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손호철교수의 글(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34331.html)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이다. 이른바 한국사회의 진보적 매체의 대명사라 불리우는 한겨레에 실린 글이라는 점, 그리고 좌파(?) - 필자는 손호철이 좌파인지 진보주의자인지 그 정체성을 가늠할 수 없다 - 지식인의 글이라는 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좌파 혹은 한겨레신문의 지향하는 바란 사회적 약자나 소수를 경시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현실을 극복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말 그들이 표방하고 있는 지향점과 글의 성격이나 내용이 부합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사이비인지 아닌 지 알게 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나는 이 제목을 '내가 살고 싶은 나라'라고 해야 된다고 보여진다. 왜나하면 글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나를 포함시켜서는 안 될 나라라는 점에서이다. 이유를 인용해가면서 적어 보도록 한다.
"아무리 틀린 생각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상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을 가거나 당이 해산당하지 않으며" (이하 인용문을 겹따옴표로 묶고 붉은글자로 처리함)
우리들의 일반의지가 객관화된 헌법 그리고 근대의 보편 이성에 희하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어떤 자유든 절대적으로 자유를 보장할 수가 없다. 자유의 본질상 그렇다. 예를 들어 손호철의 표현의 자유와 필자의 표현의 자유가 서로 경쟁하게 되면 그것을 그냥 방치해야 할까? 그렇게 되면 공동체의 효율적인 작동이 어렵게 된다. 기껏 인간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공동체의 존재의의가 훼손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가 은밀한 개인의 내면에 머무를 때야 외부에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자유이다.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 자유 여부가 문제될 수 없다. 외계와 간섭을 일으킬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가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세계와 연계되는 경우 - 현실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행동으로 옮겨진다거나 표현되어 외부와 관계맺는 상황 - 는 일정한 한계를 갖게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손호철이 염두에 둔 자유는 이런 류의 자유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손호철이 필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봉쇄하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곧 표현의 자유의 적이 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취지와 정면으로 상충하여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간단한 예를 보더라도 손호철이 쓴 '아무리 틀린 생각'이 헌법에 반한다거나 반민주적이라거나 파쇼적이라거나 인종차별주의적이라거나 자유의 본질적 훼손을 초래하는 것들은 용납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손호철의 생각은 옳지 않다. 이런 뻔한 상식을 왜 부정하며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손호철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식 예외주의를 거론하는 안목에는 정치지형이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날아야 된다는 이상적(?) 모델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색을 갖추기 위해 한국의 진보(?)정당을 진보로 자리매김하여 진보타령을 한다.
한국 좌파가 진보인가?
한국좌파에게 표를 나눔하지 않는 몰표의 대표지역인 영호남 지역주의의 배경과 맥락을 헤아릴 인식지평이 좌파에겐 결여돼 있다. 그러므로 좌파들은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없다. 지금의 지역주의를 없어져야만 한다고 주문을 외울 뿐이므로 원시시대의 샤만이 주술을 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없어질 리 없다.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당이 더민주당이고 노무현이었고 그 추종자들이다.
영호남 지역주의가 한국사회의 첨예한 이해 대립이며 그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이 뭔가를 전혀 제시할 수 없는 좌파정당이 어떻게 진보정당이라는 것일까? 만약 한국의 망국적 지역주의를 타파할 방법이나 혹은 지역주의의 배경을 성찰할 수 없는 것이 진보라면 필자같은 진보주의자에겐 진보딱지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에 불과하다. 즉 한국좌파와 그들이 지지하는 좌파정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사이비 진보정당이라는 얘기이다. 필자는 손호철이나 한겨레신문이 자칭 진보라고 가식을 떠는 것이 굉장히 혐오스럽다.
우리가 남이가와 우리가 다르냐의 영호남 지역주의
'우리가 남이가'로 패권적 지역주의를 관철하려는 영남 지역주의와, 적어도 30여년간 변방으로서 소외되고 낙후된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 지역주의를 구별할 수 없는 한국 좌파, 구천을 떠도는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발견한 계급사관이 한국 좌파를 망쳐 놓은 것이다. 한국좌파의 안목으로는 지역주의의 맥락이나 배경은 형체가 보이지 않는 바람같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예외주의란 곧 독재자 박정희의 정략적 차별정책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그 배경에 지역에 편중된 산업시설, 그에 수반되는 산업연관효과, 부수적인 사회, 문화 등의 차별... , 이어지는 30여년에 걸쳐 심화 고착된 변방인의 의로운 외침!
'우리가 다르냐 왜 우리 것을 서울이나 영남에 쏟아붓고 그것을 교정하지 않느냐'라는 호남민의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외침이 스며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며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무슨 진보란 말인가? 지식인으로서 자징 진보언론으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손호철의 친일부역배 유사의 기질 - 지역주의 양비론의 본질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지역주의, 그리고 최근 부상한 세대갈등이다.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의 압도적 우위하에 커지고 있는 세대갈등, 약화됐지만 사라지지 않은 민주 대 반민주, 그리고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진보 대 보수가 결합해 있는 구도이다.
한국의 좌파들의 거의(최근 홍세화가 인식의 혁명적 변혁을 이루었으므로 거의를 한정어로 씀) 모든 공통적 인식이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과 같다. 즉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 그리고 변방인 호남인의 '우리가 다르냐? 평등하지 않느냐!'라는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양비론이다. 이른바 소수 약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한국좌파의 괴기한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는 인식지형은, 결국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아가 힘들게 족쇄를 차고 뛰고 있는 변방인을 냅다 걷어차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부역배가 동포를 등쳐먹던 꼴과 유사하다.
"... 지역주의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호남이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역사적 역할을 해온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야 한다. 김대중 정부를 통해 호남의 한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됐다. 또 인구 면에서 영남이 누리고 있는 압도적 우위를 생각할 때 지역주의 정치는 ‘지는 게임’이다.'
손호철이 일본제국주의시대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지는 게임'이므로 분명 현실순응적 선택을 했을 것이고 강자에 빌못어 친일부역배로 천황폐를 모셨을 거라고 본다. 힘겹게 뛰는 변방인을 냅다 걷어차는 꼴은 곧 일제강점기에 동포를 팔아 호의호식한 친일부역배와 꼭 닮지 않았는가! 결국 한국좌파나 노무현은 호남 변방인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릴 이성이나 감성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호남의 한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한다. 호남 변방인이 감정의 노예인가? 김대중이 대통령됐다고 한이 풀렸다니, 김대중이 집권하여 변방 호남을 위해 심화된 지역 양극화를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폈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평등한 구성원임에도 다르다.
서울과 영남에 사는 주민들은 결국 변방인의 세금으로 혜택을 누리고 사는 선민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마저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경부고속도로는 '72년에 4차선으로 개통되었는데(지금은 8차선이다), 호남고속도로는 30년 뒤에서야 호남에 누웠는데 아직도 4차선이다. 똑같이 세금내며 살고 있는데도 1세대 늦게 호남에 가로누운 것이다. 그것 뿐이랴, 산업시설은 편재는 어떻고... 이로 인해 1세대간 누적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가치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것이다. 즉 결국 호남의 '우리가 다르냐? 차별을 철폐하고 교정해 달라'는 헌법적 권리라는 외침을 한갓 감정적 배설로 폄하하고 심지어 인구로 또는 경제럭으로 약자이므로 그래서 지는 게임하지 말고 그냥 사이비 진보정당을 지지해 주라는 주문을 왼다.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구천에서 통곡한다.
계급사관을 잘못 이해한 한국좌파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사관, 즉 편재(偏在)한 생산시설이 지역문화를 규정했다(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뻔한 명제를 외면하는 형태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들먹이는 도식화된 인식틀로 한국의 특이한 병리적 정치지형을 재단하는 것도 흡사하다. 인식의 보편성이나 학문의 지향적 보편성이 개별성을 질식시키는 그것이라면 이미 보편성을 결하는 것임을 괴이한 한국 좌파들이 어찌 알겠는가?
한국좌파의 인식이 이 정도라면 한국 좌파는 100년이 지나도 결코 한 쪽 날개는커녕 깃털 한 개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한국사회, 요즘 헬조선이라 일컫는 양극화가 극심한 환경은 지역주의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고 있는 한국 좌파와 지지자들에게 배신의 칼날을 겨눈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