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증스런 한겨레

 

계약은 대등한 당사자끼리 하는 것이며, 자기부정을 내용으로 하는 노예계약은 사이비계약이다. 한일합방은 계약형식을 취했지만 계약의 파기를 원하는데도 해지할 수 없는, 자기부정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이므로, 원천무효인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민족적, 반시대적 계약이었다.

다른 동포를 질곡으로 빠뜨리고 일신의 영달만을 도모하며 호의호식한 친일매국노들이 오늘 대한민국 곳곳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친일부역배인 독재자 박정희는 노동자와 서민의 희생을 토대로 극한의 수출주도형 불균형 경제개발을 꾀하여, 대일·대미 종속적 자본주의를 창달, 오늘 날 극심한 양극화와 지역차별을 고착시켜 놓았다.

 

 

 

동의없는 동·서차별, 교정되지 않는 동·서격차

 

변방인(영남외 국민들, 촌락민)이 편파적인 지역개발을 언제 동의했던가? 동의한 적 없다. 만약, 그것을 추인했다손 치더라도 현재 지역균형과, 정당한 몫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의 교정을 외면하고 있다.

 

 

 

변방인들이 '우리가 다르냐!'라며 분균형의 교정, 정당한 몫에 대해 소리높여 외치는데도, '우리가 남이가'라며 똘똘뭉쳐 변방인의 질곡을 외면하며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악하고 있다.

 

 

 

벌써. 불공정한 상태가 반세기에 가깝다. 여기·지금 있었던 그 가여운 영혼들이 차별 속에서 거의 일생을 보낸 것이다. 같은 동포들을 등치고 이지메하는 것을 조장, 묵인하는 불의가 판치는 한국사회, 새삼스럽게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사회인지 되묻게 된다.

 

 

친일부역배와 영남패권주의는 쌍생아

 

친일부역배와 영남패권주의는 사상적 기반이 같다. 약자를 등치고 강자에게 빌붙어(사대주의, 기회주의),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극단적 이기주의) 전근대적, 반사회적, 반인륜적, 반민족적, 유사인종주의적 패륜이라는 점에서 쌍생아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파행적 자본주의를 심화시킨데 크게 기여한 반민족적, 반민주적인 기회주의자 김종인이 되려 큰소리를 치는 가치전도적이며 퇴영적인 모습이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는 야만적 언론환경과 사회야말로 극명한 영남패권주의의 생생한 증거이다.

가증스러운 한겨레, 오마이뉴스

 

이른바 진보매체라는 한겨레나 오마이뉴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친일부역배와 유사한 친노, 더민주당, 한국좌파를 편파적으로 지지하며 영남패권주의 척결를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의사친일부역배를 응원하므로써 반역사적이며 반민족적이며 반헌법적이며 반시대적이며 전근대적인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변방인은 오늘의 이 침묵과 방관을 분명히 기억하고 심판해야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은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를 향해 야권 연대를 거부한 것···이적행위···제2 유신시대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

 

DJ3남 더민주당 김홍걸 : 김홍걸이 DJ와 묶여 소비된다는 현실에서, DJ와 김홍걸의 정체성이 얼마나 겹치는 지 살펴 볼 일이다.

 

DJ가 숫적 열세를 온 몸으로 껴안으며 민주화투쟁을 하는 자세는 곧 강자앞에서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비현실적 낭만적 독립투사와 같은 것이다. 김홍걸의 왈왈거리며 협박하는 태도에서 마치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가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야권 연대 거부?

 

새누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된다는 명분이 정의일까? 그것을 앞세우는 배경에 숫적 열세는 고립과 핍박으로 연결된다는 패배주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변방인들의 반패권적 선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이다. 정상배들이 떳떳하게 제 몫을 제 자리로 갖다 놓자고 한 적이 있었던가? 왜 새누리당에 필적하기 위한 연대를 주장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우열이 극명하게 지속되는 경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친노에게 없었다. 정치가 이해 조정의 결정판인데도 변방인의 손을 잡기는커녕 냅다 발까지 걸고 넘어뜨리며 허허거리는 문재인에겐 정치의 치열함이 전혀 없다.

 

 

영남패권주의자의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

 

김홍걸이 DJ와 이희호의 프리미엄을 멋지게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세속적으로 최규선 게이트에 얽혀 DJ에게 누를 끼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지 못했다대북송금 특검을 난도질하고, 지지자들 등져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삼성재벌과 결탁한 참여정부를 떠받들며 짖어대는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의 모습을 지켜보며 DJ와 세월 무상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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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표!  (한국 좌파의 주문)


한국 좌파들의 지역주의 인식은 천박하다.  아니 천박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예를 들어 영남의 '우리가 남이가'식 패권주의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우리가 다르냐'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두 한데 묶어 없어져야 할 그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당신들의 외침은 일고의 가치없는 쓰레기야.  그런 고집 부리지 말고 내게 표를 줘... 우리는 이념정당이며 진보정당이야...라는 것이다.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계급을 발견한 것은 초기 자본주의의 극심한 피해의 참상에 기인한 바 컸다.  인간의 역사가 그랬듯 언제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있을 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물사관인 것이다.


좌파들이 익히 알고 있듯 유물사관의 대명제가 곧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이다.

익숙치 않은 독자를 위해 조금 부연설명한다면, 하부 생산시설이다든가 노동유형 등이 문화, 정치, 사회, 종교 등의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함수로 말하자면 하부구조는 독립변수이고 상부구조는 종속변수라는 것이다.

(필자는 유물사관 자체에 대해서 매우 어리석고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기초한 안출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상론은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지역주의의 본질 - 닥쳐!(한국 좌파의 주문)

한국사회에서의 양극화 중 대표적인 것(물적인 것에 한정함)이 도시와 촌락간의 양극화,  지역간의 격차 심화, 계층간의 격차 심화 등 해소해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촌락민과 호남민의 세금을 도시인과 영남인의 후생복지를 위해 썼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이 얘기를 모른 체하며 한국좌파들은 닥치고 표만! 하고 중얼거린다는 것이다.


생산시설의 편중이야 거론할 필요없이 명백하지만 혹시나 생각해낼 수 없는 독자가 있을 지 몰라 굳이 적자면, 수도권과 영남에 집중된 산업단지와 도로망이다.  특히 고속도로에 관해서 말하자면 영남에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누웠을 당시가 1972년이다.  호남에 가로질러 누웠을 때가 2000년 쯤이다.  그렇게 늦게 가르질러 누웠는데도 품질이나 규모면에서 경부고속도로보다 못하다.

이런 시간적인 갭으로 인해 경제학에서 말하는 산업연관효과나 지역의 문화, 사회, 경제 등의 격차는 말할 여지 없이 명백하게 격차를 유발했고 심화되어 이제 고착돼 버렸다.  

이리하여 변방인 중에서 이지메당하고 있는 대표 변방인 호남은 이것을 교정하라는 헌법적 권리 주장 (저항적 지역주의)을 하는데,  이에 대해 한국사회의 주류인 영남은 정당한 권리주장에 맞서 '우리가 남이가'하며 이대로 죽~~ 이라는 영남패권주의를 외치고 있는 터이다.

진보정당인 민노당이나 열린우리당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 추종자들은 정의로운 외침과 부정의한 외침 모두를 소음으로 다룬다.  그것이 곧 지역주의 양비론이다.


늙은 도령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변방민의 대표주자 호남인의 이러한 헌법적 권리주장을 소위 진보랍시고 진보정당이 외면하며 '닥치고 표!'라는 입장은 소외계층을 위한 정의당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진정 한국좌파에게 지역주의에 대한 본질이 보이지 않는건가?

K. 마르크스가 안출한 과학적 사회주의로 인해서 우리나라가 두 동강이 나서(6.25동란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리전) 지금껏 남북한이 소련이나 미국에게 갖다 바친 군자금이 얼마인가? 게다가 그로 인한 분단상황에서 북의 유일사상과 남의 유신체제가 쌍벽을 이뤄 주권자인 국민의 인권을 얼마나 유린했던가...

게다가 빌어먹을 유물사관의 안경을 장착한 한국좌파들은 귀족노조나 정규직의 눈치를 매양 보면서 흔하디 흔한 비정규적 문제나 지역간의 격차로 인해 빚어진 소외지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다.



계속 닥치고 표만!


정의당에 표를 달라하려면 '닥치고 표!'에서 '닥치고'를 일단 없앤 뒤 지역주의에 대한 명백한 의사를 밝히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면 진정한 진보주의 정당으로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고 지금껏 희미한 존재감만을 가진 소수정당에서 로켓처럼 분출하며 거대정당으로 용솟음할 것이다.  

거꾸로 '닥치고 표만!'을 되풀이한다면 쓰레기통에 표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한 유물사관과 계급사관을 탑재한 눈의 정의당에 표를 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손호철교수의 글(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34331.html) 읽으면서 든 생각들이다.  이른바 한국사회의 진보적 매체의 대명사라 불리우는 한겨레에 실린 글이라는 점, 그리고 좌파(?) - 필자는 손호철이 좌파인지 진보주의자인지 그 정체성을 가늠할 수 없다 - 지식인의 글이라는 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좌파 혹은 한겨레신문의 지향하는 바란 사회적 약자나 소수를 경시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현실을 극복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말 그들이 표방하고 있는 지향점과 글의 성격이나 내용이 부합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사이비인지 아닌 지 알게 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나는 이 제목을 '내가 살고 싶은 나라'라고 해야 된다고 보여진다. 왜나하면  글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나를 포함시켜서는 안 될 나라라는 점에서이다.  이유를 인용해가면서 적어 보도록 한다.

"아무리 틀린 생각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상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을 가거나 당이 해산당하지 않으며" (이하 인용문을 겹따옴표로 묶고 붉은글자로 처리함)

우리들의 일반의지가 객관화된 헌법 그리고 근대의 보편 이성에 희하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어떤 자유든 절대적으로 자유를 보장할 수가 없다.  자유의 본질상 그렇다.  예를 들어 손호철의 표현의 자유와 필자의 표현의 자유가 서로 경쟁하게 되면 그것을 그냥 방치해야 할까? 그렇게 되면 공동체의 효율적인 작동이 어렵게 된다. 기껏 인간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공동체의 존재의의가 훼손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가 은밀한 개인의 내면에 머무를 때야 외부에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자유이다.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 자유 여부가 문제될 수 없다.  외계와 간섭을 일으킬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가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세계와 연계되는 경우 - 현실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행동으로 옮겨진다거나 표현되어 외부와 관계맺는 상황 - 는 일정한 한계를 갖게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손호철이 염두에 둔 자유는 이런 류의 자유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손호철이 필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봉쇄하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곧 표현의 자유의 적이 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취지와 정면으로 상충하여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간단한 예를 보더라도 손호철이 쓴 '아무리 틀린 생각'이 헌법에 반한다거나 반민주적이라거나 파쇼적이라거나 인종차별주의적이라거나 자유의 본질적 훼손을 초래하는 것들은 용납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손호철의 생각은 옳지 않다.  이런 뻔한 상식을 왜 부정하며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손호철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식 예외주의를 거론하는 안목에는 정치지형이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날아야 된다는 이상적(?) 모델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색을 갖추기 위해  한국의 진보(?)정당을 진보로 자리매김하여 진보타령을 한다.

 

 한국 좌파가 진보인가?

  한국좌파에게 표를 나눔하지 않는 몰표의 대표지역인 영호남 지역주의의 배경과 맥락을 헤아릴 인식지평이 좌파에겐 결여돼 있다. 그러므로 좌파들은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없다.  지금의 지역주의를 없어져야만 한다고 주문을 외울 뿐이므로 원시시대의 샤만이 주술을 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없어질 리 없다.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당이 더민주당이고 노무현이었고 그 추종자들이다.

 영호남 지역주의가 한국사회의 첨예한 이해 대립이며 그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이 뭔가를 전혀 제시할 수 없는 좌파정당이 어떻게 진보정당이라는 것일까?  만약 한국의 망국적 지역주의를 타파할 방법이나 혹은 지역주의의 배경을 성찰할 수 없는 것이 진보라면 필자같은 진보주의자에겐 진보딱지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에 불과하다.  즉 한국좌파와 그들이 지지하는 좌파정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사이비 진보정당이라는 얘기이다.  필자는 손호철이나 한겨레신문이 자칭 진보라고 가식을 떠는 것이 굉장히 혐오스럽다.

 

우리가 남이가와 우리가 다르냐의 영호남 지역주의

 '우리가 남이가'로 패권적 지역주의를 관철하려는 영남 지역주의와, 적어도 30여년간 변방으로서 소외되고 낙후된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 지역주의를 구별할 수 없는 한국 좌파,  구천을 떠도는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발견한 계급사관이 한국 좌파를 망쳐 놓은 것이다.  한국좌파의 안목으로는 지역주의의 맥락이나 배경은 형체가 보이지 않는 바람같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예외주의란 곧 독재자 박정희의 정략적 차별정책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그 배경에 지역에 편중된 산업시설, 그에 수반되는 산업연관효과, 부수적인 사회, 문화 등의 차별... ,  이어지는 30여년에 걸쳐 심화 고착된 변방인의 의로운 외침!

 '우리가 다르냐 왜 우리 것을 서울이나 영남에 쏟아붓고 그것을 교정하지 않느냐'라는 호남민의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외침이 스며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며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무슨 진보란 말인가?  지식인으로서 자징 진보언론으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손호철의 친일부역배 유사의 기질 - 지역주의 양비론의 본질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지역주의, 그리고 최근 부상한 세대갈등이다.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의 압도적 우위하에 커지고 있는 세대갈등, 약화됐지만 사라지지 않은 민주 대 반민주, 그리고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진보 대 보수가 결합해 있는 구도이다.

 한국의 좌파들의 거의(최근 홍세화가 인식의 혁명적 변혁을 이루었으므로 거의를 한정어로 씀) 모든 공통적 인식이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과 같다.  즉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 그리고 변방인 호남인의 '우리가 다르냐? 평등하지 않느냐!'라는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양비론이다.  이른바 소수 약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한국좌파의 괴기한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는 인식지형은, 결국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아가 힘들게 족쇄를 차고 뛰고 있는 변방인을 냅다 걷어차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부역배가 동포를 등쳐먹던 꼴과 유사하다.

 

"... 지역주의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호남이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역사적 역할을 해온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야 한다. 김대중 정부를 통해 호남의 한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됐다. 또 인구 면에서 영남이 누리고 있는 압도적 우위를 생각할 때 지역주의 정치는 지는 게임이다.'

 손호철이 일본제국주의시대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지는 게임'이므로 분명 현실순응적 선택을 했을 것이고 강자에 빌못어 친일부역배로 천황폐를 모셨을 거라고 본다. 힘겹게 뛰는 변방인을 냅다 걷어차는 꼴은 곧 일제강점기에 동포를 팔아 호의호식한 친일부역배와 꼭 닮지 않았는가!  결국 한국좌파나 노무현은 호남 변방인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릴 이성이나 감성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호남의 한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한다.  호남 변방인이 감정의 노예인가?  김대중이 대통령됐다고 한이 풀렸다니, 김대중이 집권하여 변방 호남을 위해 심화된 지역 양극화를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폈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평등한 구성원임에도 다르다.
서울과 영남에 사는 주민들은 결국 변방인의 세금으로 혜택을 누리고 사는 선민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마저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경부고속도로는 '72년에 4차선으로 개통되었는데(지금은 8차선이다), 호남고속도로는 30년 뒤에서야 호남에 누웠는데 아직도 4차선이다.  똑같이 세금내며 살고 있는데도 1세대 늦게 호남에 가로누운  것이다.  그것 뿐이랴,  산업시설은 편재는 어떻고... 이로 인해 1세대간 누적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가치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것이다.  즉  결국 호남의 '우리가 다르냐? 차별을 철폐하고 교정해 달라'는 헌법적 권리라는 외침을 한갓 감정적 배설로 폄하하고 심지어 인구로 또는 경제럭으로 약자이므로 그래서 지는 게임하지 말고 그냥 사이비 진보정당을 지지해 주라는 주문을 왼다.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구천에서 통곡한다.

 계급사관을 잘못 이해한 한국좌파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사관, 즉 편재(偏在)한 생산시설이 지역문화를 규정했다(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뻔한 명제를 외면하는 형태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들먹이는 도식화된 인식틀로 한국의 특이한 병리적 정치지형을 재단하는 것도 흡사하다.  인식의 보편성이나 학문의 지향적 보편성이 개별성을 질식시키는 그것이라면 이미 보편성을 결하는 것임을 괴이한 한국 좌파들이 어찌 알겠는가?

 

 한국좌파의 인식이 이 정도라면 한국 좌파는 100년이 지나도 결코 한 쪽 날개는커녕 깃털 한 개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한국사회, 요즘 헬조선이라 일컫는 양극화가 극심한 환경은 지역주의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고 있는 한국 좌파와 지지자들에게 배신의 칼날을 겨눈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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