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언론아 탄핵정국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

 



1. 탄핵정국 속의 아노미



이러한 狂風이 없다. 가치 전도의 아노미가 지금처럼 미친 회오리로 몰아친 적이 없다. 유신과 신군부독재 정권시만 하더라도, 콩닥이는 새가슴을 안고 양심이 숨을 가다듬었을지언정 정의가 무언지는 빛나는 안광에서 한시도 지우지 않고 살았었다. 정과 사가 뚜렷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들이 양심의 횃불을 들었었다. 시인들은 마른 가슴을 쥐어 뜯고 펜대를 꺾으며 고뇌의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최루탄가스로 숨막히는 학원에서 거리에서 젊은 학도들은 푸르른 인생을 뚝 떼어 저당잡히며 거대한 악의 정권에 맨몸으로 맞섰다.



민주주의 완성과 선진국으로의 발돋음을 위한 대장정의 길을 진군해온 이 나라가 느닷없이 아노미 광풍에 휩쓸리고 있다. 지지도 30%, 자신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당을 두 동강내버리고 뛰쳐나갔을 뿐 아니라, 무수한 실정, 위법과 반민주적 정치행위를 밥먹듯이 해온 배신자 대통령이 국회에서 헌법 정신에 따라 탄핵당한 일을 두고, 대표적 진보성향 신문 한겨레가 최일선에 나서서 국민을 상대로 탄핵 반대를 선동하고 프레시안, 오마이 등 대안 신문이라는 매체가 북소리를 울리며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 뒤를 따른다. 기타 언론과 방송이 연일 선무방송을 울려제낀다 .



'대외적'으로 이들이 항변하기는, 대통령의 위법행위가 탄핵을 받기엔 너무나 경미한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법리적 해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탄핵의 위법성이 증명될 수 있는 사안이라며 탄핵무효 구호로 윽박지른다.



그러나 정작 진보진영이 탄핵반대를 외치는 '속내'는 그것이 아니다. 다만, 탄핵 소추안 가결이 헌법 절차에 따른 입법부의 적법한 행위였으므로 그들이 법리적 정당성에 대해 한번이라도 문제삼고 나오지 않는다면 탄핵의 적법성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마는 꼴이 되므로 결국 딴지를 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탄핵의 위법성만이 이들이 지적하는 문제의 전부라면 이것은 헌법기관인 헌재의 판결 결과를 기다리면 될 일이지 대중을 상대로 선동행위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여론의 향배에 의해 법리적 해석이 좌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들 마음 속에 법리적 해석에의 관심은 없다.



이들이 주장하고픈 진짜배기 논거는 이거 하나다. "나라를 거덜 낸 16대 국회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없다!" 이 주장이야말로 대중의 정서에 강하게 호소하는 참으로 실감나는 구호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 이성은 느슨하고 감성은 질기다. 이성은 개인독립적이고 감성은 집단의존적이다. 감성이란 시시각각 가변적일 수 밖에 없어서 또 다른 유사감성과 뭉치고 의지하지 않는 한, 저도 모르게 스르르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 필히 집단화를 부른다. 감성은 집단화를 자극하고 그것은 집단을 최면속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노 정권 출범 이래 정쟁으로 날을 새며 민생을 완전 외면해 온 16대 국회를 새삼스레 매도하기에도 지쳐있는 대중의 감성을 충동하며 날카롭게 자극하기에는 그만인 폭발력있는 구호다. 그러기에 모든 언론은 야당공조로 인한 탄핵 가결을 아예 의회쿠데타라 규정하고 나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이 외치는 '16대 국회' 매도에 있어 여당행세를 하는 열우당의 의원들은 면제를 받는다. 공영방송은 총선을 코앞에 둔 현 탄핵정국의 시점에서,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 무색할만큼 바람몰이식 여당표 잡기 호기를 포착하였다 판단하자, 즉시 대중을 거리로 내모는 선무방송을 연일 내보낸다. 부정과 불법으로 얼룩진 여당임에도 그들의 지지율은 하루 아침에 두 배로 뛰어오른다. 태생적인 정치 해바라기 여당 추종 방송과 태생적으로 그들에게 비판적인 진보언론이 한 배를 맞추고 광란의 춤을 추는 현상 속에 매일 노출되면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머리도 시나브로 어지러워진다. 가치 기준과 판단이 정면으로 도전받음을 느낀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탄핵찬성론자는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원래 수구와 한통속이거나 정신이 돌았거나 상식이 모자란 사람이거나 지역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손가락질 받는다. 다락방에 처박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처지다.



아~! , 이것은 가히 메카시즘 회오리의 재현이다.



상식이 무참히 짓밟히는 처지에 몰려있는 나의 가슴도 비감으로 흐른다. 차라리 참담하다고 해야 옳다. 분노와는 다르다. 군사정권치하에서는 의분에 가슴이 불탔다. 정의와 사악의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암흑기를 끝장내고도 십 수년이 흐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가만보니 아니었다. 한 사회의 상식이 정의에 기초해 있는 것이라면 나의 정의는 지금 깡통처럼 비탈길 위에 뒹굴고 있다. 시민적 상식이 능멸당하고 있다.



이 나라 평화민주세력의 여론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개혁언론, 진보성향 지식인계급, 분당 전 민주당 지지층 다수가 합작으로 벌이는 여론몰이 행태의 동기 중 이들의 감성적 충정만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이들이 분개하는 것은 이번 탄핵이 수구기득권집단인 한나라당, 그리고 (이들이 보기에 한나라당보다 나을 것도 없다고 보는) 야당들의 '야합'이라는 것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 대통령이나 열우당이 잘해서 그들을 비호하려는 게 아니라 헌정 초유의 탄핵 사태를 발생시킨 주체가 <수구한나라당>이라서 분노한다는 것이다. 추잡한 정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 회복을 위한 정략적 안간힘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대통령도 잘못했지만 야당은 더 잘못했다는 양비론을 점잖게 펼치면서 중립을 가장한다. 그럼으로써 주장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런데 이들이 결정적으로 역사적 악수(惡手)를 두고 있는 판단착오가 있다. 이들의 비난 속에서 수구한나라와 함께 민주당이 도매금으로 떠넘겨지고 있는 사실이다. 민주당이라는 소수 정당인의 집합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수백만 개혁시민들이, 이들이 무분별하게 던진 더러운 오물을 함께 뒤집어쓰고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당한 외침은 이 소란 속에 완전히 무시되고 만다. 그것이 깊이 울리는 이 시대 양심의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당내 개혁 작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허물 하나로, 수십 년간 일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민주화를 주도해왔던 민주당 주체 세력이 졸지에 한나라당과 동급의 수구 도배로 매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과 열린당이 그간 그토록 집요하게 정략적 정치를 해온 사실들은 일순 깡그리 잊혀진다. 민주당을 박살내며 나갔으면서도 부패신장개업당이 된 열우당은 수구당 한나라로부터 매를 맞았으므로 어느새 빛나는 개혁의 체현자로 우뚝 서버린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겪는 혼돈의 연원이다. 가치관의 전도가 결코 암흑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줄이야!



지금 우리가 겪는 탄핵 정국의 혼란은 정치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정치적 관점으로만 보면 시간이 흘러 혼란이 정리될 때까지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적 공황, 가치관 혼란이라는 아노미 현상 속에 우리가 통째로 내맡겨지고 있음이다. 가치관 혼란은 정치 현상을 너머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어두운 그림자를 깊고도 오래도록 드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2. 노무현의 총선승리 강박관념



탄핵 정국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고스럽지만 잠시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무현 정권의 탄생과정과 주요 정치이벤트 한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 탄핵 정국에 다다르기까지의 원인 중 그 핵심은 노무현이 가진 <총선올인> 전략의 동기에 있다. 총선올인 전략이 한나라당과 상생 전술을 견인했고, 그의 민주당 탈당에 이은 열우당 창당을 추동했으며, 결국 선거법 위반이라는 주요 탄핵소추 사유를 얻게 된 것에서 보이듯이, 제 사건들의 중심을 일관하여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줄기를 따라가보자.



노무현이라는 신선한 개혁이미지 정치인의 출현과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의 국민적 열광의 기저에는, 수구를 이 땅에서 해체하고 사회 체제를 일신하여 선진국형 민주주의를 구가하겠다는 의지의 시대적 조류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광주민주화항쟁과 6월항쟁을 거치며 수많은 열사들이 흘렸던 피와 민중의 저항을 댓가로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참민주주의 기틀을 세워나가는 역사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급기야 2002년 초겨울, 수구냉전 군사정권 후예 집단의 궤멸을 가져올, 평화개혁 세력의 정권 재창출이라는 쾌거를 극적으로 이룩함으로써 대통령 노무현과 함께 그토록 갈망하던 국민통합과 통일을 향한 민족화해, 그리고 21세기 동북아 중심국가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장미빛 미래는 눈앞에 펼쳐졌다.



메시아와 같은 한 정치인의 출현은, 반 세기 동안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몸 바친 풍운아 DJ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감으로써 남게 될 커다란 공백을 누군가 메워줘야 한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 안에서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아적 '이미지'를 두른 정치인 노무현이 일으킨 열광은 이러한 역사적 인과성과 국민들이 갖는 시대정신의 맥락 속에 미리 예비되어 있었다. 그 열망은 자발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이성을 멀게 하고 범상한 한 정치인 머리위에 후광(halo)을 띠워줬다. 그 제의를 행함으로써 국민은 열망의 현실화를 앞당겨 성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나라 현대사에서 40년 넘게 발목을 잡던 지긋지긋한 수구냉전세력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을 성취하고, 개방적 사고, 민주적 사고, 높은 도덕성을 가진 리더쉽 아래 사회 구석 구석 대대적인 개혁을 이뤄내어 나라를 완전 개조시키고 말리라는 떨리는 열정에 평화개혁 세력은 더러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한 여름 밤의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참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대통령 노무현은 수구냉전 세력과 상생하겠다고 한다. 수구정당 한나라당과 상생하자는 제의의 상징으로써 남북 민족 공조의 정신과 성과를 박살내고 말 ‘대북송금 특검’을 그들에게 선물로 보내줬다. 이 악수의 충격으로, 그간 노무현을 열렬히 지지하던 개혁세력의 일부가 최초로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라크파병 결정과 NEIS강행, 물류대란, 숭미외교, 부안 방폐장결정 등에서 우리들의 메시아는 어이없게도 수구의 파트너였음을 노정하고 만다. 그 즈음, 노무현의 최순위 국정 목표는 그 무엇도 아닌, 차기 <총선승리>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총선승리라는 그의 목표는 정권이 가지는 지고지선의 존재 목적이 되어버리고, 이를 위해선 어떠한 불법적 비도덕적 초헌법적 수단의 동원도 개혁이라는 합리화 작업에 의해 정의로 각색된다.





대북송금특검 수용에 의한 한나라와의 상생 구도로의 포석 의도가 사실상 한나라와 손을 맞잡자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노무현이 한나라당을 멸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을까? 순박한 국민의 눈에는 이 점이 이해되질 않는다. 총선에서 수구당을 꺾어 이기려면 매 이슈마다 그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될 텐데, 왜 한민족의 융성하는 기운을 밑둥으로부터 싹뚝 잘라내는 희생까지 치루며 한나라당에게 상생을 제안하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니 불법행위의 추적이니 하는 노무현의 선전이 과연 진실한 동기일까? 그것이 남북경협과 민족화해공조라는 민족 생존권 확보의 틀을 깨면서까지 추진할 당위가 있다고 믿어줄 수 있는 것일까? 이 비밀을 읽는 것이 작금의 탄핵 정국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요체이다. 중도개혁이나 진보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이제까지 이 비밀을 읽는 수고를 게을리 해 온 경향이 있다.





3. 노무현의 총선승리전략 : 영남패권이데올로기



대북송금특검 수용을 통한 한나라당과의 상생이라는 정치 구도 재편에서 노무현이 노리는 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을 깨기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왜 민주당을 깨야만 했는가? 노무현은 한나라당을 멸시하되 그들이 현실적으로 누리는 파워를 심히 두려워하는 거다. 그들의 거대한 힘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처지이지 않는 한(즉 다수당의 자리만 빼앗아오는 조건이면), 타협 속에서 사이좋게 균형을 이루며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을 깨보겠다는 시도는 원래 언감생심이다. 그럼에도, 영남권에의 의석 진출이 제1당이 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정면에서 들이받을 수 없으니 만만한 민주당을 요리하여 영남민을 상대로 앵벌이전술을 부리는 것이다. 다행히 영남민을 공략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호남혐오 정서를 이용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처럼 쉬운 일이 없다. 대신 이를 위해 호남이 희생을 해줘야만 한다. 호남은 지역주의집단이라는 능멸의 딱지를 다시 한번 감수해주어야 한다. 노무현같은 영남패권주의자에게는 호남민에 대한 희생강요가 아무 문제거리가 아닌 것이다. 미처 양심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다만 욕을 덜 얻어먹으려면 그것이 거룩한 개혁의 일환인 것으로 포장해야 한다.



영남에 대하여 이런 발상을 했다가는 당연히 그 자리에서 돌을 맞겠지만 호남에게야 아무려면 어떤가. 사회문화적으로 늘 주류 영남의 눈치를 살피게 짜여있는 현실이니 호남민이 무슨 힘이 있어 대들겠는가. 설사 일부 호남민이 들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패권 영남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매체가 호남민을 에워싸고 대리인 자격으로 위엄있게 일갈해 줄 텐데 걱정할 게 무엔가. 그러기에 "민주당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계승하겠다"라는 거짓말이나 "호남민이 노무현이 좋아서 찍어줬나? 이회창이 싫어서 찍어줬지!" 따위의 발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 진보성향 언론, 그 누구도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지 않는다. 설사 반항하는 한 목소리가 나왔다 해도 금새 덮여버린다. 대한민국에선 호남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랬다간 사회 정서로 봐서 바로 이단아로 취급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집단에서 눈흘김을 당하며 배척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호남인 당사자들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차라리 양순한 양을 가장하는 것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처세술임을 어려서부터 잘 학습받았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는 바보를 어느 제삼자가 나서서 같은 편이 되어 싸워주겠는가! 이것이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민 정서요, 멘탈리티인 것을. 아니, 그것은 문화요 규범이 되어있다. 영남이데올로기라는 규범이다. 누구도 도전하지 않고 토를 달지 않는 규범 말이다. 물론 그것은 강요된 규범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일수록 몸을 사리는데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기득권층이므로) 어느 누가 굳이 탄탄한 논리로 무장하는 수고까지 하며 대한민국의 규범에 도전하겠는가!



노무현이 이러한 전술을 사용하는데는 당연히, 민주당이라는 <호남 태생> 이미지를 가지고는 천하가 뒤집혀도 영남표를 얻을 수 없다는, 따라서 민주당 <간판>으로는 총선에서의 승리라는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계산이 이미 확고히 서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영리한 정치인의 계산이 아닐 수 없다. 40년간 "죽어라 (수구)한나라당만 찍어왔던 영남인들(유시민의 말)"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하더라도, 호남이미지를 입고있는 민주당으로선 결코 표를 얻어낼 수 없다는 판단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움직일 수 없는 공리이다.



'호남이라는 단어는 영남민에게 있어 어차피 혐오의 상징인데...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 방법 밖에 더 없지 않은가?', '호남이 지역감정을 버려야 영남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지긋지긋한 지역주의 정치, 철밥통 정치들 천년만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얘긴가!'라며 반론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바로 노무현과 유시민 등 그의 친구들의 사고 방식이다. 아니, 이 방식이 호남민과 '깨인 소수'를 제외한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중, 그리고 먹물먹은 지식인들까지 아우르는 컨센서스이다. 한나라당보다 훨씬 다양한 지역구를 거느리고 있는 버젓한 전국 정당 민주당을 호남당이라고 폄하하고, 그러기에 호남 지역당은 없어져야 한다라며 목에 힘을 주는 자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소위 지식인들이다. 이러한 가치 도착적 인식 방식을 그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들에게도 이미 규범적 의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영남의 인격은 인격이고 호남의 인격은 견격(犬格)인 것이다. 불공평, 불평등이 이들의 규범이다. 여기에 그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학자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까지 노무현의 이데올로그(ideologue)가 되어 영남이데올로기 옹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민주화 투쟁 이념, 진보좌파 이념 따위도 영남이데올로기를 이해, 터득 하는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 따로, 삶 따로이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민주당 고사 작전에 돌입한다. 호남기득권, 호남철밥통, 호남난닝구, 호남토호세력, 심지어 호남패권, 잔민당, 호남잔민련... 등 온갖 멸시와 조롱이 가득찬 신조어를 양산한다. 당내개혁이라는 그럴싸한 구호 아래, 통합신당론과 신당론간 샅바싸움을 연출하며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민주당 내부 개혁의 당위성을 내외에 선전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기획된 <신당창당>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한바탕 사기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전 자신들이 몸담았던 둥지로부터 호남이미지를 완전히 탈색하려고 작정한 이상, 아예 신당창당이라는 새옷을 걸쳐입는 것 외 다른 선택이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민주당이 당내개혁으로 환골탈퇴할 수 있다 한 들, 그렇다고 해서 영남민들이 '여전히' 전라도당인 민주당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찍어줄까 말까 고민할 리가 만무하다는 걸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노무현의 뇌리에 절어있는 인식은, 영남민이 가진 지역주의와 수구적 정치성향은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철옹성이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에 의하여 스스로 설복당함이다. 영남민은 원래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그들 정체성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영남민들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들의 구미에 영합하고자 일단 영남민들이 기피하는 호남색으로부터 그렇게 필사적으로 탈출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남민 권익 챙겨주기가 지극정성으로 깔려있음을 본다.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 지금 영남민의 수구냉전적 정치성향에 아부하는 전략을 정식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호남민에 대한 노무현의 태도는 어떤가? 호남민은 노무현의 쌈지돈이요, 현찰이요, 봉이다. 정치의식 수준이 높다는 개혁적 마인드의 호남민들은 절대 수구 한나라당에겐 표를 안 줄 터이니 어차피 민주당만 깨뜨리면 그 표는 고스란히 신당표에 흡수된다는 계산이 다 끝났다. 그러므로 하루 아침에 호남민들을 여당 지지자로부터 야당지지자로 추락시키고, 신당으로 따라오지 않는 지역주의자라는 치욕의 낙인까지 덤으로 꾹 찍어주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적 효율이란 관점에서 이해해줄 수 있을까? 참으로 지나친 사치다. 이것은 그냥, 패륜이다. 합리성의 부재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것은 그저 제 부모를 잡아먹는 패륜행위일 뿐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만인 앞에서 데몬스트레이션한 이 패륜행위로써, 그리고 이 행위에 대한 가열찬 비판의 의지가 각 개인으로부터 억제당함으로써 남는 것은,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짊어져야 하는 <가치체계파괴>라는 짐이다. 복구하는데 엄청난 수고와 다툼과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를 만만찮은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거짓과 계략이라는 자산만으로는 한 공동체의 영속적인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안의 질서가 파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 있는 자가 싹쓸이를 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저항과 다툼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당분간 불행한 나라다. 가치체계가 다시 바로 설 때까진 그렇다.



수단이 지극히 저급하며 상식과 원칙을 엎어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개혁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거니와, 만약 개혁의 일부를 설사 일시적으로 일궈냈다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조만간 다시 한번 개혁이라는 철퇴를 받아야만 하는 사이비인 것이다. 즉 적어도 <개혁>이란 게 <민주시민의 정신>을 담보할 것이어야 한다면 말이다. 호남민을 수구세력으로 몰아 그들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부인하고 치욕을 안기는 반인륜적, 반민주적 정략으로, 수십년에 걸쳐 수구냉전군사정권을 일관되게 지지해온 영남민의 수구표를 얻어내어 그것으로 개혁을 완성해나가겠다는 말은 뻔뻔스런 사기일 수 밖에 없다.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아전인수식 논리는 이렇다. 한국의 정치가 지역주의 정당 구도에 기반하고 있어 정치 발전이 영원히 저해된다는 것이다. 각 지역민이 지역기반 정당을 자동적으로 찍어주는 틀을 기어코 부수어 재편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발상만큼은 가상하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주의를 깨겠다며 이번엔 노골적인 영남의 지역주의는 살리고, 대신 호남은 지역주의가 아닌 <지역민정체성> 자체를 파괴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무현의 인식 양식과 관련하여, 정당개혁 자체가 이들에게 있어 전혀 관심 밖이라는 추론은, 이들이 수구냉전적 영남민에게는 물론 한나라당을 향해서, 자민련을 향해서 한번도 개혁을 요구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진실임이 밝혀진다. 개혁이라는 모토 아래,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모태를 척살하길 마다하지 않았지만 수구당들에 대하여는 한 마디 싫은 소릴 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개혁이란 이들의 관심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은 오직 호남이미지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묘수인 신당창당의 길이며 야당인 한나라당과 상생을 도모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노무현은 민주당을 깨고 신당을 만들어 그것으로 과연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있는 것일까? 110 여 석의 민주당을 분열시키면서까지 데리고 나간 열린우리당은 불과 47개 의석의 왜소정당이다. 이렇게 보잘것 없는 몸피를 가지고 총선을 치뤄 승리를 일구겠다는 희망을 갖는다면 그는 이미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원래 노무현의 셈법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야무진 꿈을 가꾸었었다. 민주당의 대부분 의원들을 굴복시켜 신당에 합류케 하고 민주당을 소위 "잔민련"으로 몰아 지역토호 소수 집단으로 겨우 명맥만 잇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름을 바꾼 신당을 내걸고, 어차피 한나라당으로 못 가는 호남표의 대부분과 개혁성 강한 수도권 등의 민주당표를 쓸어담는 한편, 호남색을 털어버린 색깔로 영남표를 공략하여 결국 원내 다수당으로 등장하는 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적어도 과반수 의석 달성이었으리라. 민주당이 조용히 찌그러져만 준다면 그의 시나리오는 그리 황당한 목표가 아니었다. 원래의 민주당 표에다 30 여 석만 더 건지면 가능한 일이니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영남이데올로기에 찌든 그로서는 대선에서 영남의 표를 얻지 못했던 회한이 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가 고향 부산에서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되면서도 거푸 도전을 한 것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지역주의에 도전했던 것이 아니고 고향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말했던 데서 보이듯이, 총선에서 영남 의석을 얻는 것은 그에게 숫자 이상의 각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임이 틀임없다. 그러므로 민주당 의석을 다 가지고 거기에다 몇 석을 더하고도 영남 의석을 한 석도 못얻는다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 "영남 의석만 얻는다면 전국 10석만 얻어도 좋다"고 오기서린 말을 내뱉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므로 영남의석 얻기는 그에게 지상명령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 사술을 동원하였다. 물론 원래부터 사기숫법을 쓰지않고는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뒤집어보면, 애초부터 노무현의 목표 자체는 도덕성이 난자당한 흉악한 모습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당을 원내 다수당으로 탄생시키기 위한 어떤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전략에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을 유권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환골탈퇴 시켜 수구야당과 정정당당히 경쟁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따른다면, 노무현은 개혁을 기치로 들고 나온 대통령이므로 수구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영남민을 중심으로 <호소와 설득> 작업을 펴나갔어야 했다. 즉 영남민들의 수구냉전적 의식을 바꾸는 노력을 다하고 그것이 안 되면 여전히 떳떳한 소수 여당으로 남는 것을 택해야만 했다. '이유없이 호남이 싫더라'는 이유로 민주당에게는 표를 못주겠다는 영남민들의 기호에 기꺼이 영합하겠다는 것은, 결국 수구적 노선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그러한 수구 영합적 국회의원을 모아 개혁을 이루겠다는 주장이 되고 만다. 참으로 가당찮은 논리인 것이다.



결국 노무현은 자신을 열렬히 지지했던 개혁세력의 뒤통수를 때리고 민주당 탈당을 감행한다. 그것은 개혁의 여망을 간절히 품은 수백만 개혁세력이 맡겨준 소중한 민의를 내동댕이쳐버리는 행위로서 <대의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쿠데타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반민주적 행위는 일찌기 세계 정당사에 없던 일로서 즉각 탄핵을 받고도 남을 만행이었다. 헌법에 명시될 필요조차 없었던 민주주의 기본정신 중의 기본인 대의민주주의의 부정이 헌법 조문에 적시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면죄부를 받는다. 더구나 이렇게 비상식의 극치인 파렴치행위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신문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으로부터의 비판의 대상으로서 이슈화되지도 않는다. 아니, 권력의 눈치를 보던 그들이 결국은 노무현의 논리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노무현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영남이데올로기 통속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비롯한 동조 언론 일반은 다음과 같은 적반하장식 논리를 펼친다. '지역주의는 망국병이다. 그런데 호남당인 민주당을 해체시키는 것이 호남주민의 소위 지역 몰표성 투표행태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식 말이다. 이 신성한 논리의 완성을 위해 호남민들은 수구집단으로 매도돼야만 한다. '호남민은 거기에 작대기만 세워도 민주당 간판이면 무조건 표를 몰아주는 집단'이라는 모멸적 정체성이 주어진다. 반면 수구원조 집단을 40년간 꾸준히 지지해온 영남민의 골수 지역주의적 투표행태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철저히 통제된다. 영남민에 아부해서 그들의 표를 구걸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은 영남민의 수구냉전적 멘탈리티에 대하여는 입을 꼭 다문 채 호남민만을 물고 늘어지며 아예 그들을 개혁을 거부하는 지역주의 함몰집단으로 내몬다. 노무현과 신영남패권세력의 실로 추잡한 전술이다.



그 방식은 일찌감치 공정의 게임법칙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린 파쇼정치의 표본이다. 약한 집단에 대하여 부리는 힘 있는 집단의 살인적 폭력이다. 이들이 개혁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말 자체가 개혁에의 능욕이었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대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속이고 이용해먹는 대 국민 사기극이었다.



여기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 재밌기도 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이렇게 노무현과 열우당 패거리가 극본을 쓰고 영남이데올로기 언론들이 연출하는 무대 위에서 민주당이 열우당을 파트너로 열심히 개혁경쟁 쇼를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기쇼의 속성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순진하지만 진지한 마음에서 민주당이 개혁에 박차를 가해주기를 주문하고 채근하다 결국 욕바가지를 씌우기도 한다. 그렇다, 개혁이란 건 얼마나 신성한지 모른다. 그러나 개혁의 정신을 난도질한 당사자가 주관하는 개혁경쟁이 남기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개혁경쟁이 아니라 개혁포장 경쟁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거짓으로 개혁을 멋지게 포장하느냐의 경쟁이다. 분당 후의 민주당 내분과 내홍은 모두 노무현이라는 영리한 무대 감독 아래 그의 기획대로 충실한 연기자가 되어 놀아나는 결과였다. 민주당이 스스로 내부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면 그렇게 바람직할 수가 없다. 그것이 민주당이 생존하는 유일한 길이며 총선 승리를 담보하는 최선책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면 좋은 일이다. 단, 그 개혁의 경쟁 파트너가 유권자라면 말이다. 유권자가 두려워 개혁을 할 때가 진실이다. 그 개혁이 영속적이다.





4. 영남패권이데올로기 규준 : 불공정경쟁



그러나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어진 개혁 경쟁이라면 완전히 딴 얘기가 된다. 개혁의 알맹이를 채울 턱이 없다. 그런 여유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결국 이미지 싸움이다. 민주당 내에서마저 권력 간 이미지 싸움이 첨예하다. 유권자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포장개혁은 길게 봐서 개혁의 뒷걸음질이다. 얼마 안 가 들통난다. 게다가 민주당이 노무현 극본을 쓴 이 게임에 참여하기로 작정했다면 상대를 이길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한다. 어차피 유권자를 대상으로가 아니라 열우당을 상대로 하는 개혁경쟁에서 심판관으로서의 언론은 일방적으로 여당의 손을 들어주게 돼있기 때문이다.



그 경쟁게임 룰의 이름은 <불공정경쟁>이다. 민주당은 강제적으로 이 무대의 어리광대가 됨으로써 엄청난 내분을 겪고 그 모습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친노집단으로부터 쏟아지는 집중적 비판공세에 시달리며 지지율 추락을 맞본다. 열우당의 사이비 개혁은 언론에서 곱게 포장하여 널리 널리 선전해준다. 이러한 불공정 게임법칙하에서라면 천하 장사라 한 들 승리할 수가 있겠는가. 개혁적 성향의 민주당 지지자일수록 개혁이 지지부진하게 비쳐지는 민주당을 한층 강도높게 비판하고 이에 호응하지 못하는 민주당에 실망하는 사람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친노언론은 민주당의 추락을 즐긴다.



자, 이렇게 그들 조롱마따나 호남철밥통 민주당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반면, 상대적으로 월등한 우위를 점한 듯이 선전되는 열우당의 개혁 수위와 내용은 과연 어떻겠는가? 예컨대 탄핵 정국 후폭풍을 업고 50%의 지지를 구가하여 단번에 유일한 일급수로 떠오르는 열우당은 그 구성원을 흘낏 보기만 해도 그들이 개혁과는 아무 상관없는 정치자영업자 집단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청정수와 같은 열우당의 이미지가 그들의 실체와는 얼마나 동떨어졌는가를 금새 알 수 있다. 상종못할 집단이라고 한 목소리로 힐난하는 한나라당을 거친 의원들과 그곳 보좌관 출신, 그리고 후단협회원들이 즐비하고 대통령의 측근이란 측근은 하나같이 감방에 가있다. 게다가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불법대선자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착복까지 한 자가 당당하게 경선승자가 되는 당이다. 탄핵 직후 전국 중계되는 TV 앞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며 통곡하고 꿇어앉아 국민에게 빌면서 국회의원 사퇴서를 일괄 제출한 의원들이 일 주일을 미적거리더니 이제와선 그저 없던 일로 하자며 입씻는 당이다.



이러한 어이없는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이비 개혁 경쟁을 해왔기 때문이다. 포장을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만큼 개혁의 실체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열우당은 여당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에 절은 대부분 언론의 비호 아래 그 포장지 기술을 최고로 연마해왔다. 이것은 애초부터 승자를 결정하고 패자를 끌어들여 벌이는 쇼인 것이다. 그것은 멋진 승자와 비굴한 패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할 것인가가 최대 관심인 사기쇼이다.



그렇다면 왜 민주당은 이토록 어리석은 것일까? 왜 어리광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것일까?



대답은 둘이다. 첫째는, 민주당도 <영남이데올로기>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땅의 규범이 되어 정치판은 물론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불공정경쟁>이라는 영남이데올로기의 핵심 규범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금 어떠한 게임 환경에서 뛰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이 없다. 민주당이 생존을 하려거든 이 불공정 게임 법칙 자체를 깨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룰을 공정한 것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게임을 아무리 죽어라 뛰어봤자 패하도록 짜여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거대한 공룡이라 하더라도 우선 그 본질을 인식, 학습해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민주당의 바보짓만을 탓하고 싶진 않다.



둘째 대답 때문이다. 정작 책임의 소재가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여론을 통제하는 대한민국의 언론이 영남이데올로기 편에 서서 자신이 올린 무대에 민주당이라는 어리광대가 올라오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가 없는 강제다. 아예 카메라 앵글로부터 사라지기를 고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예 고사하기를 작정하고 저항하기엔 가진 힘이 너무 작은 것이다. 뻔히 지는 줄을 알면서도 게임에 임하지 않을 수 없는 소이다. 영남이데올로기에 편입되면 사는 길이 열리고, 거부하면 그때부터 수난의 시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노무현에게 진실로 개혁이란 목표가 지시하는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그 안에 담고자 하는 고상한 철학이 있었다면 굳이 이러한 사기술을 쳐서 개혁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그 다수 의석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만약 그 목표가 실패했을 경우엔 어떠한 원칙과 철학으로 국정을 펼칠건지에 대한 기획이 수립된 바가 없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목적은 개혁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국정 수행을 원할히 하기 위한 원내 다수당 확보에 있었다. 이렇게 소박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목표에다가 개혁이라는 신성한 가치를 엮어 포장한 결과 사이비 개혁경쟁이라는 광란이 펼쳐지고 말았던 거다.





5. 탄핵정국과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파쇼



노무현의 지지도가 30%에서 반등의 기미가 없고 측근비리와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옥죄어오는데다 열우당의 '정동영효과'도 기력을 다하면서 총선에서의 여당승리는 이미 물 건너 가는 형국이 된다. 노무현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기대처럼 민주당이 완전히 깨져버리지도 않았고 열우당의 약진도 한계가 보인다. 이 때 노무현이 던지는 카드는 한층 치열한 총선올인 작전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전략을 수립한 마당에 그는 자신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선거법을 연거퍼 어기는 발언을 한다. 노무현 정권 출범 들어, 자신에게 끊임없는 모략과 수모, 그리고 결정적인 배신을 안기고 총선 직전에 이르기까지 불법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노무현을 민주당에서 곱게 볼 리는 만무하다. 한나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개혁 경쟁이라는 불똥이 한나라에도 튕겨, 억지 춘향으로 당내 개혁을 하느라 터진 분란의 격랑이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다. 노무현은 국정을 최우선시키는 대통령의 의무와 체신을 내던지고 일 개 선거대책본부장이 되어 좌충우돌한다. 그러한 노무현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들끓는다. 지난 일 년간 노무현의 실정에 절망해온 국민 70% 이상이 그를 불신하는데다 노무현이 선거법 위반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이 옳다는 여론이 비등하다면 거기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치적 목표는 탄핵가결을 통해 자연스레 만날 수 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미움과 민주당에 대한 편견이 없이 차분하게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탄핵가결 정국은 두 야당의 야합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민의 뜻을 받든 일임을 인정하게 된다. 노 대통령 탄핵은 매우 적법할 뿐 아니라, 헌법정신을 받들어 대통령의 과도 권력을 견제하므로써 헌정질서를 수호하라는 입법부의 의무를 올바로 수행한 일이다. 노무현의 탄핵은 그간 그가 저지른 심각하고도 패역한 실정들과 위법 사실, 그리고 계속되는 위법의 가능성을 제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입법부에게 주어진 권리를 적절하게 사용한 예였다.



그런 중에도 탄핵 가결 후 일 주일이 지나는 현재 언론의 선동은 그칠 줄을 모른다. 신문방송이 탄핵찬성 의견을 무시하거나 억누르고 탄핵반대 의견과 이벤트를 극화시켜 메인에 건다. 신문이란 신문,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신문, 친노 비노를 가릴 것 없이 웹진이란 웹진, 그 어느 것을 펴보아도 탄핵반대로 도배가 돼있고 텔레비젼을 켰다하면 탄핵찬성자를 파렴치한으로 만들어버리는 프로그램으로 가득 찬 것을 매일 봐야한다. 고문이다. 신문방송 등 언론 일반은 시민단체들과의 연합전선으로 대규모 군중 집회 참여를 선동한다. 멋대로 만든 100만이라는 숫자가 춤춘다. 행정부 장관이라는 자는 탄핵무효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촛불집회를 문화축제라고 속이면서까지 친절하게도 법망을 찢어 벌려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장관이 됐건, 언론이 됐건, 진보지식인이 됐건, 필부가 됐건 이들이 주장의 정당성으로 내거는 구호는 한결같이 <국민의 뜻>이다. 국민의 뜻을 어기고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을 탄핵했다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까진 없겠다.



문제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파쇼의 그림자이다. 즉 (탄핵을 반대하는) 자기들이 '다수,' 곧 메이저라는 것이다. 힘센 다수라는 것이다. 그걸 믿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집회와 효순.미선 촛불 집회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한 국민들에게 '광화문촛불집회'가 드리우는 상징은 <국민의 힘>이요, <정의로운 저항>이다. 그러므로 지금 언론이 부추기는 탄핵무효 촛불 집회는 자동적으로 정의라는 이미지를 후광으로 달고 있다. 군중이 다수의 힘을 업고 정의라는 이미지까지 두를 때 그것은 파쇼로 쉬 빠지게 된다.



파쇼는 즉시 공포를 조성한다. 소수의 목소리는 잦아들게 된다. 소수는 괜한 죄책감에 어깨를 움츠린다. 사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입을 조심한다. 입을 봉한다. 소수가 입을 봉하고 났을 때 다수는 폭발하는 스스로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들은 국민이라는 이름과 다수라는 힘으로 법을 무시한다. 다수가 법 위에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파쇼는 제어장치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린다. 소수는 혼돈에 빠져든다. 정과 사가 헷갈린다. 사고가 위축된다.



탄핵 정국 속에서 언론이 연출해낸 것은 파쇼의 광기였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친노 언론은 그런다 쳐도, 여지껏 비노라는 스탠스를 견지했던 언론마저 왜 탄핵가결에 대하여 극도의 분개와 항의를 표출하며 파쇼의 광기까지 번득이는가? 어찌하여 그들이 한통속이 되어 다수로 합심하고 있는가? 어떤 동기와 목적이 있는 것일까?





6. 언론의 영남이데올로기 부역--'한겨레' 를 중심으로



우선 한겨레를 보자. 한겨레는 진보를 표방한다. 민노당을 공식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파성과 관계없이 좌파적 편향을 자랑으로 삼는 언론매체다. 이들의 염원은 대한민국 정치판이 건전보수와 진보의 양대 정당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완전히 멸절되어야 할 존재다. 한나라당이 궤멸됐을 때 남는 당은 민주당과 열우당이라는 보수당, 그리고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민노당 등의 진보당이다. 그러므로 이번 탄핵정국이 한겨레로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호기가 되는 것이다. 탄핵주도의 한 축인 한나라당을 벼랑 끝에 선 소수당으로 몰아버리기에는 하늘이 내린 기회가 된다.



이들에겐 한나라당이 없어지고 만 지형 위에서 볼 때, 민주당과 열우당간에 아무런 차별성이 없다. 어차피 오래 안가서 두 당이 합당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이왕 열우당 지지도가 폭등한 마당이라면 잘 된 일이다. 한나라당을 무너뜨리는 천적이기만 하다면 그게 누구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열우당의 바닥을 기는 도덕성 따위, 그들의 사기성같은 건 지금 문제가 아니다. 열우당을 확실히 밀어주면 줄수록 한나라당은 그만큼 나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떨어질거다. 상대적으로 왜소해져가는 민주당의 형편은 지금 봐줄 계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좋다. 보수당도 여럿보다는 뚜렷한 하나가 서야지만 진보당이 그와 대등한 파트너로 행세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한나라당을 죽여라!



이것이 진보성향지 한겨레의 꿈이다. 그것은 민노당의 입장과 매우 대동소이하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이비 좌파가 빠지기 쉬운 자가당착이다. 이들의 첫번째 문제는 도덕성이 없다는 점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합리화된다. 또 다른 문제점은 판단착오다.



한겨레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탄핵 가결이 법적으로도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 것임이 틀림없다. 하물며 그간 한겨레는 줄기차게 노무현의 수구적 정책 기조를 비판해왔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대통령 자격 없음과 위법 사실 등 탄핵의 정당성을 그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믿을 만하다. 한겨레의 도덕적 기만성은 이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진보를 꿈꾸면서 정작 그 정신이 표방하는 소수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일절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위축이 민주당의 잘못 때문이 아닌 것을 한겨레가 모르겠는가. 노무현과 열우당의 공작에 무너지고 있는 본질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부정의가 강자가 되어 행세를 하며 약자가 다시 구석으로 내몰리는 불공정 게임을 보며 한겨레는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진보의 정신을 완전히 갉아먹는 사이비 집단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두 번째 문제인 이들의 판단착오는 어이없게도 상상력 빈곤에 기인한다. 그 짧은 상상력은 한나라당이 자멸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은 영남 <대중>이 만들어줬다. 안타깝게도 영남인들은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찌든 사람이 대부분이다. 영남이데올로기란 패권에의 갈구이다. 열우당이 지금 순식간에 반짝하며 지지율이 올랐다고 해서, 그토록 허약한 대통령, 탄핵을 받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대통령을 두고 있는 여당이 영남인들에게 과연 듬직한 당으로 보이겠는가? 영남인들이 의지하고 맡기고 싶은 신뢰를 열우당이 보여준다고 여기겠는가? 열우당은 영남민의 패권의식을 맡기기에는 형편없이 초라한 난장이에 지나지 않는다. 영남민들은 그것을 직감으로 안다. 그 영남민이 어디로 이민가는 것이 아니다. 투표장에서 열우당을 꾹 찍고 나올 영남인들이 절대 많지 않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영남민이 의지하는 대상이다.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끄떡없다는 것은 이러한 보통의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뭔가? 헛물켜기다.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에서 꼿꼿하게 살아남는다. 과반수에 육박할 것이다. 대신 한겨레가 앞장서고 친노 어용언론들이 부추긴 댓가로 열우당이 약진하고 민주당이 약소 정당으로 내몰릴 것이다. 결국 한겨레가 보기에 한나라와 열우라는 두 개의 보수 정당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이 설 환경조건은 여전히 요원하다. 엄마의 치마 뒤에 숨어 눈만 빼꼼히 내놓는 아이처럼 덩치 큰 어른들 사이에 낀 꼬마 민노당이 될 것이다. 한겨레의 야무진 꿈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다.



사술의 동원과 파쇼의 광기에 동참하므로써 한겨레에게 남는 것은 역사적 죄악밖에는 없다. 한겨레는 노무현이 지지자를 배신한 것과 꼭 같은 패턴으로 그를 아껴왔던 중도개혁과 진보성향 독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군사독재정권 엄혹한 시절을 뚫고 횃불을 밝히며 한국 민중에게 민주의 혼을 심어준 민주당을 짓밟는데 동참해온 죄과가 남는다. 한겨레는 이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해왔다. 상식과 원칙이 통용되는 언론으로 여겼더니 진보를 표방한다는 자들이 또 다른 파쇼를 지지해버렸다. 상식을 가진 시민들을 기만했다.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정국을 도구로 이용하면서 상식과 원칙을 완전히 갈아엎어버렸다.



탄핵 정국 국면에서 한겨레는 배신을 때린 반면 오마이는 일관되게 제 길을 간 셈이다. 그렇다고 파쇼의 광기를 드러낸 오마이의 노무현광신이 무죄인 것은 아니다. 물론 오마이만이 아니다. KBS, MBC 두 공영방송, 한국일보, 경향신문, 국민일보, 문화일보 등 일간지, 그리고 브레이크뉴스, 최후로 믿었던 프레시안 등 인터넷신문까지 예외없이 한통속이 되었다. 우연일 수 없는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는가? 물론 권력 추종적인 그들이므로 친노 논조에서 벗어난 목소리를 낼 리도 만무하겠지만 이토록 일사불란한 데에는 그럴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따올림 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여타 언론사로부터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 자체가 무섭기 때문이다. 한 번 낙인찍히면 과거의 명예를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남이데올로기의 기준과 규범이 강제하는 환경이다. 공정하고 균형잡힌 보도라는 언론 본연의 자세는 고사하고, 우리가 과거 십 수년 전 이래 경험해보지 못한 파쇼언론공동체라는 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언론공동체가 끼친 사회적 해악의 깊이와 넓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영남이데올로기의 구현에 동참한 잘못을 첫째(first and foremost)로 꼽을 수 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마이너, 즉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특히 호남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일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공포였다. 재갈을 물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고와 판단 기능을 정지 혹은 파괴시켜버린 점이다. 민주당 지지율이 호남에서도 곤두박질 쳐 (전국적으로) 5% 까지 떨어진 수치가 그것을 웅변한다. 적법하고 적절한 탄핵에 참여한 댓가가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것은, 호남민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느끼는 공포감 외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전의 자랑스런 소수가 아니라 졸지에 그들은 저주받을 파렴치 집단이 되어버렸다. 마치 그들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심지어는 제 부모와 형제를 죽인 정권의 후예들과도 입을 맞출 수 있는 더러운 집단인 것처럼 매도되었다. 마치 민주당이 그러한 패륜을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지지자들은 세뇌당하였다. 그것이 공포의 효과였다.



아울러, 생명과도 같은 그들 가슴 안의 5.18이 처참히 난도질당해 버렸다. 자긍심엔 씻지 못할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들 간에, 호남인들간에, 친척과 친구들 간에, 가족 구성원들 간에 서로를 멸시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로부터 소외당하고 말았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자체가 두렵다. 차라리 입을 닫고 서로 소외되기를 택한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 정신은 산산조각이 났다. 한번 일그러진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간의 신뢰를 잇는 경험이 다시 축적될 때만 가능하다. 세월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앞으로 호남민은 한 동안 엄청난 상흔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모두 언론의 조작에 의한 결과다. 거짓이 진실이 되게 만든 결과다. 그것은 죄악이었다.





7. 탄핵정국 너머-영남패권이데올로기 해체의 길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족화해와 통일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개혁이나 사회 변동을 추동하는 데에는 주체 세력의 출현과 결집이 필히 요청된다. 이 나라의 개혁 주체는 누구인가? 말할 필요없이 호남민중이다. 또한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왜 호남민중일 수밖에 없는가?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에 저항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핍박을 받았던 민중이 충청이든 강원도민이었다면 그들이 대한민국의 개혁세력이 돼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불행하게도 호남민중이었다. 호남민중이 없다면, 또 그들이 살아있으나 그들에게서 저항 정신이 빠져나간다면, 그래서 저항할 대상을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진보는 거기서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호남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문제다.



진보좌파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착오적인 망상을 그만 하라고. 한국에 자본주의 이입 역사가 반 세기요, 한 사회의 진보는 계층·계급 간의 힘겨루기와 타협에 의해 견인되는 법이라고. 나는 이들에게 말한다. 착각하는 게 있노라고. 이 땅에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행세하는 한, 먼저 그것에 대항하지 않는 한,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사회적 약자의 권익은 영남패권과 그 부역세력으로부터 절대 빼앗아올 수 없다고.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바로 파쇼에 다름아니므로 파쇼가 해체되기 전까진 계층·계급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작금의 탄핵 정국은 파쇼의 망령이 아직도 이 땅에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주었다. 영남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총체적 언론의 힘은 결코 영남패권특수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의 규범이 되어있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이념에서 저절로, 자연스레 스며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해줬다. 영남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기괴한 형상을 한 파쇼인지도 뚜렷이 보여주었다. 파쇼가 그렇듯이 그것은 역시나 파괴적이었다. 영남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작금의 아노미는 그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실체를 깨닫는 여부에 따라서 2004년 초봄의 탄핵 정국은 우리에게 그나마 쓴 약이 되기도, 아니면 여전히 독약이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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