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은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를 향해 야권 연대를 거부한 것···이적행위···제2 유신시대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

 

DJ3남 더민주당 김홍걸 : 김홍걸이 DJ와 묶여 소비된다는 현실에서, DJ와 김홍걸의 정체성이 얼마나 겹치는 지 살펴 볼 일이다.

 

DJ가 숫적 열세를 온 몸으로 껴안으며 민주화투쟁을 하는 자세는 곧 강자앞에서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비현실적 낭만적 독립투사와 같은 것이다. 김홍걸의 왈왈거리며 협박하는 태도에서 마치 안중근 의사와 안준생의 데자뷰가 어른거리는 것은 왜일까?

 

 

야권 연대 거부?

 

새누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된다는 명분이 정의일까? 그것을 앞세우는 배경에 숫적 열세는 고립과 핍박으로 연결된다는 패배주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변방인들의 반패권적 선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이다. 정상배들이 떳떳하게 제 몫을 제 자리로 갖다 놓자고 한 적이 있었던가? 왜 새누리당에 필적하기 위한 연대를 주장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우열이 극명하게 지속되는 경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친노에게 없었다. 정치가 이해 조정의 결정판인데도 변방인의 손을 잡기는커녕 냅다 발까지 걸고 넘어뜨리며 허허거리는 문재인에겐 정치의 치열함이 전혀 없다.

 

 

영남패권주의자의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

 

김홍걸이 DJ와 이희호의 프리미엄을 멋지게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세속적으로 최규선 게이트에 얽혀 DJ에게 누를 끼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지 못했다대북송금 특검을 난도질하고, 지지자들 등져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삼성재벌과 결탁한 참여정부를 떠받들며 짖어대는 주구로 전락한 김홍걸의 모습을 지켜보며 DJ와 세월 무상을 생각한다.

선악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선악과 인간의 등장 순서가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물음은 당연히 '인간있음 후에 선악있다'이다.  마치 '인간있고 국가있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었다',  즉 국가는 절대적 목적가치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도적,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충성 어쩌구 저쩌구 민족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런 투의 얘기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를, 인간의 목적인양 호도하는 것으로써,  국가와 이해관계가 큰 이익단체나 특정 개인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부르짖는 더러운 밥그릇 지키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그런 사회적 태도가 극성인데, 사람위에 있는 국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래왔다. 군국주의였던 일본의 패망, 전체주의적인 나찌 독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모두 유사하다.  얘를 들어 독재자였던 친일파 박정희를 찬양하고 유신체재를 미화, 숭배하는 영남인이 있다면 그 자는 박정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수혜를 받아왔음을 절감하고 그 밥그릇을 끝끝내 지켜야겠다는 더러운 - 남의 밥그릇에 담겨야 할 밥을 담았으므로 - 이기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 '선악과'의 선후도 당연히 인간이 먼저이고 선악과가 뒤에 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사람 인, 사이 간'의 조어로서 2인 이상의 이야기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선악이란 무엇인가?


가치판단이다. 가치판단이란 기준을 전제한다.  그 기준이란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기대나 되고자 준거로 삼은 꿈, 이상이나, 나라나 사회에서 지켜라고 요구하는 사회규범, 종교인들의 경전, 계약서 등이 되겠다.

그러므로 가치판단 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 못한 유아기나 미숙아는 선악의 분별을 할 수 없다.  물론 G. Freud나 G. Jung이 말하는 Libido같은 본능,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내장기준(default standard)은 선악의 관념으로 분화되기 전의 단순한 감정의 차원에 불과하다.

즉, 불에 데일 때 인간은 '앗! 뜨거!'라며 아픔을 느낀다. 이게 감각, 지각이며 아픔을 느낀 후에 그 아픔에 대한 평가인 싫다느니 기쁘다느니 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선하다 악하다의 차원의 도덕적 평가 이전의 단계이다.


즉, 평가주체로서의 자아형성 전의 가치판단은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사회적 평가처럼 책임(능력)없는 상태를 비난의 객체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선·악의 관념은 몰가치적 물리적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유주체가 관계맺는 양상과 준거 사이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므로 선·악은 곧 사유주체의 경향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성악설 성선설은 잘못 선정된 아젠다이다.


결국 갭(기준과 사유나 언동간의 벌어진 틈)해소의 경향성에 관한 물음인데, 갭을 어떻게 해소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갭해소양상도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성악·선설로 이분하여 한 쪽을 택하는 것은 보편적 인성론이 될 수 없다. 무의미한 아젠다인 것이다


즉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 웅변하듯 인성이 악이냐 선이냐는 사람이 보는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은 관점에서는 논제로서 잘못 선정된 것이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선, 악의 판단을 자아형성전의 유아(미성숙아)들의 언동을 평가대상으로 해서 가름하는 것은 어떤가?

그 관점의 논의는 실익이 없다.  선`악의 평가가 불가능한 즉 미분화된 존재들의 언동을 기성세대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떤 실익이 있을까?  아마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인성론에서의 필자는 선택은 성악설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어떤 개체가 성장과정에서 외계와 관계맺을 때 절대적으로 타인의 영역과 겹치는 경계, 더 나아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타인과의 간섭의 연속인 양상으로 점철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악설이 타당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형태의 인성론은 사람의 본질과 무관한 환경과 관련된 인성론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인성론으로서의 성선설, 성악설은 잘못 설정된 소모적인 아젠다일 뿐이다.


 2016130() 맑음 2016320() - 사색의 기록일

  어떤 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마치 불가침의 절대성역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나온 어떤 저작이든 불가침의 신성을 부여해야 할까외부와 끊긴 내면에서 뒹구는 생각이라면 모를까 외부로 투사되면 벌써  어떤 의미를 갖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와 다르지 않은 층위의 권익과 충돌하여 신성을 앗길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타인의 명예라는 권익 위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장정일이 주장의 가치를 숫적으로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맥락이 같고 사회적 합의로 명문화 돼 있으며, 문명국의 일반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국어를 제대로 떼지 못한 작가들이 수두룩하지만, 문화권력을 얼마간 갖고 있는 작가라면 그 사회적 책임의 무게가 어떻다는 것을 치열하게 깨달아야 한다.

 

  책읽는 소감을 게시하는 것은 하나의 소통의 수단이다. 따라서 책읽기는 신이 읽는 것처럼 완벽한 책읽기를 이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한정된 능력만을 가진 인간인 까닭으로 볼 수 있는 것만큼만을 읽고 쓸수 있음 또한 자명하다.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산한 후, 그 책은 2013년이라는 특정시각의 박유하의 분신이 되어 독자적 존재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 책(이하 녀석이라 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빼면 이미 그 녀석이 아니며, 그 녀석의 머리카락 한 올을 그 녀석이라고 할 수 없음 역시 당연하다. 즉 제국의 위안부를 평가할 때,  체계적 독해에 실패하고 일부만 쳐다보는 식의 평가는 사회적 공해이다.

 

  저자 박유하는 줄곧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신속한 해결을 바라며 모든 시도가 선의임을 말하지만 그 녀석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균열과 파탄된 사상적 기반위에서 횡설수설하며 아픈 상처에 소금뿌리기, 편파적 편들기, 본질 비틀기가 나의 실체라고 ...

 

유감스럽게도 볼 수 있는 자만이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시대정신인반영남패권주의.c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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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 개념과 그 척결의 당위성

시민25


영남패권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대소집단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등 권력을 독점하여, 과도하고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환경조건을 구조화 시킴과 동시에, 소외지역민을 발생시키고 다시 그들을 사회문화적으로 차별하는 대한민국의 비틀린 정치경제문화적 패권 구조와 그 체제를 기리킨다.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여 사회갈등을 조장, 견지하려는 이들 세력들을 '영남패권' 혹은 영남패권주의자라 규정하며, 그 양상에 따라 영남정치패권, 영남경제패권, 영남언론패권, 영남문화패권 등의 하위개념으로 분류하며, 그 관계에 따라 영남패권을 능동적으로 관철하여 부당한 수혜를 누리는 영남패권추동세력, 패권정서하에서 수동적으로 수혜를 누리는 영남패권동조세력, 이를 묵인하며 방관하는 영남패권주변세력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패권세력에 의한 수탈적 지역주의의 대척점에 저항적 지역주의가 있다.

그리고 영남패권을 지탱하는 유무형의 체계를 통틀어 영남패권주의 혹은 영남패권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영남패권주의 해소는 시대정신이며 당위

  영남패권주의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했을 때 패배주의에 지배되어 현실을 수용하고 기회주의적으로 강한 자에게 빌붙어 동포를 팔아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인 친일부역배들의 이데올로기와 질적으로 흡사하며 사대주의로 귀결된다.

친일부역배의 의식과 궤를 같이하는 영남패권주의는 비인도적이며 반민족이며 반민주적이며 반역사적이며 불합리이며 비효율적이며 반헌법적인 심각한 병폐이다.

우리 일상을 옥죄는 이러한 전근대적이며 비인도적인 병폐들을 발본색원함이 없이는 지역화합, 민족화합, 민족자주는커녕, 인간으로서 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으로의 성장조차 바랄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지향적으로 지역간 계층간의 부당한 차별없는 천부적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과, 의존적인 공동체구성원으로서 평등이 적극적으로 시급히 확보되어 공정한 경쟁의 틀이 정착되어야 함은 우리 시대의 당위이며 시대정신이다.

1. 호남지역에 존재하는 영남패권동조세력, 비호남지역에 존재하는 반영남패권주의자, 비영·호남의 영남패권주변세력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라는 용어를 피하고 지역차별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이유

1) 영남이라는 가해 주체를 뺌으로써, 차별하는 지역과 차별 받는 지역이 어디인지 애매하게 하려는 의도.

2) 차별이란 용어는 힘의 우열의 소재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쌍방간에 상대를 차별하는 상태까지 포함하는 용어로서 어느 한 쪽의 과오가 아니라 쌍방 과실로 다루려는 의도. 이리하여 피해를 당한 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거나 그 진상을 밝히는 데 장애를 된다. 힘의 차이가 없는 대등한 쌍방간이므로 피해를 입어도 피해가 아니고, 피해가 있다면 순전히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크기로서의 피해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피해사실을 인정받지 못해 그 피해는 그저 피해자의 피해'의식'이 되고 오히려 그것은 약자의 치졸한 하소연쯤으로 희석시키려는 의도.

3) '차별이란 그저 인간사에 있기 마련인 불가피한 필요악 수준이 아니겠느냐' 하는 뉘앙스를 담아,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려는 의도.

4) 패권이라는 월등하고 독점적인 힘의 집합체라는 뜻을 뺌으로써, 한 지역(영남)이 다른 모든 지역에 대해 누리는 지배자의 위치, 억압의 위치를 슬며시 은폐시키려는 의도.

3. 지역주의, 지역감정(정서), 지역구도등의 개념과의 구별

지역주의 : 이기적 인간들이 천혜의 자연적 풍토위에 군거하여 발현하는 제 양상. 이해관계가 얽혀 획일적이지 않다.

지역감정(정서) : 풍토및 지연과 얽혀 발현하는 연고자들의 감정이나 정서로 다양한 풍토를 반영한다.

지역구도 : 지역단위들의 어떤 양상을 서술하기 위한 가치맹목적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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