와 참여가 밑받침됨으로써 가능해진다.

 

대내용 시스템 개발

또 이 작업과는 별개로, 영남민들 자신을 공생관계라는 이 시스템에 잘 적응토록 만드는 <대내교육용> 이념의 개발이라는 요구가 있다. 이 내재적 이념이 그 각 구성원의 뇌리에 각인될 때, 정권은 공권의 강제력을 약화시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더욱 원활하게 그들의 자발적 협조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은 정권의 외적 컨트롤로 이루어지는 것 보다는, 영남민 집단 자체의 효율적 관리와 성장이라는 필요에 의해서 스스로 방향이 결정된다고 봐야 하겠다.

그 대내교육용 이념이란 <권위주의 사고체계>의 확산이다. 그 집단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명분보다는, 소속 집단에의 단순 충성이나 의리를 우선으로 여기는 가치체계이다.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하는 것이 당위라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서열 개념에 민감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적소에 임하는 것이 단체의 질서 유지에 효율적이라는 인식이다. 따라서 서열상 앞서 있는 존재에게는 내가 존경을, 그리고 뒤져있는 존재는 이제 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룰이 재밌는 것은 자신이 선임자에 대해 존경을 바치지 않는 것에는 관대하고, 후임자가 자신에게 복종을 안하는 것에는 매우 가혹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룰은 으레 최고 권력자가 손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이들 영남민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학습되어 그것이 비인간적 체계라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는다. 설사 비인간적 요소를 인지하더라도 더 나은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접고 만다. 이렇게 하위집단이 상위집단에 대해 존경을 바치고 복종한다는 문화코드에 즐겨 편입될 때, 그 정점에 있는 국가 권력은 훼손이 용납되지 않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이 되고 자연히 충성의 대상으로서 인정되고 마는 것이다.

<권위주의 문화코드>에의 적응 과정

만약 누군가 이 권위주의 문화에 적응을 못한다면 그는 비도덕적 군사 파쇼 정권에게 존경을 바칠 리가 없다. 여기에서, 박정희에게 반기를 드는 영남인이 왜 그처럼 귀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저항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정권에 반기를 들게 되었을 경우, 논리적 귀결로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권위주의 문화의 허위의식을 발견할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것은 정권을 반대하는 것보다 훨씬 힘겨운 싸움이 된다. 그것은 일신의 행복 조건을 기꺼이 저당잡히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행의 씨앗이다.

평범한 영남인이 왜 그 힘든 싸움을 피하게 되는지,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사회생활에서의 불편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문화를 배격한다는 것은 매일 매시간 주위의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충돌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회식할 일이 있어도, 술자리에서 교주 박정희를 찬양하며 떠들고 있을 골빈 동료들이 뻔히 보이는지라 참석할 수가 없다. 매번 빠질 것이다. (박정희에 반대한다는 이유 이전에) '회합에 빠진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동료들로부터 사회성 없는 사람, 융통성 없는 사람, 폐쇄적인 사람, 리더십 없는 사람, 회사일에 열의가 없는 사람, 이런 식으로 찍히고 말 것이다. 단체의 권위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소위 왜곡된 조직문화에 이의달지 않는 사람, 타협적인 처세술을 익힌 사람들이 이러한 권위주의 집단 문화 속에서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게 되고, 그런 부류가 리더로서 각광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장 열렬한 박정희지지자가 영남인 집단의 리더로 클 수밖에 없는것이다. (아니면, 집단의 리더가 되려면 필히 먼저 박정희 광신도로 커 있어야만 한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권위주의 문화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개인의 내면적 고뇌 때문이다. 박정희시대에 흔히 있었던 예를 들어보자. 길을 가다가 어느 젊은이가 장발로 걸려 경찰에 의해 가위질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보기에 지저분한 긴머리 유행이 그렇잖아도 마뜩찮았는데 잘 됐다 싶다. 경찰이 할 일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지긴 하지만 거리의 미화(?)를 위해선 잘하는 일인 것 같다. 다 잊어버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중학생 아들녀석의 머리에 고속도로가 나 있다. 힘없는 학교 선생이 학교 방침대로 한 일이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지만 욕이 먼저 튀어나온다. 책임의 소재를 가만히 따져보니 두 가지 해프닝이 모두 권위주의 정권의 지시에 의해 나온 것임을 알아차린다. 여기에서 고민한다, 어느 것이 잘 못 됐나를. 그러나 하나(전자의 예 : 장발)는 찬성이고 하나(후자의 예 : 아들의 머리)는 반대라고 말하는 것이 더없이 이율배반적임을 알면서도, 결국 그러한 혼돈을 받아들이고 만다.

이것이 평범한 영남인들이 택하는 타협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명민한 판단력을 발휘하여 두 케이스 모두 군사 파쇼 정권의 권위주의 정책의 산물이다라고 규정하고 말 경우, 논리적 유추에 의하면, 이후 계속적으로 국가 정책에 비판을 하고 말 일이 자주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야말로 나 자신이 두려워 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스스로 제어 장치를 가동시킨다. , 개인인 자신의 판단력보다 단체(국가)가 하는 일이 무언가 정당성이 더 있을 것이다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단체(국가)의 권위에 무조건 승복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부딪치는 일에 대해 자꾸 판단을 하기 시작하면 남는 것도 없이 혼자만 피곤해지고 만다는 걸 터득하게 된 결과다. 이런 식으로, 상위 권위에 항의하기를 일체 포기하는 것은, 권위주의 문화에의 굴복이며 다시 그 자신이 권위주의적 인간으로 전이되는 절차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고달픈 생활을 선택하여 견딜 개인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권위주의 문화에 깊이 예속된 영남민들은 거의 예외없이 상위 권력(권위)에 항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아예 능동적 태도를 가지고 즐거이 동화되어 사는 것이다. 이 문화에 순응하기로 맘을 먹는 한, 박정희에 존경을 바치는 것은 파쇼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충성행위가 된다.

다음 단계로서, 이제 모든 개인이 모여 이 권위주의 영남문화코드를 서로 나누고 경험함으로써 점차 그 코드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간다. 일정한 수준의 강도에 이를 때 그 문화코드는, 개인 스스로가 기꺼운 마음으로 지켜가는 행동의 가이드라인으로서 뇌수에 프로그램화 되고 마는, 구동적(驅動的) <규범>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그리고 동시에 권위주의 문화코드는, 어떤 행위가 그간의 관행에 반하여 행하여지고 말았을 경우, 거기에 필히 일정한 벌을 내리고 마는 제어적(制御的) <규범>이라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규범>으로서 확립됨의 의미는 이전의 관습이나 정서, 그리고 문화코드와는 달리, 그것에 대한 의문과 소통의 창을 모두 폐쇄해버린다는 공식 선언이다. 규범은,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성역이다. 의문제기 자체가 원초적 반동 행위인 것이다. 무조건 받아들이는 공리이다.

[정리 : <권위주의>란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영남민에게 있어 권위의 개념이란 권력과 대동소이하다. 권력은 단체·집단에서 나오고 따라서 단체·집단은 권위를 지닌다. 그러므로 개인은 집단이라는 권위에 복종하는 게 옳다. 사회의 질서는 이 <서열주의>에 의해 지탱된다고 믿는다. 바로 <권위주의> 문화코드이다. 문화코드가 모든 이에게 학습·강화될 때 결국 <규범>으로 승격하고, 이 규범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행동의 가이드라인이요 통제수단으로 역할한다.]

2. 영남 권위주의 문화코드의 전 사회적 <규범화>

호남 길들이기 : 마타도어

이토록 반민주주의적인 이념이 영남인에게 움직일 수 없는 문화코드가 됨으로써 겪게되는 폐해는 양심을 지키려는 일부 영남민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남민들은 이 문화를 전 사회에 전파하겠다는 선교 사명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전 사회의 물리적 패권을 틀어쥐기 시작했으므로 자신이 새로이 점한 사회적 지위에 대해 무념무상할 리 없다. 이들은 자신의 파워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문화코드에 의하면, 열등한 집단은 우수한 집단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어있다. 자신이 정점에 위치해 있는 마당에 하위 그룹이 자신을 본체만체 한다면 자존심이 상하게 마련이다. 예전, 호남을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한 제물로서 지긋이 밟아줬을 때 이미 그들로부터 영구적 복종을 약속받은 줄만 알았더니 웬걸, 확인해 볼 때마다 그것이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수모와 핍박을 안길수록 더욱 가열찬 저항의 기미가 짙다. 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나, 갈수록 벌어지는 인구차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영남민 자신들과는 모든 면에서 상대 안되는 소위 미물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민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가 않은데다가, 내심 경멸의 념까지 가슴에 품은 듯하다!

영남민들은 권위주의라는 문화코드의 본질이 지극히 반민주적이며 비인간적임에 대한 성찰을 해 보기는커녕, 자신들이 유포하여 이제 모든 비호영남민이 받아들임으로써 전 사회적 권위까지 갖춘 그것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는 호남민이 몹시 괘씸해진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고 만만하게 대응했다간 도리어 저항의 강도가 더 높아질 위험마저 있는 상대다. 그러므로 호남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방법은, 아무리 가혹하고 비열하더라도 괘념할 일이 아니고, 일단 가장 효과적인 것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방법이란 바로 <빨갱이 딱지 붙이기>이다. 맹렬한 비난을 받을 원인과 책임 소재는 모두 호남인에게 덮어씌운다.

명분상으로는, 호남민들이 '영남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서가 아니라, 반공이라는 국가 존립의 대명제에 반동 행위를 한다는 이유를 붙여 '이질집단'이라 레이블링(labeling:딱지붙이기)한다. 국가란, 영남민만이 아닌 전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한 지고의 가치가 됐으므로 호남민을 이 대의에 배반하는 집단으로 몰아갈 경우, 그들이 갖는 변명의 구실이 형편없이 옹색해지고 말 것을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호남을 마타도어하는 영남민의 진정한 목적은 국가 안위를 염려해서가 당연히 아니고, 자신들의 패권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전략으로, 호남민들이 권위주의 문화코드를 받아들일 때까지 억압하는 것이다.

만약 호남이 영남에게 굴종하기로 미리 맘을 고쳐먹었었다면 영남으로부터의 억압행위는 훨씬 유연했을 것이다. 영남민도 원래 변태가학성을 유전자로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어차피 경쟁 상대로서의 힘을 상실한 호남을 매양 이유없이 패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억압의 동기는 바로, 영남민 자신들이 진리로 믿고 있는 권위주의 사고 체계를 호남만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호영남인 : <권위주의 규범>에의 편입

영남의 무소불위 권력은, 호남을 마타도어 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기개에서 뿐만 아니라, 그 패권 전략이 호남을 제외한 전국민에 의해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여지도록 실천돼 나가는 과정 속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시대는 박정희 군사파쇼 서슬에 숨죽이는 때요, 사회 특권층으로의 발돋움을 원하거나 사회적 생산의 과실물을 탐하려면 영남인 엘리트와의 커넥션 어딘가를 필히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 생존방식의 상식이 되어있다. 영남엘리트들이 군()을 포함한 사회 권력부 구석 구석에 이미 포진해 있는 바, 비호영남인들로서야 영남의 문화 코드를 신속하게 학습하는 것이 세상살이에서 절대 유리한 일이다. , 자신의 서열상 위치를 얼른 찾아서 영남에게 충성 경례를 올리고 호남에게는 하대를 하는 권위주의 문화 체제속에 눈치 빠르게 편입하는 것이었다.

비호영남민이 호남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기보다, 멸시의 눈으로 낮춰 보고 거드름을 피워보는 것은 그 일이 정당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 행위가 영남의 비위를 맞추는 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이것은 비호영남과 호남의 관계 설정이 아니라, 비호영남과 영남간의 관계 설정이다. 이러한 비호영남민의 영남패권 부역이 호남민에게 영남패권에 못지않은 괴로움을 안겨주는 일이지만 비호영남민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기회주의적 처신을 선택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은 영남민이 하는 것처럼 호남민을 열등 시민으로서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는 걸 늘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서열 위치를 망각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제2등 시민으로서 합당한 역할을 떠맡는다. 호남민과는 하등 사적인 유감이 없으므로 먼저 나서서 호남을 치고 나올 이유가 없다. 시와 장소에 따라 영남민의 행위를 흉내내면서 그 강도를 조절하는 식이다. 영남민은 공식(공개)적으로 호남을 차별할 수 있지만, 비호영남민은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차별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 관행이 영남과 비호영남 간의 관계설정을 위한 '영남 눈치보기'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젠 비호영남과 호남간의 관계 설정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비호영남에게 주체적인 선택권이 있었던 게 아니고 영남이 설정한 구도 안으로 얌전히 찾아 깃드는 형식이다. 비영남에게도 이러한 '서열매김'이 점차 자신들의 문화코드로 자리매김한다.

호남민을 보면 딱히 잘못한 것을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비호영남민은 그러나 호남민을 '좀 지저분하고, 무식하고, 솔직하지 못하고, 문제아, 이단아 같고 괜히 꺼려지는' 부류, '삼등 시민들'로 분류하는 훈련을 실습해나간다. 대놓고 "나가 있어!!" 하진 못하고 "너하고 놀기가 좀 거시기하다···" 며 말꼬리를 흐리는 식이다. (TV드라마, 매스컴 등을 통한 호남인 비하와 그 이미지조작이 비호영남민들로 하여금 호남민을 멸시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질은 아니다. 권위주의 문화코드가 확산됨으로써 서열의식의 형성과 함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그 결과물이다.)

이런 방식엔 비호영남인 자신의 뚜렷한 정체성 인식이 먼저 전제되고 있음을 본다. 다시 말해, 이 훈련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서열을 확인받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각 지역의 비호영남민이 호남민을 대하는 방식의 급수도 각각 다르다. 그만큼 자신의 출신지역이 점하는 위치를 전국적 서열 구조 속에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서열의식은 집단간의 서열만을 가르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개인과 개인간의 서열을 규정하는 세분화로 나아간다. 이런 방식의 서열규정 훈련을 통하여 비호영남민은 자신들도 모르게 <권위주의 문화코드>를 공식적 <규범>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결론

이렇듯 대한민국의 사회 체제는 서열주의라는 국민 정서(sentiment), 권위주의라는 사회 규범(norm)을 가치체계의 근간으로 삼아 그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영남패권주의는 권위주의라는 규범 위에 기틀을 다진다. 권위주의는 민주주의 가치체계와 가장 대척점에 서있는 이념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수구성, 전근대성, 비인간성, 반인륜성, 반개혁성, 반역사성, 반민족성, 반통일성, 비합리성, 반다원주의, 반친일파척결, 연고주의, 패거리주의, 그리고 허위문화 등등 모든 사회병리를 일으키는 근원적 산실(sources)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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