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패권주의와 전라도라는 '주홍글씨'

자유와 저항의 혼이 개혁의 주체이며 개혁의 정신이다

 

 

영남패권주의 비판 앞에 영남패권문화의 굳센 옹호자들이 악에 바친 공격의 소총수가 되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군요. 이들이 게시판에 올린 언어폭력을 본 분들은 지금 어떤 심정을 갖고 있을까요?

영남패권주의와 그 문화가 얼마나 공격적인지, 그것의 본질이 얼마나 인간 심연의 악마적 증오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이 조폭적 문화가 이 사회의 기득권 문화, 소위 주류 세력의 문화로서 그 아래 전 사회 구성원의 사고와 정서의 자유를 얼마나 지배 억압하는 폭력기제인지, 영남패권문화 수호자에겐 이것이 얼마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인지, 그래서 결국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너와 나를 분열시키는 무모한 책동은 아닐런지, 다시금 확인하며 몸서리를 치거나 아예 회의, 절망하는 분들도 생겼으리라 짐작합니다.

영남패권주의의 실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팔딱거리고 있는데 끝내 덮어두고 말겠다는 위선자들이 널려 있습니다. 조용히 사색하고 묵상하며 커피 한 잔으로 산뜻한 하루의 아침을 맞는 일상인들에게 웬 시대착오적 망령이냐며 얼굴을 심하게 찌푸리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소 당해본 체험이 없는 저들의 눈에는 안보입니다. 저들에게만은 영남패권주의의 악령이란 '허구'입니다. 소설입니다. 책동입니다. 빨갱이 짓거리입니다. 프락치 입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끝내는 '피해의식'이 되고 맙니다. 저 혼자 심심하여 방구석에서 뒹굴다 보니 허리가 좀 결린 것을 누가 저를 잡아먹겠다고 몰래 들어와 장작으로 팼다며, 단발마로 절규하는 정신병자의 피···식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말에는 미국의 50년대 중후반을 광란으로 휩쓸고 간 매카시즘적 마녀사냥 의지가 흘러 넘칩니다.

'피해자의 의식'이 아니고 '피해의식'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 인간으로서 가장 추악한 악마성이 응집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을 반 죽도록 멍석말이로 팬 뒤 그를 피해'의식'에 허덕이는 정신병자로 몰아부쳐 사회로부터 완전 격리시키겠다는 악귀의 현시 말입니다. 나는 피해의식이라는 공격적 조어를 들이대는 그 악마같은 동물들이 바로 인간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벌레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렇듯 영남패권주의와 문화의 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격을 파괴시킵니다. 억압당하는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짓밟는 자들의 인격도 함께 파탄의 구덩이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나찌파쇼와 인종주의가 그런 것처럼 그와 근본적으로 한 배아를 나누는 영남패권주의자는 이미 인간 말종이고, 거대한 사회악이며 벌레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길 가다가 뒤로부터 기습당해 뒤통수 얻어터진 놈이 더 이상의 몰매 맞는 게 두렵고 떨려, 화해한답시고 비굴한 미소 흘려야 합니까?

이게 몇몇 성질 더러운 놈들이 벌이는 시장바닥 싸움판인 줄 아십니까? 영남패권주의로 무장된 개개인의 의식은 너무도 당연히, 한 사회·문화의 소비 유통의 결정판인 정치현장에서 '깽판'을 치는 치졸한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정부하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개핵'이 개혁과는 애초부터 아무 관련이 없는 파쇼의 회오리로 서서히 일어나는 것도 바로 그 주체들이 영남패권주의자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들의 패악질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청기와집 주인과 참모, 신당추진세력, 재벌, 보수언론, 심지어 개신교, 족벌사학··· 끝도 없이 나오는 이들 모두의 권력과 기득권의 태생의 뿌리는 영남패권주의입니다. 영남패권주의자임이 명명백백히 드러난 노무현(정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는 이 문화를 한층 더 공고히 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조폭문화에 순응할 수가 없습니다. 곧 맞아죽어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비장의 무기가 있길래 맨몸으로, 그저 짱돌 몇 개 주워들고 돌진하겠다는 겁니까?

이거 돈키호테 같은 과대망상증 걸린 사람이나 할 짓 아닙니까? 아니요! 나는 그런 바보도 소영웅주의자도 아니올시다.

오직 하나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내게는 전라도 사람이라는 주홍글씨가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울 수 없는 그 마크가 차라리 나를, 내 인격과 온 인생을 구원합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으되 이젠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고결한 전라도의 혼으로 세례받았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역사의 위기 때마다 거칠 것 없이 다 떨치고 일어났던 민족애가, 그 희생의 혼이 광주에, 전라도에 면면히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구름이 몰려온다고, 풍랑과 파고가 좀 높다고 발발 떨며 움츠리는 '비겁자'들이 아닙니다. 군사적 정치적 국가 폭력이 성형을 거쳐 문화적 폭력으로 안면을 바꾼 채 있지만 그것의 악마적 DNA가 거기 그대로 원형 보존되어 상시적 비상포고령이 발동되고 있는 이 21세기의 생뚱맞게 암울한 시대 상황에도, 우리는 언제나 밝은 빛, 자유와 평등을 누리겠다는 소망의 불꽃을 꺼뜨린 적이 없습니다.

 

숨을 쉬며 살고는 있지만 내 영혼이 짓밟히고 항상적으로 이유없이 남의 감시와 눈치 속에서 움츠려야 하는 삶이라면 이제 그만 내던져 버릴 겁니다. 군사파쇼를 정면에서 맨몸으로 맞아 대항했고, 그 채찍과 모욕과 피를 다 지불하고 이만한 민주라도 쟁취해 낸 주체가 바로 누구인데, 요까짓 영남패권 반동 하나쯤에 그만 기가 꺾이고 말일이겠습니까? 이미 이뤄낸 바가 있고, 또 그게 무슨 새삼스런 일도 아닌데 가만히 거꾸러져 한숨 속에 안주하고 있단 말입니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는 그렇게 만만한 땅이 아닙니다. 반도 중에서도 뒤축에 비켜있는 조그만 조각 땅 그곳으로부터 이 나라 민주주의의 원류가 솟아 흘러왔던 것입니다. 민주의 정신, 그 자유와 평등, 평화의 혼이 가장 순결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땅입니다.

전라도의 혼이 죽을 때 이 나라의 혼은 함께 죽습니다. 남을 공격하지 않는 평화 애호, 그러나 억압의 사슬이 옥죄어올 때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앞뒤 재지 않는 투우처럼 무식하게 돌진하여 치받아버리는 저항의 혼은, 멸시와 천대 소외라는 양재기 밥그릇에 늘 배곯아 뒹구는 뼛속 시린 그 긴긴 나날들을 태우고야 건져낸 영롱한 사리(舍利)인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전라도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이 반도가 지금 이 시간 어찌되어 있을 지를 늘 상기하세요. 채임과 건드림에 지치고 더 이상 내줄 것도 없는 전라도가 이제 마지막으로 움켜쥐어야 하는 것은 오늘 만찬상에 올릴 조기 반 토막이 아니라 그 주머니를 몽땅 털어서 산 배고픔의 혼일 것입니다. 뒤로 물러설 것이 없이 타협할 것도 없이 평등과 자유의 원형 그대로를 지키겠다는 희생의 혼 말입니다.

 

전라도의 이 정신이 죽으면 한민족 모두의 생명은 함께 사그라져 버리고 맙니다.

전라도인 당신에겐 이것이 자랑이 됩니까, 천형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천형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천형으로 받아들이렵니까, 긍지로 받아들이렵니까?

,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아무말 하지 마세요.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그만 밀어 넣으세요. 이를 악 물으세요. 하지만 이제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세요. 당신에겐 전라도인임을 자랑할 선택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각오는 되어 있겠죠? 이 긍지를 오롯이 지켜내기 위해선 우리가 이제까지 희생함으로써 키워낸, 가진 자들, 누리는 자들, 혜택받은 자들, 무관심이란 폭력의 시계를 묵묵히 작동시키는 자들의 핍박을 당신은 이제 유희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 말입니다.

전라도의 혼, 민주의 혼, 평등의 혼, 자유의 혼, 저항의 혼, 소망의 혼은 세세토록 이 땅의 역사를 밝히는 횃불입니다.

우리가 곧 밟히는 듯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다시금 꼿꼿이 일어서고 맙니다. 주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이웃의 들풀들도 함께 들어 세워 풋풋한 평등과 자유의 바람을 기어이 쐬어 주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에, 평등과 자유의 정신 위에 손에 손을 포개어 엄청난 힘으로 결집시켜 나가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민중은 모두 전라도의 혼을 공유합시다.

이 대오가 개혁의 주체이며 동시에 개혁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영남인조차 억압하는 영남패권주의를 깨야

각 지역민의 집단심리구조, 비영호남인들이 움직여야

 

각 지역민의 집단 심리 구조 살피기

 

1. 호남 : 중층적

 

먼저 호남인들의 일반적 멘탈리티를 살펴보자. 이들의 심리 구조는 중층적이다. 영남인들처럼 단선적이지 않다. 이들은 정치적 차원의 사회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하나가 아닌, 서로 상충되는 가치로서의 두 개의 규범을 동시에 터득해야만 한다. 이 사회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히 사회의 아웃사이더가 되기 쉽다. , 사회 전체가-정확하게는 사회 전체가 아니라 사회의 극히 소수 지배층과 그 권력의 의지로서 대표되는 전체 사회인데-요구하는 질서로서의 규범을 익혀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믿는 가치가 자기가 속한 지역과 집단을 벗어난 '전체 사회'로부터는 경원되고 비하되는 가치라는 것을 깨달아 나가면서 혼돈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가 애착을 가져왔던 자신의 고향, 방언, 자랑스럽다 믿어왔던 역사와 문화, 심리적 일체감을 이뤘던 정치인, 정당, 사회단체, 문화단체 등이 전체 사회로부터는 모두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어있음을 깨달을 때 이들은 이 가치들을 버리느냐 아니면 타협하느냐의 곤혹스런 결단의 시간을 강요받는다. 이것을 버리려거든 당연히 평생을 주류사회와 고통스럽고 지리한 싸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이 선택하고 마는 것은 결국 자기 분열적 가치 체계의 수립이다. ,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는 전체 사회의 규율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아니면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이미 자기 안에 수립돼 있는 가치를 소중히 간직하기를 선택하지만, 이 사실을 자기와 가장 밀착된 일차집단을 이루는 사람들 외에게는 가능한 한 비밀에 붙여두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후 사회와의 치열한 불화를 각오하든지, 아니면 아예 자신의 정체성향을 뜯어서 완전 개조시키든지, 그도 아니면 사회에 대해 자신을 위장하든지 해야만 하는 기막힌 현실을 두고 쩔쩔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회와 불화하지 않기 위해선, 자기 안에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를 심어놓은 채 대외적으로는 그것과 대치되는(타협할 수 없는), 사회로부터 강요받은 주류의 가치를 자신의 대표가치로 내세우게 되는 분열을 체험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천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자기 방어의 메커니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을 피할 수 없는 호남인 각 개인에겐 대단히 비인간적인 인격적 강간의 체험이며, 사상의 자유를 유린당하는 체험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굴욕의 시간인 것이다.

 

사회가, 다른 것을 일단 제쳐두고라도, 가장 일차원적으로 호남인의 지역 자체를 첨부터 따지고 문제 삼고 나오는 데서 호남인은 일찍 이 사회적 질서에 대해 환멸을 느껴버리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만큼 사회의 제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깨어질 기회를 풍족히 부여받은 셈이고, 따라서 사회와의 타협의 필요성을 깨달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의 사회의식은 부쩍 자라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다.

 

 

2. 영남 : 단층적

 

반면, 영남인들의 멘탈리티는 단층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 영남인이 가진 사상과 정서와 호불호에 대해 시비걸 사람이 없다. 왜냐면, 이들이 속한 집단의 정치 사회 경제적 유력자들이 이 사회 전체의 규율과 가치를 결정짓고 있으며 그들 권력집단은 자신들의 외형적 상전이자 실질적 볼모인 영남민중의 정서에 영합해야만 하는 공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영남인이, 호남인이 맛봐야만 했던 혹은 맛봐야 하는, 인간적으로 비참해지는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행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 설정을 위한 갈등이나, 고민해야 할 자극, 동기부여의 경험이 대단히 희소할 수밖에 없는 그들 평균적 영남인의 사회의식은 사회의 전도된 가치체계의 틀 안에서 내내 헤어날 수가 없는 숙명을 부여 받는다.

 

게다가 정작 무서운 것은, 그들이 곡해된 가치체계--반인륜적인 패권, 특권, 차별, 배타, 이기, 불공정 등--에 안주하는 결과가 겨우 대외(타 지역인들에 대한) 경쟁력의 약화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이 누리는 신성불가침의 질서가 호남인이나 일부 비영호남인으로부터 도전받을 때 나오는 영남인들의 응전의 방식은, 상대를 하수로 낮춰 멸시하는 자세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므로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격적인 것이어서, 우선 스스로의 방어논리를 견고한 철벽으로 쌓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이 구성해놓은 기존 질서가 일부만이라도 균열이 일도록 만약 허용될 경우 이어지고 말 점증하는 반격의 수위와 그에 따른 방어논리의 궁벽함에 급작스레 직면하고 말 상황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그들로서는, 추호의 타협도 허용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도전하는 세력을 아예 사회의 공적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수구집단의 공세적 방식으로 줄달음질 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외부에 대한 벽을 높이 침과 더불어, 내부에 있는 잠재적 질서 파괴자 준동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욱 가혹한 벌을 준비해두고 그 싹을 미리 자르는, 파쇼적 내부 사회 환경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유지토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파쇼적 단일가치 체제에서는 이단아(저항세력)가 나올 가능성이 미리 차단되고, 또 그 체제 유지를 위한 공포의 수위는 늘 호남인들이라는 희생양에게 사회적으로 무거운 댓가를 치루는 모습을 시범보임으로써 항구적 싸이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 수구의 방식으로 벽을 높이 치다보면 그 곳 안에 안주함으로써 기성의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는데 동조해왔던 영남인들의 <사회적 인성>은 자신들이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스스로의 인격적이고 온전한 삶의 기회도 그만큼 지배 세력으로부터 박탈당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는 갈등의 골을 한층 더 깊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반인륜적인 사회적 행위가 왜곡된 <전체> 사회 질서를 항구화하는데 협력토록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그들의 수구적 질서 유지 방식이 가져오는 폐해는, 그 중 깨인 소수의 영남인들로 하여금 호남인이 겪어 왔던 것과 유사한 성질의 인격적 분열을 맛보며 살도록 강요한다는데 있다. 그들 깨인 소수가, 한국이란 사회 전체에서 당연한 관습이거나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존중되고 있는 제 가치가 사실은 반인륜적인 패륜이라는 것을 역사의식을 통하여 깨달아 가면서, 자신 주위의 원초적 집단까지를 포함한 같은 영남인이라는 주류가 실제로는 자신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경우에 실제 일어나는 사태이다. 그들은, 호남인들이 저항의 대상인 주류 사회를 향해 그랬던 것처럼, 결국은 자신들의 모태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회 주류에 대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가슴속에 짐짓 숨기거나 혹은 항상적으로 그들에 대항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결코 만만찮은 고해의 삶을 떠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반대하기를 인격적으로 결단한 영남인들이 극소수(말 그대로 천연기념물 정도의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호남인 못지 않게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조건을 설명한다. 이렇듯, 영남의 극단적 수구 행태는 그 안에서 순응하며 협력, 안주하는 수구적 영남인들에게도 그 인간성을 갉아 무너뜨리는 패륜이 되며, 더구나 올바른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저항하는 그 안의 깨인 영남인들의 선택권을 극심하게 억압하는 악덕인 것이다.

 

(이들 극소수 반()영남이데올로기 영남인은 그들이 그 스탠스를 주장함으로써 얻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가 단연코 없는 경우일 때만 상식적인 신뢰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의 진정성은 대단히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는 신뢰를 당연히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3. 비영호남인 : 혼합형-순응과 양심 사이

 

비영호남인들이 정체성 설정 과정에서 겪는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인간적 혐오의 경험은 호남인들에 비하여 훨씬 가벼울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멘탈리티의 중층적 형성의 개연성에서마저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질서에 대해 적어도 거의 성인이 될 때까지는 회의할 기회가 별로 없다 (호남인이라면 늦어도 고등학교 과정에서 다 겪는 것이 통례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깨어나기 시작할 때까지는 이들에게 작용하는 사회의 가치와 질서는 다 평온하고 온전해 보인다. 그러므로 선택권이 없는 채로 이들은 일단 사회 지배 질서에 협력하며 패권세력의 동조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존 사회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서 자신의 정체성에의 위치 선정이 일부 위선적이라는 갈등을 안고, 사회질서에의 순응일지, 양심에의 결단일지를 끊임없는 자문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개안(開眼)이 시작되고나서 부터는 인격적 결단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주류 지배 질서가 가하는 관습과 그가 속한 집단의 성격에 따라 사회적 압력이 더욱 극명하게 부담으로 인식되겠지만, 동시에 개인의 사회적 양심과 양식의 양에 따라 스스로 선택과 결단이 이뤄지는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꼭 영구적인 결단이 되지 못할 개연성도 아직 높다 하겠다. 이런 면에서, 비영호남인은 실로 향후 이 사회의 질서 재편 과정에서 키를 쥐고 있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 인식과 인격적 양심의 높이에 따라서 기존의 비틀린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 의지가 제고되고 따라서 사회 변동에 협력하겠지만 이들이 결코 독립변수라고는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비영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의 결단과 선도적 역할에 영향받아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희원하는 의지는 호남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강할 것이므로 이러한 동기부여는 이들로부터 비영호남인에게 확산될 것이다. 그러나 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와해시킴으로서 얻는 혜택은 영남인를 포함한 이 사회의 모든 개개인에게 차별없이 골고루 미치고 말 일이다.

 

 

4. 요약

 

이상의 논의를 정리한다면,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 아래서 호남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함에 있어 자괴감을 일찌감치 경험하며 주류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에 대외적으로는 순응하는 모양새를 갖추지만 내부적으로는 그것에 저항하는, 즉 중층적 심리 구조를 가진다. 그 저항이라는 결단의 과정에서 겪는 인격적 모욕의 경험이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체성 확립에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어 강력한 저항력을 키우는 동력이 된다.

 

영남인은 기성 사회 질서에 순응, 협력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혜택을 보장받지만 대신 인격적 피폐를 댓가로 지불할 수밖에 없다.

 

비영호남인은 사회적 질서를 강요받는 면에서 호영남인보다 탈출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이 부여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 설정에 대한 인격적 결단은 결국 사회 전체의 변동을 견인할 결정적 변수가 된다는 것이다.

영패는 논쟁의 대상인가, 논의의 대상인가?

 

 

영패 해체니, 영패 혁파니, 영패 분쇄니, 영패 극복이니 하는 말이 그 사람의 취향과 기분대로 생각없이 쓰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기에도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의 반영패 접근법이 옅게나마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영패분쇄'는 가장 맹렬한 의지를 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냉철함이 전혀 없이 열혈주의자의 높은 목청만이 요란할 거란 느낌이 있다.

'영패극복', '분쇄'가 함의하고 있는 제3의 객체로서 그 대상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자신도 그 영패에 일부 편입돼 있음을 인지하고 스스로도 자성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대신, 반영패의 대오에 참여할 적극적인 의지를 아직 유보한 자세를 내비치고 있다.

'영패해체''분쇄'에서 보이는 만큼의 능동적 행동의지가 결여된 채, 그저 막연한 심정으로 그것이 없어지기만을 기원한다는, 다소 책임을 방기한 사람의 의식이란 느낌을 전하고 있다.

'영패혁파'는 그 중 가장 발전된 인식과 진정어린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거기에는 영패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없어져야만 한다는 당위를 잘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노력과 힘을 동원함으로써 극복하겠다는 주체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어휘상의 이런 차이를 지금 내가 한가해서 구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잘못된 문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그 이유는 아래에서 논한다). 더구나 유희가 아닌 것이, 이 어휘들을 들여다 봄으로써 반영패의 해법에서 우리가 고려할 문제 범위가 좀 더 또렷이 드러나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분 과정을 통하여 객체(대상)와 주체라는 두 실체가 분류되고 역시 그 각각의 역할이 서로 다르리라는 점을 예시하게 된다. ,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객체', 막연한 <추상> 개념으로서 인식하는 '영남패권주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영패는 이념이나 신조 등의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어느새 내 앞에 마주 선 어떤 인간, 혹은 집단이라는 실존임을 알게 된다.

좀 더 관찰하게 되면, 우리가 위의 '영패해체'라는 어휘에서 이해할 때의 영패란 어디까지나 <개념(이념·신조·체제)> 에 불과하였는데 그것을 어떤 극복 '의지'와 엮어 사용하고 보니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집단>이라는 실존을 일컫고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휘를 정확하게 사용하자면, 영남패권주의혁파가 아니라 영남패권주의''혁파가 되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도 아님이 밝혀지고 만다. 혁파의 대상으로서의 영패란 하나의

1)<가치체계>이면서, 그 이념을 추종하는

2)<집단>이라는 실존임과 동시에 어떤

3)<시스템>이라는 사회 구조 등,

적어도 三位(trinity)를 동시에 거느리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영패라는 <가치체계>의 근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일전 나는 그것을 권위주의와 불공정규칙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아직 가설일 뿐이다. 더욱 연구되고 검증되어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어내야 할 과제다.

<시스템>은 어떤가?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회문화권력들이 어떤 이념과 시대적 이해를 업고 영남패권을 작동시키는지 그 메커니즘이 분석된 적이 과연 있는가?

그럼 영패를 구성하는 <집단>은 무엇인가?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며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임을 자임하는 한나라당 집단(영남패권 쟁탈전에 새롭게 뛰어든 신영남패권 열우당 집단 포함)이라는 정치권력, 영남권력과의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특혜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부를 독점하는 재벌이라는 경제권력, 조중동 등의 수구 언론권력, 나라의 부와 사회적 지위, 명예를 거머쥠으로써 문화적 최종 성과물을 독점하고 국가적 아젠다를 주도하는 강남 최상류층의 사회문화권력, 이 정도만을 우리는 겨우 손에 꼽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영남패권의 정수로서 뽑아낼만한 정치, 언론, 경제적 권력 집단을 규정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바로 <사회문화적> 권력의 실체를 규명하는 단계에서부터 우리의 불명료한 인식은 혼돈을 겪고 만다. 그들이 정치·경제 권력 집단과 횡적으로 일부 겹쳐있으면서도 엄연히 구별되는 또 다른 권력을 형성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강남이 아닌 곳에서 영패 시스템 작동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사회문화적 권력을 형성하는 대단히 유력한 집단(: 교수, 성직자, 작가, 예술가, , )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외, 수구냉전적인 영남대중 -그 중에서도 사회경제적 상류층에 대한 중산층, 서민, 그리고 기층민간의 차등성 ; 비호영남 대중 -그 중에서도 호남에 대한 차별의식은 없으나 정치적 영남패권을 지지하는 집단, 경제적 기층민이면서 호남차별의식이 뿌리 깊은 집단 ; 호남대중- 호남차별에 적극 저항하면서도 영남패권체제에 기생하는 상류/중산층 집단 ; (마지막으로) 개방/폐쇄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 등이 미제로서 남아 있다.

이들 각 집단에 대하여 어느 것이 영패의 골수를 형성하는 집단인지, 그들을 일률적으로 영패집단이라 분류해야 하는지, 책임 부담에서는 얼만큼의 차등 구분이 필요한 건지-요컨대, 우리의 반영패 운동에 있어 그들 각 집단이 우리가 가격할 타격 대상의 순위상 어떤 서열에 매김되어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명료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우리들 대부분이 아마도 이러한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 내가 지금까지 긴 설명을 통하여 말하려는 것은 바로 다음의 논의를 위해서다. 우선 이러한 형편지경에 우리의 인식 수준이 머물러 있음을 알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시스템이라면 <해체>될 것이요, <가치체계>라면 혁파될 것이며, 인간 <집단>이라면 설득되어야 할 것이다. 시스템과 가치체계를 설득으로써 해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을 해체하거나 혁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상대하는)집단이란 어디까지나 <설득>의 대상으로 남을 뿐이다. 그들을 혁파, 해체하기 위해서 당신이 아무리 그의 인격을 뭉개버렸다고 해도 그는 돌아서면 다시금 더 강고한 영패주의자로 거듭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넷(net)상에서 마주치는 상대마다-그가 어느 집단에 속해있는 지도 모른 채, 그래서 그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그에게서 영패의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보일라 치면 마치 평생 원수를 면전에서 만난 것 마냥 흥분하기 일쑤이다. 냅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곤 한다. 명백한 영패지지자한테만이 결코 아닌 것이다. 자기가 미리 정한 기준에 상대가 들어맞지 않으면 대번에 그는 골수 영패주의자로 낙인찍혀 버린다.

상대로부터 먼저 인격적 모욕을 당했을 경우 반사적으로 그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물론 나무랄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경우 반영패론자로서 저지르는 바보짓은 다음과 같다.

1. 영패를 없애는 일이 겨우 사람/집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단견이다. 지금 논쟁하고 있는 그 사람만 설득시키면, 아니면 논리로 죽사발을 만들면, 곧 바로 영패를 이기는 것으로 착각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패는 시스템과 가치체계와 집단이라는 삼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잊고 있는 사람의 경박이다. 집단은 삼위 중 한 부분일 뿐이며 하물며 당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집단도 아닌 일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 인격 무시 모드의 선제 욕지거리-그것이 카타르시스를 준다며 읽고 환호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봉사할런지 몰라도-가 영패논의에서 절대 무익하고 심지어는 해악일 뿐이라고 내가 믿는 이유이다.)

2. 대립되는 두 개 사이트간 언/논쟁에서의 승패가 영패의 현실적 타파와 굴복을 결정짓는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한 영패주의자가 주로 서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그와의 논쟁에서 이기면 서프라는 사이트 전체를 이기고 따라서 영패의 한 모서리를 부서뜨리기나 한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넷 상에서 그 사람의 소속이란 없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이트에 소속되거나 아예 소속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 사이트 커뮤니티라는 것이 네티즌이 거기 일시 머물다 지나치고 마는 개방집단임을 간과한 채, 마치 그 사람이 전체 사이트를 대표하기라도 하는 양 목숨을 걸고 논쟁에 임하는 방식은 자신과 인터넷 커뮤니티 전체를 늘 황폐케 하는데 이바지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 설전은 틀림없이 욕지거리 범벅으로 어우러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패를 주제로 시작한 논쟁은 이 점을 잊고 있을 때 백발백중 이전투구로 끝맺고 만다.

영패토론은 가능한 한 논쟁이 아닌 논의로 가야한다. 우리는 영패의 정체에 대하여 체계없이 겨우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다. 서로간 개념의 공유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논쟁이 이뤄질 수 없다. 지금은 논의하고 연구하는 단계라고 본다. 과연 우리의 영패논의가 그토록 초기 단계에 있는지는 위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바와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 영패가 가치체계, 시스템, 집단이라는 삼위로 이루어졌다는 것마저 깊이 고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런 단계일진대, 서로 자기 주장이 맞다고 입에 거품물며 댓거리 하는 건 아마도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영패논의자는 영패에 대해 이미 다 안다고 하기 앞서 더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부단히 자성할 일이다.

영남패권주의는 영남인의 일부인가 전체인가

구조적 패권주의는 개인과 집단 모두 포함, ‘공공의 적일뿐

1. <영남 일반>이 패권주의의 한 축인가, 아닌가

여기에서의 영남패권주의는 지역감정, 지역갈등, 지역차별의 사회적 불안 요소에 대한 인식상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각 개인의 선택적 문제로서 치환되고 말거나(소위 "지역감정"), 해당 지역주체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갈등 유발요인을 모호하게 윤색하여 사회적 문제로서의 심각성을 완전히 왜소화해 버리려는 시도이거나("지역갈등"), 부당한 관습이긴 하되 당사자 지역을 빼면 여타지역에겐 해당사항이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사소하며 기껏 사회 일각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로서 치부되고 말거나("지역차별”)하는 진실 가리기가 은밀히 숨쉬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인식은 역시 그 어휘 자체가 가지는 의미 영역을 뛰어넘을 수 없으므로, 대다수 우리는 자연스레 영남패권주의 용어가 가지는 영남의 가해자적 위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물론 거기에, 이제까지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사회의 소수 권력/특권층이 누리는 패권주의적 행태를 두고 그 기반이 영남지역에 있다라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으나, 그들 소수만이 아니라 그들의 패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며 공동 혜택의 수혜를 탐하는 '상대적' 기득권 집단이 또한 그 지역의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라는 사실까지를 개념화해 낼 수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야 (‘97년 대선을 전후하여 동국대 황태연교수가 용어를 개념화하였으나 일반화되는데까지는또다시 많은 시일이 걸렸다) 비로소 영남이라는 지역과 지역민을 분명히 명시함으로써 문제의 핵심과 그 주체가 영남인 일반 (특권층, 중산층, 기층민 모두 포함)이라는 사실의 인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 영남이란 지역을 명시하지 않았을 적엔 영남권력/특권층만이, 지역과 관련한 문제와 갈등의 주체라고 막연히 추론하고 말았었으나, 영남으로 제자리 매김하고 나서부터는 그 지역사회의 구성원인 일반 대중들도 문제의 한 축을 떠받들고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명쾌히 개념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의 패권주체가 겨우 영남을 지역적 연고를 가진 한 줌의 무리에 불과하다면 그 거대한 실체로서의 지역 이름을 굳이 그들에게 관형사로서 붙여준다는(:'영남' 패권주의) 것이 전혀 비상식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패권주체가 오직 극소수엘리트 권력 집단에 머무는 일이라면 '영남'이란 어휘는 이미 사장, 폐기되었어야만 했다. 만약 패권의 실체가 극소수 집단에 한정된다면, 그것은 영남패권 '집단'이라는 어휘로서 충분했을 것이며, 거기에 '주의'라 하는 이념의 한 형태를 갖다 붙이는 것이 패권주의와는 무관한 가치중립적 영남지역민 일반을 끌어들이는 억지가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이유없이 무고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을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용어가 정당한 지위를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얻어 누리고 있다는 현실 용인의 사실 자체로써, 패권의 주체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남인 거의 모두와 또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에 부역하는 비영남인들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연역적으로 증명하게 되었다.

영남패권주의 주체의 한 축으로서 일반 영남인이 필히 포함된다는 위의 논리를 뒤집으려는 반박의 시도를 예로 들어 보자.

 

2. 논리적 증명 : 사회안에 있는 패권주의 존재성

 

영남패권주의의 사회적 환경을 일정 부분 인정하거나 아예 부정하거나 상관없이, "영남패권주의란 용어 자체가 아직 전 사회적으로 검증된 용어가 아닌 문제제기형에 머문다"라고 주장하면서, 그것도 "어디까지나 영남 출신의 소수 엘리트 권력만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필요충분하므로 거기에 영남 대중까지 절로 포함되어 있다라고 개념 규정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반박이다.

이 방식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이 사회의 정치 경치 행정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의 헤게모니를 영남 카르텔집단이 틀어 쥐고 있는 실증적 현실에 대하여 역사적 인과관계를 건너 뛰어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그러한 패권을 장악했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 이런 시도의 경우,

1) 그들 영남인 집단의 패권 장악이 오직 그들의 불가사의하게 뛰어난 개인 능력에 의했을 뿐이라거나,

2) 전혀 의도치 않은 중에 사회 구조가 오직 영남인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을 어느 날 일시에 형성하고 말았다거나, 아니면

3) 비영남인이 영남인에 대한 일방적인 특혜 부여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결과였다는 등의 주장, 그리고 <동시에>

4) 영남인 일반과 그들의 적극적 써포트(support)에 의해 형성된 영남패권적 사회 구조라는 결정적(critical and unrivaled) 요인이 없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 상황을 무의 상태로 뒤집어 엎겠다는 이 가설은 실증하기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남인 개개인이 타지역 출신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등 뛰어날 리 없고, 영남인에게 훨씬 유리한 사회적 조건이 비영남인의 자발적 지지로 형성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실 상황이 역사적 인과관계 속에서 전진적으로 진행, 형성, 구조화한 영남패권 구도를 사회 체제 속에서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존재를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영남패권주의와 그 이데올로기가 영남 대중을 제외한 채로 논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가소로운 위선에 다름 아니다. 영남패권주의에서의 '영남'이 지시하는 것은 영남이라는 지역과 영남 대중, 그리고 '영남패권에 기생'하는 모든 세력과 개인이라는 주체를 모두 포섭하고 있다.

 

위와 같은 논리는 정당하며 적합하다. 영남인 일반을 뺀 채 극소수 영남 특권계층만으로는 도저히 영남패권주의를 설명할 수 없음을 사회의 현실 조건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이다. (실증적 현실은 이미 수많은 자료가 뒷받침하고 있는 바이며, 그것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이 글의 촛점을 벗어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영남 일반의 적극적 참여가 없으면 절대로 소수만의 영남패권 조차도 결성되거나, 또 다시 장기간 존속시킬 수 없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하물며 그것이 거대한 조직이라는 내면의 본 모습을 확인해 간다면, 더 이상 미시적 증명의 필요성은 없어지고 만다.

(, 패권주의의 주요 구성 요소로서 '영남 일반'을 규정한 것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부인할 수 없는 테제이되, 각 계층과 각 개인이 감당해야 할 <패권에의 기여도>라는 눈금분류에 있어선 물론 <차등>이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작의 후속 편에서 논할 것임)

 

3. 영남패권주의 실체 가리기의 동기 : 영남 일반과 개인 모두

 

매우 촘촘히 짜여진 사회적 난관의 조건을 겨우 겨우 뚫고 찾은 사회과학적 용어로서의 영남패권주의가 또 다시 더딘 걸음으로 일반에 다가오고 있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저들 패권 담당자와 그 지지 영남민들이 영남이란 주체와 패권이란 실체를 기어이 몰각시키고자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 방해 공작을 지속해왔는지에 대한 이면의 동기가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돼 있으며, 그것들은 또한 하나같이 현실에서 관찰 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 일련의 <동기>란 것은

1) (영남 일반에게 모두 해당되지만 특히 특권/지배 계층에게 '더욱' 적용되는데) 패권 상실정치 경제적 기득권 양보-에 대한 공포다. 더 들여다 보면,

2) (특히 일반 민중 개개인에게 '더욱' 해당된다) 전 국민에 대하여 상대적 우위의 사회문화적 지위를 점했던 선민우월의식의 와해에 대한 공포이자 동시에,

3) 열등 시민인 호남민과 동등한 선으로 내려와 실질적 지위 강등의 경험을 한다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에의 공포,

4) 사회 질서의 재편 가능성과 영남지역민의 수구적인 문화 양태가 가지는 적응력 결여라는 자각에 따른 극심한 심리적 위축에 대한 공포,

5) 진실 규명과 바로 잡기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받게 될, 피의자에게 던져지는 사회적 시선(혹은 편견, 그리고 소위 '왕따')과 대우에 대한 공포,

6) (비영남인으로서의 영남패권주의자에게 해당되는데) 변절과 배신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고 말 것임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와 같은 이유(동기)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언가? 영남인 개개인은 자신과 그들 지역민들이 쥐고 있는 패권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들 수 있다. 누가 먼저 그렇다고 인정하기도 전에 그들 스스로가 그 사실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4. 논리적 증명 : 개인이 가진 패권주의 존재성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필요하다. 영남인들에게, "영남인들은 2등 국민이다, 영남인들은 부당하게 사회적으로 소외받아 왔다, 호남이나 강원, 충청, 제주 중 하나가 한국 사회의 주류를 점한다" 라고 말해주고 이들에 동의하는지를 물어볼 일이며, 만약 그렇다고 대답할 경우엔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견딜 의사가 있는지를 다시 질문할 일이다.

위의 질문에 ''라고 긍정할 영남인이 단 하나도 없음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위 질문에 대해 영남인 중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부정을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게 그들이 사회의 주류임을 뼈 속 깊이 각인한 채 살아오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혹, "이 사실은 패권의식의 존재가 아니라 높은 자존심의 표현일 뿐이다"라고 누군가 말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다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 "호남과 충청, 경기, 강원, 제주 등은 영남과 동등한 수준의 정치적, 경제적 수혜와 사회 문화적 지위를 누려왔는가?" 이 질문에는 중학생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서울은 이미 전국의 축소판일 뿐 하나의 지역으로서의 대표성이 없다). 이것으로써 영남인의 현실적인 물리적 토대에서의 상대적 우위와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토대에서의 상대적 우위라는 인식은 자연 증명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적 토대의 상대적 우위라는 지위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더우기 그 현실 조건을 항구적으로 유지, 보전시키고자 한다면, 이러한 집단적 이념의 상태를 무엇이라 불러준단 말인가? 그것은 정확히 영남패권주의에 합치되고 말 뿐이다. , 자신의 존재로 인한 상대적 열등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우위의 조건을 항구화하겠다는 의식은 바로 패권주의란 말 외엔 부여해 줄 어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영남패권주의는 각 개인안에 내재된 면과 그리고 전 사회에 구조화된 두 가지 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품고 있음이다. 그 중의 한 면을 부인하는 것은 이미 오류이다. 패권주의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독점하기를 꿈꾸는 이상이므로 전 사회 공동의 이익을 해치는 행태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현재 한국인의 의식과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인자로써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영남패권주의와 상반된 멘탈리티(mentality)와 물적 토대를 가진 집단의 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남인의 대부분이 수혜적 영남패권주의-급수의 차등은 필요하지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적/정신적 혜택에서 제외되는 비영남인의 대부분은 영남패권주의적 사고와 사회체제, 그리고 그 문화에 저항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관찰을 통하여 왜 영남패권주의의 논의가 이제야 본격화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현상이 어떠한 유형의 사회 변동을 몰고 올 것인지가 좀 더 뚜렷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연환경으로 주어진 불공평 vs. 공평의 조건

 

공평의 개념을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주어진> 상태 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좀 거시기 하지요. 해당이 될 때도 간혹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니까요. 위에 공평의 조건들을 적어놨으니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고요.("공평이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지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출발점을 보장한다는 규칙이다. 태생적/환경적 약자에게는 미래의 손실분을 일정 부분 미리 보상한다는 지혜이다.") 공평과 공정은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공평(fairness or imparttiality)은 차등이 없음에 중점이 있고, 공정( fairness or justice)은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이 <정의>로운 상태임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님이 전제한 것, <모두에게 똑같은 양이 주어진> 상태를 '공평'이라고 일단 가정하십시다.

그러니, 지리적인 환경에 의해서 자연적인 공평이 깨졌다면 그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두 지역이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조건, 그러니까 한 나라(state)랄지, 한 도(province)랄지, 한 산업(industry)이랄지, 어쨌든 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조건에서만 해당하는 개념이어야 하겠죠. 예컨대, 한국의 노동자와 베트남의 노동자 간에는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공평의 개념을 놓고 따질 수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호영남이 백두대간에 의하여 동서로 갈렸는데 동쪽은 자연적인 조건으로 빈곤하였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왔으므로 공평의 상태가 깨져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따라서 동쪽 사람들이 서쪽 사람들의 부를 탐하고 서로 나눠서 공평하게 하자는 것은 정의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군요.

이 경우에는 바로 위에서 제가 말한 그 조건에 부합하는 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만약 그 동서간 불평등의 상태가 한(single) 나라라는 민족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이 불공평하므로 어떤 방법을 동원하건 그 상태를 최소화하도록 바로 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신라와 백제간의 각기 다른 정체성과 체제를 갖은 두 개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당연히 공정과 불공정 이전의 문제입니다. 부정의가 아닌 것이죠. 신라가 보기에 백제가 잘 살더라, 그러니 불공평하고 부정의하지 않느냐, 이거 안되겠구나, 가서 좀 뺏어와서 정의를 실현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도둑놈 맘보라는 것이죠.

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역사적 실제가 짐작하건대 대략 고려 이후 대한제국까지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 이 경우를 보십시다. 이 때 제도적(당시는 상놈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주거 이동의 자유가 매우 제한 돼 있었겠죠)으로도 그렇고 교통 수단의 미비로 인해서도 그렇고 서로 교류·소통하는 질적 양적 크기가 대단히 미약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경우 하나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듯 각 지역간의 물적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면 행정과 통치적 차원에서는 한 나라였을 망정, 지금의 호남과 영남은 상당 부분 각 각 <독립>적인 지역(province)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그 두 지역간에 자연적 조건으로 발생한 불공평의 상태에서는, 한 지역이 다른 한 지역의 것을 가져와서 똑같이 나눔으로써 공평을 만들겠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공평의 개념을 충족시켰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국가 통치적 차원에서, 국가 조세를 거둬들여 그 재원으로 동쪽 지역민에게 더 많이 분배함으로써 모든 백성이 고루 잘 살도록 정책을 펴는 것이 더욱 공평의 규칙에 합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왜 <교류>의 유무를 문제 삼고 있냐면요, 교류란 그저 커뮤니케이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자원·재화·용역의 생산과 분배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서 다른 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물적·지적 자원의 양이 일방적으로 컸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양은 훨씬 적으나 필수적이고도 긴급한 어떤 자원의 이동이 틀림없이 존재하여 그 두 지역이 상호 의존하며 공영을 지향해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적 교류가 됐건, 지적, 문화적 교류가 됐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풍요로운 삶을 향유할 수 없었을 거다라는 점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서쪽의 풍요로운 자연 조건을 가진 지역민이 운이 좋게도 조금만 일을 해도 넉넉하게 멀고 살 수 있는 반면, 동쪽 지역민이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각 종 생산과 분배가 그 두 지역 사이에 거의 오가지 않았었다면 그것은 곧 그 각각의 지역이 애초부터 상호 의존적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미 독립적 공동체로서의 존재 능력를 갖고 있었던 것이겠죠. 이 경우에는 절대적 의미에서 서로간에 차등이 있을 망정 그 상태가 불공평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자연의 열등 조건에 놓인 지역민이 우세 지역민들 것을 "배타적 질시() 빼앗아와야 한다는 사고방식" 이 마치 정당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겠지요. 빼앗는다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그 당위성에 있어 조금이나마 정상참작을 받으려면, 위에서 말씀드린 교류와 공동체라는 (최소한)두 가지('공동체''교류')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 한민족의 지역간 교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위의 두 조건이 충족되기엔 상당히 미흡합니다. 그러므로 님이 말씀하신 "뺏음과 질시"는 더구나 물론이려니와, '공평히 분배해야 한다'라고 문구를 고쳐놓고 말 할 때마저도, 그 경우가 갖는 당위성은 역사적으로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서남쪽 지역과 동남쪽 지역만을 놓고 볼 때를 말합니다.) 대신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 공동체 유지와 발전을 위해 분배의 묘를 살려야 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중세에 있어 만약 동쪽 지역민들이 서쪽 지역민의 풍요를 질시하여 그 부를 뺏어가려고 침략이나 어떠한 다른 경로를 통한 탈취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면 그 동기에서부터 당위성을 전혀 얻지 못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대략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각 지역간의 교류가 대단히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 동기의 당위성이 웬만큼 충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류가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부의 편재가 지속되고 있다면 무언가 부정의가 분명 있다고 봐야할 겁니다. 중앙 정부에서 분배 정책을 소홀히 했달지, 부의 대물림이 정책적으로 가능도록 방치했달지 하는 부정의가 존재 했었으리라 봅니다. 이 경우엔 불공평, 그 부정의를 강력하게 바로 잡았어야 하겠지요.

그럼 이제 구한말 경부터 일제 강점의 근대사 시기를 보기로 하지요.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한 서쪽 지역민들의 피수탈이 동쪽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가혹했습니다. 뼈골이 부서져라 일하고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농민들의 수는 호남지역에 넘쳐났지요. 그러니 영남민이 호남을 질시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님의 가정대로, 그 이전 수 대에 걸쳐 내려온 영남민들이 호남민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다고 한 번 가정하고라도, 적어도 50년이 넘도록 이러한 호남의 피수탈이 극심했던 역사적 시기를 지나왔다면, 영남인의 그러한 질시의 감정은 정당성을 완전히 잃고 만다고 보겠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공평을 논하는데 있어 합리성이 전혀 없는 얘기입니다.

공평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때마다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것이 기계적 공평은 그야말로 원시적 공산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빌어먹을) 유토피아라는 겁니다. 그 기계적 공평은 사실상 공평의 규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많이 일한 사람이 일 한 만큼 많이 갖는 것이 정의를 이루는 것이니까요.

영남패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평의 규칙이 본원적으로 굴절돼있다는 것입니다. 그 규칙만 그대로 지켜지면 '기계적 차등'{, discrepancy ; , inequality(불평등)이 아닌}의 현상 차체는 얼마든지 <정의>의 표현이 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불공평의 규칙을 가치체계로 가지는 부정의(injustice)입니다.

[편집자 주: 원문은 대화체 형식으로 시작되지만 대화부분을 일부 절사했음]

영남패권주의는 지배의 동적 메커니즘

영남패권과 각 지역민의 입장 차이는 어떻게 구성되나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인식과 현실 감각이 무딘 사람들이라고 해서 적어도 3공 박정희 독재정권 이후 지속되어온 이 나라 안의 전분야에 걸친 영남 권력 독점적 현상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말의 쓰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은 이 용어가 도발적인 느낌을 줘 섬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겉으로 드러나는 거부감이라는 일차원적 감정만이 아니라, 영남의 지배권을 공히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입장 차이>로 생기는 <세 가지 유형의 복합심리>가 있다.

 

영남인으로서는 '우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도리어 그 쪽에 해가 미칠지 모른다'라는 으름장, 비호영남인으로서는 '이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실익은 커녕 호남의 고립과 사회적 혼란만 초래할 것이므로 제3자로서는 개입을 자제하고 관망하는 게 났다'라는 기회주의적 자기 실익 챙기기, 그리고 호남인으로서는 전 사회로부터의 고립 가능성이라는 위의 <패배주의적 사고>와 함께, '사회적 분란의 빌미 야기로 말미암아 제3자인 비호영남인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라는 <배려>의 마음이 깔려 있다.

 

 

<패권>의 의미 규정

 

이렇게 영남패권주의 거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감추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문제점은, 이들이 패권에 대해 단순히 <늘 과욕을 부린다, 나보다 우세한 파워를 향유한다, 그래서 봐주기는 좀 꼴사납다> 정도의 매우 나이브(naive)한 인식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패권>의 요체는 바로, 패권세력이 <타자의 몫을 빼앗아간다>에 있다. 어떤 지배세력(dominant power)이 스스로의 능력이 우세한 이유로 나보다 더 많은 양을 소유할 뿐, 나의 몫을 향해 곁눈질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우위와 우세의 <상태>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패권(predominant influence over others ; hegemony)이란 능력이 우세한 상태만이 아니라, 현재 가진 물리적 힘의 우위를 내세우는 집단이 그것을 협박의 무기로 삼아 타자의 몫을 부당하게 강탈, 탈취해가는 <조건>을 필수 요소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남패권주의>의 핵심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영남의 우위라는 <정적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지배하므로써 그 지역의 몫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동적 매카니즘>을 일컫고 있다.

 

(여기에서 패권주의 용어에 대한 논란을 정리하는 뜻에서 말한다면, 영남부족주의, 영남지상주의, 영남중심주의 등등은 위에서 논한 패권주의의 핵심 요소인 강제적 <탈취>라는 의미를 함축하지 못하므로 모두 부적절한 어휘라 하겠다.)

 

이 조그만 인식의 차이('우위의 상태''탈취의 조건' 사이의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사회 현상의 결정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키로 한다.

 

 

<비호영남>이 갖는 개념 인식에서의 혼란

 

호남인 집단이나 비호영남 집단은 이제까지 커다란 착각 속에 지내온 셈이다. 특히 비호영남인들을 일차적 희생양이 호남인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적게 깎여 나간 자신의 몫을 두고, 그만 안도하고 자족하는 자기 기만 속에 안주해왔다. , 부당하게 소외당해 왔던 것은 일차적으로 호남이었으니 비호영남은 이제 자신이 과연 영남에 이은 <두 번째 우세>지역으로서 가해자의 입장에 서는지, 호남에 이은 <두 번째 순번의 피해자>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며 혼란을 맛보는 거다. 이 인식의 혼동의 원인은 바로, '영남이 패권을 가졌으므로 영남 외의 <모든>지역은 공히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는 방정식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이 없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패권이란 뺏음(그 이면은 빼앗김)이다'라는 개념이 없는 경우, 어이없게도 자신의 지역이 두 번째 <우세>지역으로서 굳이 피해 당사자가 아닐거라는 편의적 설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비영호남인의 정치공학적 위치 선정은 꼭 위에서 말한 개념 이해 부족에 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개념상의 혼란에 안주한다는 것이 사실은 그들 당사자가 스스로 불러들인, 강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계산적이고 기회주의적 처신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위치 설정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우세'라 자임하는 것은, 영남으로 하여금 비호영남 스스로가 호남이라는 피해 당사자와 같은 편에 서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달라는 호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번째 순위의 피해자가 됨을 영남을 향해 인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호남과 같은 정서를 나눔으로 보일 것이므로 패권자인 영남과는 무척 불편한 관계가 이뤄지고 말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피해 당사자'라는 위치 선정은 이번엔 호남인을 염두에 둔 이름이 된다. '두 번째 우세'라는 정체성은 당연히 호남에게는 비우호적 감정을 유발시킬 일이다. 그래서 영남을 향해서 견지했던 정체성이 호남을 향해서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두 번째 피해 당사자'로서의 정체성을 끌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일부 비영호남인의 순수한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호남과 영남 모두에게 비호남인 전체의 기회주의적 속성의 표현으로 다가오고 말 것임은 또한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비호영남이 갖는 서로 대립될 법한 두 가지 상충하는 위상을 같은 사람(집단)이 상황에 따라 표리부동하게 오락가락 처신하는 방식이라고 단순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비호영남 지역민 내의 일정한 집단은 내내 '두 번째 우세'임을, 그리고 또 다른 집단은 변하지 않은 정체성으로서 '두 번째 순번의 피해자'임을 계속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비호영남 내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이 두 그룹이 병존하고 있으나 우리 눈에는 자기 정체성을 편리에 따라 수시로 뒤바꾸는 사람들만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선 선의의 비호영남인마저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는 비호영남인들에게 가려 함께 매도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비호영남인 중에 '두 번째 우세'로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인데, 이 현실은 사실상 영남패권주의의 공포스런 위력과 또 그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대부분의 비호영남인들의 뇌리마저 지배하고 있는가를 증언하고 마는 것이다. , 비호영남인들의 '스스로 알아서 기기'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이다.

 

이와같이, 비호영남은 <패권>의 의미가 <뺏음/빼앗김>이라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우위/우세>의 상태라고 오해함으로써 자신의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산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 부족을 불러들인 심리를 한풀 벗겨보면 <두 번째의 우위> 라는 정체성 규정과 <두 번째 순위의 피해자>라는 정체성 선정 사이에서 맛보는 곤혹스러움을 희석시키기 위해, 그 개념상의 혼란을 스스로 불러들여 안주하기를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미묘한 과정은 결국 패권세력인 영남에 대한 눈치 보기에서 나온 처세술로서 우리 사회의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비호영남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호영남 일반>에 대한 호남의 태도

 

반면, 호남인들은 정치 경제적인 물적 토대에서의 빼앗김은 물론 사회문화적인 차별까지를 노골적으로 받아온 관계로, 그 깊은 상처로 인한 패배주의의 그림자가 가슴에 드리워졌을 거라는 유력한 유추를 허용하더라도, 저항의 화살이 오직 영남에게만 향할 뿐 비호영남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태도를 설정하겠다는 것인지 그 개념이 아직 모호하다. 그들은 비호영남인들과 마찬가지로, 패권주의로 인한 피해가 오직 자기네 호남 지역만일 뿐, 알고 보면 비호영남인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에 함께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는 미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패권 개념에 대한 인식의 오류가 발생시킨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패권의 주체는 분명 딴 지역이 아닌 영남임을 잘 알고 있되 그 피해가 오직 호남 자신에게만 미친다고 믿는 것은 분명히 패권에 대한 인식의 오류다. 그것은 당연히 패권 주체가 아닌 <모든> 지역의 '빼앗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본질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호남인의 심리 기저에는 자신들의 영남패권주의에의 저항이 사회 갈등의 첨예한 표면화와 그 증폭으로 결국 나타나고 말 것이므로 이 혼란은 필히, 가해와 피해 지역을 벗어난 '중립지대' (그들의 착각에 의한 인식)에 있는 <비호영남인>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입힐 것이란 우려를 포함하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깊은 배려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피해자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비호영남인에게, 자신이 당해왔던 영남의 패권적 행위를 닮은 공세적 저항을 취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본의 아닌 폐를 끼친다고 여기면서 그간 참고 자제해왔다면, 그것은 대단한 인류애의 발로로서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비호영남인들과 마찬가지로 호남인도 여기서 똑같은 개념 인식에의 오류를 범해왔던 허물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나중에 논하겠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해 비호영남인과의 불신과 불화를 알게 모르게 키워오게 된 이유가 된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비호영남>의 대응 자세

 

다시 돌아가서 비호영남인군()의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대응 방식을 좀 더 살펴보자. 설사 비호영남인 중에 영남패권세력에 의한 자신들의 피수탈적 처지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그룹이 있었다 할지라도 어차피 호남인에 비해서는 그 피해의 강도가 훨씬 약할 것이므로, 스스로 호남인에 앞서서 문제 제기나 저항을 결단할 동기 부여는 충분히 갖지 못했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이들 선각자적 소수에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그들 <내부>에 떠다니는 호남에 대한 <은근한> 혐오와 경원의 정서이다. 여기에서 <은근함>이란, 약자를 호위하는 제스처 때문에 그만 강자로부터 자신이 한통속이라 점찍히고 말 것에 대한 두려움을, 선행적으로 말소시키고자 하는 간접 표현이 되는데, 그것은 사실상 약자가 선택하는 애처로운 정서이기도 하다.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미워함으로써 강자로부터의 추궁을 면하겠다는 처신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가 애처로운 표현일 망정 일단 집단적인 현상이 될 때는 역시 <차별>이란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비호영남의 집단적 정서로부터 한 비호영남인이 개인적으로 탈퇴하겠다는 것은, 그 자신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가장 가까운 친지들이 항용 견지하는 무의식과의 결별이고, 그것은 곧 그들 친지들과 공유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코드를 내던짐으로써 인간적, 개인적 유대와 교류까지를 모두 포기하겠다는 사회적 자해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자산을 다 내다버리는 이러한 실익없는 어드벤처에 목을 맬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소수의 깨인 비호영남인들 능력만으로는 다수가 지지하는 호남에의 혐오 정서를 뒤엎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영남>의 대응 자세

 

영남인들이 <영남패권주의 논의>을 대하는 입장이란 뭔가? 감정상으로는 극심한 혐오요, 정신적으로는 <피해의식>이다. , 실제 피해의 크기에 비해 스스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피해의 양이 워낙 커서 그 사실이 못내 불공정한 처사로 보이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불공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무력감에 괴로워한다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것은 망상의 일종이다. 영남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수십 년에 걸쳐 이 사회의 패권카르텔을 형성해왔다는 점을 잘 인식,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자신만은 그 수혜대상 범위로부터 늘 바깥에 머물러왔다고 강변한다.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를 경우, 논리적으로는 모든 이가 모든 타자를 향해 그들의 책임을 묻는 양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의 가정일 뿐, 어차피 논리를 결한 그들 당사자의 면책 노력은 결국 이기심의 극적인 발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일단 자신과는 직접 연관이 없어보이는 극소수 권력층에게 그 화살을 돌린다. 일단 그것으로 일부 변명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명쾌히 설명되어질 것이 아님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남인이 다음에 선택하는 전략은 대별하여 두 가지인데 (영남패권이 정당하여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우기는 초극단의 예는 논의에서 제외함) 하나는 방어적 형태로서 앞에서 언급한 <피해의식>의 표현이고 또 하나는 공격적 형태로서 <으름장 놓기>이다. 첫 번째는 영남의 패권으로 이득을 챙긴 집단이 결코 영남인 일반만이 아니고 <타 지역>의 중상류 계층도 그 일원이므로 그들에 비한 자신의 수혜량은 오히려 약소하여 자기가 부당한 추궁을 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의 영남인은 자연, 스스로 발견한 방어기제의 유용성에 흡족해하고 아예 심취해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기 변론이 아예 믿음으로 전이한 상태를 보인다.)

 

다시 말해,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강화하기 위해 그 기제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부여하는 나머지, 종내엔 그것을 실제 믿어버리고 현실로 체화시킨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가져오는 것은 피해 의식의 자가 발전이다. 이 피해 의식이 있는 한 일단 면책의 사유가 되므로 그는 상상 속에서 꾸며진(fabricated) 분노를 증폭시키려는 병리적 행위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다. 이것이 초기에는 면책을 위한 합리화로써 시작했으나, 그 합리화 작업이 호남은 물론 비호영남으로부터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계속적인 의심을 받게 되자, 결국 방식을 퇴행적으로 이행시키고 마는 것이 <으름장 놓기>라는 형태다.

 

두 번째의 '으름장 놓기'는 말 그대로, 상대로부터의 추궁을 <공격적>으로 방어해내는 방식이다. 이 형식에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집단>적인 형태에서의 특징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사실 별 실효성이 없다. 일 개인은 그 사람의 전 인격으로 판정되므로 영남인이라고 해서 타지역인에 비해 우세한 사회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영남인 일 개인이 이러한 방식으로는 타자에 비해 언제나 우위에 설 수 없으므로 자기를 방어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집단적으로는 결정적 효과를 보는 전술이다. 이것이야 말로 한 사회를 재갈물릴 수 있는 섬뜩한 파워요, 그 자체로서 패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노출하는 약점은 얼마든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남패권주의의 해법 편에서 논할 것임)

 

비호영남에 의한 대리전-그 추악한 부도덕

 

그러나 '으름장 놓기'가 꼭 바로 눈 앞에서 협박 공갈을 치는 노골성을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강자로서의 체신을 잃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자칫, 사실상 부실한 속마음을 다 내비치고 말 수 있는 위험한 전술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외면적으로는 관심없다는 듯 짐짓 딴청을 부린다. 대신 그들에 부역하는 비호영남에게 압력을 넣으며 뒤로는 면밀히 사태를 주시한다. 이 때는 오히려 영남의 의중을 미리 읽는 일부 비호영남이 앞에 나서서 극렬히 공박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남이 직접 나서기에는 약자인 호남을 또 다시 핍박하는 것으로 보일 것 같아 꺼려지는 일이지만, 이들 비호영남으로서는 외형상의 명분을 얻어 매우 떳떳하며 공정한 입장에 선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자신만의 실익을 남몰래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실익'이란 심리적 안정이란 부분을 포함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주구로서의 커밍아웃이 되는 것인데, 이들은 단순히 영남에 대해 충성 시위의 기회로 삼는 것만이 아니고, 실제 현실에서 영남패권이데올로기 아래 짜여진 기득권을 일반 영남인보다 훨씬 더 많이 누려왔으며 그만큼 현실적 예상 손실이 크게 걸린 집단이기 때문이다. 강자인 영남을 호위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피해자임이 분명한 호남에 공세적이라는 것은, 그들이 영남패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는 집단이다라는 설명을 빼고 결코 가능할 리 없다. , 으름장 놓기는 영남이 구축하고 관리하는 구조 아래 비호영남이 대리해주는 형식의 공격적 대응인 셈이다.

 

영남으로서는 이러한 충성어린 영남패권 부역자 비호영남인이 자신의 비도덕성에 운무를 피워올려 패악성을 은폐해주는 전위대 역할을 대신해준다는 게 매우 든든한 것이다. 이렇게 비호영남인에 의한 대리전이란, 외피만으로 보기엔 자발적이지만 실상을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남의 패권에 의해 <강요>되는, 그러나 공동(영남과 비호영남간)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에서 양자가 비열한 야합을 하고 있는 추악한 비도덕을 과시한다. 이렇게 가해 주체 세력이 장막 뒤로 몸을 숨기고 패권에 아부하는 제2종 시민들이 대리전을 치름으로써 피아구분이 확연치 않은 시기가 계속될 때가 반영남패권주의 세력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된다.

 

영남 주류는 매우 괘씸하다는 심기를 가눈 채 팔짱을 끼고 느긋한 교만의 시선으로 영남패권주의와 그 이데올로기 논의를 깔아보고 있다. 발끈한 심정의 관심 표명 자체가 그만 사회의 이목을 끌 수 있음을 앎으로 태연히 돌아앉아 짐짓 딴청을 피운다. 그러나 순수하고 치기어린 열혈 영남인은 결국 나름대로의 분통을 자제치 못하고, 외형상 자발적이나 내면상으로는 강요를 받는 비호영남인들과 야합하여 공세적 방어 전술을 구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지금으로부터 앞으로 얼마의 기간 동안 영남패권주의 사회적 논의 확산 과정이 겪는(그리고 겪을)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 체제

불공평의 규칙 : 계층의 상향 이동 차단

영남패권주의의 체제는, 상류와 중산층 이상만이 (영남민은 타지역인에 비하여 같은 소속 계층 안에서 상대적 우위를 누리지만)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누리도록 짜여진 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이 시간에도 살아 숨쉰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이 체제를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그것을 창달 심화시키고 있다. 이 체제 아래서 하층민이 상부로 이동하는 기회부여는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인이 계층 이동하는 유일한 통로는 학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산층 비영남인과 기층민 영남인간의 경제사회적 우열은 당연히 존재한다.) 고등학교 출신과 대학교 출신의 봉급차가 지극히 엄격하다. 그 사람의 능력과 연계 없이 학벌 자체로서 봉급수준이 결정되고 만다. 그 봉급차는 재벌기업들이 시행하는 명문대 출신자에 대한 우대 채용 관행과 임금체계 적용에서 강화되었다.

2003년 현재 100대 기업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영남인 소유 대기업은 소위 명문대 출신을 싹쓸이 하고 그 중에서도 영남출신을 선택적으로 임원에 승진시킨다. 패권의식으로 무장된 재벌기업은 일반 기업과의 차등으로 인한 서열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의 대졸 출신 사원에게 일반 기업 사원의 봉급보다 월등한 액수를 지급한다.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여 훈련시켜 유능한 사원으로 만들겠다는 기획이 아니라, 경쟁 기업에서 그 인력을 가져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위를 점하려는 채용 전략으로 신입 때부터 높은 봉급을 약속하게 된다. 따라서 대졸 출신 대기업 사원의 임금 수준은 일반 기업체 사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근무 연한이 길어짐에 따라 대졸 사원간에도 능력과 직무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봉급차를 둬야한다. 이것은 이의 제기 영역 밖에 있는 관행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의 권위주의라는 가치체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기업의 관행은 역시 권위주의 이념체계에 어울리는 하부 체제를 형성하게 되어있다. 대기업에서 관행을 만들었으므로 일반 기업에서는 그 체제를 그대로 모방한다. 대기업에서 상하의 관계를 유별했으므로 일반기업에서도 고졸 출신과 대졸 출신의 확연한 차등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들이 대기업들로부터 차별되었으므로 아래 계층에 있는 고졸 출신을 차별해야만 그 만큼의 심리적 보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체제는 경영학적 마인드와 전혀 관계없이 사회의 가치체계에 의해서 절로 규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 권위주의 가치체계의 원류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영남민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일정한 카테고리 안에서의 어드밴티지를 누릴 뿐, 학벌이라는 장벽마저 뛰어넘을 순 절대 없을 만큼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종적 횡적으로 불공정 경쟁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고졸 출신과 대졸 출신의 봉급 차이가 크게 벌어진 사회 시스템에서는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계층 이동할 기회가 매우 제한돼 있다. 더구나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자가 그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 졸업시키고 그 아이가 부모가 가진 낮은 경제적 조건을 다 만회하면서 중산층 이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대단히 희소한 것이다. 영남패권 이념체계에 의해 구성되어진 대한민국 사회는 계층 이동을 쉬 용납하지 않고 서민과 기층민을 항구적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다. 이 체제는 불공정 경쟁이라는 규칙을 정식 규칙으로 채용한 시스템이다.

 

불공평의 항구화 기제

우리는 이러한 비생산적 시스템이 자본주의 발전 도상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부정적 부산물이라며 그 의미를 애써 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시스템이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에는 일체 반론없이 동의하다가도 그것이 영남패권 이념체계의 산물이라고 논증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부인하거나 아예 펄쩍 뛰고 만다. 그만큼 영남패권주의의 가치관이 이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그 시스템이 영남패권이 아닌 어떠한 문화코드가 됐건 한국의 가치체계와 관련지어 설명을 시도한 적조차 없다.)

이 사회는 공평이란 개념을 잃어버렸다. 공평을 되돌려주겠다고 해도 그것을 되찾는 시도 자체가 불경죄를 짓는 듯하여 불안하고 먼저 권력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게 되었다. 아니,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자발적으로 내팽개친다. 불공평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로 세워놓으려는 결단을 하기 위해선, 또 다른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마음으로 다져야 한다는 선()과정이 고통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불공평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장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운 것이다. 이러한 사회심리적 결정 과정이, 다시금 영남패권 이념체제가 선호하는 <불공평의 경쟁 규칙>을 항구화하고 마는 메커니즘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영남이라는 지역만이 아닌 <전 한국>의 정신이요 가치체계이며 사회체제이고 문화사조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기득권 수구적이요 냉전이데올로기적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또한, 겨우 영남민과 영남출신 군사 정권(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허울 좋은 영남의 김영삼문민정부, 기만배신의 노무현 신영남패권정부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그 사람의 영남출신 여부와 전혀 상관없이 아무 지역 출신이더라도, 그가 {예컨대 정치 권력층, 정부 관료, 행정부 고위층, 사법부 종사자(특히 변호사), 전체 공무원, 재벌, 대기업 임원, 기업가, ()의사, 경제적 기득권층, 은행과 금융기관 임원, 정당인, 언론사(신문사, 방송사, 유수잡지사) 사주, 편집진, 기자군, 방송국 임원, 드라마피디, 시사교양연예피디, 작가(소설, 드라마, 교양물) 대중음악인, 고수입 연예인, 고전음악 영화 연극 공연 미술 등 단체의 리더그룹, 시민단체 리더그룹, 노동계 리더그룹, 기독교 신교와 구교 지도부, 신부, 목사, 각 종파 원로, 사학재단 이사진, 모든 대학교수군, 사회과학, 자연과학, 테크날러지 등의 연구직 종사자, 초중고교 임원과 보직교사 등} 현재 대한민국 사회 체제를 견고히 떠받들고 있는, 즉 서민과 기층민을 제외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실질적 리더 혹은 오피니언 리더로서 일반 서민보다 더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공히 인정받고 있다면, 그 사람들 개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지위로 말미암아 이 영남이데올로기 체제 속에서 그만큼 덕을 봐왔던 자이며, 영남패권이데올로기란 체제가 대한민국에서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부지런히' 기여해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이었으며, 이들이 개인의 행복 추구 과정에서 흘린 땀과 노고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 질서는 이만큼 일그러져왔던 것이며, 몰가치의 아노미 세상이 되었으며, 서민과 기층민들은 평등권을 저당 잡히고 희망을 잃은 채 억압의 틀 아래서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은 그만큼 크다.

이들 중 특히 종교계 지도자, 교수, 학자, 언론인 등 지식인이 추궁 당해야 할 책임의 몫은 너무나 크다. 왜냐하면 이들이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의 패악을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체계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개인적으로 혜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체제를 돌이킬 수 없을만치 강고한 구조로 만드는데 첨병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개인이 영남패권 정치권에 부단히 저항해왔고 영남패권이 어질러 놓은 사회 질서에 혐오감을 안고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실질적으로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융성에 한 삽 부조해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하물며, 직접적으로 그 체제를 옹위해오고 있는 영남기득권층의 패역에의 기여도는 자심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이렇듯 제 영남민은 자신들의 이해와 기득권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타지역민을 희생시키고 올라섰지만, 이들 영남민 서민과 기층민보다 한층 더 영민한 타 지역의 엘리트 그룹은 이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체제 속에서 영남민 일반보다 더 우세한 지위를 누리고, 실질적으로는 영남의 서민과 기층민을 억압하는 위치, 즉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질서의 한 축을 떠받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남이데올로기란 영남의 패권을 지향하므로, 그 영남패권주의에 기생하기로 마음먹고 발 빠르게 움직인 자는 자신의 출신지역과 아무 상관없이 영남패권주의에 자신의 정체성을 굴복시켜 영남기득권과 동일하게 행동함으로써 그 체제가 제공하는 혜택을 똑같이 나눠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영남패권의 이념체계의 견고화에 공헌하게 된다.

영남패권주의는 영남의 패권을 지향할망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지역의 지분을 빼앗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지, 그것만으로써 영남 서민과 기층민에게 마저 타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보장해주는 체제가 아니다. 영남민 서민은 타지역의 서민에 대한 비교 우위를 누릴 뿐 타지역의 중산층과는 절대 대등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남패권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사회체제는 기득권을 가진 자가 계속 기득권을 대물림하게 되어있고 서민과 기층민은 아무리 그들이 영남이라 하여도 여전히, 냉정하게도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상승을 원천적으로 방해하고 차단하는 체제라는 사실이다. 영남 서민이 영남패권 체제 아래 중산층 이상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차별받는다면 호남의 서민은 영남 서민이 받는 몫 위에다가 영남 서민과 기층민을 포함한 모든 영남민으로부터 받는 사회 문화적 차별과 억압까지를 받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타지역의 서민도 호남민보다는 약하지만 영남 서민들 보다는 더한 이중의 차별 속에서 살고 있다.

 

결론 : 영남패권주의 가치체계의 본질

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근본 뿌리로서,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공유하는 '가치체계' 속에 <공평>의 개념을 첨부터 제외시켜야 하는 사회, 자식에게 공평에 대해 가르치기를 기피해야 하는 사회, 공평과 공정의 인식을 현실 생활에서 멀리하며 살수록 성공의 길이 쉽게 열리는 사회는 죽어가는 사회다. 불공정의 경쟁 환경이 권위주의라는 이념에 의해 호위 받으며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속으로 썩어가는 사회다.

이 문화를 영남패권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었다. 불공정 경쟁이 어엿한 경쟁의 규칙으로서 불평없이 용인되는 가치 기준은 영남패권주의 체제가 찍어낸 주물(鑄物)이다. 이러한 사회 체제 아래에서는,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더욱 축적해내고 갖지 못한 자는 있는 것마저도 계속적으로 탈취당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계층의 상향 이동의 기회는 엄격히 제한된다.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으로부터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에 의해 호남을 비롯한 비호영남 서민과 기층민은 이중의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산다. 영남패권주의의 가치체계는 이토록 비인간적인 삶을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강요한다.

그 가치체계는 비합리, 불공정, 비효율, 반인륜의 총합이다. 삼십 수년 전, 군사 독재 박정희를 따르고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과 사회적 지위로 보상받겠다던 영남대중의 패권주의 사고가 이 땅의 모든 가치체계를 파멸적으로 훼손시키고 급기야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온 영남민에게조차 억압기제로 작동되는 기이한 괴물로 둔갑한 것이다. 아직까지 이것은 호남인, 그 중에서도 호남기층민에게 가장 가혹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전 호남민과 비호영남민에게 공히 패권의 찌꺼기를 안기는 한편, 영남 서민과 기층민에게도 역시 큰 고통을 지우고 있다. 이 시스템의 타파는 계급/계층적 접근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계급적 불평등은 겉으로 표현된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비인간적 시스템은 영남패권 가치체계가 갖는 비인간성, 비효율성, 비합리성 등을 영남을 비롯한 전 대중들에게 부단히 이해시키는 대대적 시민운동을 통하여 깨뜨려 나갈 수 밖에 없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은 누구인가?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비윤리, 비합리, 비효율, 불공정의 총합)

 

가치체계

진실 은폐를 위한 개념의 왜곡

 

순진을 가장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가진 망국적 병폐를 들 때 지역감정, 지역주의, 지역갈등 등을 꼽는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나 외국의 예를 끌어 들이며, 지역감정은 애향심의 발로로서 인간의 건강한 정서이므로 지역주의라는 대결로만 번져가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라느니, 지역주의도 인간의 삶에서 안정을 담보삼기 위한 공동체의식의 연장이므로 지나치게 이기적이지 않은 선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느니, 지역갈등도 단지 각 지역간의 지배집단들이 벌이는 이권다툼의 확대해석일 뿐 각 지역 대중들간의 갈등은 아니라느니, 말을 돌리며 가장 핵심되는 문제를 애써 비켜간다.

위의 세 가지 개념은 모두 쌍방향, 즉 거의 대등한 <두 지역>간의 대립을 공통분모로 거느린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지구상 어느 땅 어느 고을을 가든 언제나 마땅히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간 사회의 원초적 모형이고 현실적 실체이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고로 한국의 지역문제는 우려할 만한 현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 현상이 '보편적'이므로 곧 <정상적>인 범위 안에 있다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지역문제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체계적으로 별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타이른다.

 

그런데 이들이 언급하기를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바로 '지역패권주의'라는 개념이다. 지역패권주의는 위의 세 가지 개념과는 다르게 어느 두 지역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 어느 <한 지역과 여타 전 지역>간의 문제라는 해석이다. 지역패권주의란 위의 세 가지 개념과는 판이한 시각으로 본 지역문제 접근법이다. 시각이 다른 것만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실체의 중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작업이다. 더구나 '영남패권주의'라는 논제가 나오면 이들이 경기를 일으키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새로운 개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꺼려하고 극구 기피해오며 순전히 남의 곁다리만을 대신 긁어왔었다는 참회론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이들 학자군의 저항은 틀림없이 일반 대중의 그것보다 훨씬 거셀 것이다.

 

 

그럼, 영남패권주의가 위의 세 개념들보다 얼마나 명쾌하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설명하는지를, 가치체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로 하자.

 

 

 

가치체계 파괴 : <공평> 개념의 부재

국가에서 시행하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 모든 정책이 관행적으로 어느 한 지역민만을 지속적으로 '특별 우대'하여 왔으며, 사회 모든 분야-국가 시책의 유무를 떠나서 시민의 경제활동 환경 등을 포함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아예 '경쟁조건'이 그 특정 지역 출신자들에게 보다 우호적 방식으로 고착화되었고,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 지역 출신자의 '독점적 지배력'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어 왔다면 그 사회의 <가치체계>는 근본부터 부정의에 기초해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편중의 현상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거짓없는 실체이다.

영남패권주의로 인해 발생한 가치체계의 비틀림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공평의 부재>라는 부정의이다. 거꾸로 말하면, 공평의 부재라는 우리의 가치체계가 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사는 사회성을 배워나가는 유아기 때부터 그렇게나 일찍, <공평(fairness), 공정>의 개념을 익히게 되어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유지 발전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 요소이자, 인간의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에서 근간이 되는 개념이다. 유아기의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하물며 형제간에도-서로 공평한가의 문제를 최우선 관심으로 놓고 다투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적 탐욕만이 아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다행히도 그것을 제어하는 도구 또한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평에 대한 관심은 거의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공평한가에 대한 '판단'은 아직 미숙할지언정 공평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이라는 얘기다. 그 아이가 지금 적게 가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너의 필요의 크기가 작아서, 혹은 다른 기회를 더 가진 대신으로, 아니면 자발적 양보와 미덕을 실천하기 위하여' 등등의 이유를 들어 공정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줄 때 그는 울음을 그치고 환하게 웃을 것이며, 그가 나중 커가면서도 상대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공평>에의 이해는 인간의 이성을 실험하는 첫걸음이고 합리를 깨우치기 위한 기초정지작업이다. 이것은 윤리의 근본을 이룬다. 공평이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지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출발점을 보장한다는 규칙이다. 태생적/환경적 약자에게는 미래의 손실분을 일정 부분 미리 보상한다는 지혜이다. 이 가치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초석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마련하기로 약속하며, 자유와 평등의 최대공약수를 실현하겠다는 '일반의지'로서, 인류의 평화애호적 삶의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

공평이라는 가치가 확고하게 정의되지 못했거나 어려서부터 실천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좋은 제도를 들여와 심어놓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들에게 공평의 개념이 서있지 못하면, 그 사회는 가치 혼란, 끝없는 부패와 타협, 다툼, 불의가 득세할 것이며 결국 원시 야만에 멈춰 서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가치체계는 이 공평의 개념을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줄 수가 없다. 공평 대신에, '때론 손해도 보고, 때론 이득도 챙기며, 부당할 지라도 참고 <사이좋게> 놀라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양보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양보는 오히려 경계할 가치이다. 공평이 전제되지 않은 양보는 손해만 안기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이좋게 놀라는 당부에는 아무런 이치가 서있지 않다. 사실상 (친하지 않은 아이에게는)'양보 하지 말라'는 요구를 말 속에 감추면서, 동시에 '사이좋게(화합)' 지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거짓이요 이율배반이다. 한국의 부모는 아이에게 자기 몫과 상대의 몫을 서로 인정하는 공평의 룰을 지키는 학습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아이에게 공평이 아닌 타협과 융화를 가르칠까?

 

(이 교육 방식은 새삼스러운게 아니고 자고이래로 있어온 <융화와 화합>이란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 둘은 어디까지나 공평이란 개념에 배반하는 개념이며, 또한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환경'공평'이란 개념을 그나마 고쳐쓰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망가뜨려 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타협과 화합'이라는 사회화 과정의 기술은 삶을 이제 처음 배워나가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가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공평에 대한 개념이 확립될 무렵, 공정과 불공정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위의 가치를 위하여 잠정적으로 양보하고 인내하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공평을 가르치지 않은 채 화합을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화합마저 가르치지 못하고 마는 오류이다.)

 

 

새로운 학습 : <불공평의 규칙>

 

왜냐하면 실제 기성 사회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공평에 대하여 진정으로 가르쳐 줬다간, 사회의 불공정이나 부정의와 부딪칠 때마다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해댈 것이며, 배워온 가치와 현실의 실체간에 놓여있는 간극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고 결국 절망하고 말 일을 도처에서 만나리라 우려하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주의 체제 안에서 상대적 기득권을 누리는 영남민도 그 자식에게 공평을 가르칠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다. 제대로 가르쳤다간 그 아이가 자라서 영남과 타지역간에 놓인 불평등을 보고 스스로를 비판하다가 자기 몫도 챙기지 못하는 빙충이가 되고 말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비영남민도 자기 자식을 공평의 룰을 제대로 지키는 아이로 키울 수 없다. 세상은 불공평의 룰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아는지라, 아이가 원칙만을 따지다가 결국엔 사회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나 반항아로 자라고 말 수 있다는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사회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이단아로 만드는 것이, 부모나 선생의 입장에서는 결코 죄책감을 갖지 않을 보장이 없기 때문에 미리부터 공평의 개념보다는 화합을 가르치게 된다. 화합을 강조해야만 하는 부모들의 의식 속엔 현 사회체제와 관행, 문화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깃들어 있다.

 

혹 그것의 개념을 제대로 가르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공평이란 개념을 '오직 가정 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가치로서 한정하고 특별히 주의시킨다. , 바깥 사회는 가족간의 관계와 다르다, 냉정하다, 정글의 법칙이 통용된다, 그러므로 그 불공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세술이다 등등을 가르친다. 불공정을 만났을 때 대적하기 보다는 미리 타협의 길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 타협의 정신은 다음 무엇을 낳는가? 불공정의 조건에 분노하지 말고 감정을 조정하라고 가르친다. 머리를 활용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불공정의 환경에 아예 친화적이 되기를 가르친다. 결국 불공정의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것을 화합과 융화라는 말로 포장한다. 불공정과 타협함으로써 불공정을 영속화시키고 마는 가치로서의 <화합과 융화>를 환영하는 것은, 대신 공평의 개념을 멀리 귀양보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싸우면 양편의 주장을 듣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려 하기보다는, 싸웠다는 즉 '화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써 양편 모두를 나무라고 마는 것이다. 물론 속을 들여다보면, 양편 모두가 아니라 남의 자식만을 꾸짖고 마는 셈이다.

 

공정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생활에서 실습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구별없이 선과 악에 대한 판별력이 떨어진다. 판별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타협의 개연성을 그만큼 크게 가진다는 뜻이다. 그 타협이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적당한'이란 의미로 얼버무려져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상대와 화합 융화하는 것이 더 없는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러한 개념을 가진 사회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 그 어떤 제도를 갖다 놓아도 공평이라는 개념이 바로 서있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타협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고 정실의 개입, 그리고 다시 화합과 융화, 그리고 의리라는 변명으로 포장되지 않을 수 없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공평이란 가치 개념을 뿌리로부터 죽여버린 지배체제이다. 왜냐하면, 불공평을 자연스러움 자체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공평은 국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영남출신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그들이 기득권을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불공정 경쟁 조건>을 짜놓은 체제이며, 또한 그 체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력조차 말살해버리는 새로운 가치체계까지를 생산해낸 <이데올로기>이다.

(사회체제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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