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생리적 계급장이나 사회적 계급장을 떼고 얘기한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보편성을 결하면 이미 학문이 아니다.

정치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한국정치를 견인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적어도 실효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손호철(최장집도 마찬가지) 은 

낯부끄러운 줄 모른다.


스스로의 인식지평이 얼마나 문제있는 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좌파들의 긍정적인 전환을 기대하는 필자로서는 그 인식지평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개별성, 특수성)


최장집이나 손호철이나 필자가 다른 생각, 다른 성장환경, 다른 지식, 다른 경험을 가졌듯 

특정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내는 존재들은 이미 특정 물리적 공간(지역)과 얽혀 매우 독창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성격과 사회적 태도가 형성된다.


보편성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공통된 특성의 보편성을 가진다. 또한 물리적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특성도 공유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손호철은 좋아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이 있니 없니 이런거 따지기 전에

그래서 리영희의 '새는 좌우로 난다'라는 구호를 들먹이며 한국사회도 좌우로 날아야 한다고 외친다.

손호철의 눈엔 이 세상의 정치지형이 오로지 손호철 손에 쥐어진 좌우(진보 VS. 보수)로만 배열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뭐하러 두꺼운 소통채널인 공적 공간을 소비할까?  차라리 사회더러 알아서 정렬하여 내 좌우(빵틀)에 들어가 앉으시지!라고 주문을 외우면 될게 아닌가?!


학문이란 곧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일정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보편적인 좌우구도의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보편성을 잃은 한국의 정치지형


그렇다면 인간사회의 보편성을 뒤흔들고 있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지, 혹은 손호철식 글로벌 스탠더드가 일반적 도구가 아닌 특수한 도구이고 오히려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이 일반적인지를 가려내야 학자적 자질이 있고 학자로서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손호철은 최장집에 비해 엉터리다.  실천적 학문을 거론하고 있지만 천박한 학문적 기초로 인해 혐오스럽기 까지 하다.


결국 먹물있는 책상맡에 앉아 진지한 성찰을 결한 채  유학가서(?) 배운 거,  그것을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손호철의 꿈 - 오로지 진보정당의 융성


왜 그런 학문적 자세가 되었을까?  손호철의 자아준거는 오직 (사이비)진보정당의 융성에 맞춰져 있다. 그리하여 좌우가 경쟁하여 사회적 질을 제고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지형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정치지형을 꿈꾼다면 왜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이 글로벌스탠더드에 귀납되지 않고 지지부진하며 반세기를 훌쩍 넘어가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되지 않을까?  필자가 정치학자라면 정말 날밤을 새우며 그 원인규명과 해결가능 여부 해법에 대해서 이미 끝장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호철은  유물사관이라는 더러워진 필터를 낀 눈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인본주의자 K.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손호철에게 정상적으로 탑재되어 한국의 정치지형을 인식한 것이 이른바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면, 난 주저없이 마르크스를 저주하겠다.  그게 아니고 장착과정에서 잘못된 것이라면, 손호철은 마르크스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라.


정말 손호철이 진보정당의 융성을 바라기는 할까?  그렇다면 지지기반의 외연 확장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지역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해법을 강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좌파의 발목을 잡아 희미한 존재감에 머물게 하는 직접적인 장애는 손호철류의 사이비 진보 좌파, 강단좌파의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외연확장의 근본적인 방법을 외면한단 말인가? 


이른바 좌파정당인 정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소외계층을 위하는 것이고 사회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까?


손호철이 읽어야 할 책 - 김욱의 '아주 낯선 상식',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


손호철은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하다. 즉, 근대이성의 객관화인 우리들의 일반의지인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숙지하지 못하거나 상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떻게 해서 대학교수가 평균적인 사회인이 갖춰야 할 상식마저 장착하지 못했을까?  진정 궁금해진다.  손호철의 영혼이 불쌍할 뿐이다.


위의 권장도서 중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다운) 책이다.  이 책을 링크한다.


자아의 확장

시간적 확장 : 과거의 나(기억, 조상) - 현재의 나 - 미래의 나(기대, 후손)

공간적 확장 : 나-> 우리-> 민족 -> 인류 -> 생명



불공정한 경쟁의 룰이 장착된 사회를 방치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다.

왜냐하면 '나'들이 서로 경쟁하는데 누구에게 족쇄차고 뛰라거나 자전거타고 편히 가라거나 하는 것이 공정한 경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내가 자전거에 올라탔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내가 족쇄차고 뛸 경우도 있다.  이것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동기가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배경이라면 누군가가 난 시행착오로 스스로 겪은 다음 대답해 줄게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지위를 영속적으로 고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동기가 되지 않고도 우리는 각자가 견줄 바 없이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라는 것으로부터

누가 우대받거나 누가 천대받는 것 자체가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  이렇게 지극히 간단한데도 그것을 발견한지가 겨우 250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귀중한 교훈임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동 장착돼 있지도 않아서 선민의식이나 열등감에 빠져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적지 않다.


 

각자는 다르다


어떤 생명체든 (오늘 날의 과학 수준에서) 일정한 물리적 공간과 생명을 얻은 특정 시각이 존재에 각인되어 있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전대통령은 경상도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우주 역사에서 그 어떤 생명이라도 절대 겹칠 수 없다.  생명을 얻은 시각이야 겹칠 수 있겠지만 배타성 있는 물리적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생명체 - 물질 - 라는 특성상 유일무이한 절대적 바코드(barcode)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다르다.


각자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견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똑같다.  이러한 점을 유감스럽게도 최근에서야 발견되었다.  근대사회, 근대이성이 발견의 주체이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고귀한 존엄한 존재인지라 누가 누구보다 우위이고 열위일 수 없다.



이것을 확장해 보자

생명체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절대적 공간좌표를 갖는 물리적 공간에 대해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없어서는 안 될 구성요소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명승지니 혹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니 하면서 특정의 물리적 공간을 선호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일종의 환상적인 준거(표준)를 만든 탓이다.

중국의 장가계라는 비경(?)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장가계를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경이 장가계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눈에는 희소성이나 색다름이 아닌 일상 그것일 게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유산이니 명승고적이니 하는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상술이 개입되어 있거나,  특정 잣대질이 개입되었거나,  보편적인 인간이 선호하는 요소가 있거나이다.


보편적인 인간이 선호하는 요소때문에 유명한 물리적 공간이라면 그것은 정말 가치있을 것이다.  그러한 곳이 어디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섬긴다는 것,  인간이 인간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오늘의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초라한 자신임을 드러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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