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인반영남패권주의.c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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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 개념과 그 척결의 당위성

시민25


영남패권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대소집단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등 권력을 독점하여, 과도하고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환경조건을 구조화 시킴과 동시에, 소외지역민을 발생시키고 다시 그들을 사회문화적으로 차별하는 대한민국의 비틀린 정치경제문화적 패권 구조와 그 체제를 기리킨다.

영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여 사회갈등을 조장, 견지하려는 이들 세력들을 '영남패권' 혹은 영남패권주의자라 규정하며, 그 양상에 따라 영남정치패권, 영남경제패권, 영남언론패권, 영남문화패권 등의 하위개념으로 분류하며, 그 관계에 따라 영남패권을 능동적으로 관철하여 부당한 수혜를 누리는 영남패권추동세력, 패권정서하에서 수동적으로 수혜를 누리는 영남패권동조세력, 이를 묵인하며 방관하는 영남패권주변세력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패권세력에 의한 수탈적 지역주의의 대척점에 저항적 지역주의가 있다.

그리고 영남패권을 지탱하는 유무형의 체계를 통틀어 영남패권주의 혹은 영남패권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영남패권주의 해소는 시대정신이며 당위

  영남패권주의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했을 때 패배주의에 지배되어 현실을 수용하고 기회주의적으로 강한 자에게 빌붙어 동포를 팔아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인 친일부역배들의 이데올로기와 질적으로 흡사하며 사대주의로 귀결된다.

친일부역배의 의식과 궤를 같이하는 영남패권주의는 비인도적이며 반민족이며 반민주적이며 반역사적이며 불합리이며 비효율적이며 반헌법적인 심각한 병폐이다.

우리 일상을 옥죄는 이러한 전근대적이며 비인도적인 병폐들을 발본색원함이 없이는 지역화합, 민족화합, 민족자주는커녕, 인간으로서 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으로의 성장조차 바랄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지향적으로 지역간 계층간의 부당한 차별없는 천부적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과, 의존적인 공동체구성원으로서 평등이 적극적으로 시급히 확보되어 공정한 경쟁의 틀이 정착되어야 함은 우리 시대의 당위이며 시대정신이다.

1. 호남지역에 존재하는 영남패권동조세력, 비호남지역에 존재하는 반영남패권주의자, 비영·호남의 영남패권주변세력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라는 용어를 피하고 지역차별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이유

1) 영남이라는 가해 주체를 뺌으로써, 차별하는 지역과 차별 받는 지역이 어디인지 애매하게 하려는 의도.

2) 차별이란 용어는 힘의 우열의 소재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쌍방간에 상대를 차별하는 상태까지 포함하는 용어로서 어느 한 쪽의 과오가 아니라 쌍방 과실로 다루려는 의도. 이리하여 피해를 당한 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거나 그 진상을 밝히는 데 장애를 된다. 힘의 차이가 없는 대등한 쌍방간이므로 피해를 입어도 피해가 아니고, 피해가 있다면 순전히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크기로서의 피해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피해사실을 인정받지 못해 그 피해는 그저 피해자의 피해'의식'이 되고 오히려 그것은 약자의 치졸한 하소연쯤으로 희석시키려는 의도.

3) '차별이란 그저 인간사에 있기 마련인 불가피한 필요악 수준이 아니겠느냐' 하는 뉘앙스를 담아,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려는 의도.

4) 패권이라는 월등하고 독점적인 힘의 집합체라는 뜻을 뺌으로써, 한 지역(영남)이 다른 모든 지역에 대해 누리는 지배자의 위치, 억압의 위치를 슬며시 은폐시키려는 의도.

3. 지역주의, 지역감정(정서), 지역구도등의 개념과의 구별

지역주의 : 이기적 인간들이 천혜의 자연적 풍토위에 군거하여 발현하는 제 양상. 이해관계가 얽혀 획일적이지 않다.

지역감정(정서) : 풍토및 지연과 얽혀 발현하는 연고자들의 감정이나 정서로 다양한 풍토를 반영한다.

지역구도 : 지역단위들의 어떤 양상을 서술하기 위한 가치맹목적 개념.

총선결과를 영패적으로 해석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총선 결과를 놓고 도하(都下) 신문찌라시들은 민주의 승리라는 둥, 이념과 정책 대결로 가는 정치시대의 개막이라는 둥, 거침없는 개혁드라이브가 걸릴 거라는 둥, 좌우 양날개로 나는 최초의 정치지형 형성이라는 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지역주의의 퇴조를 확인했다는 둥, 하나같이 헛소리들로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민주당 지지 웹진에서는 각자 가진 비통함을 달래고 추스르며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소위 논객들께선 민주당 총선패배 원인의 분석 글을 하나씩 내놓고 있기도 합니다.

언뜻 다 필요한 절차로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순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생존 조건이 영패의 지배 아래, 영패의 문화환경에 철저히 둘러싸인 채 제한받으며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피지배 상황이라는 것은 세계 여느 민주국가와는 다르게 이 땅에나 있는 아주 <특수>한 조건입니다. 우리가 시궁창 냄새가 나는 곳에서 매일매일을 살고 있는 탓으로, 그 환경이 곧 Normal한 것으로 둔갑할 수는 없습니다. 코가 그만 문드러져서 냄새를 못 맡는 현실은, 감각이 아닌 우리의 기억력으로,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되새김질 함으로써 이 환경이 Abnornal임을 늘 깨우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영패지배의 환경은 어디까지나 <비정상>이란 사실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정상적 특수환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영패의 존재를 잘 아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까먹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주장들에서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가 빠진 채 논리가 전개되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보통 통탄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예가 바로 이 시간 쏟아져 나오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자탄과 자성, 그리고 민주당 재건 모의의 형식에서 보입니다. 패배 결과의 원인을 모두 <안으로만>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민주당 내부에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치환경이 영패구조라는 거대한 영향력이 없는 normal한 상태라면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꼭 집어 올려 똑바로 마주한 뒤, 깊은 성찰에 의해 오류를 하나씩 바로잡아가는 시간이 소망스럽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의 자성은 대단히 빗나간 전제 위에 기반해있습니다. 원인을 규정하는 전제인-바로 우리의 환경이 abnormal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영패라는 외부 조건을 전혀 고려치 않은 normal한 환경하의 분석 '패러다임'이라는 겁니다. 전제가 어긋나있는 분석이 현상의 진실을 바르게 설명해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영패찌라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이비진보 티를 내는 모든 신문과 방송, 그리고 심지어는 반영패 대오에 함께한다는 민주당 지지자들마저 이러한 오류를 천연덕스럽게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겨레, 오마이의 분석 기사를 읽을 때 곧 역겨움을 느끼고 마는 것은 그들의 사고와 논리방식(패러다임)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러 민주당 논객들의 글에서마저 그런 역겨움이 느껴지곤 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바로, 민주당 지지자들의 패러다임이 막상 저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있다고 봅니다. 민주당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빼고는, 저들 무뇌아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를 의식하지 않고 사고하는 형식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패지배환경이라는 <특수>하고도 한 상태를 무시한 채, normal 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제를 깔고 있는 것과 전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실제 어떤 차이를 만들까요?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를 인식할 때, 우리는 사이비 개혁 세력의 논리적 허구를 훤히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밑창까지 다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그들의 거짓진술이 속속들이 드러납니다. 반면, 영패지배환경이라는 전제를 무시하고 총선 결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저들의 허구적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속아넘어가고 맙니다. 저들은 논리 전개에 있어, 영패지배환경 사실을 전혀 고려치 않고 그저 normal한 상태로 놓고 주장을 펼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내내 속아와 이젠 차라리 편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중립적 일반인들에겐 그것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왠지 입맛을 잃게 하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궤변만을 아닌 것 같고 대충 반은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논리입니다.

이때부터 우리 민주당 지지자들은 갸륵하게도 책임추궁과 비난의 화살을 이내 <내부>로 돌리고 맙니다. 저들의 말도 쓴소리려니 하며 귀히 여기게 됩니다. 영패지배환경이라는 대전제는 우리의 문제분석과 이해의 과정에서 이내 쏙 빠져나가고 맙니다. 오직 내부보수가 우선 다급한 일이고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부각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 우리는 그들에 대항할 전의와 논리를 잃게 됩니다. 그들의 말이 반은 맞다고 느끼는 조건에서 상대에 대한 전의가 일어날 리 만무합니다.

저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사실 왜곡 위에, 민주당죽이기, 호남죽이기를 천연덕스럽게 벌이고 있는데 순진하기만 한 우리는 집안싸움 아니면 자탄으로 가슴이나 치고 있단 말입니다. 알고 보면 한심스러운 짓입니다.

이렇게 저들 영패적 패러다임에 의한 총선결과 분석은 정통성을 인정 받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대로라면 역사에도 저들의 주장을 그대로 기록하고 말 것 같습니다. 맘씨 좋은 우리 민주당 지지자 바보들은 그저 손 놓고 저들의 17대 총선 관련 역사왜곡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민주당이 짓밟힌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저들은 대놓고 민주당의 의석 축소에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해가며 아예 사망선고까지 하겠다는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총선 결과가 구영패와 신영패의 싹쓸이로 나타났습니다. 호남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신영패에 대한 굴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민주당 지지자들은 지금 눈물이나 떨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민주당이 패배했다고 해서 우리의 반영패 의지가 함께 패배한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럴수록 반영패 기치는 선명해졌습니다.

지금부터 당장 우리들의 정당한 분노를 가열차게 표출해내야 합니다. 우리 내부가 아닌 <저들> 영패주의자들을 향해 준엄하게 항의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내부적 자성은 그 다음, 그것도 한참 뒤 나중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적극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책이 얼만큼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되 저들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깨끗하고 떳떳합니다. 저들의 비열함과 사기성과 비도덕성을 끊임없이 공격해야 합니다. 영패척결이 지금과 같은 눈물과 한숨으로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abnormal한 영패지배환경을 normal한 것이라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놓지 않을 때만 영패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보정당과 영남패권주의

부제: 홍세화의지역주의인식을비판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중 한 분인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이하 경칭 생략)이 며칠 전 쓴 "진보 정당 콤플렉스"라는 글을 일부 발췌하여 살펴본 뒤 그와 한국의 일반 진보/좌파가 갖는 지역주의에 대한 시각을 비판하고자 한다. 내가 평가하는 한 홍세화의 논리와 주장은 진보좌파의 전범(典範)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글을 빌리긴 하였으나 그것을 자연인 홍세화만이 아닌 <진보/좌파 일반>의 인식이라 놓고 비판하고자 한다.

(인용 시작) "‘보수일색인 정치판에서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가 없으므로 차별성은 오직 지역에서만 나온다. 이 땅의 정치가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인데, 지역주의 극복의 당위성을 거듭 주장하면서 진보 정당을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책과 이념의 경쟁이 지역주의 극복의 최선책임에도 진보 정당 육성을 애써 피하면서 지역주의 극복 방안들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진보 정당에는 거리를 두다가도 개혁에는 선뜻 동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진보 정당 콤플렉스 때문인가..."

"...진보 정당 콤플렉스는 레드 콤플렉스와 진흙탕으로 묘사되는 정치판에 몸담지 않고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타성이 만나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낳은 기계적 중립성이나 정치에 대한 총비론적 시각은 또 하나의 탈정치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사회 변화와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은 진보 정당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금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입은 그 흐름을 가속시킬 것이다." (인용 끝)

여기서 그는 한국의 지역주의를 '지역이기주의'와 같은 선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이해대로라면 그의 주장은 곧, '정책과 이념상의 차이가 없으므로 이 땅의 정치는 지역(이기)주의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인과 관계>의 진술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당간에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없음이 지역이기주의를 불러들인 선행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역주의의 본질은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라, 어느 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일방적 패권의 조건과 그것에 의해 억압받는 세력(집단)의 존재에 있다. , 영남패권주의가 그 본질이다.

한국의 지역패권주의는 군사파쇼정권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정치적 환경으로서, 정당간 정책과 이념의 차이 없음(혹은 차이 자체)을 배태하고 생성시킨 <선행조건>이 되는 것이다. 홍세화는 이 양자('이념상 차이''지역주의')간의 선행조건을 정확히 거꾸로 규정하고 있다. '정당간의 이념 상 차이없음'이 지역이기주의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지역패권주의라는 정치환경이 '이념 상 차이없음(혹은 이념 상의 차이)'을 결과적으로 야기시킨 조건이 된다.

홍세화는, 진보정당의 진출을 방해했던 것이 지역주의가 아닌 레드컴플렉스라고 진단하면서, 도대체 무슨 논리로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역주의를 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가? 그의 비논리와 비약을 "보면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진보정당이 지역주의를 몰아내는 도깨비방망이는 아닐텐데 말이다. 그는 정치판에 아직도 지역주의가 횡행하는 이유가 정당간 정책이념의 무차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보정당이 진출하여 정책이념의 차이만 정치판에 도입시키면 지역주의는 슬며시 자리를 뜰 것 처럼 말한다.

그의 비논리를 들여다 보자. 정당간의 정책이념 차이가 아무 문제가 안될 정도로 지역주의가 그 위에서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면, 지역주의 정치문화는 이미 '정책이념의 무차별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한 독립적인 변수가 되어있음을 인정함이 된다. 그러니 이 지역주의 문화에 새로운 정책과 이념을 도입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정치판이 정책이념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지금까지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역주의에 의해 결정적으로 방해받아 왔다면, 이제 진보정당의 국민적 육성에 의하여 지역주의가 어느 만큼 혁파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세화의 주장처럼 레드컴플렉스에 의해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체되어 왔다고 수긍할 때, 진보정당의 육성으로 인해 <레드컴플레스가 퇴치될 기회>는 맞았을지언정 <지역주의>까지 무너질 인과성은 하등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진출과 지역주의 혁파는 상호간 아무 상관이 없는 이슈다. 그가 진보정당의 착근을 방해한 이유를 레드컴플레스라고 진단한 이상, 이제 진보정당의 육성을 위해 할 일은 그 레드컴플렉스를 거둬들이는 캠페인을 벌이는 일 밖에 없다. 뻔한 말이지만 물론 이 전략은 그리 유용할 리 없다.

그가 왜 이런 모순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가? 그가 지역주의의 본질과 그것의 영향력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의 이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정치판의 지역주의 문화는 이미 진보적 정책과 이념의 도입 정도로는 임팩트를 전혀 줄 수 없을 만큼, 홍세화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억센 위력을 가지고 정치행위 방식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세화를 비롯한 진보/좌파는 정작 영남패권의 존재 자체가, '극우와 보수의 공생'을 견인하는 환경을 제공함과 동시에 진보의 발아 자체를 극도로 억압한 조건이었다는 역사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한 환경과 조건이, 바로 영남군사파쇼와 영남패권집단이 정책적으로 제도화, 구조화했던 그 산물이었음을 간과한다. 홍세화의 표피적인 진단처럼, 그저 정당간의 정책/이념 차이가 없다보니 자연적으로 정치판에 지역주의가 스며들고 말았던 것이라는 인식이다.

여기서 잠시, 진보주의자가 전형적으로 빠지기 쉬운 논리적 오류를 짚어보는 의미에서 위의 인용문 중 좀 더 사소한 점 하나를 지적한다. 그가 보수정당들 사이에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가 없었다고 단언하고 나서는데 이것은 전혀 진실에 닿아있지 않다.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보수>라는 멸시조의 딱지를 제 정당들 위에 한꺼번에 둘러씌우는 수법으로 정당 간 정책과 이념 상의 무차별성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 홍세화도 이와 똑같은(stereotypical)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그는 이 방식을 통하여 각각의 정당을 지지하는 수구냉전세력과 개혁민중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 구도의 의미마저 무로 돌려버리겠다는 논리를 천연덕스럽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걸어온 길에는 아무런 차이도 의미도 없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무지막지한 우김질이 된다. , 아직까지 수구냉전이데올로기의 포로로서 남아있는 영남대중과, 호남을 중심으로 한 민주평화개혁민중이 대립하며 그들 각각의 정당을 지지해올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인과성을 몽땅 무시하고 있다. 지지 정당 선택의 동기야 그저 그들의 지역이기주의의 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 의미를 형편없이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자의적이며 몰역사적인 인식이다.

 

문서로서의 정강상에서야 정책과 이념 면에서 정당 간 별 차이가 없다고 해석한다면 일면 수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 각 정당이 국민을 상대로 정책입안과 입법행위를 펼쳤을 때는 '수구'정당과 '보수'정당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해왔던 것이다. 정책과 이념 면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식인 홍세화의 터무니없는 역사인식이요, 사실왜곡임을 확실히 지적해둔다. 그러나 여기서 보수정당간 정책과 이념 상의 차이가 있느니 없느니 따지는 일에 더 이상의 지면을 할애할 수가 없다. 그의 한국 지역주의 문제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도발적인 인식 오류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헤치지 않을 수 없는 소이에서다.

홍세화가 여기서 '지역', '지역주의'라고 말할 때, 그는 영남패권주의가 배태한 제 현상 즉, 그것이 한국 최현대사 40여년 긴 세월을 통하여 강고하게 구조화시킨 <정치 경제 사회적 권력의 독점, 불공정규칙과 권위주의로 대표되는 비틀린 가치체계, 호남민에 대한 강고한 사회문화적 차별주의> , 전 사회에 걸친 광범위하고도 근본적인 제문제임을 전격 무시하고 있다. 총체적인 한국 사회 병리 현상의 근본 연원인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쳐두고, 그는 문제 영역으로서의 '지역'을 그저 '지역이기주의'나 지역갈등 정도, 혹은 지역간 '감정의 싸움'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겨우 "정치판"이라는 상대적으로 매우 협애한 분야에 국한된 병리현상인 것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러길래 그는 정치판의 패러다임 전이 하나로 악마적인 지역문제를 일거에 퇴화시키고 말 것처럼 선언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지금 홍세화는 정치판의 지역주의라는게, 각 지역에 기생하는 정치권력이나 토호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철저히 봉사하는 도구가 되면서 서서히 고착되고 만 구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각 지역세력들 간에 지역적 집단이기주의를 각각 좇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저급한 정치판이 형성되고 만 것이다라는 식의 현상파악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역주의가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는 원인이, 40여 년에 걸친 군사파쇼/수구냉전정권 기간을 통하여 영남패권집단이라는 주체가 일어나 자신의 기득권을 틀어쥐기 위해 지역간 불균형 구도를 인위적으로 제도화해 왔음에 기인한다라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대립하는 두 주체(한나라당 플러스 열우당 vs. 민주당)가 지역이기주의를 놓고 대등하게 대결하고 있는 양상이 아니라, 패권세력이 약소세력에 대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있는 불평등 현실에 대한 외면이다.

그에게는 각각의 지역 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힘의 차이가 정치판에서 보이는 지역주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영남과 여타 지역이 똑같이 이기주의자라는 점에서 거기에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타파의 대상인 점에서 완전히 평등하게 보인다는 거다. 하나는 패권적 지역주의자이고 하나는 생존을 위한 방어에 나선 형국이라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 둘을 싸잡아서 똑같이 지역주의자 나쁜 놈이라고 매도한다면 거기엔 한 조각 정의가 들어설 틈이 없다. 이것은 영남패권세력이 아직도 철벽처럼 버티고 선 채 사회의 모든 개혁을 사사건건 거부하는 주체라는 현실 분석이 실종된 인식인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권의 부조리 현상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치패러다임을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판갈이를 하기만 하면, 지역이기주의에 기대는 그들 소수 정치권력이 퇴출되면서 자연히 한국의 정치는 이제 전혀 새로운 시대를 구가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라는 나이브한 주장을 그가 하고 있는 거다.

그는 '정책과 이념'이라는 패러다임으로의 정치권 판갈이 문제라는 게, 우리가 이제까지 그것의 필요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완강히 막아서는 영남패권세력의 존재 때문에 늘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그 엄연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철벽이 막아서고 있는데 그것을 부수거나 뚫지 않고 어떻게 그 너머에 있는 파라다이스에 닿겠다는 것인가? 한국의 대표적 진보지식인 홍세화의 지역주의 인식이 이토록 낭만적인 수준이라면 한국의 자칭 좌파일반의 생각은 과연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지 대단히 궁금해진다.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유보다는 평등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념으로서의 진보주의를 표방하려면 우선, 우리 사회의 이른바 사회적 마이너러티(소외층)가 생성된 <역사적 과정>을 왜곡없이 정면에서 바라보고 정직하게 진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의 마이너러티가 산업화 과정을 통하여 희생타로서 발생한 노동자/농민이라는 소외계급만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역대 군사독재정권들의 지역차별 정책에 의해 대규모로 발생시킨 수백만의 호남대중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인하지 않는 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소외층은 계급적 요소 하나로만 설명되지 못하고 계급적 요소와 지역적 요소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가 진보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그 길을 트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먼저, 이 나라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과연 무언가에 대한 성찰이 좀 더 치열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홍세화를 포함한 일반진보좌파들이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진단하듯, 레드컴플렉스와 같은 보수적 사고가 진보의 의회진입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리만 계속 할텐가? 결코 그 까닭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진보진영의 한국 지역주의에 대한 진단과 인식이 영남패권주의자들과 동일선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보수/좌파를 표방한 자로서 영남패권주의를 똑바로 질타하는 지식인이 이 땅에 겨우 한 손 안에 꼽힐 정도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민주당 지지자 중엔 수많은 반영패자가 있는데 반하여 왜 노동당 지지자 중엔 그리도 귀한 이유가 과연 무언가! 계급론적 인식은 한국의 지역패권주의-, 약자를 억압하는 기제-를 그저 무로 돌려야 할 만큼 유일무이한 사회 인식체계여야만 하는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지역주의를 이념과 정책이 빠진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종속변수> 쯤으로 치부하는 한,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구와 극우가 여지껏 득세하며 신자유주의의 광포한 파고에 서민과 기층민이 온 몸을 내맡겨버릴 수 밖에 없게 된 현실이 근본적으로는 영남패권주의라는 <독립변수>에 의하여 생성되고 구조화된 사회체제 때문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그리고 강고한 영남패권과 분명하고 확실한 대립각을 세우는 용기가 없는 한, 우리는 그 정당을 가르켜 진정한 진보라 이름 붙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사회 제 분야에서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영남패권을 정면에서 제대로 질타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오히려 패권에 맞서고 있는 사회의 절대 약자인 호남민에게 호남지역주의자라는 딱지나 붙이고 있는 진영을 진보좌파라 불러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정녕 사이비 진보일 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주의자들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호남주민이 민주노동당에 18%의 표를 던졌던 사실의 의미를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될 줄 안다. 호남은 진보라는 뿌리를 내리기 좋은 옥답이다. 왜냐하면 호남은 사회적 소수집단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의 존재 의의를 사회 약자들간의 연대와 이들의 권익 확장에서 찾고자 한다면 진보좌파들은, 약자를 억누르며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원흉인 영남패권주의 혁파를 제일의 시급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패권에 대항하는 세력은 당연히 진보를 지향하는 것이고 패권에 눈감는 세력은 사실상 진보를 훼방하는 반동집단에 다름 아니다.

이 나라의 진보좌파는 낭만주의적 지역주의 접근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라! 낭만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기만적이라고 해야 할 그 인식으로부터 이제 그만 벗어나라.

[심층분석] '원칙과 소신'의 이미지, 노무현 실체해부

 

영남 위해 호남 소외시키는 신당창당은 국민사기극

 

 

개혁과 상식

 

한 사회의 총체적 개혁이란 화두는 민주주의를 오래 경험한 사회에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우리와 같이 변혁기나 과도기에 있는 사회에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 무언가 바로 잡아야 할 가시적 문제가 사회의 발전을 오랜 기간 가로막고 있어 그것을 고치고 치우는 대대적인 작업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대상은 굳이 분석이 따로 필요할 만큼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를 몰라서 개혁을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함으로써 손해를 입을 기득계층의 강력한 저항책동에 눌려 못해 왔을 뿐이니까요. 이 시대 이 사회의 '상식'에 반하는 낡은 제도와 관행과 사고방식이라면 그 분명한 대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개혁을 하는데 정치 공학을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걸림돌입니다. 온갖 술수의 개입 여지가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큰 틀은 매우 단순하고 정직해야 하며 상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치적 환경 조건과 정치 세력간의 타협의 산물로써 개혁의 밑그림이 기초된다면 거기에 설사 거창한 철학적 이념을 담았다고 떠들더라도 정작 개혁의 수혜자가 될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이익은 고스란히 빠지고 그것을 기획한 소수 정치집단이나 기득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일입니다.

 

 

주체

 

그럼 개혁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합니까? 당연히 그 시대의 변화를 갈망하고 그간 기여해왔던 '시민 일반이 주체가 되고 그들의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소수가 그것을 수행하되 매번 시민의 동의와 추인, 그리고 시민 단체의 감시 속에서 투명하게 시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정치권력이란, 선거를 통하여 정당하게 쟁취한 지지세력의 권력으로서 선거에 패배한 시민군()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지는 우위의 힘을 말합니다. 권력을 잠정적으로 위임 받은 정치인 그룹이 홀로 개혁의 주체가 된 양 착각하여 선거 결과에 의해 새로 짜여진 권력의 구도를 깨면서 전횡하고 멋대로 오/남용하는 일이 생기면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그때는 시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깊은 좌절의 한숨이 토해지고 있습니다. 허탈감 위에 얹힌 분노, 혹은 아예 시나브로 체념이나 냉담으로 젖어드는 분위기가 매우 심각한 현실에 있습니다. 노 정권을 창출한 지지자층의 민심 이반입니다. 한편, 아직까지 남은 노무현 지지파의 낙관은 저들의 한숨을 상쇄하고 덮겠다는 듯 가성의 헛웃음을 드높이기도 합니다. 그들 모두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희망과 신념을 공유하는 동지였고, 굳게 결속한 한덩어리 알짜배기 노무현 지지자들이었단 말입니다. 헌데 작금에 와서는 서로 제각기 흩어져 분열하고 대립까지 하는 지경에 와있습니다.

 

 

의문

 

이런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집권 신정부와 민주당은 숫자 놀음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내건 구호는 참으로 그럴 듯하여 명분상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름하여 지역구도 타파 정치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젠다야 말로 이 사회의 절체절명의 과제를 요약한 것으로서 자못 신성하기까지 한 역사적 당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구도 타파 개혁이 웬일인지 개혁정당 창당과 동의어가 돼 있습니다. 왜 그 둘이 일란성 쌍둥이로 취급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창당의 방식의 조율만이 관심일 뿐, 왜 창당만이 선택이며 다른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인지, 그 작업이 과연 지역구도 타파의 과업을 이뤄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관심 밖인 듯합니다. 왜 우리는 정치인이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걸 잘 알면서도 막상 그들이 벌여놓은 논쟁에는 뒤늦게 뛰어들어서 그냥 휩쓸리고 말까요? 그들의 논의 자체가 정치꾼들의 엉터리없는 수작인지의 여부부터 검토하는 것이 경제적인 일 아닐까요?

 

정치 개혁이라는 귀한 사업이 정치권력을 위임했던 유권자군()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스스로의 사적 이익만을 탐하는 소수 정치꾼들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철학과 목적과 자격이 모두 의심받을 투성이인 사람들이 주도하는 개혁신당 추진은 알고 보면 오직 자기네 편 세불리기만이 지상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와 암투와 술책의 당권 헤게모니 쟁탈전을 그들은 정당 개혁이라고 큰소리치면서 포장합니다. 11초가 아까운 이 귀중한 집권 초기에 민생 현안을 내버려 둔 채 5개월(신당논의 시작으로부터)을 질질 끌어오고 있고 아직도 분명한 가닥조차 잡히지 않은 신당 헤게모니 암투가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른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전국 정당으로 태어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요. 이것이 과연 정당한 명분인지부터 마구 의심이 갑니다. 스스로가 지역 정당이라 칭하며 그만 벗어나고 싶다는 건데, 이것이 비하인지 아니면 정말 대의를 위하고 나라의 건전한 정치 발전을 위한 고뇌의 고백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비하라면 더불어 자신의 지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이죠. 정녕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면 국민의 동의는 얻어냈는지 모르겠군요. 전국 정당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는 무엇입니까? 각 지역에 지지자가 골고루 분포하는 게 소망스럽다라는 겁니까, 아니면 국회의원을 각 지역에서 골고루 내는 것이 국민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는 겁니까? 전자는 어차피 억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므로, 문제는 후자일 뿐인데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습니다. 전국이란 말이 지역이란 말보다 이미 우위의 가치라고 보는 일반의 믿음에 우리도 속고 있는 겁니다. 사실상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의 우열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집권당이 전국 정당이 아닌 지역 정당이어서 손해 보는 국민이 있으니 안 된다는 말입니까? 어느 지역의 주민이건 자기가 선호하는 정당은 있는 것이고 지지한 정당이 집권을 하면 득을 볼 것이요 야당으로 남으면 다음 선거를 기약하며 기다릴 일입니다.

 

 

기만

 

각 지역의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각각의 특성을 안은 채 오랜 세월을 두고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전국 정당으로 변모를 시키려면 각 지역의 정치 성향에 딱 맞는 후보군을 골라 각 지역에 내보내야겠군요. 이것을 가능케 할 정당의 이념과 정강은 좌에서부터 우까지를 통째로 아우르는 짬뽕 정당을 지향하겠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정체성으로 전국 정당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웃음거리겠지요. 그래서 위장합니다. 정당의 이념과 지향을 필요 이상 선명하게 색칠합니다. 그리고 속내로는 수구집단에 이제껏 부역해온 정치꾼을 '개혁 성향' 의원이라 거짓 단장시켜 영입합니다. 그로써 지역을 넘어서는 전국적 정당이 되는 양 선전하겠다는 기만적 전략을 사용합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민주화 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한 공을 무시할 없는 특정 지역 출신 의원들을 상종 못할 개혁대상 '부패정치인'이라 몰아부치고 정리함으로써, 자리바꿔 탈 신당의 호남 색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탈색시키면 영남 보수층에게 표를 얻어내기가 매우 용이해지리라는 전략을 차용합니다.

 

보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는 유권자들에 의해 당선된 위장 개혁 정치인이 개혁을 외치며 민주당의 의원으로서 펼치는 의정활동을 하고 당의 표면적 정강을 따른다고 해서 개혁적일일까요? 유권자의 이익을 좇아 보수적일까요? 귀신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영남지역에서 표를 얻어 소위 전국 정당이 됨으로서 달라지는 것이 뭡니까? 정권에서 소외된(?) 영남인들을 위로하겠다는 것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군요. 양식있는 영남 유권자들의 자존심을 유린하는 일입니다.

 

 

토사구''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배역 행위, 즉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개혁성향의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을 과감히 발로 차버리는 행위 등이 모두 이들 개혁정당 주도층의 면밀한 정치 역학 분석에서 나온 창의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의심없는 정치적 자살 행위로서 극도로 회피되어야 할 이 패악질이 버젓이 이 나라의 집권 정당의 정치 개혁 전략으로 공공연히 용인, 합의되고 맙니다. 호남의 민주당 지지자들이야 하늘이 내려 앉아도 한나라당으로 갈 수 없는 결국 오도가도 못하는 붙박이 민주당 표인 셈인데, 그렇다면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호남의 지지자들은 좀 희생되어줘야만 하겠다는 교만한 사고 말입니다.

 

무릇 자신이 지지하고 선출했던 정치인이, 정당성이 결여된 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 강제로 퇴출되는 것을 보는 것은 바로 그 지지자 개인의 소중한 정치적 선택과 권리가 깡그리 무시당하고 빼앗기는 인격적 강간의 경험입니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기대는 누구한테 담아야 하나요?)

 

그것이 영남지역의 의원자리 몇 개를 건지겠다는 목적 때문에, 수구적인 영남 유권자에게 아부를 할 기반 조건 형성으로써 강제적으로 치러야 하는 댓가라면 소위 '개혁 대상' 의원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대로 영남패권주의 정치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걸

 

개혁 신당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영남표 '빌어먹기'입니다. 개혁의 실체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정당하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절차를 아예 상정하지 않고 (호남의원 퇴출 후) 탈호남당이라는 '이미지 조작' 하나로, 영남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아예 저급한 수준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역감정에 감성적으로만 파고들기만 하면 스리슬쩍 몇 개의 의석은 건질 수 있다는 셈본하의 치졸한 모사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영남 유권자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불과합니다. 표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영남의 양심적 유권자들의 갈망도 이 지역패권주의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겁니다. 이렇듯 개혁의 실체는 완전 실종입니다. 실로 개혁의 대상자들이 스스로 개혁 주체라며 주제 모르고 날뛰는 겁니다.

 

 

가짜명분

 

이들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강변합니다. 소위 "내년 총선에서 기필코 승리해야지만 그 의회 의석수를 기반으로 비로소 노무현 개혁의 실질적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대도를 올곧게 걸어가는 도정에서 마주치는 온갖 방해 공작과 잡음은 개혁의 완수라는 대의 쟁취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시할 수밖에 없는 소소한 장애일 뿐이다. 그만큼 내년 총선의 승리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명제다." 개혁의 이념과 목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농락하는 뒤틀린 개혁 주장입니다. 개혁정신을 깨부수며 사술을 동원하더라도 총선 승리만 하면 개혁은 천사의 모습으로 도래하리라는 기대의 자가당착 논리입니다.

 

이들 정치인들의 논리가 그 형식에서마저 얼마나 빈약하고, 그 철학적 사고의 수준이 얼마나 바닥인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말을 정확하게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겐 원래 인격과 실천 '합일적인' 철학과 논리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로지 권력 쟁취와 자신의 기득권 유지만이 그들의 관심의 전부입니다. 모든 행위는 그것에의 봉사입니다. 그들로부터 인간적 선의나 고매한 인격을 기대하는 건 순진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정치 행위라는 성질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실천 주체로부터 인격의 분리를 일정 부분 강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질

 

한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아젠다는 서로 적대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그 관계마저도 항구성을 띄지 않고 상황과 시간 변화에 따라서 변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대립적인 정치적 의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타협이라는 조절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합니다. 결국 타협이란 기술은 그 정치인의 인격 합일적인 철학과 거리를 둔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타협의 기술이 빼어난 정치인일수록 인간적 격과 정치적 격은 더욱 이중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권력욕이 남다른 정치인일수록 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만큼 그들의 정치적 행위의 진정성은 시민들에 의해 의심(suspect)받아야만 하고 다시 면밀히 검토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시민은 늘 그들의 봉노릇 밖에 못합니다.

 

지역주의 타파 정치 개혁의 허구, 그 속임수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우선 지역주의 타파란 구호 자체부터 유령입니다. 지역주의란 정의부터 실체가 없고 기껏해야 왜곡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편중된 지지분포''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인 양 둘러댑니다. 사실상 정당 지지의 지역적 편중이 상당 부분 지역이기주의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촛점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인 중 그 누구도 지역구도에서의 수혜자임을, 아니 그 편승자임을 부인한 채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나서서 매스를 들이댈 자격을 갖춘 자는 이 나라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돌팔이

 

'타파'란 제삼자인 의사가 칼을 들고 인위적으로 벌이는 외과적 처방입니다. '극복'이란 내적 성찰과 반성을 통한 방법입니다. 지역주의란 오랜 시일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결과물인데 그것을 단번에 타파한다며 정작 그 환경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커 온 정치 자영업자들이 의사 가운을 하나 훔쳐 걸치고 외과적인 수술로 쉽게 뚝딱 고치겠다고 나선다면, 신중하고 올바른 진단은 고사하고 결국 사람을 잡겠다는 짓이 됩니다.

 

 

원론

 

이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열망하는 깨인 시민을 한 사람이라도 상처주는 거짓 정치 개혁이 용납되어선 안됩니다. 정당 지지의 지역 편중을 극복하는 길은 어디까지나 정도로서 바르고 정직하게 가야합니다. 정당의 정체성과 이념을 훼절시키지 말고 국민 앞에 약속한 그 정강에 충실한 정책을 개발, 추진하므로써 자발적 지지자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 우리와 같은 왜곡된 정치 환경에서는 정치인들의 내적 자기 변혁을 위한 성찰과 반성을 살짝 보이기만 하여도 감동먹은 지지자가 자연스레 모이게 돼있다는 말입니다.

 

 

영남

 

물론 이런 원론적 설교가 지금 얼마나 한가하고 부질없는 일인지는 이들의 정치적 인격을 들여다보면 바로 깨달아집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지지받는 정당으로의 거듭남을 거론합니다. 그러니까 호남유권자를 주 기반으로 하며 영남유권자로부터 외면받는 현 정당 정치 구도가 잘못 되었다고 규정하는 겁니다. 한 지역이 자기네 당을 너무 열성으로 지지해준 것을 잘못이라 보는 겁니다. 그들 유권자들의 선택의 진정성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한마디로, 호남지역 주민과 민주당 지지층은 지역감정의 표현으로써 민주당을 지지한 것이니 가치가 없다는 규정입니다. 그들 유권자의 표에 의해 의원직을 받은 자들이 유권자의 진정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또 영남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도 비정상이니 이번엔 그 지역 유권자의 입맛에 맞는 수구 정치인을 그럴듯하게 포장시킨 뒤 내세워 지지를 호소하겠다는 겁니다. 영남표만 얻으면 지역주의 정치가 타파된다는 궤변입니다.

 

 

 

수구적 성향의 영남유권자에게 쉽게 먹혀 들어갈 수구인사를 영입하여 당선시키고 그들과 함께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이 뻔한 모순 논리를 그대로 노출시키며 국민을 설득하겠다고 하니 그 저급성에 절망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 논리를 정치 개혁이랍시고 갖다 붙입니다. 개혁에 목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대신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코드를 맞춰 개혁을 가열차게 추진하자고 주장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머리 나쁜 사기꾼들입니다. 이들이 떠드는 전국정당으로의 재편과 정치 개혁과는 일말의 관련성도 없습니다.

 

 

경고

 

지금 노 정권의 개혁처럼 목적과 비전도 내놓지 못한 채 고작해야 내년 총선 승리만을 지고의 선으로 설정한 개혁 추진은 개혁이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는 몰상식이요, 진보적 시민 사회와의 약속에 대한 반역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정치 실험은 지지층의 좁은 선택의 폭(alternative)을 볼모로 잡은 게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자기의 정치 생명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정정당당하게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지를 보세요. 최소한 영남표를 얻으려거든 영남의 수구표를 얻으려고 구걸하면 안됩니다. 유권자의 수구적 입맛, 체형에 딱 맞는 맟춤형 후보를 내세워 일단 의원만 만들면 그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전위대가 될 거라고요? 이치에 맞는 말을 해야지요. 한 마리의 국해의원(國害蟻猿)만 더 생산하는 겁니다. 표를 얻으려면 영남인의 개혁표를 얻어야 합니다. 똑 부러지게 개혁적인 인사를 찾아내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유권자를 감동, 설득하여 의원을 만들 경우 그가 개혁의 일당백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그럴 신념과 의도가 전혀 없으면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보겠다는 작태를 당장 거둬들여야 합니다.

 

 

몸통

 

개혁 신당을 출현시키겠다는 설계 오케스트라단의 단장은 누구입니까? 이 정권의 총체적 수구 행로로의 노선 변경 결정 주체는 누구입니까? 놀랄 일도 없이, 노무현입니다. 그의 보좌관 유인태, 문재인, 아니면 최측근 인사 이강철, 이강재, 아니면 신주류 삼인방 신기남, 정동영, 천정배 등을 거론할 수 있다고요? 그들은 노무현의 수족일 뿐입니다. 개혁 신당 창당의 논의와 진행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통하여 그의 의도와 구상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친구

 

그의 수족들이 무얼 믿고 이렇게 무리한 사기 행각을 감행하려 할까요? 노 대통령과 코드를 맞췄다는 확신에서 온 건방이 큰 부분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노 대통령과 민주당 신주류가 한 통속으로 어우러지는 코드가 적어도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편견이고 하나는 무모입니다.

 

 

커밍아웃

 

528일 노 대통령이 말합니다. "제도를 개편하든,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 결과적으로 어느 한 지역에서 어느 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독식하지 못하도록 또는 독식하지 않는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중략) 이 지형 위에선 제가 다수당 위에 있더라도 지역의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이 발언에서 그의 사고 방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석합니다. 1) 현재 한 정당의 3분의 2의 의석을 한 지역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현상인데 이것을 고치려면 제도 자체나 정당의 구조 개편이 있어야 한다. 2) 나는 영남의 표를 얻지 못했으므로 그 지역의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에는 흠이 있다고 느낀(인정한). 노무현의 사고의 핵심은 2)의 발언에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코드는 신주류 개혁신당파 등이 정확히 공유하는 인식입니다.

 

 

편견

 

"제도를 개편하든"이란 말 속에서의 제도는 중앙집권의 완화, 지방분권 강화와 같은 제도와 환경의 동시적 개선이 아닌, 미국식 간접선거 제도와 같은 근본적 대안을 염두에 둔 것인 듯 보입니다.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인단을 각 주에 두어, 그 주에서 한 정당에 대한 100%의 지지표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 표가 그대로 카운트되지 못하고 일정하게 제한된 선거인단 수밖에 가져가지 못하게 돼있는 제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51%의 지지나 100%의 지지나 아무 실질적 차이가 없는 제도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는 얘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2)의 발언(해석)과 연결해서 그의 인식을 분석해 봅니다. 호남지역민이 몰아 준 표에는 나름의 편향성과 당파성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인정되므로 그들의 표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고있다라는 인식의 표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그의 발언이 대통령 선거에 관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막바로 통하는 의미의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국회의원 선거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결국은 대통령 선거의 문제점과 접목시켜 거론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가 미국식 간접선거를 심각하게 고려해본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도를 개편하든"이란 발언은 그 뒤의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의 주장을 위한 의미 보정일 뿐입니다. 당연히 주장의 요점은 뒷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 방식' ('인식'보다 더욱 근본적인 그의 철학적 기조)을 엿보게 되는 곳은 오히려 앞머리입니다.

 

(이러한 말의 해부 작업이 어떤 이에겐, "말장난이다", "발언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다"라는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더구나 발언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직위에 있고 또 정식 인터뷰(한겨레 신문)에서의 발언입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지역주의를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남표의 의미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는 일정부분 지역주의의 소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로 표현된,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와 갈망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설사 지역주의의 개입의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표의 의미와 가치를 내리 깎겠다는 발상은 유아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의 표현입니다. 결국,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한 표 한 표의 의미를 축소하므로써 자신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 그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갖는다는 자가당착이 됩니다. 위에서 보듯, 사실상 그는 그 콤플렉스를 적나라하게 입으로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편견은 이것입니다.

 

"호남표의 일부는 DJ에 의존한 지역주의 표이므로 그 진정성을 다 인정하진 못하겠다. 같은 지지표라도 호남표와 타 지역인의 지지표의 의미는 다르다."

 

 

사도(詐道)

 

그의 발언에서, "제도적으로라도 3분의 2의 몰표 현상을 막고는 싶다"라는 열망이 깊이 배어납니다. 현실적으로 꿈도 꾸기 어려운 제도 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못내 아쉬워하며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중심을 환경 개선 쪽에 놓습니다. 환경 개선을 하겠다면 현 환경의 생성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현재의 현상만 보고 무조건 개혁해야 한다는 접근법입니다. , 현행 제도 하에서는 몰표를 막을 수 없으니 몰표가 못나오도록 막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의 상정 자체로써, 환경 개선의 문제가 원론적으로는 어느새 '제도 개혁'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정공법은 피해야만 하겠기에 결국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방법을 쓰겠다는 것입니다. , 몰표가 나오는 지역의 표를 조금 거두어들이고 아예 표가 안 나오는 지역의 표를 얻어내는 원천적인 방법을 도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 목적을 이루겠다는 것인가요? 두 지역민들을 서로의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아니면 표가 안 나오는 지역민들에게 아부하는 것 밖에 더 있을까요? 아부의 방법으로써, 탈호남당의 이미지로 변모하여 얼굴을 내밀겠다는 겁니다. DJ의 이미지만 벗으면 표가 절로 굴러 들어오리라는 기대입니다.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경우, DJ를 높이 외치면 자신의 태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과오보다 공적이 적지 않은 DJ, 영남인으로서는 기피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동의해주는 부도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자칫 하다간 호남 쪽에 그릇된 점이 많다라고 몰아부치는 형국이 됩니다. , DJ는 놔두고 탈호남만을 외치려니 공허하게 들리고 마는 점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영남인들의 선택 취향에 딱 들어맞는 후보를 물색하려니 역시 수구성향 정치꾼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간 개혁의 이미지를 다치게 되므로 안 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딜레마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사술(詐術)의 동원 밖에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 계속 모르게 감추고, 잘 못보고 있는 다수의 사람에게는 사기를 치는 겁니다. , 어차피 표만 얻으면 끝입니다. 우선 탈호남 이미지로의 변신에 필요한 명분 획득을 위하여 개혁의 구호를 드높이 외칩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인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둘도 없는 개혁의 전사인 양 비장미까지 띕니다. 자신의 순수한 피를 돋보이게 하려니 희생양을 마구 잡는 일도 필수입니다. 수구인사를 영입하되 개혁의 일꾼이라 선전합니다. , 여기까지가 작금의 신당 창당 논의가 연출해낸 작태입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시나리오

 

향후 시나리오입니다. 영남인들에게 향한 본격적인 아부와 선물 공세만 남았습니다. 선물이란 딴 게 아닙니다. 호남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극적으로 시위하는 겁니다. 호남당이 아니라는 이미지만 반복하여 심으면 영남표는 다 잡을 수 있다라는 계산은 끝났습니다. 영남인의 지역감정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호남인의 정치 헤게모니를 용납하지 못하는 다수 영남인들의 정서를 만족시켜야만 합니다. 당연히 당의 주도권을 영남인이 잡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남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요설로 명분을 꾸며야 합니다. 총선에서 수구꼴통 한나라당을 누르고 기필코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선전합니다.

 

 

저항

 

다시 한 번 호남이 술렁거릴 것은 뻔합니다. 부당한 방법에 의해 농락당했다고 느낄 호남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항의는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됩니다. 호남이 조금 양보하면 된다는, 명분 선점 여론몰이를 합니다. 호남만 조용하면 나라가 조용해진다는 호소도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사태에서 호남이 잠자코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지나친 낙관론자입니다. 지역감정이 아직도 이 사회의 정치 환경에서 그 영향력과 결정력이 가장 강력한 인자임을 자칫 부인하다간 큰 코 다칩니다. , 이렇게 나라는 총선이 가까와 올수록 지역감정 논박의 초특급 회오리에 휘말리게 됩니다. 민생은 뒷전에 이미 쳐박혀 있습니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 난국을 맞지 않는다 자신할 수 없는 전망입니다.

 

 

오산

 

여론 조사에서 보입니다. 민주당을 신장개업하는 것과 민주당을 허물고 신당으로 나올 때 영남인들로부터 받는 지지차는 20%이상이라고 합니다(28일자 오마이뉴스). 저항에 부딪혀 표현을 자제하고 있지만 신주류는 무척 고무돼있을 것입니다. 대세라며 밀어붙일 기회를 쉽게 접지 않을 것입니다. 신구류주간의 갈등 양상은 언제나 임시 미봉에 의해 잠시 덮어지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겠지만 어느 한쪽이 확실한 헤게모니를 쥐는 그 날까지 분란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론 조사 결과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자의적으로 자신에게 이롭게 해석합니다. 그때 그때 일희일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닥칠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 조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여론 조사의 질문 자체를 현 싯점에서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여론조사와 아무 상관없이, 지금의 개혁신당 논의가 정의에 반하는 기만과 협잡에 의한 것임이 점차 확연히 드러나고 반드시 저항에 부딪치면서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결국 국가적으로만 적잖은 희생만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것의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노무현이 집니까? 신주류 3인방이 집니까? 시민 전체가 큰 상처와 불익을 이미 받았는데 누가 책임을 진다고 하여 보상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원인에 대한 규명 회피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겁니다. 단지 지역구도 뿐만 아니라 그 모태가 되는 이 나라 정치의 파행의 긴 역사에는 영남패권주의라는 암이 그 최기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그렇게도 죽기보다 듣기 싫고 지겹고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대선에서의 영남을 제외한 전국적인 노무현 지지와 호남 몰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개혁이지요. 무엇을 개혁하자는 건가요? 개혁의 순위에서 상위에 놓인 것이 바로 '영남패권주의' 타파입니다. 소위 신지역이기주의로 어떤 득을 챙기겠다가 아닙니다. 다만 '차별받기 싫다',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라, 이겁니다.

 

-지역주의자

 

대선 결과에서 보듯이 차별에 대항하는 의지는 자발적이고 개별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무슨 작당이나 한 것처럼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열망이 호남인들에게 그토록 사무치게 간절하지 않았었다면, 다른 모든 상대적 우위의 조건과 자질들을 인정하더라도 노무현의 인기가 그 정도로 하늘을 찔렀을 거란 추측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신지역주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파렴치입니다. 이 점에 대한 성실한 분석과 고찰이 노무현에겐 결여돼 있습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둔 우리는 영남중심(패권)주의를 영원히 땅 속에 묻어버리는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무리였습니다. 나는 그를 '영남패권주의자'라고 확실하게 규정합니다. 질이 나쁜 골수 지역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영남패권주의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한 사람입니다. 증거는 위에 진술한 대로입니다. 개혁의 화신이 알고 보니 지역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영남패권주의의 피해자는 호남인만이 아닌 전 국민입니다. 심지어는 영남인도 피해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고 방식은 인간의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상식을 기초로 하는 가치체계의 굴절과 불연속이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인종차별과도 같은 지역차별은 시공을 뛰어넘어 범죄라고 규정되어 마땅합니다. 이것은 상식이 아니라 명제입니다. 상식 이전의 명제마저 서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마저도 논란거리고 싸움거립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끝없는 소모전이 진행되고 결론은 영원히 없습니다. 당연히 합리적 사고, 과학적 사고가 설 수 없고 인간관계 마저도 불신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잴 수 없는 크기로 우리 모두는 손해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끊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노무현의 실체를 알고 너무 절망했습니다.

 

지역주의 구도는 이렇게 영남패권주의가 위세를 떨쳐왔던 역사적 조건 속하여 형성되어 왔습니다. 이 구도를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공법으로 가야합니다. 노무현이 가는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돌이켜야 합니다. 노무현의 길은 나라를 진흙구덩이에 다시 한 번 쳐넣는 길입니다.

 

 

영남에 대한 배려를 냉정하게 단념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느 지역이 됐건 특별 배려를 다 끊습니다) 이어서 가시적인 개혁을 수행해 나갑니다. 이 경우,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과 지역에게는 자연스레 불이익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차별함으로써가 아니라 개혁 정책에 의해 발생한 이익과 혜택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로서 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방식입니다.

 

 

원칙

 

 

개혁은 개혁을 원하는 자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자만이 자발적으로 개혁의 대오에 동참하는 법입니다. 개혁이 싫다는 자에게 무언가를 도와 달라 호소한다고 해서 그들이 도와줄 게 있겠습니까? 아부, 호소가 아니라 당당하게 설명하고 나면 그 뿐입니다. 개혁을 하므로써 그것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이제까지 기득권을 향유해온 부류일 겁니다. 만약, 약자가 개혁에 의해 또 다시 불이익을 겪었다면 그 개혁은 크게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은, 기득권자가 조금 손해를 보고 음지에 있었던 자가 제 몫을 챙기는 사회구조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기득권자의 이익은 절대 훼손하지 않으면서 중산층과 서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요? 그렇다면 그 개혁은 거짓입니다. 그런 철학에 바탕을 둔 개혁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개혁은 불합리를 합리로 고치는 작업입니다. 무엇이 합리이고 무엇이 불합리인지 분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한 가치 체계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회는 상식이 있으되 흐리멍덩하고, 더구나 통용되지 않아 왔으므로 이제부턴 상식이 보증을 받는 관례를 시행해 나가야 합니다. 상식을 거스르면 그만한 댓가를 치루도록 만드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식이 무언지 비로소 분명히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합리의 사회로 만들었을 때, 손해 봐야만 할 자는 손해 보도록 놔두는 것이 정의입니다. 개혁은 이러한 철학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기본 원칙입니다.

 

 

의문

 

그런데 노 정권은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습니까? 원칙이 서있다면 실천하고 있습니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본질은 허위의식입니다. 아직 개혁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누가 그럽니까? 수구와 보수언론이 사사건건 발목 잡고 믿었던 지지자마저 집단 이기주의로 정권의 힘을 빼고 있다고요? 노 대통령의 개혁의지는 확고한데 참모들이 띨띨하다고요? 노동계와 공무원 노조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하여 국정 수행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니 어느 틈에 개혁의 돛을 올릴 수 있었겠냐고요?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음를 느낍니다. 그의 철학과 이념적 성향과 실천적 노선의 실체를 알 때 우리도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탐구

 

이제 잠시, 위에서 거론한 개혁정당 출범 논의의 내용과 같은 노무현 정권 출현 후 일어난 모든 정치적 행위와 결정들이 왜 일관되게 수구적 노선을 ( 촛불행진 자제 발언, 수구적 인사의 중용과 영남 출신 편중 인사, 대북송금 특검 수용, 논의를 차단한 이라크 파병 결정, 전교조 반미교육 제재 지시, 실리 없는 숭미 발언으로 국민의 자존심 짓밟기, 햇볕정책의 실질적 파기와 남북관계 급속 경색,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한미공조라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 하나로 대체해놓고 대미 외교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 재벌개혁의 연기, 수도권 지역 아파트 값 상승에 손 놓고 방관하기, 한총련 검거 지시와 5.18묘역 '난동자' 낙인 발언, 초법적으로 네이스(NEIS) 시행 밀어 부치기, 수구지역 주민 끌어안기 목표의 소위 개혁신당 구상과 지원... ) 견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노무현의 정치적 정체성은 무언지, 정치 철학은 무언지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기간이 매우 짧아 인권 변호사로 활약한 80년대 초중반의 사회활동을 빼면 처음 국회에 진출한 해에 있었던 5공 청문회 명패 사건, 903당 합당 반대 선언과 의원직 사퇴, 연이은 부산 지역구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 출마와 낙선 (98년 종로구 보궐 선거 당선 포함), 그리고 진보 개혁 성향의 시민과 노사모의 지극한 성원을 등에 업고 나선 국민 경선에서의 부상 이변 연출과, 대선 기간 중에 보여준 개혁적 발언들이 분석 자료의 전부랄 수 있습니다.

 

 

원칙과 소신

 

제조된 이미지는 '원칙과 소신'이었습니다. 원칙과 소신 중 하나만 뚜렷해도 정치인으로서의 자산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긍정적 이미지는 늘 상승 작용을 불러오기 마련이어서 일반 지지자들은, 그 둘을 하나로 결합까지 시키려는 열혈팬들의 요구에 기꺼이 동의하는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원칙이란 이미지는 3당 합당 반대 선언에서 보여준 올곧은 젊은 정치인의 인상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잇따른 부산 지역구 출마는 '원칙'이란 지향성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큰뜻(?)을 일찍이 품은 그의 정치 감각,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의 발로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의 부산 출마와 낙선의 과정은 원칙과는 상관없는 그의 어떤 결기에 가까운 것이라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서 화합의 정치를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로 노무현을 꼽으며, 그가 지역주의의 피해 당사자임으로 그것을 허무는데 최전선에 설 전사가 되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런 연상 작용은 심리적으로야 자연스런 연결이지만, 한 꺼풀 벗기면 지나친 비약임이 드러납니다. 지역차별주의에 맞서 얼마나 줄기차게 싸워왔느냐라는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역주의의 피해자임으로 곧 지역주의 타파의 선봉장이 될거다라고 건너 뛴 겁니다. 물론 이 예는 원칙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그의 사회 문제를 해석하는 시각과 철학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그의 원칙과 소신이란 이미지의 성가를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 합니다. 요약하면, 그의 정치 활동에서 원칙과 소신이 늘 동인이 된 것이 결코 아니었음 불구하고 그의 팬들의 기대가, 기왕에 만들어진 그의 이미지에 시너지 효과까지 보태며 곧 노무현 실체인 양 일반에게 전해졌던 겁니다.

 

 

이미지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미지의 역할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치인의 행위에는 어차피 인격과 실천의 합일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연이은 낙선 사실이 웅변으로 증거하듯 그가 프로 정치꾼들과는 달리, 인격 합일적이며 비타협적인 정치적 선택을 할 때마다 정치판에선 늘 외면을 당해왔습니다. 이 나라와 같은 정치판에서 각광받는 생존 전략은 진실이 아니라 정략과 술수입니다.

 

 

정치판이란 속성이 명분 선점을 가장한 음침한 권력 싸움임을 알고 볼 때, 정치인의 하나인 그가 뚜럿한 명분을 획득하고도 뻔히 지는 싸움만을 매번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정치에 신물을 내는 시민 일반에게는 그가 정치인의 음습한 속성을 한 점 묻히지 않은 인격 실천 합일의 경이로운 천연기념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선택이 신선한 감각과 사고에 기인한 것을 부인키는 어렵지만 인격 전체가 터무니없이 미화되고, 사실상 관련이 적은 '원칙과 소신'의 화신으로까지 찬양된 배경에는 예술적 차원의 이미지 메이킹 역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내 정치인으로서 좀 더 긴 세월 동안 활동했었다면 더욱 많은 정치적 타협의 모습이나 말 뒤집기, 기만술, 술수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대선 전의 이와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는 필시 구축되지 못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원내 활동을 짧게 한 덕에 대권을 잡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이미지 제조의 주역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지로 형성된 노무현을 우리가 그의 실체로서 착각한 부분이 오직 이것뿐이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결 론

 

지지자에 대한 노무현의 변절에서 보듯 시민 개개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철학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서있지 못하다는 의심이 듭니다. 가치관이란 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갈 수가 없는 법인데 그의 행동에서 읽히는 가치관은 그 토대가 매우 허약하다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난관과 같은 테스트를 견뎌 이기고 통과함으로서 타인에게 비로소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러한 면에서 철저히 검증받은 바가 없고 이제 와서 그러한 테스트 기회가 닥칠 때마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노무현이 실체 노무현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미지 메이킹의 포로였습니다. 언론도 반성하고 여론 주도층도 반성해야 합니다. 아직도 그를 파악하는데 까지, 그래서 더 이상의 실망도 기대도 필요치 않을 싯점까지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그의 발언에, 행동에 나타나는 그대로를 가지고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조만간 정리가 되리라고 봅니다. 대선 전의 노무현을 가지고, 그는 반드시 돌아오네 마네 논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가 스스로, 대선 전에 알려졌던 노무현이 아니라고 말로, 행동으로 강변하는 마당에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며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입니다. 대통령인 그가 누군지, 그의 철학과 성향과 이념과 지향점이 무언지를 실증에 근거해서 바로 알아야 우리 각 개인의 정치적 포지션도 제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정권에 대해 효과적인 비판과 감시의 방법도 계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당신이 속은 것,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속을 것

 

"노무현지지자는 곧 개혁세력이다"

이 말이 대선 전까지는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틀린 말이 된다. 엄밀히 말해, 노무현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개인 '노무현'이 아닌 '개혁'이라는 이념을 지지한 것이다. 개혁이 빠져버린 노무현은 이미 노무현이 아니다. 개혁을 내팽개친 노무현을 아직까지 지지한다는 말은 개혁문제만큼은 더 이상 상관 않겠다는 말, 아니면 애초부터 개혁엔 관심 없었다는 뜻이다.

'인간 노무현'의 가치보다 '개혁'을 우위에 놓는 사람들은 인간 노무현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개혁을 운위할 자격이 없는 배신자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개혁과 동의어였던 인간 노무현을 살리는 길은 무언가? 아직도 노무현의 실체를 파악 못하고 있는 바보들과의 논쟁에 의한 설득이 통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개인 노무현''개혁 노무현'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에게 "현재의 노무현은 개혁이 아니다. 더 이상 개혁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지를 철회함이 마땅하다. 노무현이 이 엄중한 위기감을 깨달을 때만이 그를 개혁의 기치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득하는 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실체를 통찰하지 못하는 '인간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러한 논리성에 설득 당해 줄까? 아마도 이 논리를 이해할 사람이라면 지지철회를 이미 마친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고 개혁에의 희망이 다 물 건너 갔다고 단정하려는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물 건너 갔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

첫째, 노무현을 압박하여 개혁의 기치를 다시 들게 만들 세력이 부재한다.

둘째, 노무현은 원래부터 그의 지지자들이 믿고 있던 개혁마인드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 인간 노무현은 개혁의 표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세째, 노무현은 비개혁파 혹은 영남패권 마인드를 가진 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들을 모두 갈아 엎을 정치공학 차원의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줄기차게 말 할 것이다. 노무현을 믿어보자고. 노무현에 의한 개혁에 힘을 실어주자고. 대안이 있느냐고. 냄비기질 제발 버리라고. 이런 식으로, 진정한 개혁세력은 사이비 지지자라는 누명이나 뒤집어 쓸 것이다. 하지만 개혁 위에 인간 노무현을 얹어놓는 사람들이 걸어 갈 길은 뻔하다. 그들은 대선 드라마를 통하여 속았고 또 그렇게 계속하여 속을 것이다. 노무현이 사라질 때까지 속을 것이다.

대안은 위에서 말하였다: 현재까지 노무현의 실체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노무현지지자들의 생각을 확실히 깨부시고 바꿔놓는, 가열찬 논쟁에 나서는 것, 그것이다. 당분간은 그들이 개혁세력의 적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들의 애매한 노무현 온정주의를 냉철한 개혁주의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개혁이란 실체가 실종된 채로 남고 만다. 그들을 설득한 다음에 노무현을 '강제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노무현이 개혁을 스스로 단행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는 무망하다. (그는 개혁주의자가 아님을 알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시나리오는 거의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상황은 그것을 용인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거 문익환 선생같은 이가 있어 희생으로 제 몸을 던진다면 가능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노 대통령의 수구적 진로 수정은 실수인가 철학인가

노 대통령은 지금 5년 정권 로드맵(roadmap)의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 먼저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요즘 조선일보의 환호를 보세요. 각하니, 편집국 초청이니, 국가 질서 회복이니 하며 노 대통령의 수구적 행태를 엄호하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양 은근한 노비어천가로 고무하고 박수를 쳐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저런 짐짓 속보이는 짓을 하고 있을까요? 노대통령이 정말 장하고 이뻐서요?

아닐겁니다. 노 대통령을 길들이고 있는 겁니다. 프로파겐다입니다. 그들 신문의 독자에게 노 대통령의 혁명적일 만치 변모된 정체성을, 나발불며 선전해대는 겁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수구적 발언이 나오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그 사실들이 노 대통령의 정체성의 근본적 변신이라며 딱지(Labeling)를 붙여주는, 희화적이지만 겉으로는 엄숙하기만 한 제의(祭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혹여 장래에 노 대통령이 그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미리 강력하게 차단하려는 그 야비한 술수 말입니다. 그들의 올가미 씌우기 방법입니다.

노 대통령이 만약 개혁지향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경우가 발생했다고 칩시다. 조중동으로선 또 한번의 놓칠 수 없는 호기가 됩니다. 노 대통령이 이미 잘 못 계산하고 들여놓은 조중동과의 자연스런 '코드 맞추기' 회합이 이번엔 그를 윽박지를 수 있는 자료로서 조중동에겐 훌륭히 이용되고 말 것입니다. 변신의 귀재 어쩌구 하는 천박한 어휘를 다 동원하여 그의 노선 회귀를 또 한번의 용서받지 못 할 변절로서 규정하고 그를 수구의 이익에 부역하는 정권으로 기필코 잡아놓으려, 정책 결정의 고비 고비 마다 딴지를 걸며 괴롭혀 댈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여기가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 자신이 불러들인 함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자못 필요했을 정책수행의 수구화로의 편향은 나중 조중동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드는 악수로 돌아오고 맙니다. 더욱 더 노골적으로 우편향을 요구하는 조중동의 간섭과 협박을 노 정부가 버텨내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므로, 강력한 지지자들을 소외시켜왔던 업보를 가진 노 정부는 점차 조중동과의 협력 관계를 아예 정책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권의 안정과 안녕을 담보받는 길을 선택하고 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노 대통령은 더 훗날, 이러한 패착이 지지층의 자연적 와해나 이반, 그리고 강고한 극우언론의 발목잡기에 의한 것일 뿐 자신의 신념,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책임을 피하려 할 지도 모릅니다. 허를 찔린 공생의 함정, 그들이 놓은 악귀같은 덫에 걸린 불행이었다 하면서요.

그러나 정치인의 한 번 판단과 그 행위는 적어도 정치적인 이익과 그 반대급부를 무시한 채 실천되고 말았다 해서 책임을 벗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정치인의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정치의 기역니은을 인정합시다. 현재 우리 눈에 실착으로 보이는 정책 결정은 필시 노 대통령과 그 참모진이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고도의 정치 행위라고 규정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수구와의 공생의 댓가는 이토록 만만찮은 것입니다.

자신의 수구적 발언으로 지지자의 대거 이탈을 경험하면서도 한편 지금 당장은 조중동의 격려와 다둑거림에 자신의 깊은 한숨을 의탁해버리고 있을 노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야 가여운 마음이 아니 들 수 없지만, 냉혹한 현실에서는 이제 그가 쉬 발을 뒤로 뺄 수도 없는 형국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초심으로 되돌아 가려고 해도, 조중동의 하이에나 이빨에 한 번 발목잡히기 시작한 그가 운신할 선택의 폭은 대단히 협소해져버린 겁니다. 그들은 절대 노통을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비운이 현실로 나타나면 우리가 나서서 가열차게 싸워야 한다구요?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문제의 본질은 노 대통령에게 계속 남아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지금 '일관되게' 어느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를 검토하면 될 일입니다. 그 발걸음을 주시하다보면 그 때가 되었을 싯점에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노 대통령과 한편이 되어 조중동에 대항할 상황에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옵니다. 노 대통령이 필경 조중동의 품에 의탁해 있을 사태를 우린 결국 맞을 거라고 예측합니다. 치기어린 허튼 예상이라 웃고 마는 사람도 더러 있겠군요.

 

보십시오.

노 대통령은 취임 3개월간 지치지도 않고 간단없는 시리즈로 수구적 발언과 정치 행위를 일삼아왔습니다. 촛불행진 자제 발언, 수구적 인사의 중용과 영남 출신 편중 인사, 대북송금 특검 수용, 논의를 차단한 이라크 파병 결정, 전교조 반미교육 제재 지시, 실리 없는 숭미 발언으로 국민의 자존심 짓밟기, 햇볕정책의 실질적 파기와 남북관계 급속 경색,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한미공조라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 하나로 대체해놓고 대미 외교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 재벌개혁의 연기, 수도권 지역 아파트 값 상승에 손 놓고 방관하기, 한총련 검거 지시와 5.18묘역 '난동자' 낙인 발언, 초법적으로 네이스 시행 밀어 부치기, 수구지역 주민 끌어안기 목표의 소위 개혁신당 구상과 지원... 숨이 찰 지경입니다. 드디어 오늘에 와서는 극우진영과 수구언론의 두둔과 찬사까지 얻어내는 장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기조가 분명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연이나 상황의 강요가 아닌 노 대통령 자신이 선택한 기조 말입니다.

한 마디로 수구의 길입니다. 선거 공약과는 정확히 180도 틀어진 변신입니다. 대 변신입니다. 그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가히 세상이 뒤집혔다며 수선을 떨어도 할 말이 없게 된 엄청난 반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취임 후 3개월 만의, 지지층의 정확한 자리 바꿈의 현상은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현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정치적 이념과 지향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보여집니다. 그간 그의 이름 앞에 관형사로 붙었던 '개혁'의 실체는 정작 알맹이 부재, 철학 부재임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상황과 실리를 우선시키는 철학, 그래서 이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원칙과 소신도 얼마든지 유기시키고 마는 철학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그는 예측 불가능의 정치인입니다. 선거 기간 후보로서 쌓았던 지지자들로부터의 신용과 신뢰를 내동댕이치고도 향후 개의치 않겠다고 공언하는 비상식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 입니다.

그의 실리가 어떤 기준에 근거하는지 (그는 '상황에의 순응'을 실리라고 말합니다) 파악이 안 되는 정치인이라면, 그를 믿고 계속 지지한다는 것 자체는, 나의 정체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전제하의 투항이고 무책임성의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를 '무조건 믿고' 밀어주자는 말은 정치적 지진아나 할 말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믿고 우두커니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에게 남겨진 유권자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선택의 폭은 노 대통령의 어이없는 변절로 인해 몹시 옹색하게 졸아들었습니다. 그간의 지지자들이 실제 어제, 오늘을 고비로 하여 대규모로 이탈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제(521)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회의를 느낀다-- "이러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이 상황으로 가면 대통령을 제대로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는 발언이 또한 결정적인 자충수를 둔 듯 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금 지지자들을 되돌릴 수 없는 길을 향해 지금 막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개혁을 오매불망하는 지지자들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구와의 공생을 선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 조중동에게 발목 잡히고 있는 노 대통령, 그들과 화합하는데서 국정수행의 고뇌의 땀을 씻어내며 평안을 구가할 노 대통령, 그는 다시 육체와 정신의 극심한 고통을 수반할 첨예한 대립으로 조중동과 맞서 싸울 철학과 신념과 의지가 결코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확실히 섭니다.

후보 시절 그가 언론 개혁을 외칠 때완 다르게, 대통령이 되고 보니 국정 책임자로서 거대 언론과 매양 대립만 하고 있는 것은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하였을 성 싶습니다. 이러한 예측이 저 개인의 자의적 판단과 취향으로 무책임하게 마구 발설되고 있다고 분개할 사람들도 있겠지요. 아닙니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이전까지의 편견을 다 내려놓고 조용히 사색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것은 인간 노무현과 나와의 관계, 즉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 개별적으로 어떤 대의 앞에 떳떳하게 단독자로서 서느냐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노 대통령이 수구의 길을 가면 반대할 일이고 개혁을 밀고 가는 철학이 확실히 보였다고 판단되면 그를 지지하면 될 일 입니다. 그러나 조중동과의 상생을 택하는 그를 무조건 지지한다는 건 자가당착이라고 보입니다. 그것은 조중동과 수구, 기득권, 반통일, 사대숭미, 친일, 반재벌개혁, 반민중에 손들어 주는 일이 되고 마니까요.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흠모하던 님인들 어쩌리요, 그가 지금 적군 진지에 가담하여 옛 동지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옛 정만을 회억하며 동정으로 눈을 질끈 감을 순 없는 일이 아닙니까? 노 대통령의 계획됐지만 돌연한 우연으로 보이는, 수구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으로 인해 이미 민중의 상당수는 커다란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턱대고 감싸며 기다릴 수 만 없습니다.

돌아오지도 않을, 돌아올 수도 없는 강을 건너는 옛 님을 나는 깨끗이 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추스려서 나도 모르는 새 형성된 새로운 수구와의 대치선에 또 걸어나가야겠습니다. 그게 내가 설 곳이고 또 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몰표논쟁을 너머 국민화합의 단초를 찾아서

미국으로부터의 편지

 

호남 결집표에 대한 해석에 있어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시는 분, 그러나 95%의 몰표는 역시 받아들이는데 곤혹감을 떨칠 수 없다고 토로하시는 분들을 위해 씁니다.

이 번 대선의 몰표를 우려하는 분들이 자신의 출신지역(.호남과 무관하다는)을 내세우며 지역감정에 중립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지역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임을 알아 달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출신배경 하나로써, 자기들의 주장이 지역감정을 담고 있지 않노라는 근거를 삼으려 합니다. 이런 주장은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참으로 위험한 논리입니다.

출신배경과는 무관하게 얼마든지 지역감정에 절어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에서의 자유를 표방하는 자체가 오해일 경우가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40여 년에 걸친 수구냉전세력의 집권에 의해 얼마나 길들여지고 뇌세척을 당해왔는지, 그 예를 보이려고 합니다.

 

영남을 지역적 근거로 한 그들은 지역주의를 자의적으로 조작 확대 유포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이용하는 매국적 전략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남 출신자는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호남출신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자리하는 구도가 강고해졌습니다. 강자의 주장은 여론을 주도하기 마련입니다. '2등 국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호소와 주장은 그것이 대단히 절박하고 말 그대로 정당성이 있을 때 마저도 반향 없이 늘 허공에 흩어지고 맙니다. 그 예를 이번 '몰표 논란'의 현장에서 똑똑히 보게 됩니다. 지역감정에서 자유롭다는 사람들마저도 얼마나 현 지역주의의 틀 속에서 자유스럽지 못한지도 극명히 보여줍니다.

(이 글은 '중립주의자'이신 M형의 주장을 내내 생각하며 쓰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M형은 1225일 한겨레 토론방에 '중립적 시각'이란 아이디로 "지역감정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을 썼었지요)

저는 여기서 호남표에 대한 논란의 현상 자체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왜 호남표를 문제 삼는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왜 호남표에 대한 의구심이 많은 사람에게 드는 것인지가 나에겐 오히려 큰 의문입니다. 스스로 편견속에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중립임을 표방하며 공정함을 호소한 뒤, 굳이 호남표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하는 지 사회심리가 그것이 매우 궁금합니다.

님들은 문제제기시 스스로 매우 불편부당한 정보라고 믿고 있는 근거들를 제시합니다. (대선 이후 수도 없이 쏟아지는 반론의 글들이 95% 몰표의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굳이 더 보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님들이 굳이 치우친 정보만을 수집했을까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님이 지금까지 지역감정과 관련하여 절대적으로 편향된 정보에만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언론의 권력을 40여 년간 독식한, 영남을 지역적 근거로 한 세력들이 만들어 낸 왜곡된 정보들에 매우 길들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님()은 언제 호남의 입장에 서보신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 지를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이 이제까지는 수구냉전 기득권층이 생산해낸 정보만 접해 왔을테니, '중립'을 견지하기 위해서라도 호남인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정보도 접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남인의 목소리는 편견에 가득 차 있어서 들으나 마나 한 거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40년 영남 기득권층이 생산해낸 정보들만은 편견이 없노라고 자신하겠습니까. 만약 현재까지 생산된 정보들이 가치중립적인 것들이라고 우기신다면 님은 수구세력에 의해 이미 구제불능 상태로 세뇌 돼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럼 님이 어떤 면에서, 편견의 질곡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지를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문제제기의 시각입니다. 바로 님이 글을 쓴 동기 자체란 뜻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경악할 사실은 영남표의 수구성입니다. 그런데 네티즌의 대부분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합니다.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무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듯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반면, 놀랍게도 오히려 호남표를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호남표에 문제 있다고 아우성입니다. 님의 문제제기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왜 영남 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합니까. 영남은 수구꼴통집단이니 아예 논의에서 제껴 놓자는 합의입니까. 아니면 영남에게 무슨 큰 죄를 졌습니까, 큰 부채를 졌습니까. 영남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아니면 영남은 그렇게 우리가 감싸고 돌아야만 할 지치고 천대받는 소외지역이라도 되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침묵합니까. 너무 거대한 권력이라 두렵고 겁난다는 겁니까. 그렇지만 호남은 어차피 늘 눌려왔으니 좀 추궁해 본들 큰 일이야 벌어지겠나 하는 기회주의적 발상은 아닙니까.

호남의 표는 관제화된 표, 동원된 표가 아닙니다. 각각의 개인이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상식과 비상식 중 그저 상식을 지지했던 결과일 뿐입니다. 95% 라는 숫자가 아직도 영 께름칙하다고 느끼신다면 이 나라 정치사회 구조가 얼마나 참혹할 정도로 비틀린 지경이었는지를 먼저 살피셔야 할 겁니다. 95%는 대한민국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고 상징입니다. 더구나 지지받은 노 후보가 호남지역의 패권을 부르짖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무랄 구석이 없습니다.

반면 이회창 지지 영남유권자 75% 중 절대다수가 영남패권주의를 선택했습니다. 20%, 30%, 40%도 아니고 전체 75% 중 절대다수가 영남 패권주의의 기치에 떼로 몰려든 겁니다. 호남표를 분석해 보십시오. 거기 호남패권주의의 흔적이 있습니까. 5%라도 있습니까. 어떤 호남 유권자가 부산출신 후보를 지지하면서 호남 정권 재창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꿨겠습니까.(영남표가 갖는 지역패권주의의 표심을 읽는 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그것이 유권자의 몇 %인지를 따지자는 유치한 얘기가 아닙니다. )

대한한국의 수준이 아직 이 정도입니다. 이만큼이나 한국은 정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불공평이 지배하는데도 님과 같은 사람은 나서서 중립임을 자랑스레 외칩니다. 영남표에 대한 가감없는 이해를 위해 며칠 밤인가를 꼬박 지새우고 난 뒤 호남표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도무지 봉건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지역패권주의가 75%의 수치 속에 극명하게 드러났는데도 그 무지막지한 집단주의는 논의에서 면제를 받고 도리어, 상대지역 출신이지만 노 후보의 탁월한 자질과 능력을 평가하는 '상식'을 택했던 호남인은 트집잡히고 추궁당하는 이 현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세상입니다. 이게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침묵하는 여러분 모두가 바로 공범입니다. 영남표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 않은 여러분이, 비상식이 버젓이 상식 행세를 하고 있는 이 나라를 만들고 있는 협력자입니다.

 

호남인은 자기방어를 하기에 급급하다 못해 이제 지쳐 있습니다. 왜 그들이 떳떳한 일, 자랑스런 일을 했으면서도 수세의 입장이 되어 자기변호에 내몰려야 합니까. 경제적인 차별보다 몇 배나 더 깊고 질긴 상처는 사회적 차별에서 비롯됩니다. 70년대 초 산업화과정과 더불어 본격화된 박정희정권의 지역감정 조작 범죄는 호남인들을 간사하고 음험하고 의리 없고 뒤통수치고 천하고 교활하고··· 등등의, 부정적 인간상의 표본인양 이미지조작을 자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남인 뿐만 아니라 호남인을 제외한 전 국민은 호남인들을 멸시의 눈으로 흘기고 냉소하며 배타적 소외와 천시를 일삼는데 동조해 왔습니다. 이런 행태가 무려 한 세대를 훨씬 너머 이어져 오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 비호남인 중 문제제기를 했던 지식인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이제, 호남인들이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나마 방어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기막힌 심정에 울고 있는 것, 공감하십니까.

호남인들은 범수구세력을 포함한 영남의 지역패권주의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왕따 당하지 않을까 늘 두려운 겁니다. 쪽수에서 형편없이 밀리니, 모종의 구실로 비틀려 왕따를 당하고 말 지 겁나기 때문입니다. 호남인이 정당한 어떤 연유로 인해 왕따라도 당한다면 차라리 정의의 도가 살아있음을 보며 감사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모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차별당하고 멸시받아온 호남인들은 바르게 행동하고도 칭찬은커녕 세상모르고 시건방졌다는 괘씸죄를 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게 어디 살 세상입니까. 이게 어디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 줄 세상입니까.

우리는 모두 호남인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호남인이 아니었으면, 이 땅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군사독재의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덕에 이만큼의 민주화가 되었고 더구나 그들의 상식적인 투표행위란 공헌에 힘입어 우리 노 당선자가 탄생한 것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차별과 소외의 어두운 그늘에서 무려 40년 넘게 가슴을 졸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던 우리 형제인 호남인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향한 험난한 노정에서 뿌린 그들의 피의 희생에 커다란 부채감을 품어야 합니다. 이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한국인의 한이 풀리지 않습니다. 이들의 응어리를 풀지 않고서는 이 응어리가 끝내 우리 각자의 족쇄가 되어 국민화합을 저해할 것입니다. 호남인의 소외를 슬그머니 모른 척 하고 사회통합을 운위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은 위선이요 속임수입니다. 그 화합은 말뿐인 통합이고 어거지입니다. 그것은 호남인의 가슴을 아리도록 멍울지게 할 뿐입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어느 유명 논객은 그러합니다. 아주 당당하며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전라도 깽깽이들, 그만 징징거리고 아예 전라민국으로 하나 떼서 독립이라도 하라고요. 국민 화합이 이 나라가 당면한 최고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마당에 그런 막말을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부당하게 차별받아 왔던 호남인들을 위무하는 것은, 국가의 현안 어쩌고 하기도 전에, 저 인간의 양심을 지키는 자의 따뜻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떨림이요, 영혼의 맑은 목소리입니다.

하물며 희망을 싹틔울 새 정권의 여명을 맞아서까지 호남인을 몰아세우는 잔인성은 그만, 동작 그만! 으로 끝내세요.

중립을 주장하신 님 이하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영남표에 대해 문제제기 하시기 바랍니다. 휘어진 것은 바로 펴야 합니다. 그들이 다수여서, 이 사회에서 힘이 있으므로, 아니면 긁어 부스럼이므로 영남표에 대해선 눈 질끈 감자라고 하는 멘탈리티를 끝내 견지하는 이상 이 땅은 계속해서 전근대주의의 진구렁에 갇혀 헤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남인들이 스스로 하면 더욱 좋을 것이요, 우선은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남인을 도매금으로 매도하자는 게 천만에 아닙니다. 영남인을 양심불량 집단으로 몰아넣고 나는 빠져나와 카타르시스나 즐기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목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지역감정에 대해 치열하게 자성하는 기회를 갖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호남과 비호남이란 대립구도 속에서 '상대'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만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비판해보자는 겁니다. 이 일은 당연 영남인이 주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호남인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내가 해봤자 '라도'애들은 안 할 텐데 뭐," 라며 책임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몸 안에 암세균처럼 스멀거리는 지역편견을 청정하게 세탁해내는 일이, 개인이 마음 한번 바꿔먹겠다는 결심으로 가능해질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 병은 개인의 질병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전 사회 구성원들 뇌촉수 곳곳까지 깊숙히 침투한 전염병입니다. 따라서 나 하나만 득도하여 깨어나고 병을 치유 받는 게 아닙니다. 주위의 전염병 환자의 몸에서도 동시에 병원균을 박멸해야만, 나 또한 병의 재발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공론의 장'에서 토론해야 할 이유입니다. 이 질병은 수치스러운 병이므로 쉬쉬하다가 그저 나 홀로 아스피린 먹고 치유되는, 그런 병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대명의 햇살 아래 거침없이 펴놓고 공개방송으로 토론하여 균들의 행방을 추적하고 각 균에 최적의 치유제를 개발하여 우리가 동시에 복용하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이 지난한 수고를 건너 뛰어 국민간 화합을 꿈꾸는 것은 허황하기 짝이 없습니다. 국민화합이 어디 대~한 민국 한 달 외쳤다고 내게 달려와 주었습니까. 월드컵 함성 속에서 국민화합에의 열망만은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이제는 공개토론을 통한 자성입니다.

님들. 지식인, 그리고 개혁의 논객들이여, 입을 열어 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결코 쉬쉬하지 말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시작합니다.

오하이오 작은도시 실베니아에서

이경렬 드림

영남과 호남 그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영남의 공세적 '우월의식'과 비영남의 대응방식

 

1. 영남인의 무의식 결정론

영남패권주의 사고 방식에 깊이 동화돼있는 일반 영남민중에 대비되는 호남민의 의식은 영남패권주의적일 것이며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 전체의 영남패권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는 하부 체제로서 역할 분담을 하는 현상이 지적되는데 그것은, 비영호남지역민의 사고 방식이 영남패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영남패권이데올로기적 이라는 점이다.

먼저 영남인과 호남인의 의식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영남인의 그것은, 위에서 "사고 방식"이라 표현했듯이 무의식의 영역을 상당 부분 포함하는 사고 체계인 반면, 호남인의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이 아닌 깨인 의식이라는 차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아울러, 비영호남인의 사고는 이 중간 개념으로서 '의식'에 경도된 혼합적 사고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 무의식과 의식간의 차이가 이 영남패권주의이데올로기의 본질과 사회현상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대부분 영남인은 자신 안에 내재된 패권의식에 대한 자각이 약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각하기를 기피하는 무의식이다. 그들의 우월의식, 가해자적 위치, 수구성, 이기심,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혜택의 제1차 수혜자라는 현실, 등등에 대한 자각을 한사코 거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 싶어한다라는 부분이 이들에겐 무의식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그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숨 쉬어 왔었기 때문에 스스로 냉정한 자의식을 갖는다는 게 용이한 일이 아닌 점을 인정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환경을 자기 합리화의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무의식도 이들의 사고체계를 고착시키는데 일조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영남인들의 사고 방식은 그들이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사회적으로 우호적인 조건을 항구화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전술로써 현실 사회에서 작용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해악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그것을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 영역에 머물게 함으로써 스스로 면책을 부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개인과 타자 영남인간에 유사한 사고방식을 서로간에 부추기고 강화하여 이미 의문 제기를 탈각하는 자연스런 관습으로 녹아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의 영남인만의 관습은 오직 그들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점유한 사회적 강자라는 위치로 말미암아 자신들에 의한, 자신들만을 위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여타 하위 지역민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영역만으로 그들의 사고 방식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매우 명료한 의식의 영역에서, 이미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작동하는 편파적인 룰이 자기 개인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해서 지금까지 작동되어 온 것이 아니라는 편리한 자기 합리화 (, 비영호남인들을 포함한 전 사회의 자발적 합의인 것으로 주장) 심리 속에 그 불공정한 룰이 그만 폐기되고 마는 것을 절대 지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무의식을 가장한 생득적 이기심이 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다.

 

 

2. 호남인의 의식 결정론

 

이와 같은 영남인들의 사고 방식과는 달리 호남인들의 반패권주의적 성향은 매우 분명한 의식의 영역에 의존해 있다. 왜냐면 이들의 사고는 영남인들의 자기 정체성 규정에 따른 반응으로써 형성된 후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영남인들의 사고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혹은 그것의 개연성에 따라서 부단히 의식적인 활동을 통한 정체성의 규정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그들이 선택하는 생존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영남인의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경우, 손해나는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호남인은 늘 강자의 의중을 의식의 영역에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비영호남인이라는 주변인들도 강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매 한가지이니 이들에게 우호적 시선을 기대하기도 사실상 어려운 형편인 이상, 호남인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이중 억압의 조건 속에 갇혀있다.

이처럼 호남인들은 영남인들에 대한 관계 공학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매우 의식적 결단으로 재구성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영남인들의 성향에 대한 소상한 정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영남인이 우월의식에 젖어있다는 사실을 잘 앎으로써 갖게 되는 호남인의 반응은 매우 복잡한 심리적 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영남인으로서는 이러한 호남인들이 설정하는 자신들에 대한 위치 선정에 대해 전혀 신경쓸 일이 없다. 그들은 사회적 절대 강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예컨대, 호남인들로서는 영남인들의 행위 양태에 대해 놀람, 두려움, 미움, 증오, 비웃음, 현실인식, 무력감, 절망, 연민, 자기성찰,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기 위치 설정이라는 일련의 심리적 과정과 이성적 결단을 거칠 수 있다. 물론, 증오와 비웃음 등의 낮은 단계에서 그만 위치 설정을 함으로써 영남인들에 대한 적대적 자세를 최종의 정체성으로 갖고 마는 개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차원에 그칠 뿐, 집단적으로는 역시 평화적 공존이라는 공학적 위치 선정의 원리안에서 이성적인 사고 과정을 통한 정체성 정립을 결정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의식의 층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해둔다.

 

 

3. 호남인의 인식론적, 도덕적 우위와 그 이유

 

지난 번 글에서 요약한 영남인의 사고 방식의 단면들으로서 그들이 가진, 패권의 물적 토대가 와해될 가능성에 대한 공포, 선민의식의 와해에 대한 공포, 사회 질서 재편에의 적응력 결여에 대한 공포, 영남인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의 공포 등등에 대해 비영남인들은 깨어있는 인식을 가지고 가지고 있는 반면, 영남인들은 비영남인들이 가지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속수무책으로 그 심리를 노출시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호남인들이 영남인들의 심리를 읽지 않을 수 없는 사회 환경 조건에서 생성된 결과는 기대치 않게도, 영남인에 대한 인식 수준의 상대적 우세 점유이다. 이렇듯, 무의식의 영역을 포함하는 영남인의 사고 방식과는 달리, 순수 의식의 영역에서 이성적 사고 회로를 통과함으로써 호남인들이 갖게 되는 심리적 복합성, 사회적 정당성, 윤리적 우위는 의도치 않았으나 슬며시 스며들어온, 너무도 분명한 긍정적 부산물로 남는다. 이것은 호남인들이 태생적으로 도덕적 인자를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억지 주장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구조화된 사회적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비호영남인의 상대적 자율성 확보 조건

 

그럼, 비영호남인들의 사고 패러다임은 어떤 패턴을 더욱 닮아 있을까? 이것은 언뜻 각 개인의 결단에 맡겨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 쉬우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회적 조건에 수렴한다고 봐야 한다. 영남인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 약자라는 위치로 인하여,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는 결정권이 그들에게 없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남과 호남의 관계 설정에서 결정적으로 파생되고 만 것이 아닌, 그들 지역인들의 능동적인 사회적 행위와 기존의 사회적 구조 간에 벌어진 타협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조건을 무의식으로 받아들이는 면과, 의식의 차원에서 타협적 관계 설정 과정을 거치는 양면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호남에 비해, 사회적 절대 강자인 영남에 의한 견제를 덜 받았고 그런 만큼 자신들의 독자적인 관계 설정의 여유가 더 풍부한 비영호남인들이 갖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비영호남인들의 사고 방식은 비교적 넓은 스팩트럼에 걸쳐 있다고 판단된다. , 개인적으로 혹은 소규모 집단별로 영남패권의 우산 속에 들거나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편입되어 직접적으로 물적 정신적 혜택을 볼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적은 노력만으로도 영남패권의 해악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능동적인 위치 설정이 그만큼 용이한 조건 속에 있다. 비영호남인은 호남인의 위치와는 달리, 사회가 규정하는 강제력의 틀에서 자기 의지의 독자적 운용권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당연히 그들 각각이 속한 지역이 사회적 강자에 얼마만큼 깊이 종속돼 있느냐에 따라 또한 크게 영향받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호남과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까운 제주민들이 갖는 호남에 대한 적대감이 전국평균을 넘는다는 사실이나, 충청민에 비해 강원민이 호남에 대해 덜 우호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경기인들이 가지는 정체성 규정이 역시 '영남우호'이면서도 각 개인차가 타지역인에 비해 훨씬 크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사회적 조건의 결정력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제주와 강원이 정치 사회적으로 독립성이 그만큼 덜하고 동시에 사회의 주류(강자)인 영남권에 더 깊이 종속돼 있는 조건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결과라 하겠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각 지역별 주민이 영남패권이데올로기에 대해 반응하는 양태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그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이나 소집단이 갖는, 정체성에 대한 자기 결정력도 상당 부분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영남패권주의를 분쇄하라!

인터넷 논객들은 '영남패권주의'라는 유령을 공론화해야

 

1219일 대선 이후 노무현정권의 수구로의 회귀를 목도하며, 터지는 분노와 때때로의 절망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신의 시대에서도, 작지만 또렷한 희망의 불씨가 오롯이 지펴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좀 거창하게 말해서 문화의 대변혁의 단초입니다. 사회의 거짓과 부정의 뿌리로서 버젓이 행세해온 군사파쇼문화의 또 다른 양식인 영남패권문화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작게도 혹은 크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얼마만큼 거대하고 심대한 사안인가 아닌가의 인식도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겁니다.

그저 영남패권주의를 지금까지 개인의 출세와 영달의 도구로써 맘껏 향유해온 정치모리배 즉 한나라당 극우 보수주의자들, 호남의 지역맹주 역할을 자임하며 정치생명을 연장시키는 소위 민주당 정박후, 개혁당의 유시민과 김원웅, 청와대 참모들, 그리고 노무현 등을 현실적인 공격타겟으로 잡고 본다면, '문화의 대변혁' 운운 조차도 낭만적 수사가 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눈앞의 적들이 바로 위에 적시한 정치권이긴 하되 상식적인 가치, 즉 자유와 평등이 우세한 시민 사회의 도래를 꿈꾸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남패권주의가 바로 자유와 평등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짓밟는 봉건사회의 유물이라는, 거대한 악의 문화임을 상기하게 될 겁니다. 이럴 때 정치 지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문화의 변혁이 되리라는 걸 인정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는 정치개혁이란 이슈로 시작을 하지만 결국은 문화개혁의 문제가 되고 말리라는 얘깁니다.

저는 영남패권주의의 극복을 위한 문제점으로 다음을 꼽습니다.

1. 영남인들은 물론이지만, 영남인들만이 결코 아닌 전//민은 40여 년의 영남지배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거의 체질화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2. 영남의 반민족, 반역사, 반민주적인 패권주의 문화와 행위에 대해 대부분의 호남인들을 제외한 전국민은 지금까지 그것을 일방적으로 감싸고 대신 변명해 왔으므로 모두 각자가 공범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희생양인 호남인의 부당한 불이익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다.

3. 그 공범자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하여 반성해야 한다.

4. 반성과 극복을 촉구하는 일환으로,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문제의 핵심은 이겁니다.

모든 /////이 자성(自省)-자발적이건 강제적 환경조성이건-을 통하여 영남패권주의 사고를 깨부숴나가야 한다.

, 이것은 정치권을 깨부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각 개인의 사고를, 그래서 전 사회의 문화를 새로이 갈아엎는 근본적 문화개혁까지 이뤄내야 할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제가 여기 대자보와 동프라이즈(www.dongprise.com), 시대소리(www.sidaesori.com)에 쏟아지는 정치적 목표를 염두에 둔 논의들로 인해 매우 크게 고무돼 있습니다. 엄청난 논의의 진전입니다.

그러나 문화적 목표를 절대 놓쳐서는 안되리라는 저의 믿음 때문에, 향후 영남패권주의 논의의 방향에 대하여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1. 정치권의 영남패권주의와, 특히 지식인을 포함한 일반 시민 개인의 골수에 박힌 영남패권주의를 지나치게 분리하여 비판하지 않아야 한다.

당장은 전선이 선명하여 타격하기에는 신이 날 일이지만 정치권만을 크게 부각시킬수록 그 뒤의 공생관계에 있었던 개인은 자연 면책되어 버리고 결국은 그들의 머리 속에 든 차별주의(이제는 영남패권이 아닌 여러 형태로 진화하고 말 차별주의)라는 사고를 영영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요즘 논의되는 '역영남포위론'이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문화적 목표라는 마인드가 없는 채로 실현되고 말 때에는 그 환상적인 목표 달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반목과 투쟁의 여지를 너무 크게 남길 수 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술은 각 개인이 의식 무의식으로 갖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의 폐해, 반인륜성, 공격성, 정신분열성 등등 인문학적 의미를 고스란히 투영한 해악성을 정치적 논의와 함께 끊임없이 논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 논의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고, 그 논의의 완성을 위하여 제언하는 것입니다.

2. 지식인들의 영남패권주의 논의 참여를 '강제'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하나 마나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시점에선 뚜렷한 전술이 없을 망정 이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논제는 동프나 시대소리 안의 논의가 아직까지는 매우 제한적인 단계라는 현실을 인정하며 내는 말입니다.

교수나 학자들은 세상 눈치에 빤하면서도 '비겁자'가 되기 쉬운 조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선명한 목소리를 내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비겁자'들이 선선히 공론의 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인 못지 않게 시류에 민감하기 마련인 지식인, 교수 학자 부류들은 어느 정도 대세가 보인다 싶으면 너도 나도 뒤질세라 커밍아웃할 겁니다.

이러한 자발적 참여를 '강제'케 하려면 역시 일반 대중의 공감대라는 여론을 먼저 형성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 영남패권주의 폭로의 정의로움을 선전해나가야 합니다. 정치 공학적 차원에 지나치게 매몰된 투쟁 위주가 됐을 때는 그 역작용으로 일반인의 논의 참여를 차단하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론의 환기와 그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는 우리 주장의 정의로움이라는 인문사회학적 가치를 더욱 강조하는 게 효과적 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줄기찬 선전활동으로 공감대가 형성될 때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좀 더 효율적인 선전 운동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지식인의 참여를 강제하기 위한 조건 형성으로서, 우리는 이 논의의 정의로움과 도덕성을 중점적으로 알려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정치'지향적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3. 영남 지식인과 영남 일반인에게 지금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의 짐을 지워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 되게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영남 출신 지식인의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대담한 비판을 몹시도 경이롭게 평가해왔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이 대선전 시민들의 희생적이기까지 한 절대지지를 누린 환경조건에는 그가 영남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이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작용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남인이 '영남에 비판적이다'라는 것과, 서울인이 '서울에 비판적이다'는 것과, 호남인이 '호남에 비판적이다'는 것들간의 가치부여 차이는 아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노무현은 그 전도된 혜택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유시민, 노혜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영남패권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을 때 그들은 그 한 번으로 정의의 화신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에 와서 이들이 구제불능급 영남패권주의자임이 입증되고 말았습니다(이 말에 이의를 달고 싶은 사람은 저의 이전 글을 읽어보시거나 딴 자료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반영남패권주의라는 인증을 받으려 한다면 한층 더 철저하고 엄격한 일반의 검증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불공평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이들이 짊어져야할 책임의 일부입니다. 영남패권주의로 인해 부당하게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말에는 당연히 정치인 추미애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일반 영남 시민들도 포함됩니다.

4. 마지막으로, 인터넷 매체와 정치담론사이트들이 영남패권주의 비판의 공동메카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당파주의적 배타성으로 해야한다가 절대 아닙니다. 이들 싸이트보다 더욱 효과적인 토론장이 만들어질 때도 배타적으로 여기를 고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 비판의 논의를 연중 365, 7, 끊임없이 지속함으로써 이들 세 싸이트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그 역할을 선도적으로 해나가도록 늘 각오를 다지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빼야할 논제도 혹 있을지 모르겠고 더구나 보완해야 할 논제는 각자의 머리 속에 쌓여있을 정도이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영남패권주의 타도에 천착하는 여러 논객들의 의견과는 상충하는 점도 더러 있으리라고 봅니다.

꾸준히 이 논의에 참여하실 것을 기대하고 또 믿습니다.

유령과 악령, 우리 안의 영남파시즘

영남인이 적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와 옹호세력이 적이다

 

'영남패권주의'의 분쇄를 위한 대의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크게 보아 하나는 소극적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적 저항입니다. 하나는 영남패권주의의 실체를 인정은 하나 그 심각성을 인식 못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패권주의의 존재, 책임과 역할 자체를 호남에게 덤터기 씌우는 파렴치 조폭 무리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과연 가능할까요?

제 기준입니다. 일단 한 번의 설득작업으로 성공하지 못한 부류에겐 두 번째도 세 번째의 시도에도 성공의 가능성은 무망하다는 판단입니다. 이 때는 문제가, 이미 인간 양심에의 호소라는 영역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반영남패권주의가 이들 각 개인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 영남패권적 정치 사회 문화 체제 아래서 기득권층에 속하여 아무 문제없이 계속 잘 먹고 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를 스스로 깰 하등의 동기나 이유가 없기 때문인 거지요. 무슨 뜻인가요. 이들은 수구의 틀안에 안주해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겐 설득의 노력이 모두 허사입니다. ''패권주의가 곧 제 밥그릇 빼앗기는 걸로 인식하여 반사적 혐오감과 내면적 공포감을 발악적으로 드러내는 자들에겐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영남패권주의의 향유에 관한 한, 영남인들에게는 기득권층과 기층민간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층민마저도 영남패권주의는 자랑스런 사회적 가치요 프라이드고, 프리미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기층민들에게 '영남패권주의'란 경제적 기득권이 아니라 <사회적 기득권>을 부여하는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그들이 공사판 인부라고 적나라하게 가정해 봅시다. 그들이 어울리는 비슷한 계층의 팔도 사람들이 거기 다 있겠지요. 이들이 모두 평등할까요? 아닙니다. 영남인이 누리는 사회문화적 프리미엄으로 인한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영남인은 그들 스스로의 우격다짐 말고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프리미엄, 곧 힘의 우세가 이미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겁니다. (사실은, 시쳇말로 소위 영남인의 '무대뽀/우격다짐' 기질이라는 것도 사회문화적 장치가 부추기고 정당화시켜준 겁니다)

이 구조는 오래된 틀입니다. 그것은 평소에는 은근하여 수면위에 드러나지 않으나 매우 조그만한 이해가 생기기만 해도 그 위세는 시퍼렇게 튀어나와 금방 공격적으로 상대를 짓이기는데 이용됩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에 기반한 도발적 행위를 보세요. (이 매우 일반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한국의 막돼가는 정치판도 정상적이라 수용하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의가 있는 사람은 저의 이전 글을 보시거나 다른 자료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이렇듯 사회 기층에서마저도 영남패권주의는 여전히 드센 위세를 뽐냅니다.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범인류적 보편가치라는 평등을 추구하는 문화개혁으로서의 ''영남패권주의일 망정 이들에겐 곧 제 자존심과 프라이드를 빼앗는 반동외래사상이 되고 말아, 그 기득권을 위협하는 소리와 기도가 나올 때마다 줄기차게 욕하고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겁니다.

바로, 영남패권주의는 극소수 정치인들의 권력싸움에 불과할 뿐, 영남의 서민과 기층민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무대뽀'들의 주장이 억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영남패권주의가 이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문화로서 굳어진 지가 이미 수십 년인데 거기에서 자유로울 사회 구성원이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회 기저층에서도 이렇다면 사회 기득권층으로부터 나오는 불평등이야 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반인류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반사회적인 것이 바로 이 영남패권주의 문화입니다. 이것은 문화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연스런 문화로 오래 전부터 편입돼 있음을 바로 인정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세계 민주사회의 역사에 유례없이 오로지 남한사회만을 특징짓는 이 야수적인 문화, 영남패권문화를 강력한 의지로 퇴치시켜 나가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한국의 문화이므로 그것이 오직 영남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님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 패권주의에 저항해 온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그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물들어 있습니다. 침묵하는 비영남, 비호남인들 모두가 영남패권주의를 공기처럼 편히 받아들이고 호흡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실상은, 이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경험할 때 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사회 기득권층에 기대어 있을수록 그들의 문화 지키기 의지는 영남패권주의자인 순수 영남인의 그것과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이 반동적으로 저항하면 할수록, 평등사상과 인권존중사상 마저도 단호히 거부하게 할만한 사회문화적 기득권을 이들이 '지금까지 누려왔음'이 웅변으로 입증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려 40여년 입니다. 이것이 Fair (공평)한 일입니까? 거기 정의가 있습니까?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에게 정당성이 있습니까?

이 문제는 지역감정이라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활한 술책을 뒤에 숨긴 허위입니다. 아무 말이든 불평하지 않고, 공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없는 일인 것처럼 입 딱 다물고, 또 영호남이 교류하고, 스포츠를 통해 화합하고, 그리고 고정관념에 찌든 머리 굳은 쉰세대가 저세상으로 떠나버리면 아, 이 지긋지긋한 지역감정 없는 새로운 세상은 자연히 도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공상입니다.

물론 그 기저에는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영남패권주의 온존의 기제가 강력히 버티고 있지만, 우리가 손 놓고 있을 때는 이 <사회문화적> 기득권 수호라는 구조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굳어져만 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가 입을 벌려 외쳐야 합니다. 분노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해하는 자가 이 허위를 폭로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 만큼 성장한 것이 흐르는 세월과 함께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까? 아니죠. 잊어선 안 될 일입니다. 군사파쇼와 수구냉전세력, 극우기득권, 보수언론 등과 끊임없이, 타협없이 싸워온 순수한 청년들, 양심적 지식인, 희생적인 시민, 또 그 중에서도 특히 호남 민중들의 피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고 쟁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민주화가 이룩됐습니까? 더 이상, 피를 운위하는 것은 시대착오입니까? 좋습니다. 스크럼을 짜고 벽돌을 던지는 가두시위의 시대는 아마도 간 듯 싶습니다. 그렇게 희망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계층간의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누구도 완벽히 치유할 수 없는 악의 존재만 문제의 전부가 아닙니다.(우리가 치열하게 타개해나가야 할 문제임은 물론입니다)

우리는 민주 사회가 갖춰야 할 가장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영남패권주의 문화 아래서 민주주의를 논하며 껄껄거리며 웃고, 숨쉬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한 저질 패권문화가 모든 사회 구성원 개인, 개인의 골수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데도 세계로 뻗는 대한민국,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되었다고 히히덕거리고 있습니다. 21세기라고 합니다. IT강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성을 고스란히 담고 좋아라 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수치스러워서 안되겠습니다. 이런 비루한 깡패문화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민주사회, 아직 요원합니다.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민주쟁취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신념과 의분과 열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아직 갈 길 먼 길, 구부러진 황토 길을 따라 수고로운 걸음을 또 내디뎌야 합니다. 이 대오에 지식인들이, 작가들이, 교수들이, 그리고 의분에 충만한 청년들이, 서러움 많은 서민 민중들이 나와 서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는 반평등입니다. 인류의 적입니다. 우리 인간 평화 공존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이 몰가치에 대한 척결의 대오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그냥 인간됨이 자랑스럽다면 이 반인류적 반동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영남인들은 어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잠재적인 적입니다. 누가 감히 영남인들을 적으로 모는 패륜을 저지르냐고요?

진의를 왜곡하면 안됩니다. 영남인이 적이 아니라 영남패권주의가 적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영남인과 또 비영남인이 이 대의의 적이란 말입니다. , ''영남패권주의에 저항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추구 세력인 우리의 확실한 적이라는 뜻입니다.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기득권을 무장해제 시켜야 합니다. 영남패권주의에 절어있는 자의 정면에 똑바로 서서 모욕주어야 합니다. (아니, 조속히 법제화해야 할 일입니다.)

시급한 일입니다. 그것은 단호히 깨부셔야 합니다. 타협없이 깨부셔야 합니다. 수세적 입장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정의롭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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