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한 줄로 10명정도 사람을 세워놓고 어떤 사진의 정보를 귓속말로 전달한다고 할 때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된 이미지가 최초의 이미지와 부합될까?

* 부합(符合) : 쪼개진 대나무가 서로 아귀가 맞듯 일치하여 틀림없는 상태

 

과학 분해능의 한계와 인간의 시각의 한계로 인해 실제 전자의 움직임을 본 사람이 없다. 오늘날의 원자 구조는 그냥 추정에 의한 모형일 뿐이다. 그것도 확률적 추정이다.

 

실증과학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즐겨쓰는 통계의 한계도 존재한다전수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란 오늘과 같이 전산으로 자료가 취합되고 관리되는 국한된 경우에 한정된다비용과 자료확보의 효율성 측면과도 얽힌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마저도 전경과 배경(형태심리학적 용어) 미분화 상태는 그저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비친 풍경에 불과하고 그것을 자료로 해 정보화할 수 없다.

 

전경과 배경이 지각된 대상마저 인식과정에서 주관에 의해 제약되고 호오에 따라 윤색된다. 그뿐이 아니다. 외부로 표출될 때 언어의 한계와 언어능력의 한계에 따라 또 뒤틀릴 수 있다.

 

표본조사를 통한 통계자료는 어떤 질문을 통한 누구의 응답인가에 따라 신뢰성이 달라진다는 한계만 아니라, 제공된 통계자료는 취급자의 의도에 따라 또 한번 뒤틀릴 여지가 있다.

 

그뿐이 아니다. 소통과정에서 또 한번 가공되어진다. 정보를 수용하는 주체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 지를 결단한다.

 

다양성을 포착하는 우리 또한 호오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그 입장만을 선으로 나머지를 악으로 배타적으로 쳐낸다.

 

그래서 인간세상엔 다양성이 존재하고 의견이 대립하는 것이다.

 

 

독선과 자기부정의 식민지근대화론

 

한국사는 우리 민족의 안목으로 보는 과거에 대한 성찰이다.  역사는 몰가치적 과학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해서 미래를 향해 투사하는 과거의 우리(조상)로부터 미래의 우리(후손)에게의 소통을 위한 가교이다.  우리가 아닌 일본의 시각이 들어앉은 역사란 이미 한국사일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을 펴는 안병직류는 마치 자신의 인식이나 가치관이 절대선인 것처럼 주장한다. 시대적 한계속에 갇힌 통계나 기억의 한계라는 불완전성에 방점을 찍고 역사를 재단하는 편파적 관점, 한국인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반민족적 매국사학... 그것이 곧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정치판의 안병직류

 

정치판에서 자기부정의 행태,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는 자해행위자가 곧 노빠류 이다.

 

우리의 일반의지인 헌법, 근대이성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정치판의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일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권력을 상하, 좌우, 전후 찢을 수 있는 한 분리시켜 놓았다. 권력을 쥔 자들을 믿지 말라는 우리(과거의 인류의 조상들)들의 산 경험이다. 그런데 이른바 빠돌이·빠순이들이 있다.

 

빠돌이·빠순이란 자신의 영혼을 팔아 정상모리배의 수족이 되었거나 시체에 몰려드는 쇠파리와 같은 존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부정·자해행위를 감수하는 영혼을 팔아넘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고종석 등이 한 때 노빠였다. 언제나 비판적 시각으로 감시자 역할에 충실해야 함에도 자기부정을 하다가 곧 정신을 되찾았다.

 


아직도 자해행위를 하고 있는 빠돌이·빠순이가 있을 것이다. 커밍아웃 해서 자해행위를 왜 계속하는지 말씀해 보시라?

 


황태연 교수가 안출한 영남패권주의라는 개념이 2000년 초엽에 지역주의와 얽혀 점진적으로 거론되는 차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는 시민입니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개념이나 그 내용은 여기 링크를 클릭하시면 ebook을 다운로드하실 수 있으니 활용하시고 널리 유통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기에서 거론하는 영남패권(주의)이라는 개념은 위에 언급한 ebook의 개념으로 지칭해서 씀을 밝힙니다)

이 광장 사이트의 영남패권주의 관련 글들을 일별해 보면 반영남패권주의,  곧 영남패권 반대라는 것을 한갓 주장으로 인식하는 듯한 뉘앙스로 비춰집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의지 즉 나 개인(특수)의지가 아닌 우리의 의지(일반의지)가 객관화된 것이 헌법입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근대사회의 시대정신인 근대이성은 어김없이 무능하고 폐쇄적인 조직깡패 유사의 이씨조선 500년을 초월하여 헌법에 내장되었습니다.


대한민국호가 진수된 이래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겼습니다만, 이른바 규모의 경제라는 경제학적 문제와 얽힌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계와 후발주자로서의 열세로 인한 근대화 과정에서의 수출주도형 불균형 경제성장정책의 채택에 뒤얽혀, 친일부역배였던 독재자 박정희의 정권유지차원의 편파적 지역개발이 가세해 경부축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진행되어 그 폐해가 고착, 심화되고 말았습니다.


정권연장에 혈안이 된 박정희의 편파적 지역개발의 사상적 기초엔 이씨조선의 사대주의라는 패배주의적 심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자에게 기대는 기회주의가 선명히 묻어 있으며, 소수약자를 짓밟고 강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이즘, 우리는 다르다라는 선민주의와 유사인종주의가 물들어 있습니다.   헌법과 상충하는  친일부역배 박정희의 혐오스러운  반헌법적, 반민주적, 반민족적, 반역사적, 전근대적, 비인도적 죄악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는 오늘 날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질곡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도로, 항만, 산업시설  등 물적 기반, 즉 사회간접자본의 편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무려 30여년의 갭으로 건설된 고속도로입니다.  아직도 규모에 있어서 우열의 확연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 산업기지가 들어서면 그에 따르는 팽창적 연관효과가 수반되며 그 경제적 가치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지역차별적 정책으로 야기된 지역적 우열에,  사회적 자본의 우열이 수반함은 불문가지입니다.  변방인의 열악한 사회적 자본은 변방지역의 도시로의 인구유출을 가속화하고, 우세한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등에 업은 패권지역은 더 더욱 패권을 공고히 하기에 이르릅니다.  오늘 날의  대구광역시의 정체, 광주광역시의 상대적 번창의 배경입니다.


그리하여 지역간의 불균형은 심화돼 왔습니다.  이 현실은 단순한 균형정책이나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절대 교정될 수 없습니다.


서울이나 수도권 그리고 지방의 중심도시의 번창이라는 도시화,  그 이면인 촌락의 공동화, 

인위적으로 조장, 고착된 지역차별의 대표적 우열지역인 영, 호남......


바꿔 말하자면,  서울에만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은 촌부에겐 정확히 그림의 떡입니다.  호남에서 태어났다는 선택할 수도 없는 운명적 상황이,  그리고 영남에서 출생했다는 객관적 상황,  생애 시작부터 확연하게 갈리는 불공정한 경쟁시스템...


세금에서 변방인이 덜 납부하는 혜택을 보기라도 했나요?  지금 세금을 평등하게 납부한다는 사실조차도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역설까지 성립합니다. 

서울(혹은 도시)이나 영남에 산다는 자체가 곧 촌락이나 호남사람들의 세금의 혜택을 입고 산다는 이 불편한 현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한국사회의 자화상입니다.  변방인은 도시사람과 영남사람을 위해서 멍에를 지고 족쇄를 차고 살아야 된다고 헌법에 씌여 있나요?


 영남패권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단순한 주장으로 거론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당한 권리주장입니다.  법률적 차원의 권리주장이 아니라 헌법적 차원의 권리주장입니다. 헌법 이전의 자연법적 평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를 얘기하는데 그것을 부정하거나 호도하는 것은 몰상식이요, 반헌법적이요, 비민주적이며, 반이성적, 반역사적인, 비인도적인, 부도덕한 죄악입니다.


'우리가 남이냐'의 영남패권주의,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지역주의를 구별하지 않고 한갓 소음으로만 여기는 좌파와 노무현및 추종자들과 뻔한 상식적인 얘기에 귀막고 입닫고 있는 지식인들은 개혁세력이 아니라 몰상식하고 부도덕한 파렴치범들이며 동포들을 팔아 호의호식한 친일부역배와 흡사한 매국노들입니다.


영남패권주의를 척결하자는 얘기는 주장이 아니라 권리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정서적, 감정적 차원의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정치적 아젠다에 불과한 얘기가 아닙니다.

사회적 지원관계에 의한 이용가능 한 자원으로서의 사회적 자본


Coleman(1990)은 한 개인이 그 안에 참여함으로써 특정하게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사회구조 혹은 사회적 관계의 한 측면의  사회적 자본을 정의하였다.

Nahapiet과 Ghoshal(1998)은 개인 또는 사회적 단위가 소유한 관계의 네트워크로부터 이끌어내어 이용 가능한 실제적으로 잠재적인 자원의 합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

인격이란 한 사람의 일관되고 광범위하며 자연스러운 판단과 행동, 정서반응의 총합이다.   인격장애의 경우 인격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자신을 구성하는 본질의 일부이기에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아에 잘 어울린다고 여긴다.  즉 자신이 타인에게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불편해 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치료를 통해 변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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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생리적 계급장이나 사회적 계급장을 떼고 얘기한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보편성을 결하면 이미 학문이 아니다.

정치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한국정치를 견인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적어도 실효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손호철(최장집도 마찬가지) 은 

낯부끄러운 줄 모른다.


스스로의 인식지평이 얼마나 문제있는 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좌파들의 긍정적인 전환을 기대하는 필자로서는 그 인식지평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개별성, 특수성)


최장집이나 손호철이나 필자가 다른 생각, 다른 성장환경, 다른 지식, 다른 경험을 가졌듯 

특정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내는 존재들은 이미 특정 물리적 공간(지역)과 얽혀 매우 독창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성격과 사회적 태도가 형성된다.


보편성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공통된 특성의 보편성을 가진다. 또한 물리적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특성도 공유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손호철은 좋아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이 있니 없니 이런거 따지기 전에

그래서 리영희의 '새는 좌우로 난다'라는 구호를 들먹이며 한국사회도 좌우로 날아야 한다고 외친다.

손호철의 눈엔 이 세상의 정치지형이 오로지 손호철 손에 쥐어진 좌우(진보 VS. 보수)로만 배열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뭐하러 두꺼운 소통채널인 공적 공간을 소비할까?  차라리 사회더러 알아서 정렬하여 내 좌우(빵틀)에 들어가 앉으시지!라고 주문을 외우면 될게 아닌가?!


학문이란 곧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일정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보편적인 좌우구도의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보편성을 잃은 한국의 정치지형


그렇다면 인간사회의 보편성을 뒤흔들고 있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지, 혹은 손호철식 글로벌 스탠더드가 일반적 도구가 아닌 특수한 도구이고 오히려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이 일반적인지를 가려내야 학자적 자질이 있고 학자로서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손호철은 최장집에 비해 엉터리다.  실천적 학문을 거론하고 있지만 천박한 학문적 기초로 인해 혐오스럽기 까지 하다.


결국 먹물있는 책상맡에 앉아 진지한 성찰을 결한 채  유학가서(?) 배운 거,  그것을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손호철의 꿈 - 오로지 진보정당의 융성


왜 그런 학문적 자세가 되었을까?  손호철의 자아준거는 오직 (사이비)진보정당의 융성에 맞춰져 있다. 그리하여 좌우가 경쟁하여 사회적 질을 제고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지형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정치지형을 꿈꾼다면 왜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이 글로벌스탠더드에 귀납되지 않고 지지부진하며 반세기를 훌쩍 넘어가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되지 않을까?  필자가 정치학자라면 정말 날밤을 새우며 그 원인규명과 해결가능 여부 해법에 대해서 이미 끝장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호철은  유물사관이라는 더러워진 필터를 낀 눈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인본주의자 K.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손호철에게 정상적으로 탑재되어 한국의 정치지형을 인식한 것이 이른바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면, 난 주저없이 마르크스를 저주하겠다.  그게 아니고 장착과정에서 잘못된 것이라면, 손호철은 마르크스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라.


정말 손호철이 진보정당의 융성을 바라기는 할까?  그렇다면 지지기반의 외연 확장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지역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해법을 강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좌파의 발목을 잡아 희미한 존재감에 머물게 하는 직접적인 장애는 손호철류의 사이비 진보 좌파, 강단좌파의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외연확장의 근본적인 방법을 외면한단 말인가? 


이른바 좌파정당인 정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소외계층을 위하는 것이고 사회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까?


손호철이 읽어야 할 책 - 김욱의 '아주 낯선 상식',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


손호철은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하다. 즉, 근대이성의 객관화인 우리들의 일반의지인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숙지하지 못하거나 상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떻게 해서 대학교수가 평균적인 사회인이 갖춰야 할 상식마저 장착하지 못했을까?  진정 궁금해진다.  손호철의 영혼이 불쌍할 뿐이다.


위의 권장도서 중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다운) 책이다.  이 책을 링크한다.


선악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선악과 인간의 등장 순서가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물음은 당연히 '인간있음 후에 선악있다'이다.  마치 '인간있고 국가있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었다',  즉 국가는 절대적 목적가치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도적,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충성 어쩌구 저쩌구 민족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런 투의 얘기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를, 인간의 목적인양 호도하는 것으로써,  국가와 이해관계가 큰 이익단체나 특정 개인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부르짖는 더러운 밥그릇 지키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그런 사회적 태도가 극성인데, 사람위에 있는 국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래왔다. 군국주의였던 일본의 패망, 전체주의적인 나찌 독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모두 유사하다.  얘를 들어 독재자였던 친일파 박정희를 찬양하고 유신체재를 미화, 숭배하는 영남인이 있다면 그 자는 박정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수혜를 받아왔음을 절감하고 그 밥그릇을 끝끝내 지켜야겠다는 더러운 - 남의 밥그릇에 담겨야 할 밥을 담았으므로 - 이기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기독교 경전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 '선악과'의 선후도 당연히 인간이 먼저이고 선악과가 뒤에 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래 '사람 인, 사이 간'의 조어로서 2인 이상의 이야기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선악이란 무엇인가?


가치판단이다. 가치판단이란 기준을 전제한다.  그 기준이란 개인적으로 희망하는 기대나 되고자 준거로 삼은 꿈, 이상이나, 나라나 사회에서 지켜라고 요구하는 사회규범, 종교인들의 경전, 계약서 등이 되겠다.

그러므로 가치판단 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 못한 유아기나 미숙아는 선악의 분별을 할 수 없다.  물론 G. Freud나 G. Jung이 말하는 Libido같은 본능,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내장기준(default standard)은 선악의 관념으로 분화되기 전의 단순한 감정의 차원에 불과하다.

즉, 불에 데일 때 인간은 '앗! 뜨거!'라며 아픔을 느낀다. 이게 감각, 지각이며 아픔을 느낀 후에 그 아픔에 대한 평가인 싫다느니 기쁘다느니 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선하다 악하다의 차원의 도덕적 평가 이전의 단계이다.


즉, 평가주체로서의 자아형성 전의 가치판단은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사회적 평가처럼 책임(능력)없는 상태를 비난의 객체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선·악의 관념은 몰가치적 물리적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유주체가 관계맺는 양상과 준거 사이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므로 선·악은 곧 사유주체의 경향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성악설 성선설은 잘못 선정된 아젠다이다.


결국 갭(기준과 사유나 언동간의 벌어진 틈)해소의 경향성에 관한 물음인데, 갭을 어떻게 해소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갭해소양상도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성악·선설로 이분하여 한 쪽을 택하는 것은 보편적 인성론이 될 수 없다. 무의미한 아젠다인 것이다


즉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 웅변하듯 인성이 악이냐 선이냐는 사람이 보는 안목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은 관점에서는 논제로서 잘못 선정된 것이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선, 악의 판단을 자아형성전의 유아(미성숙아)들의 언동을 평가대상으로 해서 가름하는 것은 어떤가?

그 관점의 논의는 실익이 없다.  선`악의 평가가 불가능한 즉 미분화된 존재들의 언동을 기성세대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떤 실익이 있을까?  아마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인성론에서의 필자는 선택은 성악설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어떤 개체가 성장과정에서 외계와 관계맺을 때 절대적으로 타인의 영역과 겹치는 경계, 더 나아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타인과의 간섭의 연속인 양상으로 점철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악설이 타당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형태의 인성론은 사람의 본질과 무관한 환경과 관련된 인성론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인성론으로서의 성선설, 성악설은 잘못 설정된 소모적인 아젠다일 뿐이다.


 2016130() 맑음 2016320() - 사색의 기록일

리비도와 예술

리비도 : G. Freud의 리비도보다 G. Jung의 리비도를 지칭함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동물은 우주의 평균온도보다 더 높은 체온을 가진다. 

항상성(Homeostatus)을 유지하며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잊은 채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DNA의 전달 숙주로 스스로를 제공한다는 것 말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명유지를 위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 식자재를 흡입하고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수면이나 휴식을 취하고

에너지 소비과정에서 불필요해진 찌꺼기를 배설하고


이런 정도의 생명 활동은 생명체라면 다 하는 거다.


이런 정도의 생명활동으로 나날을 메워가는 사람들은 이성을 갖지 않은 짐승과 다름없다.


열심히 효율적으로 생명유지를 위한 수요(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잠재 에너지인 경제적 부)를 확보한 후

가능한 한 최대의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여 

    자유로운 시간을 자아 신장을 위해 노력을 쏟는 거다.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독특한 기쁨 - 진리 추구와 미의 추구.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죄악이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 환경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짐승처럼 살다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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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표!  (한국 좌파의 주문)


한국 좌파들의 지역주의 인식은 천박하다.  아니 천박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예를 들어 영남의 '우리가 남이가'식 패권주의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우리가 다르냐'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두 한데 묶어 없어져야 할 그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당신들의 외침은 일고의 가치없는 쓰레기야.  그런 고집 부리지 말고 내게 표를 줘... 우리는 이념정당이며 진보정당이야...라는 것이다.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계급을 발견한 것은 초기 자본주의의 극심한 피해의 참상에 기인한 바 컸다.  인간의 역사가 그랬듯 언제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있을 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물사관인 것이다.


좌파들이 익히 알고 있듯 유물사관의 대명제가 곧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이다.

익숙치 않은 독자를 위해 조금 부연설명한다면, 하부 생산시설이다든가 노동유형 등이 문화, 정치, 사회, 종교 등의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함수로 말하자면 하부구조는 독립변수이고 상부구조는 종속변수라는 것이다.

(필자는 유물사관 자체에 대해서 매우 어리석고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기초한 안출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상론은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지역주의의 본질 - 닥쳐!(한국 좌파의 주문)

한국사회에서의 양극화 중 대표적인 것(물적인 것에 한정함)이 도시와 촌락간의 양극화,  지역간의 격차 심화, 계층간의 격차 심화 등 해소해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촌락민과 호남민의 세금을 도시인과 영남인의 후생복지를 위해 썼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이 얘기를 모른 체하며 한국좌파들은 닥치고 표만! 하고 중얼거린다는 것이다.


생산시설의 편중이야 거론할 필요없이 명백하지만 혹시나 생각해낼 수 없는 독자가 있을 지 몰라 굳이 적자면, 수도권과 영남에 집중된 산업단지와 도로망이다.  특히 고속도로에 관해서 말하자면 영남에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누웠을 당시가 1972년이다.  호남에 가로질러 누웠을 때가 2000년 쯤이다.  그렇게 늦게 가르질러 누웠는데도 품질이나 규모면에서 경부고속도로보다 못하다.

이런 시간적인 갭으로 인해 경제학에서 말하는 산업연관효과나 지역의 문화, 사회, 경제 등의 격차는 말할 여지 없이 명백하게 격차를 유발했고 심화되어 이제 고착돼 버렸다.  

이리하여 변방인 중에서 이지메당하고 있는 대표 변방인 호남은 이것을 교정하라는 헌법적 권리 주장 (저항적 지역주의)을 하는데,  이에 대해 한국사회의 주류인 영남은 정당한 권리주장에 맞서 '우리가 남이가'하며 이대로 죽~~ 이라는 영남패권주의를 외치고 있는 터이다.

진보정당인 민노당이나 열린우리당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 추종자들은 정의로운 외침과 부정의한 외침 모두를 소음으로 다룬다.  그것이 곧 지역주의 양비론이다.


늙은 도령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변방민의 대표주자 호남인의 이러한 헌법적 권리주장을 소위 진보랍시고 진보정당이 외면하며 '닥치고 표!'라는 입장은 소외계층을 위한 정의당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진정 한국좌파에게 지역주의에 대한 본질이 보이지 않는건가?

K. 마르크스가 안출한 과학적 사회주의로 인해서 우리나라가 두 동강이 나서(6.25동란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리전) 지금껏 남북한이 소련이나 미국에게 갖다 바친 군자금이 얼마인가? 게다가 그로 인한 분단상황에서 북의 유일사상과 남의 유신체제가 쌍벽을 이뤄 주권자인 국민의 인권을 얼마나 유린했던가...

게다가 빌어먹을 유물사관의 안경을 장착한 한국좌파들은 귀족노조나 정규직의 눈치를 매양 보면서 흔하디 흔한 비정규적 문제나 지역간의 격차로 인해 빚어진 소외지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다.



계속 닥치고 표만!


정의당에 표를 달라하려면 '닥치고 표!'에서 '닥치고'를 일단 없앤 뒤 지역주의에 대한 명백한 의사를 밝히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면 진정한 진보주의 정당으로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고 지금껏 희미한 존재감만을 가진 소수정당에서 로켓처럼 분출하며 거대정당으로 용솟음할 것이다.  

거꾸로 '닥치고 표만!'을 되풀이한다면 쓰레기통에 표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한 유물사관과 계급사관을 탑재한 눈의 정의당에 표를 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자아의 확장

시간적 확장 : 과거의 나(기억, 조상) - 현재의 나 - 미래의 나(기대, 후손)

공간적 확장 : 나-> 우리-> 민족 -> 인류 -> 생명



불공정한 경쟁의 룰이 장착된 사회를 방치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다.

왜냐하면 '나'들이 서로 경쟁하는데 누구에게 족쇄차고 뛰라거나 자전거타고 편히 가라거나 하는 것이 공정한 경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내가 자전거에 올라탔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내가 족쇄차고 뛸 경우도 있다.  이것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동기가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배경이라면 누군가가 난 시행착오로 스스로 겪은 다음 대답해 줄게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지위를 영속적으로 고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동기가 되지 않고도 우리는 각자가 견줄 바 없이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라는 것으로부터

누가 우대받거나 누가 천대받는 것 자체가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  이렇게 지극히 간단한데도 그것을 발견한지가 겨우 250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귀중한 교훈임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동 장착돼 있지도 않아서 선민의식이나 열등감에 빠져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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