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를 팔아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무리들이 일제 강점기의 친일 부역배이다.

 

 

이들은 거시적으로 존엄한 인간을 차별하며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몰락을 헤아리지 못하고

 

강자앞에서 현실을 수용하는 패배주의적 특성을 지닌 기회주의적 인간 군상들이다.

 

 

이들의 대척점에 독립투사들이 있다.

 

 

우리는 친일부역배를 혐오한다. 왜냐하면 기회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이며 현실순응적이며 사대주의적이며 서열주의 등 갖가지 전근대성이 착종된 때문이다. 그리고 독립투사와 친일부역배가 같지 않고 다르다는 시비지심이 작동한다. 필자의 얘기도 이런 맥락임은 물론이다.

 

 

이렇게 다른 것을 다르게 본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우리가 정작 친일부역배를 혐오하면서도 스스로 친일부역배와 같은 선택, 행태를 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바로 한국사회의 교육의 한계로 빚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 대표적 지역적 특징 하나가 영·호남 지역격차이다.

 

 

이 지역격차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과 부산을 잇는 영남 퍼주기식 수출주도형 불균형적 경제성장정책의 결과물이다. 이 파행적 경제성장 추진 과정에서 호남이나 영남외의 변방인들의 동의를 얻은 바 없다.

 

따라서 경제학적 차원의 일시적 집중 경제정책이었다면 늦지않게 그 교정이 뒤따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부역배 독재자 박정희와 경제참모들의 이러한 불균형 경제성정정책은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의 일환이기도 했으므로 그것을 되돌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결국 호남이나 변방인들의 희생 위에서 오늘의 영남의 번영이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이 현재의 질곡의 방치가 친일부역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내 간파할 수 있다. 변방인들을 짓밟아 영남민의 영달을 취한 그것, 곧 기회주의적이며 비인도적인 친일부역배의 특성과 다르지 않다.

 

 

기득권을 유지 고수하려는 영남인들의 수구적 투표행태나 근성을 묵인하고, 정당한 몫을 되돌리라는 호남, 혹은 변방인들의 외침을 외면하는 입장을 지역주의 양비론이라고 한다.

 

 

노무현이나 문재인 부류들, 한국의 좌파들이 그런 입장에 서 있다. 즉 친일부역배와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역주의 양비론을 지지하는 것은 다름아닌 친일부역배를 찬양하는 일과 다름 없는 것이다.

 

 

제대로 역사의식을 갖고 있거나 시민의식을 가진 자가 절대 지역주의 양비론을 지지할 수 없다.

 

노빠들은 그래서 반민족적, 반역사적, 반헌법적, 전근대적 부류로서 우리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

 

또한 범민주세력의 바이러스인 것이다.

 

물리적 공간인 호남, 그리고 그 곳과 연고를 가진 호남인

이 둘이 결합되면 소위 호남 변방인이 된다.


한국에서 파행적 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60년대 이후 

규모의 경제로 인한 수출주도형 대미,대일 의존적 영남 퍼주기식 경부축 경제성장정책이 선택되어졌다.

   거기다 친일부역배 독재자 박정희의 꼼수로 인한 장기집권의 일환인 정략적 지역소외가 가세해


급기야 지역격차는 심화되고 고착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영,호남간 대립은 일상화되었는데...  곧 망국적 지역주의라고들 한다.

'우리가 남이가,  기왕 얻은 거 그대로 지켜내야 한다'는 영남 지역주의와

'우리가 다르냐! 왜 정당한 몫을 되돌리지 않느냐?! '라는 호남 지역주의의 대립을


한국사회는 지역감정, 지역정서, 지역차별, 망국적 지역주의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영호남 대립을 단순한 감정이니 정서니  혹은 정치적 색깔로만 다루는 것은 엉터리 역사인식이다.


정치외, 경제, 사회, 문화, 언론, 지식과 얽힌 복합적 관계이며 일상적 이슈이다.


이러한 한국사회에서 변방인 호남인들은 평상시에도 불리한 사회간접자본들 때문에 반 세기 넘게 불이익을 강요당하며

호남 몫이 영남에 투입돼 파행적으로 고착된 탓에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즉 호남에서의 삶, 호남인으로서의 태생 자체가 영남에서의 삶 보다 사회적 비용이 더 들고 불리하다는 것이다.


호남의 몰표는 이런 불공평함을 적극적으로 교정하라는 열망인데,  이 열망을 등지고 몰염치하게도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인간이 민주화가 뭔지 알 만한 노무현이 택한 노선이 지역주의 양비론이다.  운동권이 택한 노선이기도 하고 좌파들이 택한 노선이기도 하다.


지역주의 양비론은 호남 지역주의를 영남지역주의와 동급으로 다뤄 '지역주의는 나쁜 거잖아!  모두 닥치고 조용'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결국 기득권을 가진 영남만 만족하는 지역주의 양비론은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남편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가?



'72년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는데 호남고속도로는 2001년도에 완공됐다고 하지만서두 그럼에도 고속도로 지선으로 경부고속도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왜소하고 초라하다.  거의 1세대 뒤쳐진 SOC의 수혜가 경제학상의 산업연관효과로 따지면 천문학적 차이로 귀결된다.


한일합방전후의 영호남의 총체적 생산력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면 현재는 거의 더블스코어로 격차가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남인이 호남인보다 부지런하고 머리좋고 수완좋아서 그랬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선민의식이나 유사인종주의적 편견에 불과하다.



따라서, 호남인으로서 문재인류나 노무현, 노빠들, 좌파에게 우호적이며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일제강점기때 약자인 동포를 짓밟고 강자에게 빌붙은 친일부역배와 다를 바 없는 영남패권주의자를 지지하는 것과 다름 없다.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좌파를 지지하는 것보다 지역적 소외가 훨씬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다.  계급적 이해야 개개인의 차원이지만 지역차별이라는 이해는 공간과 결합돼 임의로 끊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의 계급적 이해는 지역적 이해보다 선명하지도 않다.


즉, 호남인이 노무현류의 지역주의양비론자를  지지한다는 것은 자기 몫을 찾기는커녕 자기 눈을 스스로 찌르는 어리석은 행태라는 얘기이다.  역사의식이나 호남인이라는 자아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은 자이다.  

오늘 이 시각에도 호남인이라는 자기정체성을 잃고 노빠짓꺼리를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 닭짓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의 영남패권주의가 만연하고 지속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문재인의 글을 통해 몇 가지 의미있는 소득을 발견합니다.

 

영남패권주의(정희준이 부정한개념을 문재인의 입을 통해 유통시켰다는 점친노(정희준이 부정한 그 개념)가 존재한다는 점을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하,원문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형태로 줄이며 밑줄그으며 인용하기로 한다.)

 

영남에서 지지 받지 못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고참여정부였습니다그런데 정작 호남에서는 영남 패권주의라고 비난받는다면그야말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이 다시 굳건하게 손을 잡을 때만이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호남만으로도 안 되고이른바 '친노'만으로도 안 됩니다.

 

 

 

형용모순적 글쓰기

 

벌레 파먹고 상처입고 설익은 사과를 스케치북에 그려넣는다그 못난이 사과를 어떻게 서술하는 지 아래를 읽으며 그려 보도록 하죠.

 

···정치인으로서당의 전 대표로서또 그 이전에는 대선주자로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 한 번도 제대로 승리의 기쁨을 돌려드리지 못했··· 호남에 고립감과 상실감만 안겨드렸··· 강한 야당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고정권교체의 희망도 드리지 못했··· 당의 분열을 막지 못했고후보 단일화도 이루지 못했··· 반드시 이겨야 할 국면에서 분열로 인한 패배를 걱정하게 만들었···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저와 당의 부족한 점을 메우느라 정신없었던···

 

위와 같이 실컷 못난이 사과를 그려놓고서는

 

이렇게 오해와 불신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라고 말합니다못난이 사과를 그려놓고 일거에 그것을 오해라고 부정합니다.

이러한 형용모순적 글쓰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또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습니다그러나 한 가지제가 가져갈 수 없는 짐이 있습니다.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다고 한 후 과오인 짐 한 가지를 빼겠다고 합니다그러므로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거짓말을 한다는 자각조차 없는 부도덕의 극치입니다.


노무현이나 문재인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입니까다름아닌 우리가 남이가똘똘 뭉쳐 기득권을 지켜내자라는 영남패권주의와, ‘우리가 다르냐차별말고 시정하라!’는 호남지역주의를 모두 잡음으로 여기는 입장즉 지역주의 양비론입니다.

호남 변방 소외민들의 동의없는 영남 편중 개발을 방치하고 묵과하는 것은 곧 호남인에게 덧씌워진 멍에와 질곡을 방치하고 부당한 영남기득권이 유지되도록 결과하는 명백한 호남차별입니다그런데···

 

저에게 덧씌워진 '호남 홀대' '호남 차별'이라는 오해···그 말 만큼은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치욕이고 아픔입니다

 

라며 오해라고 말하는군요오해란 어떤 자료가 유통과정에서 그릇되게 소비된 상태입니다위에서 지적했다시피 호남차별은 오해가 아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문재인은 과거의 자기를 부정하는 행태를 반성하고 초월해야 하는데도 수치를 모르고 호남차별 한 적 없다고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4.13 정치 지형의 대립구도를 문재인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는군요.

 

호남인에게 지역 정당이란 불명예를 안기면서까지 그들만의 영달을 쫓는 세력

VS.

신성한 호남 땅···을 사수하는 새누리당과 맞서 정권교체 해낼 정당 더불어 민주당의 모든 호남 후보들

 

즉 위와 같은 대립구조에서 문재인이 선택한 후자문재인 안목으로는 신성하고 순결한 후보들을 정치의식 수준이 문제 있는 호남 사람들이,

순결하고 신성한 노무현이나 문재인류를 더럽게 분칠하는 거짓말에 휘둘리는 존재로서 오해나 모욕을 가한다는 투의 천박한 수준의 이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호남민심에 대한 대단한 모욕입니다과거의 모욕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덧붙이는군요.

 

 

결론적으로 노무현과 문재인은 ‘(은폐된 투항적영남패권주의자입니다거짓말쟁이라는 것지독히도 엉망인 한국어 구사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빠진 노빠들이 지지하는 문재인의 수준.... 딱 그 수준입니다.

 

 

 

-----------------이하 문재인의 오락가락 전문 ----------------

 

다음은 문 전 대표의 '광주시민들께 드리는 글전문이다.

광주시민 여러분뵙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언제라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었는데말리시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정치인으로서당의 전 대표로서또 그 이전에는 대선주자로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호남 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밑거름 삼았던 제가여러분에게 한 번도 제대로 승리의 기쁨을 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호남에 고립감과 상실감만 안겨드렸습니다강한 야당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고정권교체의 희망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당의 분열을 막지 못했고후보 단일화도 이루지 못했습니다반드시 이겨야 할 국면에서 분열로 인한 패배를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실망을 하셨는지잘 알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못난 문재인이 왔습니다여러분에게 직접 야단을 맞고직접 질타를 듣기 위해서안 된다는 당을 설득해 이제야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그리고 그간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여러분의 분이 풀릴 때까지제 얼굴 맞대고호되게 꾸짖어 주십시오.

저와 당의 부족한 점을 메우느라 정신없었던 사이호남 분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이렇게 오해와 불신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이제라도제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죄송합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그러나 이제제가 대표직에서 물러난 우리 더불어 민주당은 과거의 혼란을 딛고 새롭고 유능한 인재들로 넘쳐 납니다저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이 유능한 인재들의 면면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제가 다 담지 못했던 호남 분들의 요구와 열망을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국회에 퍼 나를 인재들입니다.

차기차차기 이 나라를 이끌어가기에 충분한 인재들이 호남의 더불어 민주당 후보들 속에 있습니다정권을 탈환하고대권을 꿈꿀 만한 훌륭한 씨앗들이 뿌려졌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은 이렇게 새로운 인재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호남 기득권 정치인의 물갈이를 바라는 호남의 민심에 우리당은 호응했습니다.

이 분들에게 기회를 주십시오자신 있게 기대감을 가지고 힘을 주십시오더불어 민주당 기호 2번의 새롭고 활기찬 후보들이야 말로호남의 정신과 열정을 한 지역에 가두어 두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장시켜 갈 인재들입니다.

호남 정신의 지평을 전국으로 넓히면서 지역 경제문화에 새 바람을 이끌 주역들입니다그런 전문성과 인적 인프라를 충분히 갖춘 인재들입니다.

시민 여러분.

호남을 볼모로 자신의 기득권에만 안주했던 구시대적 정치호남 민심을 왜곡해서 호남을 변방에 가두어 두려는 분열적 정치인여러분들은 그런 정치인들에 대한 강한 교체 의지를 가지고 계실 겁니다더불어 민주당의 후보들을 통해 바로 그런 구시대적분열적 정치인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호남인에게 지역 정당이란 불명예를 안기면서까지 그들만의 영달을 쫓는 세력이 이 신성한 호남 땅에서 더 이상은 발붙이지 못하도록더불어 민주당의 모든 호남 후보들은 끝까지 싸워 나갈 것입니다시민 여러분이 그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광주시민 여러분.

 

저에 대한 여러분의 실망과 섭섭함에도 불구하고더불어 민주당에 대한 여러분의 애정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아무리 부족하고 서운한 점이 많아도그래도 새누리당과 맞서 정권교체 해낼 정당은 우리 더불어 민주당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애정에도 불구하고 저에 대한 지지를 거두시겠다면저는 미련 없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습니다대선에도 도전하지 않겠습니다.

호남의 정신을 담지 못하는 야당 후보는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호남의 뜻이라면저는저에 대한 심판조차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호남 유권자 여러분.

저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겠습니다그러나 한 가지제가 가져갈 수 없는 짐이 있습니다.

저에게 덧씌워진 '호남 홀대' '호남 차별'이라는 오해는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그 말 만큼은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치욕이고 아픔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모욕입니다저와 당과 호남의 분열을 바라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아주십시오그것만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엄혹했던 5공 군부독재 정권 시절부산의 민주화 운동은 '5월의 광주'를 부산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87년 6월항쟁 전야 5노무현과 제가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연 광주 비디오 관람회를 보려는 부산 시민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열기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고부산 가톨릭센터는 명동성당처럼 부산 6월항쟁의 중심이 됐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호남과 호남 바깥 민주화 세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당 합당으로 호남이 고립됐을 때도그에 반대한 영남의 민주화 세력은 지역 내에서 전라도니 빨갱이니 핍박받고 고립되면서도 호남과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결합이 김대중 정부를 탄생시켰고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노무현과 제가 걸어온 길이었습니다영남에서 지지 받지 못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고참여정부였습니다그런데 정작 호남에서는 영남 패권주의라고 비난받는다면그야말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참여정부가압도적인 지지로 출범시켜준 호남의 기대에 못 미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대북송금 특검도 있었고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도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광주가 정치적인 고향'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남을 사랑했어도호남사람처럼 호남의 정서를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호남이 듣기에 섭섭한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결단코 호남 홀대는 없었습니다오히려 역대 어느 정부보다 호남을 배려했다고 자부합니다.

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을 이간하여호남을 다시 고립화시키려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말아주십시오호남과 호남 바깥의 민주화 세력이 다시 굳건하게 손을 잡을 때만이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호남만으로도 안 되고이른바 '친노'만으로도 안 됩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호남 바깥에서는 잘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번 총선에서도 부산에서경남에서울산에서대구에서경북에서강원에서 더 늘어난 승리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호남이 손을 거둬들이지만 않는다면정권교체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광주시민전남북 도민들께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총선이 끝나면 곧바로 전당대회를 통해 더불어 민주당 지도부도 새롭게 선출됩니다물론 저는 앞으로 당권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더 이상 국회의원도 아닌 만큼시민들 속으로 들어가서 정권교체의 역량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광주시민 여러분저를 믿고 더불어 민주당에게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주십시오.

자주 오겠습니다총선이 끝나면더 여유로운 신분으로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정치인 문재인이 아니라 미운 정 고운 정다 든 못난 아들놈처럼 맞아 주실 거라 믿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사랑합니다.

프레시안]문재인은 충장로에서 무릎을 꿇어라! 억울하더라도…

우선 글을 비평하기 전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제완은 영남패권주의자이다.

 

김제완의 그릇된 인식

 

김제완의 이념적 지향을 살펴보기 위해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료들을 인용하기로 한다.

(이하 김제완의 서술을 밑줄로 인용함)

진실의 언어는 그렇게 거칠지 않다김욱 교수의 문제 제기 방법이 너무나 공격적 도발적이기 때문이다노무현이 영남 패권주의자라는 말조차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나아가서 전두환의 영남 패권과 동일시하는 김욱 교수의 발언에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다토론의 격렬함은 현실의 반영이다.

 

영남 패권 논란을 이제 중지하고··· 그리곤 영남 패권이 호남 민심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은 결과라면 나는 내부에서 찾아보겠다보수화모욕감,당파성이란 세 개의 키워드로 호남 민심을 규명해 보려 한다.

 지켜볼수록 피곤해지는’ 초점을 벗어난 소모적인 영남패권주의 논쟁을 중지시키고 호남민심을 규명

하는 것···일까?


마치 중립적 관점을 유지하는 듯 서술하는...김제완으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 주된 동기는 무엇일까

 

김제완은 한국사회의 질곡에 대한 영남패권주의 담론을 평가절하하고 아울러 호남 민심을 한갓 감정적 차원으로 거론함으로써 호남 민심을 왜곡하려 한다.

 


김제완이 거론하는 세 가지 키워드(보수화모욕감당파성)와 관련된 문장들을 인용하며 들여다 보도록 하자.

 

1. 보수화 관련 서술

호남이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대통령을 원한다. '광주 정신'에 의해 억눌려왔던 호남인들 일부 보수 성향이 커밍아웃하는 것 아닐까.”

 

김제완의 진단인 보수화가 맞다면 더민주당에 대한 호남민심의 이탈이라는 변화의 선택은 급진적 선택이 된다이는 보수적 성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선택이다.

 

2. 모욕감 관련 서술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 사람의 자존감을 다치게 했다이렇게 상처 주는 말들은 아주 오래 간다.

 

현재 호남민심은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다김제완은 호남인들의 집단 의지를 감정적 배설로 호도한다그것이 진정 단순한 감정적 배설이나 반응이라면시간 경과에 따라 그 상흔이 희미해지거나 소멸했어야 한다가해 주체 노무현이 사라졌으므로 모욕감은 해소되거나 약화되어야 자연스럽다그러나과거와 달리 점점 불타오르는 반문재인 정서의 추동력의 배경을 단순한 감정적 반응인 모욕감이라 이해하는 안목은 절대 비현실적이다.

 

호남의 반문재인 정서는 다름아닌 대의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분노요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의 반민주적인 배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이며, ‘우리가 남이가의 영남패권주의와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지역주의를 모두 소음으로 여기는 지역주의 양비론에 대한 분노즉 반헌법적 작태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천명이라고 봐야 옳은 것이다.

 

3. ‘당파성’ 관련 서술

당파성이란 파당성과 다름없는 말로사회의 여러 복합적인 상황을 오직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태도이다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아온 집단에서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다노동 계급뿐 아니라 여성장애인도 이런 방법론적 편향을 사용해왔다김욱 교수의 영남 패권 주장이나 '호남 자민련여론도 호남 당파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된다.

 

당파성을 키워드로 하는 식민사관즉 제국주의 사관이 연상되는 서술이다이조 시대의 무능한 지배계층의 이전투구식 당파싸움을 한민족의 민족성으로 대치시켜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려 했던 반민족적 역사학이 취하는 논리 그대로이다.

김제완의 인식여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호남인들의 지금까지의 정체성과는 너무 동떨어진 반민족적인 식민사관인 당파성을 호남 민심과 연계하여 이해하고 있다. ‘정당한 몫에 관한 얘기인 영남패권주의 논의를 중지하고 호남 민심을 한갓 진영논리에 매몰된 부당한 몫 챙기기라고 매도하는 김제완의 태도는 영락없이 약자를 등지고 강자에 빌붙은 친일부역배의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영남패권주의 부정적 경향의 한 단서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그런 정서(반문재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그렇게 하지 않으니 더 확대된다."

 

반문재인 정서에 대한 원인을 따져 단순한 감정적 배설인지 혹은 합리적인 의사 표명인지를 따져 묻지 않는 태도는 영남패권주의의 부정적 경향의 한 양상이다작금의 한국사회에서 공정함정의를 따지며 살라고 훈육하는 것은 곧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살라고 가르치는 저주와 다름없다.  이것이 현실이다안타깝게도 영남패권주의가 작동하는 그 혐오스러운 세례를 김제완이 흠뻑 받았음에도 그것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런 류의 맹목적 친노가 더민주당을 타락시키는 더러운 연료가 된다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타락은 비판적 지지를 견지하지 못하고 광신도가 돼버린 맹목적 노빠가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렇게 편파적이며 굴절된 안목의 글이 프레시안에 실렸다는 것은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기왕의 프레시안의 시도가 진지함이 아닌 일회적 흥미본위의 소비적 태도였지 않나하는 우려가 기우일까?

황태연 교수가 안출한 영남패권주의라는 개념이 2000년 초엽에 지역주의와 얽혀 점진적으로 거론되는 차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는 시민입니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개념이나 그 내용은 여기 링크를 클릭하시면 ebook을 다운로드하실 수 있으니 활용하시고 널리 유통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기에서 거론하는 영남패권(주의)이라는 개념은 위에 언급한 ebook의 개념으로 지칭해서 씀을 밝힙니다)

이 광장 사이트의 영남패권주의 관련 글들을 일별해 보면 반영남패권주의,  곧 영남패권 반대라는 것을 한갓 주장으로 인식하는 듯한 뉘앙스로 비춰집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의지 즉 나 개인(특수)의지가 아닌 우리의 의지(일반의지)가 객관화된 것이 헌법입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근대사회의 시대정신인 근대이성은 어김없이 무능하고 폐쇄적인 조직깡패 유사의 이씨조선 500년을 초월하여 헌법에 내장되었습니다.


대한민국호가 진수된 이래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겼습니다만, 이른바 규모의 경제라는 경제학적 문제와 얽힌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계와 후발주자로서의 열세로 인한 근대화 과정에서의 수출주도형 불균형 경제성장정책의 채택에 뒤얽혀, 친일부역배였던 독재자 박정희의 정권유지차원의 편파적 지역개발이 가세해 경부축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진행되어 그 폐해가 고착, 심화되고 말았습니다.


정권연장에 혈안이 된 박정희의 편파적 지역개발의 사상적 기초엔 이씨조선의 사대주의라는 패배주의적 심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자에게 기대는 기회주의가 선명히 묻어 있으며, 소수약자를 짓밟고 강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이즘, 우리는 다르다라는 선민주의와 유사인종주의가 물들어 있습니다.   헌법과 상충하는  친일부역배 박정희의 혐오스러운  반헌법적, 반민주적, 반민족적, 반역사적, 전근대적, 비인도적 죄악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는 오늘 날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질곡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도로, 항만, 산업시설  등 물적 기반, 즉 사회간접자본의 편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무려 30여년의 갭으로 건설된 고속도로입니다.  아직도 규모에 있어서 우열의 확연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 산업기지가 들어서면 그에 따르는 팽창적 연관효과가 수반되며 그 경제적 가치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지역차별적 정책으로 야기된 지역적 우열에,  사회적 자본의 우열이 수반함은 불문가지입니다.  변방인의 열악한 사회적 자본은 변방지역의 도시로의 인구유출을 가속화하고, 우세한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등에 업은 패권지역은 더 더욱 패권을 공고히 하기에 이르릅니다.  오늘 날의  대구광역시의 정체, 광주광역시의 상대적 번창의 배경입니다.


그리하여 지역간의 불균형은 심화돼 왔습니다.  이 현실은 단순한 균형정책이나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절대 교정될 수 없습니다.


서울이나 수도권 그리고 지방의 중심도시의 번창이라는 도시화,  그 이면인 촌락의 공동화, 

인위적으로 조장, 고착된 지역차별의 대표적 우열지역인 영, 호남......


바꿔 말하자면,  서울에만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은 촌부에겐 정확히 그림의 떡입니다.  호남에서 태어났다는 선택할 수도 없는 운명적 상황이,  그리고 영남에서 출생했다는 객관적 상황,  생애 시작부터 확연하게 갈리는 불공정한 경쟁시스템...


세금에서 변방인이 덜 납부하는 혜택을 보기라도 했나요?  지금 세금을 평등하게 납부한다는 사실조차도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역설까지 성립합니다. 

서울(혹은 도시)이나 영남에 산다는 자체가 곧 촌락이나 호남사람들의 세금의 혜택을 입고 산다는 이 불편한 현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한국사회의 자화상입니다.  변방인은 도시사람과 영남사람을 위해서 멍에를 지고 족쇄를 차고 살아야 된다고 헌법에 씌여 있나요?


 영남패권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단순한 주장으로 거론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당한 권리주장입니다.  법률적 차원의 권리주장이 아니라 헌법적 차원의 권리주장입니다. 헌법 이전의 자연법적 평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를 얘기하는데 그것을 부정하거나 호도하는 것은 몰상식이요, 반헌법적이요, 비민주적이며, 반이성적, 반역사적인, 비인도적인, 부도덕한 죄악입니다.


'우리가 남이냐'의 영남패권주의,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지역주의를 구별하지 않고 한갓 소음으로만 여기는 좌파와 노무현및 추종자들과 뻔한 상식적인 얘기에 귀막고 입닫고 있는 지식인들은 개혁세력이 아니라 몰상식하고 부도덕한 파렴치범들이며 동포들을 팔아 호의호식한 친일부역배와 흡사한 매국노들입니다.


영남패권주의를 척결하자는 얘기는 주장이 아니라 권리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정서적, 감정적 차원의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정치적 아젠다에 불과한 얘기가 아닙니다.

요즘 필자가 시간이 조금 있는 탓에 자주 글을 쓰게 된다.

 

노무현이 신화가 되는 것은 무뇌아들 때문

'손호철'이라는 검색어로 미끼를 던졌더니 이 글이 걸렸다.  읽어보니 노무현을 우호적으로 본다.   긴 글을 읽어보나마나 한국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돼 있음이 뻔한지라 거두절미하고 아래 대목만을 놓고 생각해 보자.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서민과 노동자의 가계를 어렵게 했음에도 정치적 자유와 반권위주의적 가치만으로 이미 정치적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정치적 자유를 창달한 인물 혹은 정권이라고?

터무니없는 과장이요 미화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이나 열린우리당,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지지자들을 등지고 신당을 창당한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원리를 저버린 배신의 정치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패악질이다.  그러한 무리들이 정치적 자유를 창달했다고 얘기한다면 시력이 극히 불량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정치적 자유의 남용을 창달했다 할 것이다.

 

노무현이 반권위주의적이었던가?

사실 우리 일반의 의지 (일반 의지)의 객관화인 헌법상 대통령의 지위가 전형적인 대통령제와 다르게 권한이 강화된 대통령제이므로 그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다.  권한이 강화된 배경엔 분단현실이 있지만, 대통령의 그 우월적 지위를 등에 업고 임기말에 노무현은 임기초의 배신의 정치를 회상하게 할 만한 반민주적인 작태를 연출했다.

  이를테면 노무현 지지자들이 한사코 한나라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몰표로 지지했던 그 정체성을 버리고, 어떤 양해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냅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하겠다고 구걸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의 권한이란 지지한 민의를 등에 업고 (그것이 곧 민주적 정당성이다)  그 민의의 대리인으로서 신의와 성실로 국정을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적대세력과 연정을 하겠다고 구걸에 나선 것이다.

 

  탄핵정국에서 원내 절대과반을 검쥔 참여정부, 열화같은 국민적 기대에 부응한 정책이 뭐였을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 상기시켜주면 좋겠다.  세든 청기와집에서 수시로 언론 플레이나 하고,  세치 혀를 놀려 같잖은 토론이나 즐기고, 따라서 파격적인 노무현의 행보란 영남비주류로서의 희미한 존재감에 대한 열등감 해소차원의 자기만족에 불과한 시간을 보낸 게 아니잖는가?

 결국 국민의 안목은 그런 추태를 연출한 위선자에게 국회의석을 회수해 버렸고,  그리하여 민의를 등에 업지 못해 빈사상태에 빠진 정국에서 자아반성적 성찰을 결한 채 권위주의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려 한 것이 곧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이었다.

 작금에 손호철이나 혹은 새로운 더민주당의 전제군주가 된 김종인, 김한길, 천정배는 자꾸 새누리당의 절대과반수를 걱정하며 연대 혹은 통합을 얘기한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이 도대체 어떠한 뚜렷한 차별성이 있는 지  생각나지 않는다.  기껏 필리버스터링도 중도하차해 버려서 그나마 차별성이 있나 했더니 역시나이다.

 생각컨대, 초기의 노무현은 제법 탈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여주는 척 했다.  그러나 세상 만물은 모두 변한다.  사람은 특별하게 반역사적, 반민주적, 반헌법적으로도 변한다.  노무현이 변했다.  아니 본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인간이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이 그런 대표적 인물이었다.

   아직도 노무현을 추종하는 무리들인 무뇌아 친노들이 한국사회에 있다. 역사는 준엄하다. 누구에게나 ...

 

  이런 노무현을 어떻게 신화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다소 빛바랜 시절의 글이지만,  그렇게 생각한 그 당시의 생각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지 몹시 궁금해져서 이 연결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장애우들에게 빚쟁이이다.

 

장애를 갖지 않은 우리 모두는 장애우들에게 빚지고 살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왜일까요?

그 까닭은 여러분이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는 거리, 출입구, 심지어 평균인을 모델로 설치된 모든 시설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장애우의 특별한 장애를 그 기준으로 사회가 운용된다면 여러분은 십중팔구 금새 불편함을 호소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하는 와중에서 때때로 초래된 상처나 아픔을 놓고도 매우 불편하고 힘들어하는데

 장애우들은 그들을 기준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사는 게 아니라 (그를 입장에서 볼 때)남을 위한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므로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까요...

그래서 장애우들에게 뭔가 혜택을 주는 것은 우리 것을 덜어내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위주로 된 불편한 세상에서 살아내는 그 수고로움에 대한 배상(보상이 아닙니다)적 성격,  장애우들 입장에서 볼 때는 곧 권리로서의 혜택입니다. ***

 

 

장애우의 권리를 없애버린 반민주적 반인륜적 패륜아 노무현과 열우당

 노무현이 대통령할 때 장애우들의 이동의 불편함을 얼마간 보조하는 자동차용 LPG가스요금 할인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여정부의 다른 어떤 악정보다 그것을 없애버린 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므로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을 혐오합니다.

  소외계층은 물론이고 소외지역... 이를 통틀어 변방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변방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자의 인성이나 도덕적 품성을 좋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부도덕한 인간을 우상처럼 따르고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친노가 행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의 지적수준이나 시민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참수 사망에 이르기까지 노무현과 열우당(한나라당은 기대가능성이 없는 정당이므로 거론하지 않음)이 보여준 작태...

국가란 궁극적으로 인간이 있고 그 후에 인간을 위해 도입된 제도 혹은 장치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그 국가를 다스리는 기술의 하나로 대의제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이죠...

이제 얼마 있으면 4.3 총선이 시작되겠네요.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민의를 대변하는 국가기관,  선량을 뽑는다는 것은 곧 지역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표선수를 뽑는 것인데,  기껏 뽑아 대통령에 앉히고 국회의원 만들어 놓았더니, 과거 노무현은 그 대의민주주의를 등졌더랬죠.  즉, 노무현을 지지한 지지자들을 모욕하곤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지지자들을 향해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한 나라의 주인을 향해 모욕하기를 한 두번만 한게 아니었죠.  그런 이상한 배신의 정치를 선호한 인물을 흠향하는 자들이 아직 한국사회에 있다는 것이 슬퍼집니다.  정치적 지지로 인해 국가의 향배가 좌우되는데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나의 지지가 나라의 향배를 좌우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어수룩한 시민의식을 가진 유권자의 잘못된 주권행사는 곧 나라를 망치는 것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무현으로 인해 한국의 경제적 민주화가 1세대 이상 늦어질 것이라는 엄혹한 현실, 

이 현실의 배경에는  우리가 다르냐라는 변방인들의 외침을 등지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외침을 결과적으로 감싼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이 있습니다.   이런 지역주의 양비론이 아직도 좌파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당시 배신의 정치를 자행하는 도상에서 노회찬이 환상의 파트너라며 매스컴에 나와 유시민과 호흡을 맞췄던 일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한국사회에는 무뇌아들이 많습니다.  이 사회적 부조리한 현상이 결국 민주시민을 양성할 수 없는 파행적 교육 탓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편적 인간 이성의 작동을 긍정한다면, 성인이 된 유권자라면 적어도 이런 것쯤은 간파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 국가를 이끌어 줄 선량이나 대통령이 누구면 좋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정상모리배들을 보고,  아직도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낳고 있는 각종 부조리한 사회현실의 배경에 변방인들을 소외시키고 극소수들만이 부를 거머쥐고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기형적인 시스템을 묵과하는 반역사적이며 반민주적이며 반이성적이며 반헌법적인 패권주의가 있음을 묵과하고 있을까요?

하여,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공정한, 정의로운, 공평무사한, 질서를 지키는 ... 이러한 가치들을 지키며 생활한다는 것은 곧 이지메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군요.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닌 불신의 사회를 우리 모두가 용인하고 방치하는 이상 OECD에서 엿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민낯 - 자살율 1위, 삶의 질 불량률 1위 - 을 결코 개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목이 자극적인가요?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면 당신은 아마 노무현이나 그 추종자들이 모여있는 더불어 민주당에 우호적이겠군요.

그들의 도덕성 지수가 얼마나 되나요?  당신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수준과 도덕성 수준이 어긋나 있지 않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사실을 적시하며 부정적으로 얘기하는데도 계속 그들을 우호적으로 감싸며 지지할 것인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선자 유시민  = 유통기한 지난 생각

(제목을 이렇게 뽑긴 했는데 이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곁들여야 하겠다.

일단 본문에 인용된 내용에 대해 유시민의 사고방식이 바뀌어 - 퇴행이지만 -

  그 인용문을 사문화시켰다면 위선자가 아니다.  이미 낭만적 진보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고 항소이유서를 쓸 당시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견지하고 있다면 분명 위선자이다.)

 

 난 유시민을 혐오한다. 유시민을 보면 8자 수염을 그린 간사한 인간이 연상된다.

위선과 재승덕박의 대명사랄까?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그를 저명인사로 대접하고 패널로 즐겨 초빙하며 세 치 혀를 놀리는 간사함을 기꺼히 소비한다.

유시민을 신화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기여한 폭행에 얽힌 항소이유서를 들여다 보았다.

 

스멀거리는 불쾌한 감정으로 훑어보다가 아래 문장을 놓고 유시민을 살펴보기로 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이 문장은 유시민에게는 이미 유통기한이 다돼 생명이 끝난 문장이다.

왜냐하면 구성원의 행복 추구들간에 놓여진 불공평한 현실에 눈감고

세치 혀를 눌리며 정의를 찾고 진리를 논하기 때문이다.

 

불공평한 현실이란 사회양극화, 지역격차를 가리킨다.

난 유시민을 보면서

이른바 민주투사가 곧 경제적 민주화의 전사일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불쌍한 영혼을 가진 자를 대단한 존재인양 거론하는 무리들은 자기만의 안목이 없는건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