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거일씨나 이문열씨에게 화가 난 것은, 내 판단과 달리, 그들의 이념때문이 아니라 인격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에 이념과 인격을 구분하려는 노력의 실익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고종석 작가(이하 경칭 생략)의 칼럼에서 따온 내용이다.

얼마 전 이인직의 혈의 누의 일부가 EBS수능시험 강좌(?)에 유통되었다는 기사을 접하고 생각해 본 주제였는데 오늘 고구마 줄기를 들추다가 맞닥뜨렸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천착해 볼까 한다.

 

오염된 작품과 오염되지 않은 작품 사이에서

이를테면 나찌에 협조한 H. 카라얀과 그가 지휘한 수다한 작품들...
                      변절한 춘원 이광수의 작품들,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의 혈의 누 ....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뭘까?  세대를 뛰어넘어 종족보존을 위해 우리 몸뚱아리가 본능에 이끌리어 DNA를 전달하는 숙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이 글을 읽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자.

 

숙명으로 단순작업이 직업으로 주어진다면

  ( 단순작업인 종이를 세는 작업만 하여도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전혀 문제없을 정도로 보수가 듬뿍 주어진다.  그리고 감정이입의 효율을 위해서 필자와 고종석을 등장시키겠다.)

 필자가 고종석에게 A4 종이 매수를 세라고 했다고 하자.   하염없이 하루 이틀 한달 일년 10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존재는 인성아닌 신성의 그 무엇,  즉 유한성을 초월한 존재자라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든 귀한 존재요, 유한한 존재이다.  고종석에게 여생 중에 남은 시간이 겨우 독서할 수 있는 하루라는 시간뿐이라고 가정하자.   흠결있는 책과 하자없는 책 중 무엇을 소비할까?

 

 

유한성(동적으로 효율성)

 

적어도 합리적 사고가 가능하다면 해답은 빤하다.  유한성은 실존적 인간이 살아내며 항상 염두에 굴리는 화두이다.  인지적 구두쇠, 단순한 일의 기계화, 무미건조한 단조로운 일의 기피, 조금 더 신선한 뭔가의 갈구.. 이러한 경향은 모두 유한성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유한성(stock)을 뒤집어 동적(flow)으로 파악하게 되면 곧 효율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유한하니까 효율을 추구하고 효율추구는 곧 인간세계의 역사적인 굵직하고 면면한 노선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른바 산업혁명의 배경엔 효울성의 추구라는 도구의 발전이 개입돼 있다.  이 효율 추구는 그 시야만 다를 뿐 어느 시대이든 그 누구든 추구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보편성을 갖는다.

따라서 효율적인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이다.  비효율이 횡행하는 사회는 곧 비합리적인 사회이고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불완전한 사회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근시안적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보다 거시적인 광역적인 완전한 정보를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라야 이상적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는 주제가 벗어나므로 약함) 왜냐하면 자원의 비효율성을 낳고 있다는 혐의를 오늘의 자본주의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그리 쪼개써야 하는 이유

 

굳이 유한성이나 효율성을 염두에 둬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짐승과 달리 인간은 먹고사는 리비도(Libido : Freud가 아닌 Jung)가 해결되면 그 후로 동물과 달리 미를 추구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의 확장

 

자아정체성을 확장해 보자.  우리 모두는 물리적인 공간상에 배타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즉 유일무이하다.  게다가 시간적 궤적을 겹쳐 파악하면 각자의 존재는 절대 겹칠 수 없는 독특한 좌표(바코드라 해도 좋다)를 지닌다.  그 누구도 표준이 될 수 없는 절대적 표준들이 수다하게 널린 상대적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에 내몰린다.

 

이로부터 우리는 거창한 자연법 혹은 신앙, 관습을 배제하고서도 모든 사회규범을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우들의 경우, 그들은 평균보통인 - 장애를 갖지 않은 - 들의 기준으로 형성된 시스템하-사회적 효울이라는 미명하에-에서 수용을 강제당하며 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장애우들을 위한 정부지원은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권리에 대한 대가)이지 은혜가 될 수 없다.  우리 정상인들은 장애우들에게 한 풀 꺾이는 빚쟁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의 전환이란 생각할 수 있는 존재들임에도 전혀 쉽지 않다. 

 

유한성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공공재(경제학적 개념이 아님)인 경제적 자원이나 개개인의 시간이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따라서 책을 사회에 유통시키려는 작가는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 글 솜씨가 없는 필자가 이 글을 써서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다면 유한한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소모케 하는 죄악이다 -

 

따라서 적어도 보편적 이성에 미달하는 즉 함량미달인 작품이 세상에 유통되어 누군가의 시간을 낭비케 한다면 저승에 가서 천벌을 받아야 한다.  (좀 극단적이고 과격한 표현인가?  : ) )

 

같은 맥락에서 정치에서의 인물의 인품과 이념간의 괴리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정치지형에서의 인물의 평가는 더 엄혹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혀 비효율적인 이념을 추종하는 날엔 공동체의 절대이념과 상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유한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오염된 책과 그렇지 않은 책들간의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는 오염된 책을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런 괴리된 작품이 곧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야 우리는 간혹 있을 수 있는 누군가의 무의미한 시간 소모를 차단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오염된 책에서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는 - 사실 없을 것이지만 - 합리성과 배치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한정적으로만 소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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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 이제는 넘자 (손호철)

http://action.or.kr/71905

 

87년 민주화이후 선거 때면 의례 찾아오는 지역주의가 올해도 벌써부터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의 낙천, 낙선운동에 대한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의 음모론을 시발로 부산 경남지역의 한나라당 공천탈락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당구성을 통해 서서히 수위가 높아지던 정치권의 지역주의적 선거전략은 김종필 명예총재의 충격적인 지역주의 발언을 통해 전면화하고 만 것이다.

 

사실 지역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천년을 맞아 시민단체들이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하는 등 낡은 정치의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드높은 상황에서 다시 지역주의적 선동이 전면적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 만해도 공동정권의 두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당사자가 김대중대통령이 71년 대선에 출마함으로서 지역주의가 생겨났다고 김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선 데에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된다. 게다가 이 같은 주장은 71년 대선당시 3선개헌에 대한 비판여론으로 승리가 어렵게 되자 경상도대통령을 통해 지역주의를 선동한 것이 김 명예총재를 포함한 공화당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 역사에 대한 후안무치한 왜곡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사실 불행히도 이 같은 사태는 공동정권의 출범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 즉 대선 당시 김 대통령진영에서는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은 소시민적 도덕주의에 불과하며 오히려 지역주의를 극대화하는 호남과 충청의 지역주의연합에 의해 지역간 정권교체를 이끌어내야 하며 이 지역간 정권교체가 지역주의를 해결할 것이라는 잘못된 논리를 내세워 디제이피연합을 성사시킨 바 있다. 결국 이 논리에 따르면 김 명예총리의 지역주의적 선동은 정당한 저항적 지역주의의 발로이기 때문에 비판할 이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소외지역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는 지역주의의 현실은 패권적 지역주의이건 저항적 지역주의이건 지역주의는 결코 지역주의로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제 어떠한 지역주의도 단호히 심판하는 국민적 결의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총선시민연대가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정치인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리겠다고 나선 것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92년 대선당시의 초원복집 사건처럼 지역주의의 비판과 쟁점화가 오히려 지역주의적 투표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엉뚱한 사태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사실 진보대 보수와 같이 정당간에 차별성을 부여하고 지역주의를 대치할 수 있는 새로운 건설적인 정치적 경쟁구조가 생기지 않는 한 지역주의는 끈질기게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 같은 가능성은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유권자 개개인의 현명한 선택뿐이다.

 

 

손호철(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038일자

 

[ 촌평 ]

지역주의를 정서나 감정적 차원으로 다루는 한편, 모든 유권자들이 지역맹주인 정상배들에 휘둘린다는 그릇된 전제위에 서 있다.  이는 지역주의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학자로서의 천박한 인식틀을 내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외국인 학자가 보는 식견보다 지역주의는 사소한 것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패권적,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라는 점에서 지역주의 양비론의 아류에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생리적 계급장이나 사회적 계급장을 떼고 얘기한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보편성을 결하면 이미 학문이 아니다.

정치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한국정치를 견인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적어도 실효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손호철(최장집도 마찬가지) 은 

낯부끄러운 줄 모른다.


스스로의 인식지평이 얼마나 문제있는 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좌파들의 긍정적인 전환을 기대하는 필자로서는 그 인식지평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개별성, 특수성)


최장집이나 손호철이나 필자가 다른 생각, 다른 성장환경, 다른 지식, 다른 경험을 가졌듯 

특정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내는 존재들은 이미 특정 물리적 공간(지역)과 얽혀 매우 독창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성격과 사회적 태도가 형성된다.


보편성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공통된 특성의 보편성을 가진다. 또한 물리적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특성도 공유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손호철은 좋아한다.  포스트모던이즘이 있니 없니 이런거 따지기 전에

그래서 리영희의 '새는 좌우로 난다'라는 구호를 들먹이며 한국사회도 좌우로 날아야 한다고 외친다.

손호철의 눈엔 이 세상의 정치지형이 오로지 손호철 손에 쥐어진 좌우(진보 VS. 보수)로만 배열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뭐하러 두꺼운 소통채널인 공적 공간을 소비할까?  차라리 사회더러 알아서 정렬하여 내 좌우(빵틀)에 들어가 앉으시지!라고 주문을 외우면 될게 아닌가?!


학문이란 곧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일정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보편적인 좌우구도의 정치지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보편성을 잃은 한국의 정치지형


그렇다면 인간사회의 보편성을 뒤흔들고 있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지, 혹은 손호철식 글로벌 스탠더드가 일반적 도구가 아닌 특수한 도구이고 오히려 한국사회의 독특한 정치지형이 일반적인지를 가려내야 학자적 자질이 있고 학자로서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손호철은 최장집에 비해 엉터리다.  실천적 학문을 거론하고 있지만 천박한 학문적 기초로 인해 혐오스럽기 까지 하다.


결국 먹물있는 책상맡에 앉아 진지한 성찰을 결한 채  유학가서(?) 배운 거,  그것을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손호철의 꿈 - 오로지 진보정당의 융성


왜 그런 학문적 자세가 되었을까?  손호철의 자아준거는 오직 (사이비)진보정당의 융성에 맞춰져 있다. 그리하여 좌우가 경쟁하여 사회적 질을 제고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지형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정치지형을 꿈꾼다면 왜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이 글로벌스탠더드에 귀납되지 않고 지지부진하며 반세기를 훌쩍 넘어가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되지 않을까?  필자가 정치학자라면 정말 날밤을 새우며 그 원인규명과 해결가능 여부 해법에 대해서 이미 끝장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호철은  유물사관이라는 더러워진 필터를 낀 눈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인본주의자 K.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손호철에게 정상적으로 탑재되어 한국의 정치지형을 인식한 것이 이른바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면, 난 주저없이 마르크스를 저주하겠다.  그게 아니고 장착과정에서 잘못된 것이라면, 손호철은 마르크스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라.


정말 손호철이 진보정당의 융성을 바라기는 할까?  그렇다면 지지기반의 외연 확장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지역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해법을 강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좌파의 발목을 잡아 희미한 존재감에 머물게 하는 직접적인 장애는 손호철류의 사이비 진보 좌파, 강단좌파의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외연확장의 근본적인 방법을 외면한단 말인가? 


이른바 좌파정당인 정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소외계층을 위하는 것이고 사회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까?


손호철이 읽어야 할 책 - 김욱의 '아주 낯선 상식',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


손호철은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하다. 즉, 근대이성의 객관화인 우리들의 일반의지인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숙지하지 못하거나 상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떻게 해서 대학교수가 평균적인 사회인이 갖춰야 할 상식마저 장착하지 못했을까?  진정 궁금해진다.  손호철의 영혼이 불쌍할 뿐이다.


위의 권장도서 중 활강의 시대정신과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다운) 책이다.  이 책을 링크한다.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손호철교수의 글(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34331.html) 읽으면서 든 생각들이다.  이른바 한국사회의 진보적 매체의 대명사라 불리우는 한겨레에 실린 글이라는 점, 그리고 좌파(?) - 필자는 손호철이 좌파인지 진보주의자인지 그 정체성을 가늠할 수 없다 - 지식인의 글이라는 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좌파 혹은 한겨레신문의 지향하는 바란 사회적 약자나 소수를 경시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현실을 극복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말 그들이 표방하고 있는 지향점과 글의 성격이나 내용이 부합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사이비인지 아닌 지 알게 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나는 이 제목을 '내가 살고 싶은 나라'라고 해야 된다고 보여진다. 왜나하면  글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나를 포함시켜서는 안 될 나라라는 점에서이다.  이유를 인용해가면서 적어 보도록 한다.

"아무리 틀린 생각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상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을 가거나 당이 해산당하지 않으며" (이하 인용문을 겹따옴표로 묶고 붉은글자로 처리함)

우리들의 일반의지가 객관화된 헌법 그리고 근대의 보편 이성에 희하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어떤 자유든 절대적으로 자유를 보장할 수가 없다.  자유의 본질상 그렇다.  예를 들어 손호철의 표현의 자유와 필자의 표현의 자유가 서로 경쟁하게 되면 그것을 그냥 방치해야 할까? 그렇게 되면 공동체의 효율적인 작동이 어렵게 된다. 기껏 인간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공동체의 존재의의가 훼손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가 은밀한 개인의 내면에 머무를 때야 외부에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자유이다.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 자유 여부가 문제될 수 없다.  외계와 간섭을 일으킬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가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세계와 연계되는 경우 - 현실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행동으로 옮겨진다거나 표현되어 외부와 관계맺는 상황 - 는 일정한 한계를 갖게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손호철이 염두에 둔 자유는 이런 류의 자유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손호철이 필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봉쇄하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곧 표현의 자유의 적이 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취지와 정면으로 상충하여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간단한 예를 보더라도 손호철이 쓴 '아무리 틀린 생각'이 헌법에 반한다거나 반민주적이라거나 파쇼적이라거나 인종차별주의적이라거나 자유의 본질적 훼손을 초래하는 것들은 용납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손호철의 생각은 옳지 않다.  이런 뻔한 상식을 왜 부정하며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손호철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식 예외주의를 거론하는 안목에는 정치지형이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날아야 된다는 이상적(?) 모델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색을 갖추기 위해  한국의 진보(?)정당을 진보로 자리매김하여 진보타령을 한다.

 

 한국 좌파가 진보인가?

  한국좌파에게 표를 나눔하지 않는 몰표의 대표지역인 영호남 지역주의의 배경과 맥락을 헤아릴 인식지평이 좌파에겐 결여돼 있다. 그러므로 좌파들은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없다.  지금의 지역주의를 없어져야만 한다고 주문을 외울 뿐이므로 원시시대의 샤만이 주술을 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없어질 리 없다.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당이 더민주당이고 노무현이었고 그 추종자들이다.

 영호남 지역주의가 한국사회의 첨예한 이해 대립이며 그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방책이 뭔가를 전혀 제시할 수 없는 좌파정당이 어떻게 진보정당이라는 것일까?  만약 한국의 망국적 지역주의를 타파할 방법이나 혹은 지역주의의 배경을 성찰할 수 없는 것이 진보라면 필자같은 진보주의자에겐 진보딱지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에 불과하다.  즉 한국좌파와 그들이 지지하는 좌파정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사이비 진보정당이라는 얘기이다.  필자는 손호철이나 한겨레신문이 자칭 진보라고 가식을 떠는 것이 굉장히 혐오스럽다.

 

우리가 남이가와 우리가 다르냐의 영호남 지역주의

 '우리가 남이가'로 패권적 지역주의를 관철하려는 영남 지역주의와, 적어도 30여년간 변방으로서 소외되고 낙후된 '우리가 다르냐!'의 호남 지역주의를 구별할 수 없는 한국 좌파,  구천을 떠도는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발견한 계급사관이 한국 좌파를 망쳐 놓은 것이다.  한국좌파의 안목으로는 지역주의의 맥락이나 배경은 형체가 보이지 않는 바람같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예외주의란 곧 독재자 박정희의 정략적 차별정책의 결과로 생성된 것이다.  그 배경에 지역에 편중된 산업시설, 그에 수반되는 산업연관효과, 부수적인 사회, 문화 등의 차별... ,  이어지는 30여년에 걸쳐 심화 고착된 변방인의 의로운 외침!

 '우리가 다르냐 왜 우리 것을 서울이나 영남에 쏟아붓고 그것을 교정하지 않느냐'라는 호남민의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외침이 스며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며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무슨 진보란 말인가?  지식인으로서 자징 진보언론으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손호철의 친일부역배 유사의 기질 - 지역주의 양비론의 본질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지역주의, 그리고 최근 부상한 세대갈등이다.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의 압도적 우위하에 커지고 있는 세대갈등, 약화됐지만 사라지지 않은 민주 대 반민주, 그리고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진보 대 보수가 결합해 있는 구도이다.

 한국의 좌파들의 거의(최근 홍세화가 인식의 혁명적 변혁을 이루었으므로 거의를 한정어로 씀) 모든 공통적 인식이 노무현의 지역주의 양비론과 같다.  즉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 그리고 변방인 호남인의 '우리가 다르냐? 평등하지 않느냐!'라는 저항적 지역주의를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양비론이다.  이른바 소수 약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한국좌파의 괴기한 지역주의 양비론이라는 인식지형은, 결국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아가 힘들게 족쇄를 차고 뛰고 있는 변방인을 냅다 걷어차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부역배가 동포를 등쳐먹던 꼴과 유사하다.

 

"... 지역주의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호남이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역사적 역할을 해온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야 한다. 김대중 정부를 통해 호남의 한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됐다. 또 인구 면에서 영남이 누리고 있는 압도적 우위를 생각할 때 지역주의 정치는 지는 게임이다.'

 손호철이 일본제국주의시대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지는 게임'이므로 분명 현실순응적 선택을 했을 것이고 강자에 빌못어 친일부역배로 천황폐를 모셨을 거라고 본다. 힘겹게 뛰는 변방인을 냅다 걷어차는 꼴은 곧 일제강점기에 동포를 팔아 호의호식한 친일부역배와 꼭 닮지 않았는가!  결국 한국좌파나 노무현은 호남 변방인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릴 이성이나 감성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호남의 한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한다.  호남 변방인이 감정의 노예인가?  김대중이 대통령됐다고 한이 풀렸다니, 김대중이 집권하여 변방 호남을 위해 심화된 지역 양극화를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폈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평등한 구성원임에도 다르다.
서울과 영남에 사는 주민들은 결국 변방인의 세금으로 혜택을 누리고 사는 선민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마저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경부고속도로는 '72년에 4차선으로 개통되었는데(지금은 8차선이다), 호남고속도로는 30년 뒤에서야 호남에 누웠는데 아직도 4차선이다.  똑같이 세금내며 살고 있는데도 1세대 늦게 호남에 가로누운  것이다.  그것 뿐이랴,  산업시설은 편재는 어떻고... 이로 인해 1세대간 누적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가치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를 것이다.  즉  결국 호남의 '우리가 다르냐? 차별을 철폐하고 교정해 달라'는 헌법적 권리라는 외침을 한갓 감정적 배설로 폄하하고 심지어 인구로 또는 경제럭으로 약자이므로 그래서 지는 게임하지 말고 그냥 사이비 진보정당을 지지해 주라는 주문을 왼다.

 

인본주의자 K. 마르크스가 구천에서 통곡한다.

 계급사관을 잘못 이해한 한국좌파들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사관, 즉 편재(偏在)한 생산시설이 지역문화를 규정했다(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뻔한 명제를 외면하는 형태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들먹이는 도식화된 인식틀로 한국의 특이한 병리적 정치지형을 재단하는 것도 흡사하다.  인식의 보편성이나 학문의 지향적 보편성이 개별성을 질식시키는 그것이라면 이미 보편성을 결하는 것임을 괴이한 한국 좌파들이 어찌 알겠는가?

 

 한국좌파의 인식이 이 정도라면 한국 좌파는 100년이 지나도 결코 한 쪽 날개는커녕 깃털 한 개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한국사회, 요즘 헬조선이라 일컫는 양극화가 극심한 환경은 지역주의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고 있는 한국 좌파와 지지자들에게 배신의 칼날을 겨눈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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