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타계한 G. Freud는 지금 껏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무의식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성적 측면에 방점을 찍는 심층심리학을 창안했다. 미답의 불가시적 심리 영역을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식·무의식적 행동의 저변에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반영이 행동이라는, 이른바 어떤 영역이든 약방의 감초처럼 심리가 개입할 단서를 마련하였다.

 

이 게시판에도 심리적 현상들이 즐비하다. 아니 전체가 심리의 반영이다. 게시판 배열, 조회수, 노출 필드, 배치, 추천, 댓글, 색상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글을 쓰는 것은 무의식도 아닌 의식의 반영이다. 즉 의식적 동기에 기인한 적극적 행동이다.  정치,사회적 행위도 당연히 어떤 심리에 기인한 (집단)행동이다.

 

 

심리적 접근은 분석대상을 보다 근원적으로 규명하는데 기여한다. 심리학이 아직 다른 인접과학보다 정량적이거나 실증적 측면에서 취약하지만서도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한 몫 해 내고 있음은 명백하다. 오히려 임상심리 측면에서는 과잉개입이 문제될 정도라고 보여진다.

 

정치판에서의 현안은 우리 문제이다. 따라서 문제해결 전략은 효율적이어야 한다.

 

 이 공간이 자유방임적인 최소규제를 택하고 또, 하루당 게시물을 제한하는 그것은 곧, 효율성을 염두에 둔 고민의 흔적이 명백하다.   때문에 이 공간에 제출되는 글은 이 아크로광장의 존재의의(의미)에 배치되지 않으며, 반사회적, 비이성적인 내용이 아닌 그 어떤 시도도 환영받아야 한다.  다름아닌 J. F. 사르트르의 글쓰기 자세와 다름없는 자세이다.

    

(그렇게 쓰여진 글이래도 아직 독자의 간택이란 지난한 관문이 남아있다.)

선악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선악과 인간의 등장 순서가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물음은 당연히 '인간있음 후에 선악있다'이다.  마치 '인간있고 국가있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었다',  즉 국가는 절대적 목적가치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도적,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충성 어쩌구 저쩌구 민족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런 투의 얘기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를, 인간의 목적인양 호도하는 것으로써,  국가와 이해관계가 큰 이익단체나 특정 개인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부르짖는 더러운 밥그릇 지키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그런 사회적 태도가 극성인데, 사람위에 있는 국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래왔다. 군국주의였던 일본의 패망, 전체주의적인 나찌 독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모두 유사하다.  얘를 들어 독재자였던 친일파 박정희를 찬양하고 유신체재를 미화, 숭배하는 영남인이 있다면 그 자는 박정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수혜를 받아왔음을 절감하고 그 밥그릇을 끝끝내 지켜야겠다는 더러운 - 남의 밥그릇에 담겨야 할 밥을 담았으므로 - 이기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 '선악과'의 선후도 당연히 인간이 먼저이고 선악과가 뒤에 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사람 인, 사이 간'의 조어로서 2인 이상의 이야기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선악이란 무엇인가?


가치판단이다. 가치판단이란 기준을 전제한다.  그 기준이란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기대나 되고자 준거로 삼은 꿈, 이상이나, 나라나 사회에서 지켜라고 요구하는 사회규범, 종교인들의 경전, 계약서 등이 되겠다.

그러므로 가치판단 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 못한 유아기나 미숙아는 선악의 분별을 할 수 없다.  물론 G. Freud나 G. Jung이 말하는 Libido같은 본능,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내장기준(default standard)은 선악의 관념으로 분화되기 전의 단순한 감정의 차원에 불과하다.

즉, 불에 데일 때 인간은 '앗! 뜨거!'라며 아픔을 느낀다. 이게 감각, 지각이며 아픔을 느낀 후에 그 아픔에 대한 평가인 싫다느니 기쁘다느니 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선하다 악하다의 차원의 도덕적 평가 이전의 단계이다.


즉, 평가주체로서의 자아형성 전의 가치판단은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사회적 평가처럼 책임(능력)없는 상태를 비난의 객체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선·악의 관념은 몰가치적 물리적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유주체가 관계맺는 양상과 준거 사이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므로 선·악은 곧 사유주체의 경향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성악설 성선설은 잘못 선정된 아젠다이다.


결국 갭(기준과 사유나 언동간의 벌어진 틈)해소의 경향성에 관한 물음인데, 갭을 어떻게 해소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갭해소양상도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성악·선설로 이분하여 한 쪽을 택하는 것은 보편적 인성론이 될 수 없다. 무의미한 아젠다인 것이다


즉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 웅변하듯 인성이 악이냐 선이냐는 사람이 보는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은 관점에서는 논제로서 잘못 선정된 것이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선, 악의 판단을 자아형성전의 유아(미성숙아)들의 언동을 평가대상으로 해서 가름하는 것은 어떤가?

그 관점의 논의는 실익이 없다.  선`악의 평가가 불가능한 즉 미분화된 존재들의 언동을 기성세대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떤 실익이 있을까?  아마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인성론에서의 필자는 선택은 성악설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어떤 개체가 성장과정에서 외계와 관계맺을 때 절대적으로 타인의 영역과 겹치는 경계, 더 나아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타인과의 간섭의 연속인 양상으로 점철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악설이 타당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형태의 인성론은 사람의 본질과 무관한 환경과 관련된 인성론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인성론으로서의 성선설, 성악설은 잘못 설정된 소모적인 아젠다일 뿐이다.


 2016130() 맑음 2016320() - 사색의 기록일

리비도와 예술

리비도 : G. Freud의 리비도보다 G. Jung의 리비도를 지칭함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동물은 우주의 평균온도보다 더 높은 체온을 가진다. 

항상성(Homeostatus)을 유지하며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잊은 채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DNA의 전달 숙주로 스스로를 제공한다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명유지를 위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 식자재를 흡입하고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수면이나 휴식을 취하고

에너지 소비과정에서 불필요해진 찌꺼기를 배설하고


이런 정도의 생명 활동은 생명체라면 다 하는 거다.


이런 정도의 생명활동으로 나날을 메워가는 사람들은 이성을 갖지 않은 짐승과 다름없다.


열심히 효율적으로 생명유지를 위한 수요(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잠재 에너지인 경제적 부)를 확보한 후

가능한 한 최대의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여 

    자유로운 시간을 자아 신장을 위해 노력을 쏟는 거다.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독특한 기쁨 - 진리 추구와 미의 추구.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죄악이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 환경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짐승처럼 살다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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