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당의 선전 = 선택지 탓인 반사이익

 

 

더민주당의 총선결과에 대한 위상은 한 마디로 반사이익이다.

 

더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닌 새누리당의 닭짓으로 인한 반사이익 +

 

신생정당 국민의당에 대한 선택지가 없어 울며겨자먹기식의 전략적 투표로 인한 반사이익일 뿐이다.

 

 

영남패권주의 이슈는 선거철에만 반짝 빛나는 1회용 종이컵이 아니다. 영남패권주의는 한국인 모두를 옥죄고 있는 일상의 굴레요 멍에이며 부정의의 흔적이다.

 

 

만약 영남패권주의 이슈가 공공에게 소비되어 일반화되면,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질곡안 영남패권주의를 자각하게 되면 더민주당의 입지는 사상누각이 요, 풍전등화가 될 것이다.

 

 

자유를 위한 민주화와 경제민주화는 별개 몸뚱아리가 아니다. 그런데 더민주당의 운동권 애들은 그것이 딴 몸인양 현실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다름아닌 지역주의 양비론이다.

 

 

우리가 다르냐! 우리의 정당한 몫을 교정하라는 호남 민심을 외면한 그들의 가증스럽고 천박한 민주화경력의 포장지가 이슈로 부각되면 치욕스럽게 정치생명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위선자들의 심판은 머지 않았다. 그 어떤 수단도 진실과 정의를 영원히 덮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데 혁혁하게 기여한 김종인을 영입한 문재인의 안목은 한마디로 천박하다. 경제민주화의 지향점 하나가 곧 과거의 불공정한 퍼주기식 불균형 경제정책의 교정이고 그것이 호남 민심이 아니겠는가!.

 

 

김종인의 사탕발림이나 문재인의 사죄방문이 응답받지 못한 까닭이 바로 그 것이다.

 

 

노빠들은 본질을 호도하며 견강부회하지 말고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노빠들은 더민주당을 진정한 국민의 당으로 추동할 정치적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빠들 역시 치욕스러운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영남패권주의 척결!

 

유일하게 그 선봉에 누가 서느냐가 관건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영남패권주의 척결은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사필귀정으로 귀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친일부역배를 압도적으로 혐오하기 때문이다.

조선 500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무능한 양반들의 흔적들···,

첫 단추를 잘못 꿴 이승만의 민족정기 훼손,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을 좌초시킨 친일부역배 박정희의 쿠데타, 이어진 정상배들과 경제학도들이 추동한 파행적 경제성장으로 빚어진 한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그 과실을 탐하며 양극화를 조장·고착시키고 있는 영남패권주의,

 

헬조선 ···

 

가치전도의 일상화와, 자원 낭비로 귀결되는 극심한 기호적 소비’,

사회적 자본의 편재(偏在)로 인한 지역격차 및 폐쇄적 계층구조의 고착···

 

 

 

정상배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한국의 정치지형도 자본주의라는 제국의 일원으로서 영락없이 정치자영업자들이 득세하여 유권자의 선택의 폭이 좁아졌고 투표할 때만의 정치참여가 된 지 오래이다. 정치가들의 어깨는 수많은 유권자들의 기대, 즉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무거운 가치가 짐지워져 있는 틀림없는 공공재이다. 그러므로 정치판에서의 도덕적 흠결에 대한 관용은 사치이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고학력자가 넘치며, 대체재인 정치신인들이 넘치므로 더구나 그러하다.

 

정상배의 소비는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과거의 우리(조상)가 저지른 잘못으로 오늘 우리가 질곡에서 허우적대고 오늘·여기의 잘못된 선택이 미래의 우리(후손)에게 당연히 파장을 미칠 것이므로 한 표 한 표는 그야말로 신성한 가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종인의 악어의 눈물

 

김종인류가 과거의 허물을 사죄한다며 5.18 묘역에서 무릎을 꿇었으나, 그 진정성이 관철되는 것일까?

 

정당하게 탈당절차를 밟고 신당을 창당하여 다른 길을 걷는 경쟁정당에게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모습, 이런 모습이 국제관계에서는 국가 자주권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양상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미화된 한국식 자본주의의 부정적 양상에 한 몫 거든 김종인의 반역사적 자취, ·를 넘나들며 양지만을 좇은 전력은 친일부역배들의 기회주의적인 처신과 대동소이하다.

 

 

 

범민주세력의 바이러스와의 연대는 불정의

 

의석수의 우열만 앞세워 연대를 강요하는 김종인류는 다수에 주눅들어 경쟁을 포기하고 투항하는 친일부역배의 사대주의, 패배주의와 다를 바 없으므로 새누리당으로 가든지, 폐당해야 한다. 또한 야권연대는 사실상 소수정당의 의미를 반영하기 위한 비례대표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며, 유권자의 선택을 임의로 배제하는 반민주적인 것이기도 하다.

 

, 야권연대의 후보자 옹립은 수의 다과가 기준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남이가우리가 다르냐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역주의 양비론에 매몰된 더민주당은 영남패권주의 정당의 입지를 결과적으로 강화할 뿐이며, 범민주세력의 도덕성까지 훼손하는 범민주진영의 바이러스적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김종인의 반역사적 자기부정

 

호남의 정체성은 호남이라는 물리적 공간과의 결합보다 정의로운 가치와 더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이가의 지역주의와 우리가 다르냐의 지역주의 모두를 부정하는 지역주의 양비론자가 호남과의 지역적 연고를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자기부정이며, 기회주의적인 처신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부도덕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한 줄로 10명정도 사람을 세워놓고 어떤 사진의 정보를 귓속말로 전달한다고 할 때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된 이미지가 최초의 이미지와 부합될까?

* 부합(符合) : 쪼개진 대나무가 서로 아귀가 맞듯 일치하여 틀림없는 상태

 

과학 분해능의 한계와 인간의 시각의 한계로 인해 실제 전자의 움직임을 본 사람이 없다. 오늘날의 원자 구조는 그냥 추정에 의한 모형일 뿐이다. 그것도 확률적 추정이다.

 

실증과학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즐겨쓰는 통계의 한계도 존재한다전수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란 오늘과 같이 전산으로 자료가 취합되고 관리되는 국한된 경우에 한정된다비용과 자료확보의 효율성 측면과도 얽힌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마저도 전경과 배경(형태심리학적 용어) 미분화 상태는 그저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비친 풍경에 불과하고 그것을 자료로 해 정보화할 수 없다.

 

전경과 배경이 지각된 대상마저 인식과정에서 주관에 의해 제약되고 호오에 따라 윤색된다. 그뿐이 아니다. 외부로 표출될 때 언어의 한계와 언어능력의 한계에 따라 또 뒤틀릴 수 있다.

 

표본조사를 통한 통계자료는 어떤 질문을 통한 누구의 응답인가에 따라 신뢰성이 달라진다는 한계만 아니라, 제공된 통계자료는 취급자의 의도에 따라 또 한번 뒤틀릴 여지가 있다.

 

그뿐이 아니다. 소통과정에서 또 한번 가공되어진다. 정보를 수용하는 주체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 지를 결단한다.

 

다양성을 포착하는 우리 또한 호오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그 입장만을 선으로 나머지를 악으로 배타적으로 쳐낸다.

 

그래서 인간세상엔 다양성이 존재하고 의견이 대립하는 것이다.

 

 

독선과 자기부정의 식민지근대화론

 

한국사는 우리 민족의 안목으로 보는 과거에 대한 성찰이다.  역사는 몰가치적 과학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해서 미래를 향해 투사하는 과거의 우리(조상)로부터 미래의 우리(후손)에게의 소통을 위한 가교이다.  우리가 아닌 일본의 시각이 들어앉은 역사란 이미 한국사일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을 펴는 안병직류는 마치 자신의 인식이나 가치관이 절대선인 것처럼 주장한다. 시대적 한계속에 갇힌 통계나 기억의 한계라는 불완전성에 방점을 찍고 역사를 재단하는 편파적 관점, 한국인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반민족적 매국사학... 그것이 곧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정치판의 안병직류

 

정치판에서 자기부정의 행태,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는 자해행위자가 곧 노빠류 이다.

 

우리의 일반의지인 헌법, 근대이성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정치판의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일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권력을 상하, 좌우, 전후 찢을 수 있는 한 분리시켜 놓았다. 권력을 쥔 자들을 믿지 말라는 우리(과거의 인류의 조상들)들의 산 경험이다. 그런데 이른바 빠돌이·빠순이들이 있다.

 

빠돌이·빠순이란 자신의 영혼을 팔아 정상모리배의 수족이 되었거나 시체에 몰려드는 쇠파리와 같은 존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부정·자해행위를 감수하는 영혼을 팔아넘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고종석 등이 한 때 노빠였다. 언제나 비판적 시각으로 감시자 역할에 충실해야 함에도 자기부정을 하다가 곧 정신을 되찾았다.

 


아직도 자해행위를 하고 있는 빠돌이·빠순이가 있을 것이다. 커밍아웃 해서 자해행위를 왜 계속하는지 말씀해 보시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