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독이 유행처럼 만연해 있다.


짝을 찾지 못해 고독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워 고독이고


이혼해서 고독하고

옆에 있어도 고독하고

여럿 속에서도 고독하고...


그러나 철학적 고독은 이런 세속적 고독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소크라테스, 미래의 미륵불과

오늘의 나 사이에  아무런 공유할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마르크스는 어떨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안출하며 저술할 때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인간세상을 구하고 역사의 궁극원리를 규명해 냈다고 확신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기하의 인민들과 더 효율적으로 소모됐을 자원들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희생되고 소모되었다. 


그가 확신했던 보편적 가치라 믿었던 과학적 사회주의가 한갓 오류투성이의 망상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진정 고독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저승에서 엄청난 벌을 받고 있지 않을까?




I.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이를테면 유한성의 극히 일부만 건드렸다.

                실천이성비판은 동적 효율성이라는 극히 부분적인 타당성만을 간파한 내용이다.


따라서 칸트도 참 외롭고 고독할 것이다.



세상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비관한 석가도 외로울 것이고

이슬람의 저항운동을 보건대 예수도 매우 고독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진정한 고독이란 이렇게 보편적 진리에 발을 담그지 않아 영겁의 세월 속에서 감수해야 할 소통단절의 상태일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주어진 삶을 영겁의 시간속에서 공유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이 마감하고 결코 끝나지 않을 영겁의 영원속에서

처절하게 고독을 만끽할 것인가?


그래서 유한한 우리는 자신을 날마다 초월하여 진리를 구하며, 삶을 허비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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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새論새評] 전국의 향토인이여

이른바 철학을 전공한 진중권은 (좌파의) 인기 패널로 꽤 소비되는 듯 하다. 그의 최근 글을 통해 진중권을 읽어보자.

(이 글은 위 글을 토대로 한 이른바 정서심리학적 인간 조명이며 시간나는대로 한국의 지식인, 정상모리배들을 읽어 볼 생각이다. 마침 추천게시판에 진중권의 글이 걸려 있어서 1번으로 당첨시켰다.)    



 선별적 통계 인용과 아전인수적 해석 

 

좌파라면 유물사관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본다. (사실 진중권의 전공인 미학이란 학문은 I.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비롯되는데 좌파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음.) 그래서 하부구조인 생산시설에 주목해야 하고 한국의 생산시설의 인위적인 공간적 편중이 어떤 결과에 귀착될 것인지의 답은 뻔하다. 따라서 진중권의 이런 선별적 통계의 인용과 해석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의사(Pseudo)통계조작이다. 이것이 공공에게 소비되는 상황이므로 더욱 비난가능성이 커진다.

 

 

진중권의 지역주의 양비론

 

진중권은 한국사회의 향우회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진중권은 반기문의 편지를 들먹이며 지역색이 추가됐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향우회정치의 원인이나 그 해법에 대한 진중권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짐짓 서울사람의 눈을 빌리거나, 자신의 탈지역색을 부각시키거나, 견강부회적 통계까지 끌어오는 등, 실제 계산은 이른바 지역주의 양비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꼼수이다.

 

, 이렇게 세 가지 이상의 자료를 들이대며 정당화하는 진중권의 의식은 양 지역주의가 같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추청이 옳지 않다면, 즉 진중권의 지역주의 양비론 입장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면, ‘우리가 남이가식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진중권의 호남 향우회 정치와 같은 수위의 비난 글이 있어야겠다. 그러나 아마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위 글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및 성 차별 해소에 더 관심을 갖자라는 얘기인 듯 위장했으나, 호남의 향우회 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글이다. 왜 이렇게 편파적일까? 이른바 상식, 평등을 외치는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 지역주의를 왜 외면하는 것일까? 다름아닌 진중권이 영남패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향우회정치의 본질 정상모리배에게 놀아나는 감정적인 유권자들(?)

 

진중권이 자인하듯 정상모리배들이 판치는 한국정치판에서 집요하고 강고한 지역주의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진중권의 안목대로 서술하자면 지역색이 집요하며 강고해 보이는 유권자들은 정상모리배들의 유혹에 곧잘 휘둘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들이다. 과거 막걸리·고무신 선거때는 막걸리나 고무신을 얻었지만 그것마저도 없이 오로지 감정적 존재로 그려낸다. 집단에 대한 대단한 모욕이다.

 

진중권의 이같은 안목은 천박한 자아 · 사회적 성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본능적 직관이 호소하는 정서 즉, 차별에 대한 호남인의 분노야말로 호남 지역주의의 본질임이 명백하므로, 그것을 비난할 여지는 추호도 없다. 변방 지역민들의 일상을 옥죄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반감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정지지형의 이합집산은 곧 정치지형의 독립변수인 지역유권자의 향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호남 향우회 정치란 곧 얼마간 인간사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지역주의인 것이지, 반사회적 향우회 정치가 아니다. 정당한 몫에 대한 외침을 외면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반사회적, 반민주적 작태로써 비난 대상인 것이다.

 

 

 

양비론적 지역주의 입장에 선 지식인은 친일부역배

 

일제치하 친일부역배는 동포를 등쳐 호의호식한 족속들이다. 우리의 고통을 분담한 게 아니라 고통을 가중시킨 극단적 이기주의자요, 선민주의에 대항하지 않고 강자에 빌붙어 약자를 유린한 현실순응적 패배주의자, 기회주의자, 사대주의자요, 비인도주의자이다. 진중권같은 사이비 지식인의 실질은 다름아닌 친일부역배와 다르지 않다.

 

 

 

차별을 선별적으로 식별하는 괴상한 진중권

 

진중권에겐 성, 계층, ·촌간 차별은 보이지만 지역간 차별은 보이지 않는다. K.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따르면 물적인 하부구조는 모든 것의 독립변수이다. 따라서 지역에 편중된 생산시설은 지역사회나 문화나 지역정서를 규정하는 독립변수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지역정서나 지역감정같은 상부구조를 독립변수라고 본다. 이른바 좌파적 시각으론 수용할 수 없는 안목이며,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사이비 좌파이다. 지역주의 양비론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노무현이나 문재인과 다름없고, 좌파와 같다. 즉 한국 좌파는 사이비 좌파이다.

 

 

한국좌파는 친일부역배이자 민주주의의 적

 

한국좌파를 일제치하로 옮겨 평가해 보자. 약자의 아픔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짓밟고 유린하며 강자에 빌붙었다. 강자(영남패권주의자)에게 항의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점에서 현실순응적 패배주의자이며 사대주의자요, 약자를 유린하는데 조장·기여한다는 점에서 극단적 이기주의자이며, 패륜적 기회주의자이며, 사회를 개악하는데 일조하는 측면에서 반사회적, 비이성적인 자들로 영락없이 친일부역배이다.

 

 

우리 헌법에 장착된 평등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반헌법적이요, 주권자(민주)의 의지인 헌법을 거스른다는 면에서 비민주적인 자들이다. 흔히 독재자를 민주주의의 적, 그래서 반민주적이라 한다. 진중권 같은 민주주의의 적을 소비하는 매체가 있다는 것, 곧 한국사회의 자화상이요 영남패권주의에 장악된 한국사회라는 반증이다.

 

 

 

향우회정치

 

인간이 모두 이기적이듯 향우회 정치는 당연한 것이다. 좌파들이 이념정당 어쩌구 하는데 사실 그 빌어먹을 이념 때문에 냉전과 남·북 분단, (우리의 후생을 윤택하게 했을) 정례적 국방비로의 천문학적인 규모의 국부의 유출, 그 으슥한 배경에 K. 마르크스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인간의 이기적 동기를 헤아리지 못한 유물사관을 토대로 구축된 공산사회는 결국 소멸되었다. 우리는 공자나 예수나 부처나 마르크스를 모두 조망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초월할 수 있음에도 오늘날 한국좌파는 여전히 낡고 형해화된 유물사관을 어두운 구석에서 부둥켜안고 부질없이 부활의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어떻게 세뇌되면 130년이나 낡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가 뱉은 배설물을 탐하며 금과옥조처럼 귀중히 여길까? 긍정적인 인본주의적 요소보다 인류역사에 끼친 해악이 훨씬 컸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아

 

한국식 좌파들은 부디 깨어나라. 친일부역배 같은 반역사적인 인식을 거두고, 질곡에서 신음하는 변방인들을 외면하지 말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부디 미몽에서 하루바삐 깨어나라.

 

진정 한국사회를 진보적으로 인도하려는 열망이 있다면, 그깟 마르크스를 왜 초월할 수 없을까!


 

(우선 생리적 계급장이나 사회적 계급장을 떼고 얘기한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보편성을 결하면 이미 학문이 아니다.

정치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한국정치를 견인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적어도 실효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손호철(최장집도 마찬가지) 은 

낯부끄러운 줄 모른다.


스스로의 인식지평이 얼마나 문제있는 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좌파들의 긍정적인 전환을 기대하는 필자로서는 그 인식지평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개별성, 특수성)


최장집이나 손호철이나 필자가 다른 생각, 다른 성장환경, 다른 지식, 다른 경험을 가졌듯 

특정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내는 존재들은 이미 특정 물리적 공간(지역)과 얽혀 매우 독창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성격과 사회적 태도가 형성된다.


보편성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공통된 특성의 보편성을 가진다. 또한 물리적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특성도 공유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손호철은 좋아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이 있니 없니 이런거 따지기 전에

그래서 리영희의 '새는 좌우로 난다'라는 구호를 들먹이며 한국사회도 좌우로 날아야 한다고 외친다.

손호철의 눈엔 이 세상의 정치지형이 오로지 손호철 손에 쥐어진 좌우(진보 VS. 보수)로만 배열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뭐하러 두꺼운 소통채널인 공적 공간을 소비할까?  차라리 사회더러 알아서 정렬하여 내 좌우(빵틀)에 들어가 앉으시지!라고 주문을 외우면 될게 아닌가?!


학문이란 곧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일정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보편적인 좌우구도의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보편성을 잃은 한국의 정치지형


그렇다면 인간사회의 보편성을 뒤흔들고 있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지, 혹은 손호철식 글로벌 스탠더드가 일반적 도구가 아닌 특수한 도구이고 오히려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이 일반적인지를 가려내야 학자적 자질이 있고 학자로서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손호철은 최장집에 비해 엉터리다.  실천적 학문을 거론하고 있지만 천박한 학문적 기초로 인해 혐오스럽기 까지 하다.


결국 먹물있는 책상맡에 앉아 진지한 성찰을 결한 채  유학가서(?) 배운 거,  그것을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손호철의 꿈 - 오로지 진보정당의 융성


왜 그런 학문적 자세가 되었을까?  손호철의 자아준거는 오직 (사이비)진보정당의 융성에 맞춰져 있다. 그리하여 좌우가 경쟁하여 사회적 질을 제고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지형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정치지형을 꿈꾼다면 왜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이 글로벌스탠더드에 귀납되지 않고 지지부진하며 반세기를 훌쩍 넘어가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되지 않을까?  필자가 정치학자라면 정말 날밤을 새우며 그 원인규명과 해결가능 여부 해법에 대해서 이미 끝장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호철은  유물사관이라는 더러워진 필터를 낀 눈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인본주의자 K.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손호철에게 정상적으로 탑재되어 한국의 정치지형을 인식한 것이 이른바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면, 난 주저없이 마르크스를 저주하겠다.  그게 아니고 장착과정에서 잘못된 것이라면, 손호철은 마르크스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라.


정말 손호철이 진보정당의 융성을 바라기는 할까?  그렇다면 지지기반의 외연 확장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지역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해법을 강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좌파의 발목을 잡아 희미한 존재감에 머물게 하는 직접적인 장애는 손호철류의 사이비 진보 좌파, 강단좌파의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외연확장의 근본적인 방법을 외면한단 말인가? 


이른바 좌파정당인 정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소외계층을 위하는 것이고 사회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까?


손호철이 읽어야 할 책 - 김욱의 '아주 낯선 상식',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


손호철은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하다. 즉, 근대이성의 객관화인 우리들의 일반의지인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숙지하지 못하거나 상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떻게 해서 대학교수가 평균적인 사회인이 갖춰야 할 상식마저 장착하지 못했을까?  진정 궁금해진다.  손호철의 영혼이 불쌍할 뿐이다.


위의 권장도서 중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다운) 책이다.  이 책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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