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표논쟁을 너머 국민화합의 단초를 찾아서

미국으로부터의 편지

 

호남 결집표에 대한 해석에 있어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시는 분, 그러나 95%의 몰표는 역시 받아들이는데 곤혹감을 떨칠 수 없다고 토로하시는 분들을 위해 씁니다.

이 번 대선의 몰표를 우려하는 분들이 자신의 출신지역(.호남과 무관하다는)을 내세우며 지역감정에 중립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지역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임을 알아 달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출신배경 하나로써, 자기들의 주장이 지역감정을 담고 있지 않노라는 근거를 삼으려 합니다. 이런 주장은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참으로 위험한 논리입니다.

출신배경과는 무관하게 얼마든지 지역감정에 절어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에서의 자유를 표방하는 자체가 오해일 경우가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40여 년에 걸친 수구냉전세력의 집권에 의해 얼마나 길들여지고 뇌세척을 당해왔는지, 그 예를 보이려고 합니다.

 

영남을 지역적 근거로 한 그들은 지역주의를 자의적으로 조작 확대 유포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이용하는 매국적 전략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남 출신자는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호남출신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자리하는 구도가 강고해졌습니다. 강자의 주장은 여론을 주도하기 마련입니다. '2등 국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호소와 주장은 그것이 대단히 절박하고 말 그대로 정당성이 있을 때 마저도 반향 없이 늘 허공에 흩어지고 맙니다. 그 예를 이번 '몰표 논란'의 현장에서 똑똑히 보게 됩니다. 지역감정에서 자유롭다는 사람들마저도 얼마나 현 지역주의의 틀 속에서 자유스럽지 못한지도 극명히 보여줍니다.

(이 글은 '중립주의자'이신 M형의 주장을 내내 생각하며 쓰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M형은 1225일 한겨레 토론방에 '중립적 시각'이란 아이디로 "지역감정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을 썼었지요)

저는 여기서 호남표에 대한 논란의 현상 자체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왜 호남표를 문제 삼는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왜 호남표에 대한 의구심이 많은 사람에게 드는 것인지가 나에겐 오히려 큰 의문입니다. 스스로 편견속에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중립임을 표방하며 공정함을 호소한 뒤, 굳이 호남표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하는 지 사회심리가 그것이 매우 궁금합니다.

님들은 문제제기시 스스로 매우 불편부당한 정보라고 믿고 있는 근거들를 제시합니다. (대선 이후 수도 없이 쏟아지는 반론의 글들이 95% 몰표의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굳이 더 보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님들이 굳이 치우친 정보만을 수집했을까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님이 지금까지 지역감정과 관련하여 절대적으로 편향된 정보에만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언론의 권력을 40여 년간 독식한, 영남을 지역적 근거로 한 세력들이 만들어 낸 왜곡된 정보들에 매우 길들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님()은 언제 호남의 입장에 서보신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 지를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이 이제까지는 수구냉전 기득권층이 생산해낸 정보만 접해 왔을테니, '중립'을 견지하기 위해서라도 호남인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정보도 접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남인의 목소리는 편견에 가득 차 있어서 들으나 마나 한 거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40년 영남 기득권층이 생산해낸 정보들만은 편견이 없노라고 자신하겠습니까. 만약 현재까지 생산된 정보들이 가치중립적인 것들이라고 우기신다면 님은 수구세력에 의해 이미 구제불능 상태로 세뇌 돼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럼 님이 어떤 면에서, 편견의 질곡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지를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문제제기의 시각입니다. 바로 님이 글을 쓴 동기 자체란 뜻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경악할 사실은 영남표의 수구성입니다. 그런데 네티즌의 대부분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합니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무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듯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반면, 놀랍게도 오히려 호남표를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호남표에 문제 있다고 아우성입니다. 님의 문제제기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왜 영남 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합니까. 영남은 수구꼴통집단이니 아예 논의에서 제껴 놓자는 합의입니까. 아니면 영남에게 무슨 큰 죄를 졌습니까, 큰 부채를 졌습니까. 영남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아니면 영남은 그렇게 우리가 감싸고 돌아야만 할 지치고 천대받는 소외지역이라도 되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침묵합니까. 너무 거대한 권력이라 두렵고 겁난다는 겁니까. 그렇지만 호남은 어차피 늘 눌려왔으니 좀 추궁해 본들 큰 일이야 벌어지겠나 하는 기회주의적 발상은 아닙니까.

호남의 표는 관제화된 표, 동원된 표가 아닙니다. 각각의 개인이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상식과 비상식 중 그저 상식을 지지했던 결과일 뿐입니다. 95% 라는 숫자가 아직도 영 께름칙하다고 느끼신다면 이 나라 정치사회 구조가 얼마나 참혹할 정도로 비틀린 지경이었는지를 먼저 살피셔야 할 겁니다. 95%는 대한민국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고 상징입니다. 더구나 지지받은 노 후보가 호남지역의 패권을 부르짖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무랄 구석이 없습니다.

반면 이회창 지지 영남유권자 75% 중 절대다수가 영남패권주의를 선택했습니다. 20%, 30%, 40%도 아니고 전체 75% 중 절대다수가 영남 패권주의의 기치에 떼로 몰려든 겁니다. 호남표를 분석해 보십시오. 거기 호남패권주의의 흔적이 있습니까. 5%라도 있습니까. 어떤 호남 유권자가 부산출신 후보를 지지하면서 호남 정권 재창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꿨겠습니까.(영남표가 갖는 지역패권주의의 표심을 읽는 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그것이 유권자의 몇 %인지를 따지자는 유치한 얘기가 아닙니다. )

대한한국의 수준이 아직 이 정도입니다. 이만큼이나 한국은 정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불공평이 지배하는데도 님과 같은 사람은 나서서 중립임을 자랑스레 외칩니다. 영남표에 대한 가감없는 이해를 위해 며칠 밤인가를 꼬박 지새우고 난 뒤 호남표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도무지 봉건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지역패권주의가 75%의 수치 속에 극명하게 드러났는데도 그 무지막지한 집단주의는 논의에서 면제를 받고 도리어, 상대지역 출신이지만 노 후보의 탁월한 자질과 능력을 평가하는 '상식'을 택했던 호남인은 트집잡히고 추궁당하는 이 현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세상입니다. 이게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침묵하는 여러분 모두가 바로 공범입니다. 영남표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 않은 여러분이, 비상식이 버젓이 상식 행세를 하고 있는 이 나라를 만들고 있는 협력자입니다.

 

호남인은 자기방어를 하기에 급급하다 못해 이제 지쳐 있습니다. 왜 그들이 떳떳한 일, 자랑스런 일을 했으면서도 수세의 입장이 되어 자기변호에 내몰려야 합니까. 경제적인 차별보다 몇 배나 더 깊고 질긴 상처는 사회적 차별에서 비롯됩니다. 70년대 초 산업화과정과 더불어 본격화된 박정희정권의 지역감정 조작 범죄는 호남인들을 간사하고 음험하고 의리 없고 뒤통수치고 천하고 교활하고··· 등등의, 부정적 인간상의 표본인양 이미지조작을 자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남인 뿐만 아니라 호남인을 제외한 전 국민은 호남인들을 멸시의 눈으로 흘기고 냉소하며 배타적 소외와 천시를 일삼는데 동조해 왔습니다. 이런 행태가 무려 한 세대를 훨씬 너머 이어져 오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 비호남인 중 문제제기를 했던 지식인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이제, 호남인들이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나마 방어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기막힌 심정에 울고 있는 것, 공감하십니까.

호남인들은 범수구세력을 포함한 영남의 지역패권주의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왕따 당하지 않을까 늘 두려운 겁니다. 쪽수에서 형편없이 밀리니, 모종의 구실로 비틀려 왕따를 당하고 말 지 겁나기 때문입니다. 호남인이 정당한 어떤 연유로 인해 왕따라도 당한다면 차라리 정의의 도가 살아있음을 보며 감사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모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차별당하고 멸시받아온 호남인들은 바르게 행동하고도 칭찬은커녕 세상모르고 시건방졌다는 괘씸죄를 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게 어디 살 세상입니까. 이게 어디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 줄 세상입니까.

우리는 모두 호남인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호남인이 아니었으면, 이 땅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군사독재의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덕에 이만큼의 민주화가 되었고 더구나 그들의 상식적인 투표행위란 공헌에 힘입어 우리 노 당선자가 탄생한 것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차별과 소외의 어두운 그늘에서 무려 40년 넘게 가슴을 졸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던 우리 형제인 호남인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향한 험난한 노정에서 뿌린 그들의 피의 희생에 커다란 부채감을 품어야 합니다. 이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한국인의 한이 풀리지 않습니다. 이들의 응어리를 풀지 않고서는 이 응어리가 끝내 우리 각자의 족쇄가 되어 국민화합을 저해할 것입니다. 호남인의 소외를 슬그머니 모른 척 하고 사회통합을 운위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은 위선이요 속임수입니다. 그 화합은 말뿐인 통합이고 어거지입니다. 그것은 호남인의 가슴을 아리도록 멍울지게 할 뿐입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어느 유명 논객은 그러합니다. 아주 당당하며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전라도 깽깽이들, 그만 징징거리고 아예 전라민국으로 하나 떼서 독립이라도 하라고요. 국민 화합이 이 나라가 당면한 최고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마당에 그런 막말을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부당하게 차별받아 왔던 호남인들을 위무하는 것은, 국가의 현안 어쩌고 하기도 전에, 저 인간의 양심을 지키는 자의 따뜻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떨림이요, 영혼의 맑은 목소리입니다.

하물며 희망을 싹틔울 새 정권의 여명을 맞아서까지 호남인을 몰아세우는 잔인성은 그만, 동작 그만! 으로 끝내세요.

중립을 주장하신 님 이하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영남표에 대해 문제제기 하시기 바랍니다. 휘어진 것은 바로 펴야 합니다. 그들이 다수여서, 이 사회에서 힘이 있으므로, 아니면 긁어 부스럼이므로 영남표에 대해선 눈 질끈 감자라고 하는 멘탈리티를 끝내 견지하는 이상 이 땅은 계속해서 전근대주의의 진구렁에 갇혀 헤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남인들이 스스로 하면 더욱 좋을 것이요, 우선은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남인을 도매금으로 매도하자는 게 천만에 아닙니다. 영남인을 양심불량 집단으로 몰아넣고 나는 빠져나와 카타르시스나 즐기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목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지역감정에 대해 치열하게 자성하는 기회를 갖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호남과 비호남이란 대립구도 속에서 '상대'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만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비판해보자는 겁니다. 이 일은 당연 영남인이 주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호남인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내가 해봤자 '라도'애들은 안 할 텐데 뭐," 라며 책임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몸 안에 암세균처럼 스멀거리는 지역편견을 청정하게 세탁해내는 일이, 개인이 마음 한번 바꿔먹겠다는 결심으로 가능해질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 병은 개인의 질병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전 사회 구성원들 뇌촉수 곳곳까지 깊숙히 침투한 전염병입니다. 따라서 나 하나만 득도하여 깨어나고 병을 치유 받는 게 아닙니다. 주위의 전염병 환자의 몸에서도 동시에 병원균을 박멸해야만, 나 또한 병의 재발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공론의 장'에서 토론해야 할 이유입니다. 이 질병은 수치스러운 병이므로 쉬쉬하다가 그저 나 홀로 아스피린 먹고 치유되는, 그런 병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대명의 햇살 아래 거침없이 펴놓고 공개방송으로 토론하여 균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각 균에 최적의 치유제를 개발하여 우리가 동시에 복용하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이 지난한 수고를 건너 뛰어 국민간 화합을 꿈꾸는 것은 허황하기 짝이 없습니다. 국민화합이 어디 대~한 민국 한 달 외쳤다고 내게 달려와 주었습니까. 월드컵 함성 속에서 국민화합에의 열망만은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이제는 공개토론을 통한 자성입니다.

님들. 지식인, 그리고 개혁의 논객들이여, 입을 열어 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결코 쉬쉬하지 말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시작합니다.

오하이오 작은도시 실베니아에서

이경렬 드림

영남과 호남 그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영남의 공세적 '우월의식'과 비영남의 대응방식

 

1. 영남인의 무의식 결정론

영남패권주의 사고 방식에 깊이 동화돼있는 일반 영남민중에 대비되는 호남민의 의식은 영남패권주의적일 것이며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 전체의 영남패권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는 하부 체제로서 역할 분담을 하는 현상이 지적되는데 그것은, 비영호남지역민의 사고 방식이 영남패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영남패권이데올로기적 이라는 점이다.

먼저 영남인과 호남인의 의식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영남인의 그것은, 위에서 "사고 방식"이라 표현했듯이 무의식의 영역을 상당 부분 포함하는 사고 체계인 반면, 호남인의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이 아닌 깨인 의식이라는 차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아울러, 비영호남인의 사고는 이 중간 개념으로서 '의식'에 경도된 혼합적 사고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 무의식과 의식간의 차이가 이 영남패권주의이데올로기의 본질과 사회현상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대부분 영남인은 자신 안에 내재된 패권의식에 대한 자각이 약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각하기를 기피하는 무의식이다. 그들의 우월의식, 가해자적 위치, 수구성, 이기심,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혜택의 제1차 수혜자라는 현실, 등등에 대한 자각을 한사코 거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 싶어한다라는 부분이 이들에겐 무의식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그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숨 쉬어 왔었기 때문에 스스로 냉정한 자의식을 갖는다는 게 용이한 일이 아닌 점을 인정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환경을 자기 합리화의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무의식도 이들의 사고체계를 고착시키는데 일조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영남인들의 사고 방식은 그들이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사회적으로 우호적인 조건을 항구화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전술로써 현실 사회에서 작용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해악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그것을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 영역에 머물게 함으로써 스스로 면책을 부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개인과 타자 영남인간에 유사한 사고방식을 서로간에 부추기고 강화하여 이미 의문 제기를 탈각하는 자연스런 관습으로 녹아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의 영남인만의 관습은 오직 그들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점유한 사회적 강자라는 위치로 말미암아 자신들에 의한, 자신들만을 위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여타 하위 지역민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영역만으로 그들의 사고 방식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매우 명료한 의식의 영역에서, 이미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작동하는 편파적인 룰이 자기 개인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해서 지금까지 작동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편리한 자기 합리화 (, 비영호남인들을 포함한 전 사회의 자발적 합의인 것으로 주장) 심리 속에 그 불공정한 룰이 그만 폐기되고 마는 것을 절대 지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무의식을 가장한 생득적 이기심이 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다.

 

 

2. 호남인의 의식 결정론

 

이와 같은 영남인들의 사고 방식과는 달리 호남인들의 반패권주의적 성향은 매우 분명한 의식의 영역에 의존해 있다. 왜냐면 이들의 사고는 영남인들의 자기 정체성 규정에 따른 반응으로써 형성된 후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영남인들의 사고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혹은 그것의 개연성에 따라서 부단히 의식적인 활동을 통한 정체성의 규정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그들이 선택하는 생존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영남인의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경우, 손해나는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호남인은 늘 강자의 의중을 의식의 영역에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비영호남인이라는 주변인들도 강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매 한가지이니 이들에게 우호적 시선을 기대하기도 사실상 어려운 형편인 이상, 호남인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이중 억압의 조건 속에 갇혀있다.

이처럼 호남인들은 영남인들에 대한 관계 공학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매우 의식적 결단으로 재구성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영남인들의 성향에 대한 소상한 정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영남인이 우월의식에 젖어있다는 사실을 잘 앎으로써 갖게 되는 호남인의 반응은 매우 복잡한 심리적 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영남인으로서는 이러한 호남인들이 설정하는 자신들에 대한 위치 선정에 대해 전혀 신경쓸 일이 없다. 그들은 사회적 절대 강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예컨대, 호남인들로서는 영남인들의 행위 양태에 대해 놀람, 두려움, 미움, 증오, 비웃음, 현실인식, 무력감, 절망, 연민, 자기성찰,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기 위치 설정이라는 일련의 심리적 과정과 이성적 결단을 거칠 수 있다. 물론, 증오와 비웃음 등의 낮은 단계에서 그만 위치 설정을 함으로써 영남인들에 대한 적대적 자세를 최종의 정체성으로 갖고 마는 개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차원에 그칠 뿐, 집단적으로는 역시 평화적 공존이라는 공학적 위치 선정의 원리안에서 이성적인 사고 과정을 통한 정체성 정립을 결정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의식의 층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해둔다.

 

 

3. 호남인의 인식론적, 도덕적 우위와 그 이유

 

지난 번 글에서 요약한 영남인의 사고 방식의 단면들으로서 그들이 가진, 패권의 물적 토대가 와해될 가능성에 대한 공포, 선민의식의 와해에 대한 공포, 사회 질서 재편에의 적응력 결여에 대한 공포, 영남인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의 공포 등등에 대해 비영남인들은 깨어있는 인식을 가지고 가지고 있는 반면, 영남인들은 비영남인들이 가지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속수무책으로 그 심리를 노출시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호남인들이 영남인들의 심리를 읽지 않을 수 없는 사회 환경 조건에서 생성된 결과는 기대치 않게도, 영남인에 대한 인식 수준의 상대적 우세 점유이다. 이렇듯, 무의식의 영역을 포함하는 영남인의 사고 방식과는 달리, 순수 의식의 영역에서 이성적 사고 회로를 통과함으로써 호남인들이 갖게 되는 심리적 복합성, 사회적 정당성, 윤리적 우위는 의도치 않았으나 슬며시 스며들어온, 너무도 분명한 긍정적 부산물로 남는다. 이것은 호남인들이 태생적으로 도덕적 인자를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억지 주장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구조화된 사회적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비호영남인의 상대적 자율성 확보 조건

 

그럼, 비영호남인들의 사고 패러다임은 어떤 패턴을 더욱 닮아 있을까? 이것은 언뜻 각 개인의 결단에 맡겨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 쉬우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회적 조건에 수렴한다고 봐야 한다. 영남인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 약자라는 위치로 인하여,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는 결정권이 그들에게 없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남과 호남의 관계 설정에서 결정적으로 파생되고 만 것이 아닌, 그들 지역인들의 능동적인 사회적 행위와 기존의 사회적 구조 간에 벌어진 타협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조건을 무의식으로 받아들이는 면과, 의식의 차원에서 타협적 관계 설정 과정을 거치는 양면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호남에 비해, 사회적 절대 강자인 영남에 의한 견제를 덜 받았고 그런 만큼 자신들의 독자적인 관계 설정의 여유가 더 풍부한 비영호남인들이 갖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비영호남인들의 사고 방식은 비교적 넓은 스팩트럼에 걸쳐 있다고 판단된다. , 개인적으로 혹은 소규모 집단별로 영남패권의 우산 속에 들거나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편입되어 직접적으로 물적 정신적 혜택을 볼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적은 노력만으로도 영남패권의 해악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능동적인 위치 설정이 그만큼 용이한 조건 속에 있다. 비영호남인은 호남인의 위치와는 달리, 사회가 규정하는 강제력의 틀에서 자기 의지의 독자적 운용권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당연히 그들 각각이 속한 지역이 사회적 강자에 얼마만큼 깊이 종속돼 있느냐에 따라 또한 크게 영향받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호남과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까운 제주민들이 갖는 호남에 대한 적대감이 전국평균을 넘는다는 사실이나, 충청민에 비해 강원민이 호남에 대해 덜 우호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경기인들이 가지는 정체성 규정이 역시 '영남우호'이면서도 각 개인차가 타지역인에 비해 훨씬 크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사회적 조건의 결정력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제주와 강원이 정치 사회적으로 독립성이 그만큼 덜하고 동시에 사회의 주류(강자)인 영남권에 더 깊이 종속돼 있는 조건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결과라 하겠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각 지역별 주민이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대해 반응하는 양태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그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이나 소집단이 갖는, 정체성에 대한 자기 결정력도 상당 부분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영남패권주의를 분쇄하라!

인터넷 논객들은 '영남패권주의'라는 유령을 공론화해야

 

1219일 대선 이후 노무현정권의 수구로의 회귀를 목도하며, 터지는 분노와 때때로의 절망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신의 시대에서도, 작지만 또렷한 희망의 불씨가 오롯이 지펴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좀 거창하게 말해서 문화의 대변혁의 단초입니다. 사회의 거짓과 부정의 뿌리로서 버젓이 행세해온 군사파쇼문화의 또 다른 양식인 영남패권문화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작게도 혹은 크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얼마만큼 거대하고 심대한 사안인가 아닌가의 인식도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겁니다.

그저 영남패권주의를 지금까지 개인의 출세와 영달의 도구로써 맘껏 향유해온 정치모리배 즉 한나라당 극우 보수주의자들, 호남의 지역맹주 역할을 자임하며 정치생명을 연장시키는 소위 민주당 정박후, 개혁당의 유시민과 김원웅, 청와대 참모들, 그리고 노무현 등을 현실적인 공격타겟으로 잡고 본다면, '문화의 대변혁' 운운 조차도 낭만적 수사가 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눈앞의 적들이 바로 위에 적시한 정치권이긴 하되 상식적인 가치, 즉 자유와 평등이 우세한 시민 사회의 도래를 꿈꾸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남패권주의가 바로 자유와 평등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짓밟는 봉건사회의 유물이라는, 거대한 악의 문화임을 상기하게 될 겁니다. 이럴 때 정치 지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문화의 변혁이 되리라는 걸 인정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는 정치개혁이란 이슈로 시작을 하지만 결국은 문화개혁의 문제가 되고 말리라는 얘깁니다.

저는 영남패권주의의 극복을 위한 문제점으로 다음을 꼽습니다.

1. 영남인들은 물론이지만, 영남인들만이 결코 아닌 전//민은 40여 년의 영남지배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거의 체질화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2. 영남의 반민족, 반역사, 반민주적인 패권주의 문화와 행위에 대해 대부분의 호남인들을 제외한 전국민은 지금까지 그것을 일방적으로 감싸고 대신 변명해 왔으므로 모두 각자가 공범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희생양인 호남인의 부당한 불이익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다.

3. 그 공범자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하여 반성해야 한다.

4. 반성과 극복을 촉구하는 일환으로,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문제의 핵심은 이겁니다.

모든 /////이 자성(自省)-자발적이건 강제적 환경조성이건-을 통하여 영남패권주의 사고를 깨부숴나가야 한다.

, 이것은 정치권을 깨부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각 개인의 사고를, 그래서 전 사회의 문화를 새로이 갈아엎는 근본적 문화개혁까지 이뤄내야 할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제가 여기 대자보와 동프라이즈(www.dongprise.com), 시대소리(www.sidaesori.com)에 쏟아지는 정치적 목표를 염두에 둔 논의들로 인해 매우 크게 고무돼 있습니다. 엄청난 논의의 진전입니다.

그러나 문화적 목표를 절대 놓쳐서는 안되리라는 저의 믿음 때문에, 향후 영남패권주의 논의의 방향에 대하여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1. 정치권의 영남패권주의와, 특히 지식인을 포함한 일반 시민 개인의 골수에 박힌 영남패권주의를 지나치게 분리하여 비판하지 않아야 한다.

당장은 전선이 선명하여 타격하기에는 신이 날 일이지만 정치권만을 크게 부각시킬수록 그 뒤의 공생관계에 있었던 개인은 자연 면책되어 버리고 결국은 그들의 머리 속에 든 차별주의(이제는 영남패권이 아닌 여러 형태로 진화하고 말 차별주의)라는 사고를 영영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요즘 논의되는 '역영남포위론'이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문화적 목표라는 마인드가 없는 채로 실현되고 말 때에는 그 환상적인 목표 달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반목과 투쟁의 여지를 너무 크게 남길 수 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술은 각 개인이 의식 무의식으로 갖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의 폐해, 반인륜성, 공격성, 정신분열성 등등 인문학적 의미를 고스란히 투영한 해악성을 정치적 논의와 함께 끊임없이 논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 논의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고, 그 논의의 완성을 위하여 제언하는 것입니다.

2. 지식인들의 영남패권주의 논의 참여를 '강제'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하나 마나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시점에선 뚜렷한 전술이 없을 망정 이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논제는 동프나 시대소리 안의 논의가 아직까지는 매우 제한적인 단계라는 현실을 인정하며 내는 말입니다.

교수나 학자들은 세상 눈치에 빤하면서도 '비겁자'가 되기 쉬운 조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선명한 목소리를 내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비겁자'들이 선선히 공론의 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인 못지 않게 시류에 민감하기 마련인 지식인, 교수 학자 부류들은 어느 정도 대세가 보인다 싶으면 너도 나도 뒤질세라 커밍아웃할 겁니다.

이러한 자발적 참여를 '강제'케 하려면 역시 일반 대중의 공감대라는 여론을 먼저 형성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 영남패권주의 폭로의 정의로움을 선전해나가야 합니다. 정치 공학적 차원에 지나치게 매몰된 투쟁 위주가 됐을 때는 그 역작용으로 일반인의 논의 참여를 차단하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론의 환기와 그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는 우리 주장의 정의로움이라는 인문사회학적 가치를 더욱 강조하는 게 효과적 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줄기찬 선전활동으로 공감대가 형성될 때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좀 더 효율적인 선전 운동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지식인의 참여를 강제하기 위한 조건 형성으로서, 우리는 이 논의의 정의로움과 도덕성을 중점적으로 알려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정치'지향적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3. 영남 지식인과 영남 일반인에게 지금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의 짐을 지워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 되게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영남 출신 지식인의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대담한 비판을 몹시도 경이롭게 평가해왔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이 대선전 시민들의 희생적이기까지 한 절대지지를 누린 환경조건에는 그가 영남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이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작용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남인이 '영남에 비판적이다'라는 것과, 서울인이 '서울에 비판적이다'는 것과, 호남인이 '호남에 비판적이다'는 것들간의 가치부여 차이는 아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노무현은 그 전도된 혜택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유시민, 노혜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영남패권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을 때 그들은 그 한 번으로 정의의 화신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에 와서 이들이 구제불능급 영남패권주의자임이 입증되고 말았습니다(이 말에 이의를 달고 싶은 사람은 저의 이전 글을 읽어보시거나 딴 자료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반영남패권주의라는 인증을 받으려 한다면 한층 더 철저하고 엄격한 일반의 검증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불공평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이들이 짊어져야할 책임의 일부입니다. 영남패권주의로 인해 부당하게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말에는 당연히 정치인 추미애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일반 영남 시민들도 포함됩니다.

4. 마지막으로, 인터넷 매체와 정치담론사이트들이 영남패권주의 비판의 공동메카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당파주의적 배타성으로 해야한다가 절대 아닙니다. 이들 싸이트보다 더욱 효과적인 토론장이 만들어질 때도 배타적으로 여기를 고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 비판의 논의를 연중 365, 7, 끊임없이 지속함으로써 이들 세 싸이트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그 역할을 선도적으로 해나가도록 늘 각오를 다지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빼야할 논제도 혹 있을지 모르겠고 더구나 보완해야 할 논제는 각자의 머리 속에 쌓여있을 정도이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영남패권주의 타도에 천착하는 여러 논객들의 의견과는 상충하는 점도 더러 있으리라고 봅니다.

꾸준히 이 논의에 참여하실 것을 기대하고 또 믿습니다.

유령과 악령, 우리 안의 영남파시즘

영남인이 적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와 옹호세력이 적이다

 

'영남패권주의'의 분쇄를 위한 대의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크게 보아 하나는 소극적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적 저항입니다. 하나는 영남패권주의의 실체를 인정은 하나 그 심각성을 인식 못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패권주의의 존재, 책임과 역할 자체를 호남에게 덤터기 씌우는 파렴치 조폭 무리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과연 가능할까요?

제 기준입니다. 일단 한 번의 설득작업으로 성공하지 못한 부류에겐 두 번째도 세 번째의 시도에도 성공의 가능성은 무망하다는 판단입니다. 이 때는 문제가, 이미 인간 양심에의 호소라는 영역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반영남패권주의가 이들 각 개인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 영남패권적 정치 사회 문화 체제 아래서 기득권층에 속하여 아무 문제없이 계속 잘 먹고 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를 스스로 깰 하등의 동기나 이유가 없기 때문인 거지요. 무슨 뜻인가요. 이들은 수구의 틀안에 안주해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겐 설득의 노력이 모두 허사입니다. ''패권주의가 곧 제 밥그릇 빼앗기는 걸로 인식하여 반사적 혐오감과 내면적 공포감을 발악적으로 드러내는 자들에겐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영남패권주의의 향유에 관한 한, 영남인들에게는 기득권층과 기층민간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층민마저도 영남패권주의는 자랑스런 사회적 가치요 프라이드고, 프리미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기층민들에게 '영남패권주의'란 경제적 기득권이 아니라 <사회적 기득권>을 부여하는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그들이 공사판 인부라고 적나라하게 가정해 봅시다. 그들이 어울리는 비슷한 계층의 팔도 사람들이 거기 다 있겠지요. 이들이 모두 평등할까요? 아닙니다. 영남인이 누리는 사회문화적 프리미엄으로 인한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영남인은 그들 스스로의 우격다짐 말고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프리미엄, 곧 힘의 우세가 이미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겁니다. (사실은, 시쳇말로 소위 영남인의 '무대뽀/우격다짐' 기질이라는 것도 사회문화적 장치가 부추기고 정당화시켜준 겁니다)

이 구조는 오래된 틀입니다. 그것은 평소에는 은근하여 수면위에 드러나지 않으나 매우 조그만한 이해가 생기기만 해도 그 위세는 시퍼렇게 튀어나와 금방 공격적으로 상대를 짓이기는데 이용됩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에 기반한 도발적 행위를 보세요. (이 매우 일반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한국의 막돼가는 정치판도 정상적이라 수용하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의가 있는 사람은 저의 이전 글을 보시거나 다른 자료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이렇듯 사회 기층에서마저도 영남패권주의는 여전히 드센 위세를 뽐냅니다.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범인류적 보편가치라는 평등을 추구하는 문화개혁으로서의 ''영남패권주의일 망정 이들에겐 곧 제 자존심과 프라이드를 빼앗는 반동외래사상이 되고 말아, 그 기득권을 위협하는 소리와 기도가 나올 때마다 줄기차게 욕하고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겁니다.

바로, 영남패권주의는 극소수 정치인들의 권력싸움에 불과할 뿐, 영남의 서민과 기층민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무대뽀'들의 주장이 억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영남패권주의가 이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문화로서 굳어진 지가 이미 수십 년인데 거기에서 자유로울 사회 구성원이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회 기저층에서도 이렇다면 사회 기득권층으로부터 나오는 불평등이야 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반인류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반사회적인 것이 바로 이 영남패권주의 문화입니다. 이것은 문화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연스런 문화로 오래 전부터 편입돼 있음을 바로 인정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세계 민주사회의 역사에 유례없이 오로지 남한사회만을 특징짓는 이 야수적인 문화, 영남패권문화를 강력한 의지로 퇴치시켜 나가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한국의 문화이므로 그것이 오직 영남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님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 패권주의에 저항해 온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그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물들어 있습니다. 침묵하는 비영남, 비호남인들 모두가 영남패권주의를 공기처럼 편히 받아들이고 호흡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실상은, 이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경험할 때 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사회 기득권층에 기대어 있을수록 그들의 문화 지키기 의지는 영남패권주의자인 순수 영남인의 그것과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이 반동적으로 저항하면 할수록, 평등사상과 인권존중사상 마저도 단호히 거부하게 할만한 사회문화적 기득권을 이들이 '지금까지 누려왔음'이 웅변으로 입증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려 40여년 입니다. 이것이 Fair (공평)한 일입니까? 거기 정의가 있습니까?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에게 정당성이 있습니까?

이 문제는 지역감정이라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활한 술책을 뒤에 숨긴 허위입니다. 아무 말이든 불평하지 않고, 공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없는 일인 것처럼 입 딱 다물고, 또 영호남이 교류하고, 스포츠를 통해 화합하고, 그리고 고정관념에 찌든 머리 굳은 쉰세대가 저세상으로 떠나버리면 아, 이 지긋지긋한 지역감정 없는 새로운 세상은 자연히 도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공상입니다.

물론 그 기저에는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영남패권주의 온존의 기제가 강력히 버티고 있지만, 우리가 손 놓고 있을 때는 이 <사회문화적> 기득권 수호라는 구조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굳어져만 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가 입을 벌려 외쳐야 합니다. 분노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해하는 자가 이 허위를 폭로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 만큼 성장한 것이 흐르는 세월과 함께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까? 아니죠. 잊어선 안 될 일입니다. 군사파쇼와 수구냉전세력, 극우기득권, 보수언론 등과 끊임없이, 타협없이 싸워온 순수한 청년들, 양심적 지식인, 희생적인 시민, 또 그 중에서도 특히 호남 민중들의 피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고 쟁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민주화가 이룩됐습니까? 더 이상, 피를 운위하는 것은 시대착오입니까? 좋습니다. 스크럼을 짜고 벽돌을 던지는 가두시위의 시대는 아마도 간 듯 싶습니다. 그렇게 희망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계층간의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누구도 완벽히 치유할 수 없는 악의 존재만 문제의 전부가 아닙니다.(우리가 치열하게 타개해나가야 할 문제임은 물론입니다)

우리는 민주 사회가 갖춰야 할 가장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영남패권주의 문화 아래서 민주주의를 논하며 껄껄거리며 웃고, 숨쉬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한 저질 패권문화가 모든 사회 구성원 개인, 개인의 골수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데도 세계로 뻗는 대한민국,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되었다고 히히덕거리고 있습니다. 21세기라고 합니다. IT강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성을 고스란히 담고 좋아라 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수치스러워서 안되겠습니다. 이런 비루한 깡패문화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민주사회, 아직 요원합니다.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민주쟁취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신념과 의분과 열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아직 갈 길 먼 길, 구부러진 황토 길을 따라 수고로운 걸음을 또 내디뎌야 합니다. 이 대오에 지식인들이, 작가들이, 교수들이, 그리고 의분에 충만한 청년들이, 서러움 많은 서민 민중들이 나와 서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반평등입니다. 인류의 적입니다. 우리 인간 평화 공존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이 몰가치에 대한 척결의 대오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그냥 인간됨이 자랑스럽다면 이 반인류적 반동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영남인들은 어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잠재적인 적입니다. 누가 감히 영남인들을 적으로 모는 패륜을 저지르냐고요?

진의를 왜곡하면 안됩니다. 영남인이 적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가 적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영남인과 또 비영남인이 이 대의의 적이란 말입니다. , ''영남패권주의에 저항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추구 세력인 우리의 확실한 적이라는 뜻입니다.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기득권을 무장해제 시켜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에 절어있는 자의 정면에 똑바로 서서 모욕주어야 합니다. (아니, 조속히 법제화해야 할 일입니다.)

시급한 일입니다. 그것은 단호히 깨부셔야 합니다. 타협없이 깨부셔야 합니다. 수세적 입장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정의롭기 때문입니다.

영남패권주의와 전라도라는 '주홍글씨'

자유와 저항의 혼이 개혁의 주체이며 개혁의 정신이다

 

 

영남패권주의 비판 앞에 영남패권문화의 굳센 옹호자들이 악에 바친 공격의 소총수가 되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군요. 이들이 게시판에 올린 언어폭력을 본 분들은 지금 어떤 심정을 갖고 있을까요?

영남패권주의와 그 문화가 얼마나 공격적인지, 그것의 본질이 얼마나 인간 심연의 악마적 증오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이 조폭적 문화가 이 사회의 기득권 문화, 소위 주류 세력의 문화로서 그 아래 전 사회 구성원의 사고와 정서의 자유를 얼마나 지배 억압하는 폭력기제인지, 영남패권문화 수호자에겐 이것이 얼마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인지, 그래서 결국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너와 나를 분열시키는 무모한 책동은 아닐런지, 다시금 확인하며 몸서리를 치거나 아예 회의, 절망하는 분들도 생겼으리라 짐작합니다.

영남패권주의의 실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팔딱거리고 있는데 끝내 덮어두고 말겠다는 위선자들이 널려 있습니다. 조용히 사색하고 묵상하며 커피 한 잔으로 산뜻한 하루의 아침을 맞는 일상인들에게 웬 시대착오적 망령이냐며 얼굴을 심하게 찌푸리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소 당해본 체험이 없는 저들의 눈에는 안보입니다. 저들에게만은 영남패권주의의 악령이란 '허구'입니다. 소설입니다. 책동입니다. 빨갱이 짓거리입니다. 프락치 입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끝내는 '피해의식'이 되고 맙니다. 저 혼자 심심하여 방구석에서 뒹굴다 보니 허리가 좀 결린 것을 누가 저를 잡아먹겠다고 몰래 들어와 장작으로 팼다며, 단발마로 절규하는 정신병자의 피···식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말에는 미국의 50년대 중후반을 광란으로 휩쓸고 간 매카시즘적 마녀사냥 의지가 흘러 넘칩니다.

'피해자의 의식'이 아니고 '피해의식'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 인간으로서 가장 추악한 악마성이 응집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을 반 죽도록 멍석말이로 팬 뒤 그를 피해'의식'에 허덕이는 정신병자로 몰아부쳐 사회로부터 완전 격리시키겠다는 악귀의 현시 말입니다. 나는 피해의식이라는 공격적 조어를 들이대는 그 악마같은 동물들이 바로 인간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벌레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렇듯 영남패권주의와 문화의 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격을 파괴시킵니다. 억압당하는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짓밟는 자들의 인격도 함께 파탄의 구덩이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나찌파쇼와 인종주의가 그런 것처럼 그와 근본적으로 한 배아를 나누는 영남패권주의자는 이미 인간 말종이고, 거대한 사회악이며 벌레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길 가다가 뒤로부터 기습당해 뒤통수 얻어터진 놈이 더 이상의 몰매 맞는 게 두렵고 떨려, 화해한답시고 비굴한 미소 흘려야 합니까?

이게 몇몇 성질 더러운 놈들이 벌이는 시장바닥 싸움판인 줄 아십니까? 영남패권주의로 무장된 개개인의 의식은 너무도 당연히, 한 사회·문화의 소비 유통의 결정판인 정치현장에서 '깽판'을 치는 치졸한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정부하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개핵'이 개혁과는 애초부터 아무 관련이 없는 파쇼의 회오리로 서서히 일어나는 것도 바로 그 주체들이 영남패권주의자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들의 패악질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청기와집 주인과 참모, 신당추진세력, 재벌, 보수언론, 심지어 개신교, 족벌사학··· 끝도 없이 나오는 이들 모두의 권력과 기득권의 태생의 뿌리는 영남패권주의입니다. 영남패권주의자임이 명명백백히 드러난 노무현(정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는 이 문화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조폭문화에 순응할 수가 없습니다. 곧 맞아죽어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비장의 무기가 있길래 맨몸으로, 그저 짱돌 몇 개 주워들고 돌진하겠다는 겁니까?

이거 돈키호테 같은 과대망상증 걸린 사람이나 할 짓 아닙니까? 아니요! 나는 그런 바보도 소영웅주의자도 아니올시다.

오직 하나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내게는 전라도 사람이라는 주홍글씨가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울 수 없는 그 마크가 차라리 나를, 내 인격과 온 인생을 구원합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으되 이젠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고결한 전라도의 혼으로 세례받았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역사의 위기 때마다 거칠 것 없이 다 떨치고 일어났던 민족애가, 그 희생의 혼이 광주에, 전라도에 면면히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구름이 몰려온다고, 풍랑과 파고가 좀 높다고 발발 떨며 움츠리는 '비겁자'들이 아닙니다. 군사적 정치적 국가 폭력이 성형을 거쳐 문화적 폭력으로 안면을 바꾼 채 있지만 그것의 악마적 DNA가 거기 그대로 원형 보존되어 상시적 비상포고령이 발동되고 있는 이 21세기의 생뚱맞게 암울한 시대 상황에도, 우리는 언제나 밝은 빛, 자유와 평등을 누리겠다는 소망의 불꽃을 꺼뜨린 적이 없습니다.

 

숨을 쉬며 살고는 있지만 내 영혼이 짓밟히고 항상적으로 이유없이 남의 감시와 눈치 속에서 움츠려야 하는 삶이라면 이제 그만 내던져 버릴 겁니다. 군사파쇼를 정면에서 맨몸으로 맞아 대항했고, 그 채찍과 모욕과 피를 다 지불하고 이만한 민주라도 쟁취해 낸 주체가 바로 누구인데, 요까짓 영남패권 반동 하나쯤에 그만 기가 꺾이고 말일이겠습니까? 이미 이뤄낸 바가 있고, 또 그게 무슨 새삼스런 일도 아닌데 가만히 거꾸러져 한숨 속에 안주하고 있단 말입니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는 그렇게 만만한 땅이 아닙니다. 반도 중에서도 뒤축에 비켜있는 조그만 조각 땅 그곳으로부터 이 나라 민주주의의 원류가 솟아 흘러왔던 것입니다. 민주의 정신, 그 자유와 평등, 평화의 혼이 가장 순결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땅입니다.

전라도의 혼이 죽을 때 이 나라의 혼은 함께 죽습니다. 남을 공격하지 않는 평화 애호, 그러나 억압의 사슬이 옥죄어올 때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앞뒤 재지 않는 투우처럼 무식하게 돌진하여 치받아버리는 저항의 혼은, 멸시와 천대 소외라는 양재기 밥그릇에 늘 배곯아 뒹구는 뼛속 시린 그 긴긴 나날들을 태우고야 건져낸 영롱한 사리(舍利)인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전라도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이 반도가 지금 이 시간 어찌되어 있을 지를 늘 상기하세요. 채임과 건드림에 지치고 더 이상 내줄 것도 없는 전라도가 이제 마지막으로 움켜쥐어야 하는 것은 오늘 만찬상에 올릴 조기 반 토막이 아니라 그 주머니를 몽땅 털어서 산 배고픔의 혼일 것입니다. 뒤로 물러설 것이 없이 타협할 것도 없이 평등과 자유의 원형 그대로를 지키겠다는 희생의 혼 말입니다.

 

전라도의 이 정신이 죽으면 한민족 모두의 생명은 함께 사그라져 버리고 맙니다.

전라도인 당신에겐 이것이 자랑이 됩니까, 천형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천형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천형으로 받아들이렵니까, 긍지로 받아들이렵니까?

,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아무말 하지 마세요.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그만 밀어 넣으세요. 이를 악 물으세요. 하지만 이제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세요. 당신에겐 전라도인임을 자랑할 선택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각오는 되어 있겠죠? 이 긍지를 오롯이 지켜내기 위해선 우리가 이제까지 희생함으로써 키워낸, 가진 자들, 누리는 자들, 혜택받은 자들, 무관심이란 폭력의 시계를 묵묵히 작동시키는 자들의 핍박을 당신은 이제 유희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 말입니다.

전라도의 혼, 민주의 혼, 평등의 혼, 자유의 혼, 저항의 혼, 소망의 혼은 세세토록 이 땅의 역사를 밝히는 횃불입니다.

우리가 곧 밟히는 듯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다시금 꼿꼿이 일어서고 맙니다. 주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이웃의 들풀들도 함께 들어 세워 풋풋한 평등과 자유의 바람을 기어이 쐬어 주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에, 평등과 자유의 정신 위에 손에 손을 포개어 엄청난 힘으로 결집시켜 나가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민중은 모두 전라도의 혼을 공유합시다.

이 대오가 개혁의 주체이며 동시에 개혁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영남인조차 억압하는 영남패권주의를 깨야

각 지역민의 집단심리구조, 비영호남인들이 움직여야

 

각 지역민의 집단 심리 구조 살피기

 

1. 호남 : 중층적

 

먼저 호남인들의 일반적 멘탈리티를 살펴보자. 이들의 심리 구조는 중층적이다. 영남인들처럼 단선적이지 않다. 이들은 정치적 차원의 사회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하나가 아닌, 서로 상충되는 가치로서의 두 개의 규범을 동시에 터득해야만 한다. 이 사회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히 사회의 아웃사이더가 되기 쉽다. , 사회 전체가-정확하게는 사회 전체가 아니라 사회의 극히 소수 지배층과 그 권력의 의지로서 대표되는 전체 사회인데-요구하는 질서로서의 규범을 익혀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믿는 가치가 자기가 속한 지역과 집단을 벗어난 '전체 사회'로부터는 경원되고 비하되는 가치라는 것을 깨달아 나가면서 혼돈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가 애착을 가져왔던 자신의 고향, 방언, 자랑스럽다 믿어왔던 역사와 문화, 심리적 일체감을 이뤘던 정치인, 정당, 사회단체, 문화단체 등이 전체 사회로부터는 모두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어있음을 깨달을 때 이들은 이 가치들을 버리느냐 아니면 타협하느냐의 곤혹스런 결단의 시간을 강요받는다. 이것을 버리려거든 당연히 평생을 주류사회와 고통스럽고 지리한 싸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이 선택하고 마는 것은 결국 자기 분열적 가치 체계의 수립이다. ,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는 전체 사회의 규율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아니면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이미 자기 안에 수립돼 있는 가치를 소중히 간직하기를 선택하지만, 이 사실을 자기와 가장 밀착된 일차집단을 이루는 사람들 외에게는 가능한 한 비밀에 붙여두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후 사회와의 치열한 불화를 각오하든지, 아니면 아예 자신의 정체성향을 뜯어서 완전 개조시키든지, 그도 아니면 사회에 대해 자신을 위장하든지 해야만 하는 기막힌 현실을 두고 쩔쩔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회와 불화하지 않기 위해선, 자기 안에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를 심어놓은 채 대외적으로는 그것과 대치되는(타협할 수 없는), 사회로부터 강요받은 주류의 가치를 자신의 대표가치로 내세우게 되는 분열을 체험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천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자기 방어의 메커니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을 피할 수 없는 호남인 각 개인에겐 대단히 비인간적인 인격적 강간의 체험이며, 사상의 자유를 유린당하는 체험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굴욕의 시간인 것이다.

 

사회가, 다른 것을 일단 제쳐두고라도, 가장 일차원적으로 호남인의 지역 자체를 첨부터 따지고 문제 삼고 나오는 데서 호남인은 일찍 이 사회적 질서에 대해 환멸을 느껴버리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만큼 사회의 제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깨어질 기회를 풍족히 부여받은 셈이고, 따라서 사회와의 타협의 필요성을 깨달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의 사회의식은 부쩍 자라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다.

 

 

2. 영남 : 단층적

 

반면, 영남인들의 멘탈리티는 단층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 영남인이 가진 사상과 정서와 호불호에 대해 시비걸 사람이 없다. 왜냐면, 이들이 속한 집단의 정치 사회 경제적 유력자들이 이 사회 전체의 규율과 가치를 결정짓고 있으며 그들 권력집단은 자신들의 외형적 상전이자 실질적 볼모인 영남민중의 정서에 영합해야만 하는 공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영남인이, 호남인이 맛봐야만 했던 혹은 맛봐야 하는, 인간적으로 비참해지는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행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 설정을 위한 갈등이나, 고민해야 할 자극, 동기부여의 경험이 대단히 희소할 수밖에 없는 그들 평균적 영남인의 사회의식은 사회의 전도된 가치체계의 틀 안에서 내내 헤어날 수가 없는 숙명을 부여 받는다.

 

게다가 정작 무서운 것은, 그들이 곡해된 가치체계--반인륜적인 패권, 특권, 차별, 배타, 이기, 불공정 등--에 안주하는 결과가 겨우 대외(타 지역인들에 대한) 경쟁력의 약화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이 누리는 신성불가침의 질서가 호남인이나 일부 비영호남인으로부터 도전받을 때 나오는 영남인들의 응전의 방식은, 상대를 하수로 낮춰 멸시하는 자세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므로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격적인 것이어서, 우선 스스로의 방어논리를 견고한 철벽으로 쌓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이 구성해놓은 기존 질서가 일부만이라도 균열이 일도록 만약 허용될 경우 이어지고 말 점증하는 반격의 수위와 그에 따른 방어논리의 궁벽함에 급작스레 직면하고 말 상황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그들로서는, 추호의 타협도 허용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도전하는 세력을 아예 사회의 공적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수구집단의 공세적 방식으로 줄달음질 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외부에 대한 벽을 높이 침과 더불어, 내부에 있는 잠재적 질서 파괴자 준동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욱 가혹한 벌을 준비해두고 그 싹을 미리 자르는, 파쇼적 내부 사회 환경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유지토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파쇼적 단일가치 체제에서는 이단아(저항세력)가 나올 가능성이 미리 차단되고, 또 그 체제 유지를 위한 공포의 수위는 늘 호남인들이라는 희생양에게 사회적으로 무거운 댓가를 치루는 모습을 시범보임으로써 항구적 싸이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 수구의 방식으로 벽을 높이 치다보면 그 곳 안에 안주함으로써 기성의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는데 동조해왔던 영남인들의 <사회적 인성>은 자신들이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스스로의 인격적이고 온전한 삶의 기회도 그만큼 지배 세력으로부터 박탈당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는 갈등의 골을 한층 더 깊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반인륜적인 사회적 행위가 왜곡된 <전체> 사회 질서를 항구화하는데 협력토록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그들의 수구적 질서 유지 방식이 가져오는 폐해는, 그 중 깨인 소수의 영남인들로 하여금 호남인이 겪어 왔던 것과 유사한 성질의 인격적 분열을 맛보며 살도록 강요한다는데 있다. 그들 깨인 소수가, 한국이란 사회 전체에서 당연한 관습이거나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존중되고 있는 제 가치가 사실은 반인륜적인 패륜이라는 것을 역사의식을 통하여 깨달아 가면서, 자신 주위의 원초적 집단까지를 포함한 같은 영남인이라는 주류가 실제로는 자신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에 실제 일어나는 사태이다. 그들은, 호남인들이 저항의 대상인 주류 사회를 향해 그랬던 것처럼, 결국은 자신들의 모태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회 주류에 대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가슴속에 짐짓 숨기거나 혹은 항상적으로 그들에 대항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결코 만만찮은 고해의 삶을 떠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반대하기를 인격적으로 결단한 영남인들이 극소수(말 그대로 천연기념물 정도의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호남인 못지 않게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조건을 설명한다. 이렇듯, 영남의 극단적 수구 행태는 그 안에서 순응하며 협력, 안주하는 수구적 영남인들에게도 그 인간성을 갉아 무너뜨리는 패륜이 되며, 더구나 올바른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저항하는 그 안의 깨인 영남인들의 선택권을 극심하게 억압하는 악덕인 것이다.

 

(이들 극소수 반()영남이데올로기 영남인은 그들이 그 스탠스를 주장함으로써 얻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가 단연코 없는 경우일 때만 상식적인 신뢰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의 진정성은 대단히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는 신뢰를 당연히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3. 비영호남인 : 혼합형-순응과 양심 사이

 

비영호남인들이 정체성 설정 과정에서 겪는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인간적 혐오의 경험은 호남인들에 비하여 훨씬 가벼울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멘탈리티의 중층적 형성의 개연성에서마저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질서에 대해 적어도 거의 성인이 될 때까지는 회의할 기회가 별로 없다 (호남인이라면 늦어도 고등학교 과정에서 다 겪는 것이 통례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깨어나기 시작할 때까지는 이들에게 작용하는 사회의 가치와 질서는 다 평온하고 온전해 보인다. 그러므로 선택권이 없는 채로 이들은 일단 사회 지배 질서에 협력하며 패권세력의 동조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존 사회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서 자신의 정체성에의 위치 선정이 일부 위선적이라는 갈등을 안고, 사회질서에의 순응일지, 양심에의 결단일지를 끊임없는 자문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개안(開眼)이 시작되고나서 부터는 인격적 결단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주류 지배 질서가 가하는 관습과 그가 속한 집단의 성격에 따라 사회적 압력이 더욱 극명하게 부담으로 인식되겠지만, 동시에 개인의 사회적 양심과 양식의 양에 따라 스스로 선택과 결단이 이뤄지는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꼭 영구적인 결단이 되지 못할 개연성도 아직 높다 하겠다. 이런 면에서, 비영호남인은 실로 향후 이 사회의 질서 재편 과정에서 키를 쥐고 있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 인식과 인격적 양심의 높이에 따라서 기존의 비틀린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 의지가 제고되고 따라서 사회 변동에 협력하겠지만 이들이 결코 독립변수라고는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비영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의 결단과 선도적 역할에 영향받아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희원하는 의지는 호남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강할 것이므로 이러한 동기부여는 이들로부터 비영호남인에게 확산될 것이다. 그러나 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와해시킴으로서 얻는 혜택은 영남인를 포함한 이 사회의 모든 개개인에게 차별없이 골고루 미치고 말 일이다.

 

 

4. 요약

 

이상의 논의를 정리한다면,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 아래서 호남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함에 있어 자괴감을 일찌감치 경험하며 주류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에 대외적으로는 순응하는 모양새를 갖추지만 내부적으로는 그것에 저항하는, 즉 중층적 심리 구조를 가진다. 그 저항이라는 결단의 과정에서 겪는 인격적 모욕의 경험이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체성 확립에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어 강력한 저항력을 키우는 동력이 된다.

 

영남인은 기성 사회 질서에 순응, 협력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혜택을 보장받지만 대신 인격적 피폐를 댓가로 지불할 수밖에 없다.

 

비영호남인은 사회적 질서를 강요받는 면에서 호영남인보다 탈출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이 부여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 설정에 대한 인격적 결단은 결국 사회 전체의 변동을 견인할 결정적 변수가 된다는 것이다.

영패는 논쟁의 대상인가, 논의의 대상인가?

 

 

영패 해체니, 영패 혁파니, 영패 분쇄니, 영패 극복이니 하는 말이 그 사람의 취향과 기분대로 생각없이 쓰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기에도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의 반영패 접근법이 옅게나마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영패분쇄'는 가장 맹렬한 의지를 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냉철함이 전혀 없이 열혈주의자의 높은 목청만이 요란할 거란 느낌이 있다.

'영패극복', '분쇄'가 함의하고 있는 제3의 객체로서 그 대상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자신도 그 영패에 일부 편입돼 있음을 인지하고 스스로도 자성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대신, 반영패의 대오에 참여할 적극적인 의지를 아직 유보한 자세를 내비치고 있다.

'영패해체''분쇄'에서 보이는 만큼의 능동적 행동의지가 결여된 채, 그저 막연한 심정으로 그것이 없어지기만을 기원한다는, 다소 책임을 방기한 사람의 의식이란 느낌을 전하고 있다.

'영패혁파'는 그 중 가장 발전된 인식과 진정어린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거기에는 영패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없어져야만 한다는 당위를 잘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노력과 힘을 동원함으로써 극복하겠다는 주체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어휘상의 이런 차이를 지금 내가 한가해서 구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잘못된 문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그 이유는 아래에서 논한다). 더구나 유희가 아닌 것이, 이 어휘들을 들여다 봄으로써 반영패의 해법에서 우리가 고려할 문제 범위가 좀 더 또렷이 드러나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분 과정을 통하여 객체(대상)와 주체라는 두 실체가 분류되고 역시 그 각각의 역할이 서로 다르리라는 점을 예시하게 된다. ,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객체', 막연한 <추상> 개념으로서 인식하는 '영남패권주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영패는 이념이나 신조 등의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어느새 내 앞에 마주 선 어떤 인간, 혹은 집단이라는 실존임을 알게 된다.

좀 더 관찰하게 되면, 우리가 위의 '영패해체'라는 어휘에서 이해할 때의 영패란 어디까지나 <개념(이념·신조·체제)> 에 불과하였는데 그것을 어떤 극복 '의지'와 엮어 사용하고 보니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집단>이라는 실존을 일컫고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휘를 정확하게 사용하자면, 영남패권주의혁파가 아니라 영남패권주의''혁파가 되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도 아님이 밝혀지고 만다. 혁파의 대상으로서의 영패란 하나의

1)<가치체계>이면서, 그 이념을 추종하는

2)<집단>이라는 실존임과 동시에 어떤

3)<시스템>이라는 사회 구조 등,

적어도 三位(trinity)를 동시에 거느리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영패라는 <가치체계>의 근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일전 나는 그것을 권위주의와 불공정규칙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아직 가설일 뿐이다. 더욱 연구되고 검증되어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어내야 할 과제다.

<시스템>은 어떤가?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회문화권력들이 어떤 이념과 시대적 이해를 업고 영남패권을 작동시키는지 그 메커니즘이 분석된 적이 과연 있는가?

그럼 영패를 구성하는 <집단>은 무엇인가?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며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임을 자임하는 한나라당 집단(영남패권 쟁탈전에 새롭게 뛰어든 신영남패권 열우당 집단 포함)이라는 정치권력, 영남권력과의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특혜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부를 독점하는 재벌이라는 경제권력, 조중동 등의 수구 언론권력, 나라의 부와 사회적 지위, 명예를 거머쥠으로써 문화적 최종 성과물을 독점하고 국가적 아젠다를 주도하는 강남 최상류층의 사회문화권력, 이 정도만을 우리는 겨우 손에 꼽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영남패권의 정수로서 뽑아낼만한 정치, 언론, 경제적 권력 집단을 규정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바로 <사회문화적> 권력의 실체를 규명하는 단계에서부터 우리의 불명료한 인식은 혼돈을 겪고 만다. 그들이 정치·경제 권력 집단과 횡적으로 일부 겹쳐있으면서도 엄연히 구별되는 또 다른 권력을 형성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강남이 아닌 곳에서 영패 시스템 작동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사회문화적 권력을 형성하는 대단히 유력한 집단(: 교수, 성직자, 작가, 예술가, , )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외, 수구냉전적인 영남대중 -그 중에서도 사회경제적 상류층에 대한 중산층, 서민, 그리고 기층민간의 차등성 ; 비호영남 대중 -그 중에서도 호남에 대한 차별의식은 없으나 정치적 영남패권을 지지하는 집단, 경제적 기층민이면서 호남차별의식이 뿌리 깊은 집단 ; 호남대중- 호남차별에 적극 저항하면서도 영남패권체제에 기생하는 상류/중산층 집단 ; (마지막으로) 개방/폐쇄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 등이 미제로서 남아 있다.

이들 각 집단에 대하여 어느 것이 영패의 골수를 형성하는 집단인지, 그들을 일률적으로 영패집단이라 분류해야 하는지, 책임 부담에서는 얼만큼의 차등 구분이 필요한 건지-요컨대, 우리의 반영패 운동에 있어 그들 각 집단이 우리가 가격할 타격 대상의 순위상 어떤 서열에 매김되어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명료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우리들 대부분이 아마도 이러한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 내가 지금까지 긴 설명을 통하여 말하려는 것은 바로 다음의 논의를 위해서다. 우선 이러한 형편지경에 우리의 인식 수준이 머물러 있음을 알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시스템이라면 <해체>될 것이요, <가치체계>라면 혁파될 것이며, 인간 <집단>이라면 설득되어야 할 것이다. 시스템과 가치체계를 설득으로써 해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을 해체하거나 혁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상대하는)집단이란 어디까지나 <설득>의 대상으로 남을 뿐이다. 그들을 혁파, 해체하기 위해서 당신이 아무리 그의 인격을 뭉개버렸다고 해도 그는 돌아서면 다시금 더 강고한 영패주의자로 거듭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넷(net)상에서 마주치는 상대마다-그가 어느 집단에 속해있는 지도 모른 채, 그래서 그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그에게서 영패의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보일라 치면 마치 평생 원수를 면전에서 만난 것 마냥 흥분하기 일쑤이다. 냅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곤 한다. 명백한 영패지지자한테만이 결코 아닌 것이다. 자기가 미리 정한 기준에 상대가 들어맞지 않으면 대번에 그는 골수 영패주의자로 낙인찍혀 버린다.

상대로부터 먼저 인격적 모욕을 당했을 경우 반사적으로 그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물론 나무랄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경우 반영패론자로서 저지르는 바보짓은 다음과 같다.

1. 영패를 없애는 일이 겨우 사람/집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단견이다. 지금 논쟁하고 있는 그 사람만 설득시키면, 아니면 논리로 죽사발을 만들면, 곧 바로 영패를 이기는 것으로 착각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패는 시스템과 가치체계와 집단이라는 삼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잊고 있는 사람의 경박이다. 집단은 삼위 중 한 부분일 뿐이며 하물며 당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집단도 아닌 일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 인격 무시 모드의 선제 욕지거리-그것이 카타르시스를 준다며 읽고 환호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봉사할런지 몰라도-가 영패논의에서 절대 무익하고 심지어는 해악일 뿐이라고 내가 믿는 이유이다.)

2. 대립되는 두 개 사이트간 언/논쟁에서의 승패가 영패의 현실적 타파와 굴복을 결정짓는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한 영패주의자가 주로 서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그와의 논쟁에서 이기면 서프라는 사이트 전체를 이기고 따라서 영패의 한 모서리를 부서뜨리기나 한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넷 상에서 그 사람의 소속이란 없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이트에 소속되거나 아예 소속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 사이트 커뮤니티라는 것이 네티즌이 거기 일시 머물다 지나치고 마는 개방집단임을 간과한 채, 마치 그 사람이 전체 사이트를 대표하기라도 하는 양 목숨을 걸고 논쟁에 임하는 방식은 자신과 인터넷 커뮤니티 전체를 늘 황폐케 하는데 이바지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 설전은 틀림없이 욕지거리 범벅으로 어우러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패를 주제로 시작한 논쟁은 이 점을 잊고 있을 때 백발백중 이전투구로 끝맺고 만다.

영패토론은 가능한 한 논쟁이 아닌 논의로 가야한다. 우리는 영패의 정체에 대하여 체계없이 겨우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다. 서로간 개념의 공유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논쟁이 이뤄질 수 없다. 지금은 논의하고 연구하는 단계라고 본다. 과연 우리의 영패논의가 그토록 초기 단계에 있는지는 위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바와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 영패가 가치체계, 시스템, 집단이라는 삼위로 이루어졌다는 것마저 깊이 고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런 단계일진대, 서로 자기 주장이 맞다고 입에 거품물며 댓거리 하는 건 아마도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영패논의자는 영패에 대해 이미 다 안다고 하기 앞서 더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부단히 자성할 일이다.

영남패권주의는 영남인의 일부인가 전체인가

구조적 패권주의는 개인과 집단 모두 포함, ‘공공의 적일뿐

1. <영남 일반>이 패권주의의 한 축인가, 아닌가

여기에서의 영남패권주의는 지역감정, 지역갈등, 지역차별의 사회적 불안 요소에 대한 인식상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각 개인의 선택적 문제로서 치환되고 말거나(소위 "지역감정"), 해당 지역주체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갈등 유발요인을 모호하게 윤색하여 사회적 문제로서의 심각성을 완전히 왜소화해 버리려는 시도이거나("지역갈등"), 부당한 관습이긴 하되 당사자 지역을 빼면 여타지역에겐 해당사항이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사소하며 기껏 사회 일각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로서 치부되고 말거나("지역차별”)하는 진실 가리기가 은밀히 숨쉬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인식은 역시 그 어휘 자체가 가지는 의미 영역을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대다수 우리는 자연스레 영남패권주의 용어가 가지는 영남의 가해자적 위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물론 거기에, 이제까지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사회의 소수 권력/특권층이 누리는 패권주의적 행태를 두고 그 기반이 영남지역에 있다라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으나, 그들 소수만이 아니라 그들의 패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며 공동 혜택의 수혜를 탐하는 '상대적' 기득권 집단이 또한 그 지역의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라는 사실까지를 개념화해 낼 수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야 (‘97년 대선을 전후하여 동국대 황태연교수가 용어를 개념화하였으나 일반화되는데까지는또다시 많은 시일이 걸렸다) 비로소 영남이라는 지역과 지역민을 분명히 명시함으로써 문제의 핵심과 그 주체가 영남인 일반 (특권층, 중산층, 기층민 모두 포함)이라는 사실의 인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 영남이란 지역을 명시하지 않았을 적엔 영남권력/특권층만이, 지역과 관련한 문제와 갈등의 주체라고 막연히 추론하고 말았었으나, 영남으로 제자리 매김하고 나서부터는 그 지역사회의 구성원인 일반 대중들도 문제의 한 축을 떠받들고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명쾌히 개념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의 패권주체가 겨우 영남을 지역적 연고를 가진 한 줌의 무리에 불과하다면 그 거대한 실체로서의 지역 이름을 굳이 그들에게 관형사로서 붙여준다는(:'영남' 패권주의) 것이 전혀 비상식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패권주체가 오직 극소수엘리트 권력 집단에 머무는 일이라면 '영남'이란 어휘는 이미 사장, 폐기되었어야만 했다. 만약 패권의 실체가 극소수 집단에 한정된다면, 그것은 영남패권 '집단'이라는 어휘로서 충분했을 것이며, 거기에 '주의'라 하는 이념의 한 형태를 갖다 붙이는 것이 패권주의와는 무관한 가치중립적 영남지역민 일반을 끌어들이는 억지가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이유없이 무고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을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용어가 정당한 지위를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얻어 누리고 있다는 현실 용인의 사실 자체로써, 패권의 주체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남인 거의 모두와 또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에 부역하는 비영남인들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연역적으로 증명하게 되었다.

영남패권주의 주체의 한 축으로서 일반 영남인이 필히 포함된다는 위의 논리를 뒤집으려는 반박의 시도를 예로 들어 보자.

 

2. 논리적 증명 : 사회안에 있는 패권주의 존재성

 

영남패권주의의 사회적 환경을 일정 부분 인정하거나 아예 부정하거나 상관없이, "영남패권주의란 용어 자체가 아직 전 사회적으로 검증된 용어가 아닌 문제제기형에 머문다"라고 주장하면서, 그것도 "어디까지나 영남 출신의 소수 엘리트 권력만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필요충분하므로 거기에 영남 대중까지 절로 포함되어 있다라고 개념 규정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반박이다.

이 방식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이 사회의 정치 경치 행정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의 헤게모니를 영남 카르텔집단이 틀어 쥐고 있는 실증적 현실에 대하여 역사적 인과관계를 건너 뛰어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그러한 패권을 장악했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 이런 시도의 경우,

1) 그들 영남인 집단의 패권 장악이 오직 그들의 불가사의하게 뛰어난 개인 능력에 의했을 뿐이라거나,

2) 전혀 의도치 않은 중에 사회 구조가 오직 영남인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을 어느 날 일시에 형성하고 말았다거나, 아니면

3) 비영남인이 영남인에 대한 일방적인 특혜 부여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결과였다는 등의 주장, 그리고 <동시에>

4) 영남인 일반과 그들의 적극적 써포트(support)에 의해 형성된 영남패권적 사회 구조라는 결정적(critical and unrivaled) 요인이 없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 상황을 무의 상태로 뒤집어 엎겠다는 이 가설은 실증하기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남인 개개인이 타지역 출신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등 뛰어날 리 없고, 영남인에게 훨씬 유리한 사회적 조건이 비영남인의 자발적 지지로 형성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실 상황이 역사적 인과관계 속에서 전진적으로 진행, 형성, 구조화한 영남패권 구도를 사회 체제 속에서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존재를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영남패권주의와 그 이데올로기가 영남 대중을 제외한 채로 논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가소로운 위선에 다름 아니다. 영남패권주의에서의 '영남'이 지시하는 것은 영남이라는 지역과 영남 대중, 그리고 '영남패권에 기생'하는 모든 세력과 개인이라는 주체를 모두 포섭하고 있다.

 

위와 같은 논리는 정당하며 적합하다. 영남인 일반을 뺀 채 극소수 영남 특권계층만으로는 도저히 영남패권주의를 설명할 수 없음을 사회의 현실 조건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이다. (실증적 현실은 이미 수많은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는 바이며, 그것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이 글의 촛점을 벗어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영남 일반의 적극적 참여가 없으면 절대로 소수만의 영남패권 조차도 결성되거나, 또 다시 장기간 존속시킬 수 없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하물며 그것이 거대한 조직이라는 내면의 본 모습을 확인해 간다면, 더 이상 미시적 증명의 필요성은 없어지고 만다.

(, 패권주의의 주요 구성 요소로서 '영남 일반'을 규정한 것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부인할 수 없는 테제이되, 각 계층과 각 개인이 감당해야 할 <패권에의 기여도>라는 눈금분류에 있어선 물론 <차등>이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작의 후속 편에서 논할 것임)

 

3. 영남패권주의 실체 가리기의 동기 : 영남 일반과 개인 모두

 

매우 촘촘히 짜여진 사회적 난관의 조건을 겨우 겨우 뚫고 찾은 사회과학적 용어로서의 영남패권주의가 또 다시 더딘 걸음으로 일반에 다가오고 있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저들 패권 담당자와 그 지지 영남민들이 영남이란 주체와 패권이란 실체를 기어이 몰각시키고자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 방해 공작을 지속해왔는지에 대한 이면의 동기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돼 있으며, 그것들은 또한 하나같이 현실에서 관찰 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 일련의 <동기>란 것은

1) (영남 일반에게 모두 해당되지만 특히 특권/지배 계층에게 '더욱' 적용되는데) 패권 상실정치 경제적 기득권 양보-에 대한 공포다. 더 들여다 보면,

2) (특히 일반 민중 개개인에게 '더욱' 해당된다) 전 국민에 대하여 상대적 우위의 사회문화적 지위를 점했던 선민우월의식의 와해에 대한 공포이자 동시에,

3) 열등 시민인 호남민과 동등한 선으로 내려와 실질적 지위 강등의 경험을 한다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에의 공포,

4) 사회 질서의 재편 가능성과 영남지역민의 수구적인 문화 양태가 가지는 적응력 결여라는 자각에 따른 극심한 심리적 위축에 대한 공포,

5) 진실 규명과 바로 잡기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받게 될, 피의자에게 던져지는 사회적 시선(혹은 편견, 그리고 소위 '왕따')과 대우에 대한 공포,

6) (비영남인으로서의 영남패권주의자에게 해당되는데) 변절과 배신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고 말 것임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와 같은 이유(동기)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언가? 영남인 개개인은 자신과 그들 지역민들이 쥐고 있는 패권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들 수 있다. 누가 먼저 그렇다고 인정하기도 전에 그들 스스로가 그 사실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4. 논리적 증명 : 개인이 가진 패권주의 존재성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필요하다. 영남인들에게, "영남인들은 2등 국민이다, 영남인들은 부당하게 사회적으로 소외받아 왔다, 호남이나 강원, 충청, 제주 중 하나가 한국 사회의 주류를 점한다" 라고 말해주고 이들에 동의하는지를 물어볼 일이며, 만약 그렇다고 대답할 경우엔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견딜 의사가 있는지를 다시 질문할 일이다.

위의 질문에 ''라고 긍정할 영남인이 단 하나도 없음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위 질문에 대해 영남인 중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부정을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게 그들이 사회의 주류임을 뼈 속 깊이 각인한 채 살아오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혹, "이 사실은 패권의식의 존재가 아니라 높은 자존심의 표현일 뿐이다"라고 누군가 말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다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 "호남과 충청, 경기, 강원, 제주 등은 영남과 동등한 수준의 정치적, 경제적 수혜와 사회 문화적 지위를 누려왔는가?" 이 질문에는 중학생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서울은 이미 전국의 축소판일 뿐 하나의 지역으로서의 대표성이 없다). 이것으로써 영남인의 현실적인 물리적 토대에서의 상대적 우위와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토대에서의 상대적 우위라는 인식은 자연 증명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적 토대의 상대적 우위라는 지위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더우기 그 현실 조건을 항구적으로 유지, 보전시키고자 한다면, 이러한 집단적 이념의 상태를 무엇이라 불러준단 말인가? 그것은 정확히 영남패권주의에 합치되고 말 뿐이다. , 자신의 존재로 인한 상대적 열등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우위의 조건을 항구화하겠다는 의식은 바로 패권주의란 말 외엔 부여해 줄 어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영남패권주의는 각 개인안에 내재된 면과 그리고 전 사회에 구조화된 두 가지 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품고 있음이다. 그 중의 한 면을 부인하는 것은 이미 오류이다. 패권주의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독점하기를 꿈꾸는 이상이므로 전 사회 공동의 이익을 해치는 행태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현재 한국인의 의식과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인자로써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영남패권주의와 상반된 멘탈리티(mentality)와 물적 토대를 가진 집단의 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남인의 대부분이 수혜적 영남패권주의-급수의 차등은 필요하지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적/정신적 혜택에서 제외되는 비영남인의 대부분은 영남패권주의적 사고와 사회체제, 그리고 그 문화에 저항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관찰을 통하여 왜 영남패권주의의 논의가 이제야 본격화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현상이 어떠한 유형의 사회 변동을 몰고 올 것인지가 좀 더 뚜렷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연환경으로 주어진 불공평 vs. 공평의 조건

 

공평의 개념을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주어진> 상태 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좀 거시기 하지요. 해당이 될 때도 간혹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니까요. 위에 공평의 조건들을 적어놨으니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고요.("공평이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지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출발점을 보장한다는 규칙이다. 태생적/환경적 약자에게는 미래의 손실분을 일정 부분 미리 보상한다는 지혜이다.") 공평과 공정은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공평(fairness or imparttiality)은 차등이 없음에 중점이 있고, 공정( fairness or justice)은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이 <정의>로운 상태임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님이 전제한 것,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주어진> 상태를 '공평'이라고 일단 가정하십시다.

그러니, 지리적인 환경에 의해서 자연적인 공평이 깨졌다면 그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두 지역이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조건, 그러니까 한 나라(state)랄지, 한 도(province)랄지, 한 산업(industry)이랄지, 어쨌든 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조건에서만 해당하는 개념이어야 하겠죠. 예컨대, 한국의 노동자와 베트남의 노동자 간에는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공평의 개념을 놓고 따질 수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호영남이 백두대간에 의하여 동서로 갈렸는데 동쪽은 자연적인 조건으로 빈곤하였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왔으므로 공평의 상태가 깨져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따라서 동쪽 사람들이 서쪽 사람들의 부를 탐하고 서로 나눠서 공평하게 하자는 것은 정의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군요.

이 경우에는 바로 위에서 제가 말한 그 조건에 부합하는 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만약 그 동서간 불평등의 상태가 한(single) 나라라는 민족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이 불공평하므로 어떤 방법을 동원하건 그 상태를 최소화하도록 바로 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신라와 백제간의 각기 다른 정체성과 체제를 갖은 두 개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당연히 공정과 불공정 이전의 문제입니다. 부정의가 아닌 것이죠. 신라가 보기에 백제가 잘 살더라, 그러니 불공평하고 부정의하지 않느냐, 이거 안되겠구나, 가서 좀 뺏어와서 정의를 실현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도둑놈 맘보라는 것이죠.

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역사적 실제가 짐작하건대 대략 고려 이후 대한제국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 이 경우를 보십시다. 이 때 제도적(당시는 상놈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주거 이동의 자유가 매우 제한 돼 있었겠죠)으로도 그렇고 교통 수단의 미비로 인해서도 그렇고 서로 교류·소통하는 질적 양적 크기가 대단히 미약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경우 하나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듯 각 지역간의 물적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면 행정과 통치적 차원에서는 한 나라였을 망정, 지금의 호남과 영남은 상당 부분 각 각 <독립>적인 지역(province)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그 두 지역간에 자연적 조건으로 발생한 불공평의 상태에서는, 한 지역이 다른 한 지역의 것을 가져와서 똑같이 나눔으로써 공평을 만들겠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공평의 개념을 충족시켰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국가 통치적 차원에서, 국가 조세를 거둬들여 그 재원으로 동쪽 지역민에게 더 많이 분배함으로써 모든 백성이 고루 잘 살도록 정책을 펴는 것이 더욱 공평의 규칙에 합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왜 <교류>의 유무를 문제 삼고 있냐면요, 교류란 그저 커뮤니케이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자원·재화·용역의 생산과 분배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서 다른 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물적·지적 자원의 양이 일방적으로 컸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양은 훨씬 적으나 필수적이고도 긴급한 어떤 자원의 이동이 틀림없이 존재하여 그 두 지역이 상호 의존하며 공영을 지향해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적 교류가 됐건, 지적, 문화적 교류가 됐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풍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없었을 거다라는 점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서쪽의 풍요로운 자연 조건을 가진 지역민이 운이 좋게도 조금만 일을 해도 넉넉하게 멀고 살 수 있는 반면, 동쪽 지역민이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각 종 생산과 분배가 그 두 지역 사이에 거의 오가지 않았었다면 그것은 곧 그 각각의 지역이 애초부터 상호 의존적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미 독립적 공동체로서의 존재 능력를 갖고 있었던 것이겠죠. 이 경우에는 절대적 의미에서 서로간에 차등이 있을 망정 그 상태가 불공평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자연의 열등 조건에 놓인 지역민이 우세 지역민들 것을 "배타적 질시() 빼앗아와야 한다는 사고방식" 이 마치 정당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겠지요. 빼앗는다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그 당위성에 있어 조금이나마 정상참작을 받으려면, 위에서 말씀드린 교류와 공동체라는 (최소한)두 가지('공동체''교류')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 한민족의 지역간 교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위의 두 조건이 충족되기엔 상당히 미흡합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뺏음과 질시"는 더구나 물론이려니와, '공평히 분배해야 한다'라고 문구를 고쳐놓고 말 할 때마저도, 그 경우가 갖는 당위성은 역사적으로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서남쪽 지역과 동남쪽 지역만을 놓고 볼 때를 말합니다.) 대신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 공동체 유지와 발전을 위해 분배의 묘를 살려야 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중세에 있어 만약 동쪽 지역민들이 서쪽 지역민의 풍요를 질시하여 그 부를 뺏어가려고 침략이나 어떠한 다른 경로를 통한 탈취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면 그 동기에서부터 당위성을 전혀 얻지 못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대략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각 지역간의 교류가 대단히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 동기의 당위성이 웬만큼 충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류가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부의 편재가 지속되고 있다면 무언가 부정의가 분명 있다고 봐야할 겁니다. 중앙 정부에서 분배 정책을 소홀히 했달지, 부의 대물림이 정책적으로 가능도록 방치했달지 하는 부정의가 존재 했었으리라 봅니다. 이 경우엔 불공평, 그 부정의를 강력하게 바로 잡았어야 하겠지요.

그럼 이제 구한말 경부터 일제 강점의 근대사 시기를 보기로 하지요.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한 서쪽 지역민들의 피수탈이 동쪽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가혹했습니다. 뼈골이 부서져라 일하고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농민들의 수는 호남지역에 넘쳐났지요. 그러니 영남민이 호남을 질시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님의 가정대로, 그 이전 수 대에 걸쳐 내려온 영남민들이 호남민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다고 한 번 가정하고라도, 적어도 50년이 넘도록 이러한 호남의 피수탈이 극심했던 역사적 시기를 지나왔다면, 영남인의 그러한 질시의 감정은 정당성을 완전히 잃고 만다고 보겠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공평을 논하는데 있어 합리성이 전혀 없는 얘기입니다.

공평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때마다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것이 기계적 공평은 그야말로 원시적 공산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빌어먹을) 유토피아라는 겁니다. 그 기계적 공평은 사실상 공평의 규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많이 일한 사람이 일 한 만큼 많이 갖는 것이 정의를 이루는 것이니까요.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평의 규칙이 본원적으로 굴절돼있다는 것입니다. 그 규칙만 그대로 지켜지면 '기계적 차등'{, discrepancy ; , inequality(불평등)이 아닌}의 현상 차체는 얼마든지 <정의>의 표현이 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불공평의 규칙을 가치체계로 가지는 부정의(injustice)입니다.

[편집자 주: 원문은 대화체 형식으로 시작되지만 대화부분을 일부 절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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