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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1' 발언에서 노무현의 도덕성 지수를 가늠한다

시민25 2016. 3. 17. 16:45

'십분의 1' 발언에서 노무현의 도덕성 지수를 가늠한다.

지난 일 년 간 노무현이 한 충격적인 발언사건 중에서 며칠 전의 "십분의 일" 사건은 내게 있어 "대통령 짓 못해먹겠다" 사건 이상으로 더 잊혀질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짓" 운운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고 본다면 십분의 일 발언에서는 그의 <도덕성>의 허울이 한 꺼풀 벗겨졌다고 판단되었다. 인간에게 있어 성격의 갈래는 천차 만별이라 그 발언 하나로 그를 규정하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방식이라 여겨지는 반면, 그의 도덕성을 검토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란 직책을 가진 이의 향후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훨씬 더 유용한 도구가 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성이 떨어질 법한 그의 지난 발언을 다시금 문제 삼는 것이 내일을 위해 결코 무익한 일만은 아니리라 믿는다.

대통령 노무현이 국민을 향해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이 저지른 범법사실을 두고 사과한다면 그 목적은근본적으로, 법을 어겼다는 사실에 대한 사과가 아니다. 법을 어겼으면 그에 상응하는 법리적 처벌을 받는 것으로 원인적 행위에 대한 책임 추궁이 말소가 되고 말 일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사과의 여지가 없다. 국민에 대한 <사과>, 범법 행위에 대하여 법의 처벌을 다 감당하고도 따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잉여> 부분에 대한 사과인 것이다. 여기서 잉여라고 하는 것은 범죄의 성격이 법리적 해석 이전에 도덕과 밀접히 관련된 부분으로서, 법이 상정하는 응분의 처벌만으로는 그 범죄가 드리운 사회·윤리적 파괴 효과까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는 인식의 기초 아래, 사회 정의에의 합의를 새로이 이끌어내겠다는 공동체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공동체적 요구는 피의자 누구에게나 기대되는 것이 아니고, 그 범법 주체가 <사회적 책임>을 막중하게 짊어진 공인이었을 경우에나 해당하게 마련이다.

이 사과라는 형식은 <사회적 제의(ritual)>. 그것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피의자인 공인에게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 , 침묵하는 공동체적 요구에 피의자 자신이 능동적으로 다가가 그들의 분노를 위무함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된 추궁의 짐을 덜어버릴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한 기회가 되는 점이다. 피의자인 공인에겐, 자기가 저지른 범법 행위로 인한 막대한 사회적 책임을, 잠시 수치심을 견디며 내뱉는 몇 마디 말로써 상당 부분 맞바꾸는 기회이다. 게다가 잘만 하면 잉여 부분만이 아니라 범법 사실 자체에 대하여도 일부 사면을 받을 수 있다. 피의자에게 이처럼 높은 경제적 효과를 보장하는 기회란 실로 굉장한 이벤트인데, 이것은 사실상 피의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공동체가 스스로 입은 상처를 얼른 싸매고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서글픈 관용의 표현이다.

제의가 수행하는 또 다른 목적은, 상처 난 사회정의를 치유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점이다. 피의자가 꾹꾹 눌러 쓴 고해성사를 듣는 순간, 민중은 가슴 속 분노를 다독거려 조용히 숨죽인 채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부흥을 간절히 기원함으로써 제의에 동참한다. 공동체는 피의자가 발하는 참회의 목소리를 들어주며 용서하는 형식을 빌어 서로가 서로를 관용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성찰하고 균열을 봉합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 피의자 공인에게 소명의 기회로 쓰여 그 개인의 허물을 사면받는 작은 의미에 머무르게 할 지, 아니면 전 공동체가 지난 불행을 씻고 일신(一新)의 스피릿으로 거듭나 쓰러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회로 활용할 지는, 전적으로 의식을 집행하는 집전자의 철학과 능력에 달렸다. 이렇듯 제의는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위다. 일국의 최고 권력자라면 제의를 통하여 얼마든지 닥친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야 할 일이다.

의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건성이다. 고해성사의 진실이 경건성에 의해 담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성은 고백자의 겸허하고도 도덕적인 자세에서 나온다. 사과나 고해성사의 행위를 제의에 비유했듯이 그것은 변명과 설득의 과정이 전혀 아니다. 재판정에서 변론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변명과 상대 설득의 형식은 자신이 받을 벌을 다소 경감할 수는 있겠으나 공동체로부터 나오는 자발적이며 전면적인 사면의 은택을 유발할 수는 없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변명이 계산적이고 치밀할수록 공동체는 역으로 그에 대한 관용의 폭을 제약해 나간다. 그는 더욱 뚜렷하게 공동체의 적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잘못을 고해성사할 내밀한 시간을 내주기를 간청하여 공동체로부터 겨우 허락받아 놓은 뒤 느닷없이 돌변하여 공동체를 향해 따지고 드는 비상식적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수는 그에게서 경건성이 결여되었을 때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 , 스스로가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시위하는 셈이다.

며칠 전 우리가 목도한 대통령 노무현의 '십분의 일' 발언은, 국민에게 올리는 사과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국민을 설득의 대상으로 삼고 만 오만과 부도덕으로부터 새어나왔다. 사회 통합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렇듯 좋은 반전의 기회를 그는 인간적 부도덕성으로 말미암아 그만 깔고 앉아 뭉개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무지한 탓에 자신의 허물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자충수를 두기까지 하였다.

노무현이 이번 사과·해명 기자 회견에서 얻어내야 했던 것은 불법 자금 모금의 액수에 대한 보충 설명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눙쳤던 거짓말에 대한 사죄와 이에 따른 국민적 이해였어야 했다. , 한나라당과 노무현 캠프 중 누가 더 심한 불법행위를 했느냐라는 양()의 저울질이 아니라, 순전히 노무현에만 한정하여 도덕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유무가 문제였어야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국민의 관심이오직 그가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얼마나 진솔하게 인정하고 사죄하는가라는 도덕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이유들을 다음의 두 가지 범주에서 관찰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었다. 검은 뭉치돈을 철저히 배격하고 희망 돼지와 같은 소액 성금만으로 선거를 치루겠다는 그의 약속이 불러일으킨 감동의 물결이 결국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그는 이제 와서 짐짓 모른 체 한다. 그 감동을 나눴던 풀뿌리 지지자들이 지금 그와 그의 측근들이 저지른 엄청난 범죄 행위 앞에 배신감으로 몸을 떨고 있는 현실에도 그는 내내 태연자약하기만 하다. 그가 후보 시절, 청렴의 화신의 도포를 두른 채 약속한 말들이 겨우 불법 선거 비용 따위에 있어 한나라당과의 산술적 비교 우위가 아니었을 것인즉, 지금 와서는 그런 의미일 수도 있었다라는 식의 딴청을 핀다. 그는 후보 시절 자신이 말한 약속들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메시아적 이미지를 둘렀으며, 그것이 형편없는 거짓으로 판명나고 있는 현재, 돌아선 지지자들이 가질 실망과 분노의 깊이가 과연 어떠한 지에 대해 도무지 한 점 관심을 가질 줄 모른다.

원래부터 강도질 해 먹던 집단이 오백억원을 갈취해 먹은 것 보다, 청백리로 추앙받던 공직자가 천만원을 뒷구멍으로 뇌물받아 먹는 짓이 그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있어 훨씬 깊고 광범위한 것임을 그는 아는가 모르는가? 그것은 그가 도덕성이라는 개혁 세력의 표상을 짓밟음으로써 우리들로부터 개혁의 지표 자체를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개혁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한 행위는 겨우 몇 백억의 금액으로 환산될 가치가 아닌 것이다. 정치를 조삼모사로 본다는 그의 말마따나 그는 국민을 조삼모사의 대상으로 본다는 심증을 갖게 만든다.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를 들먹임으로써 사죄는커녕 은근히 도덕적 자신감을 위장하고 있기까지 한다. 19일 노사모와 함께한 취임 1주년 기념식장에서의 노무현 발언에선 아예 공세로 전환한 그의 후안무치를 원없이 감상하게 된다. ("이 정도 쓰고 당선됐다 하면 다들 놀란다” ;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금액)

둘째, 그의 비인간적 면모다. 저지른 과오가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불가항력적 상황에 의해 야기됐다고 혹 아직까지 그가 스스로 믿고 있다고 치더라도, 올인했던 믿음이 산산히 깨지는 것을 보는 옛 지지자들의 상한 마음에 그는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속임수 행위로 말미암아 수많은 옛 지지자들의 마음이 크게 상하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그가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국민 일반과 자신의 옛 지지자들을 인격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한나라당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범법 행위를 어물쩡 축소시키려는 따위의 치졸한 속임수는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눈속임 동작으로 인하여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소하는 가운데 그만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을 지를 그는 필시 한 번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행위는 상식인의 눈에도 넌센스이자 어리숙한 사기꾼이 쓰는 전형적인 속임 수법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마는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속임수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경험이다. 노무현이 자신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본다면, 이처럼 국민을 대하는 그의 방식을 통하여 그의 비인간적이며 졸렬하기까지 한 면면들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십분의 일' 사건으로 인하여, 대통령 노무현의 배덕은 그저 그가 저지른 범법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도덕성, 그리고 국민에 대한 인간적 관심과 동정심(compassion)의 결여라는 비인간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십분의 일' 발언은 이제까지의 노무현이 벌여 온 일련의 정치적 배신행위의 배면에 놓인 동기를 궁금해 오던 이들에게 상당부분 그 의문을 해소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의 바닥을 기는 도덕성 지수이다. 이것은 앞으로 노 정권의 정치적 결정 행위와 정책적 지향 그리고 그 실천이 얼마나 굴절되고 도덕적 파탄 지경을 향해 내달을른 지를 예시하고 있다 하겠다.

노무현은 자신이 내뱉은 '십분의 일' 발언의 치졸한 논리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그 이틀 후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4당 대표와의 회동 중 발설한 내용을 다시 보충 설명하기까지 하였다. 이 기자회견으로써 노무현은 도덕성의 추락만이 아니라 정치력 발휘에 있어서도 아마추어리즘의 실상을 생생히 연출하고 말았다. 전일 노 대통령의 '십분의 일' 발언으로 국민들은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혹여 대통령이 말실수를 인정하고 납득할만한 사과의 변을 내놓을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철저한 자기 부정의 용기를 보인다면 국민들은 추락하는 대통령을 마주하는 민망함을 벗기 위해서라도 그의 범법 행위를 용서해주고픈 심리 속에서 부심하던 차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예의 교만때문에국민들의 애절한 가슴을 읽어내지 못하였다. 절대적 의미에서의 도덕적 순결성을 내세워 대통령에 오른 정치인이라면, 선거와 관련한 신묘한 부패 행위들을 펼쳐 이미 도덕적 파탄 집단으로 낙인 찍힌 한나라당과 견주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진흙 구덩이로 끌어내리는 자가당착의 행위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것은 자신의 위법 행위를 진솔하게 인정하는 당당한 자세가 아닐 뿐 아니라, 자신의 청렴을 믿고 표를 몰아 준 지지자들의 도덕적 순결성을 정면으로 능멸하는 정치적 미숙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태를 제대로 통찰하는 눈이 있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정직하게 석고대죄하는 자세로 나왔어야 했다. , 노 정권이 당장 와해되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들의 염원을 하나로 묶어 그들로부터 그 자리에서 사면을 받아내는 의식(ritual)의 시간을 기자회견에서 가졌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정당한 정치력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천문학적 액수의 불법대선자금을 끌어모은 한나라당의 부도덕을 질타하여 그를 궤멸의 나락으로 밀쳐낼 기회를 범 개혁 세력이 꿈에서도 그리고 있음을 노무현만 모르는 것일까? 노무현이 만약 자신의 부도덕한 불법행위를 국민앞에 확실히 까발리고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하였다면 범개혁세력은 한나라당의 응징을 위해서라도 제의의형식을 빌어 노무현에게 면죄부를 주며 공동체의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자 함께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란 인간적 그릇은 그만큼 크지 못함을 드러내었다. 오히려 다시 한 번 억지 논리를 고수하며 자신의 상대적 결백성(?)을 입증하겠다는 듯 한 태도로 나옴으로써 스스로를 옥죄는 자충수를 두고 만 것이다. 그 기자 회견으로써 노무현은 검찰로 하여금 1/10을 꿰맞추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이 기정 사실화돼버렸고, 더불어 끝내 잘못의 인정을 거부하며 범법의 의미 축소나 왜곡을 기도하려는 의지가 분명함을 널리 공포한 셈이 되었다.

노무현에게 있어 애초부터 이러한 '제의'가 어울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경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 속 진실이란 경건한 자세 속에서 절로 표현되고 마는 까닭이다. 의식의 집전자가 품은 진정성이 회중 위에 유포되지 않고서야 회중의 자발적 참례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회중의 열의가 빠진 제의는 이미 의식이랄 수도 없을 터이다. 대통령 노무현에게 이만한 기대를 거는 것마저도 현실적으로 무리임이 갈수록 자명해지고 있다.

노무현은 불법 대선 자금 사태로 벌어진 파행 정국을 수습하기는커녕 협량한 정치력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저급한 도덕성, 그리고 그의 비인간성(혹은 인간적 미성숙)으로 인해 도리어 사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 면모가 예시하는 것은, 항시적 위기 상황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도덕적 아노미 현상(가치관의 혼돈), 그리고 사회 통합에 역행하는 갈등의 대거 양산 등이다. 그것은 입에 담기조차 거북스러운 불길한 예측이지만 그나마 사태를 냉정하게 똑바로 바라볼 때만 적합한 대응 전술이 나오리라는 점에서 오늘 정리를 해두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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